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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옆에 있는 분들과 인사 나눌 때 오늘 하루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오늘 하루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 보면 가늠한 여인에 대한 사건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이 가늠한 여인 사람들이 돌로 쳐 죽이려고 했던 그 가늠한 여인에 대한 이 사건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우리의 태도와 또 그에 관련한 중요한 교훈들을 전해주고 있는데요. 그 상황 가운데 그 상황의 배경은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실 때 일어난 사건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가늠하는 현장을 보고 붙잡아서 이 여인을 끌어다가 예수께로 끌고 왔습니다. 그리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율법 전문가들이잖아요. 자신들이 신봉하는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에 따라 가늠한 여인, 특별히 이 여인은 가늠한 그 현장에서 들통이 났기 때문에 가늠했다고 하는 그 자체를 부인할 수 없는 죄 지은 여인 이 여인을 이 율법에 따라 돌로 쳐 죽이려고 합니다. 십계명에 절대적으로 가늠을 언금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죠 어쩌면 지금 이 가늠한 여인을 돌로 쳐 죽이는 것은 그 누구에게도 이 의의를 제기할 수 없는 그러한 명확한 사실이고, 그 당시의 상황에서는 그런 일들이 수시로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근데 여러분 그 사건에 두 가지의 큰 모순이 있는데요. 먼저 첫 번째는 이 여인이 간음을 하는 현장에서 잡혀왔다고 했는데 간음이라고 하는 건 혼자 하는 게 아니잖아요. 그렇죠. 남자와 여자가 함께 상대자가 있어야 이루어질 수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이 가늠한 여인을 붙잡아서 왔다고 한다는 것은 그 현장에서 마땅히 여인과 간음을 벌이던 남성도 분명히 있었다는 걸 예측할 수 있죠.
그런데 지금 예수님 앞에 끌고 온 건 이 여인 혼자입니다. 이 여인이 만약에 돌에 맞아 죽어야 할 그런 간음을 저질렀다면 그 상대방 남자는 불륜의 관계였기 때문에 이걸 간음이라고 했겠죠. 그러면 그 불륜을 범한 남자도 여자와 동일하게 돌에 맞아 죽어야 합니다. 율법에 여자만 처형해라 이런 식으로 절대 기록돼 있지 않거든요.
그런데 지금 이 일을 진행하고 있는 사람들이 누구예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율법 전문가입니다. 근데 그 사람들이 함께 있었던 그 남성에게는 아무런 추궁도 하지 않고 이 여자만 끌고 와가지고 지금 돌로 쳐 죽이려고 하는 거예요. 누구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하다고 누구보다 하나님의 말씀의 전문가라고 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사람들 앞에서 볼 때는 굉장히 말씀에 충실한 것 같아 보이지만 이중 잣대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근데 여러분 이 모순은요 우리에게도 간혹 발견되는 모습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내 나름대로의 신앙관을 가지고 이렇게 가 오는데 이렇게 가는데 그 과정 속에서 내 기준 에 합한 내용들은 신앙적으로 다 수용을 하지만 내가 기준하고 있는 것을 넘어서는 순간 거부하고 부정하고 그리고 오히려 반박합니다.
두 번째 모순은 무엇이냐면 이 하나님의 말씀 가늠하지 말라고 하는 십계명의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만 해석했다는 것이 모순입니다. 그러니까 이 간음하지 말라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이 율법을 간음 한마디로 육체적인 행위 정도로만 그들은 생각한 거예요.
율법주의자들은 굉장히 문자적으로 성경을 해석을 했습니다. 문자적으로 그래서 성경에 나와 있는 문자 하나를 바꾸는 거, 이거를 변형하는 거 그거를 굉장히 엄하게 금지했죠. 여러분 죄를 뜻하는 말은 하마르티아 관역에서 벗어나다라고 하는 게 죄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정확하게 과녁을 향해서 쏴야 하는데 화살이 과녁을 벗어났다 그러면 이걸 죄라고 성경은 이야기한다고요.
그러면 제가 저쪽에 있는 과녁을 향해서 화살을 쏴요. 화살을 쐈는데 이 화살이 과녁에 안 맞히고 옆에 갔어요. 그러면 이게 과녁의 문제입니까? 저의 문제입니까? 과녁에 좀 가서 맞아줘야지 그대로 있었으니까 문제일까요?
아니에요. 죄라고 하는 건 저 과녁 자체 결과물의 문제가 아니라 이 과정의 문제, 이 화살을 쏜 사람의 조준점이 어디에 있느냐가 이게 문제인 겁니다.
죄도 마찬가지예요. 간음이라고 하는 우리가 지금 이 바리새인과 율법주의자들이 말하는 육체적인 어떤 드러난 죄는요. 결과물입니다. 죄의 원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정조준하지 않고 있는 우리 인간의 본연 깊숙이 있다는 것을 예수님은 너무나도 잘 알고 계셨어요. 그래서 그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가늠하였느니라.
그러니까 이 율법주의자나 바리새인들은 겉으로 드러나는 어떤 사건 실질적인 행위 그것만 가지고 지금 이런 식으로 자기들을 의로운 것마냥 그랬지만 예수님은 마음으로 품는 것 자체도 죄라고 이야기하십니다. 육체적인 것 이전에 마음에서 시작되는 것이라고 하는 걸 명확하게 이야기하고 있어요.
그리고 나서 그들에게 말하시죠.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여러분 지금 이 여인에게 돌을 들고 지금 대기하고 있는 사람들은요. 그 당시에 이 문화적인 배경 속에서 남자와 여자가 차별하고 있는 이런 시대적인 배경을 볼 수 있는 거 똑같이 죄를 저질렀는데 남자는 지금 여기에 등장하지도 않잖아요. 그렇죠. 똑같은 현장에서 잡혔는데 남자는 지금 없습니다. 그 여인만 끌려온 거예요. 그런 사회 풍경에 따라서 자기들은 아무런 죄가 없는 것처럼 착각하면서 돌을 던지려고 하고 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간음을 행하고도 들통나지 않아서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면서 그 자리에 돈을 들고 있는 사람도 있고요. 또는 간음에 범죄하지 않았지만 마음속에 온갖 음욕을 품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지금 이 죄에 대한 문제를 이렇게 말하고 난 다음에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
한 사람도 돌을 던지지 못하고 그 자리를 다 떠나갑니다. 그 사람들은 이 간음하지 말라고 하는 말을 문자적인 것에서 조금 더 포괄적인 하나님이 뜻하신 게 무엇인지를 깨달았기 때문에 차마 자기들이 돌을 던질 수가 없었던 것이 예수님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만날 때마다 외식하는 자 위선하는 자라고 매도하셨습니다.
실제로 그 사람들은 종교적인 지도자임에도 불구하고 흉측한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외형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율법을 최고로 잘 지키는 그러한 사람의 모습들을 가지고 있었죠.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에 참 의미와 하나님이 뜻하신 바를 온전히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그냥 그런 일이 벌어졌을 때 돌을 들고 쳐죽이는 게 그 사람들의 임무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언어로 만약에 우리에게 주셨다면 아마 우리가 성경을 지금 다 이렇게 읽고 같이 묵상하는 게 참 어려울 것 같아요. 종교개혁 이전에는 성경을 원어로 막 읽고 그러다 보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경이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그냥 이렇게 듣고만 있는 듣는 것만으로도 그게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감격 속에 예배를 드렸던 모습들이 있었잖아요. 근데 하나님은 하나님의 언어로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인간의 언어로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우리가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그 문자적인 것으로만 우리가 다가가다 보면 이런 오류가 범해질 수 있어요.
물론 성경 중에는요. 문자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내용대로 우리가 받아들여야 될 말씀들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우리가 잘 분별을 해야 돼요. 성경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이 내용은 그냥 이 말씀하신 대로 우리가 믿고 나가는 말씀이 있어요.
특별히 성경에 보면 예수님에 대한 예언이 대부분 그렇습니다. 구약에 보면 예수님에 대한 예언들이 많이 있었잖아요.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다
라고 하는 이사야의 예언도 있었고요.
또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나올 것이라
또 그 외에도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오,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이렇게 해가지고 예수님의 그 죽으심까지도 이미 구약에 예언되어 있었어요.
그런데 이것들을 왜 하나님은 이렇게 정확하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는 순간부터 십자가에 죽으시는 그 과정까지 구약 성경을 통해서 정확하게 예언해놓으셨을까 그것은 아무도 오해하지 못하고 그 말씀대로 기다리고 그 말씀대로 그들이 메시아가 왔을 때 붙들고 나아가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근데 여러분 희한한 게 뭡니까?
지금 이 말씀을 해석하고 말씀을 가르치는 바리새인 서기관들이요.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이거를 적용하고 문자적으로 가르쳤던 사람들이 메시아에 대해서는요. 문자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왜냐하면 자기들이 볼 때는 아니 어떻게 메시아가 와가지고 시골구석 같은 그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시고 빈민들이 가득 찬 갈릴리에서 사역을 하시고 어떻게 인간에게 수모를 당하고 죽으신다고 문자적으로만 보면 자기들이 이해가 되지 않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거를 문자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또 자기들 마음대로 해석을 합니다. 자기들이 고대하고 기다리던 메시아가 이렇게 힘없고 나약한 인간일 수 없다고 하는 자기들 나름대로의 그 그릇된 확신을 가지고 말씀을 하나의 상징이나 비유로 폄하시켜버려 그러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오셨는데 그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오히려 십자가에 못 박아버리는 주동자가 된 게 바로 바리새인 서관인 겁니다.
여러분 오늘 말씀도요. 예수님이 이제 승천하는 장면이 나왔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사역하시는 대부분의 그 땅은 이스라엘입니다. 어쩌면 이 땅에서의 사역 가운데는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구원자 정도로 남아 계셔요. 그 제자들을 데리고 돌아다니는 그 모든 땅덩어리가 이스라엘 정도 범주를 넘어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승천하시는 순간 예수 그리스도는 이제 이스라엘의 구원자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구원자가 되셨음을 분명하게 이야기하십니다. 마치 아주 하늘 위에 떠 있는 태양이 우리 전 지구를 비치고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는 과정을 통해서 이제는 이스라엘의 구원자가 아닌 우리 모두의 구원자가 되셨음을 분명하게 드러내신 거예요.
그런데 그때 어떤 과정이 보여집니까?
제자들이 승천하는 그 예수님을 바라보고 계속 그곳을 바라보고만 있는 거예요. 처음 보는 광경이고 지금 이거는 놀라운 일이잖아요. 예수님이 지금 안 그래도 막 죽으셨다가 40일 만에 지금 막 그 승천하는 과정에 이르기까지의 그 과정들도 처음 경험하는 지금 말도 안 되는 상황들을 지금 이들은 겪고 있는데 이제는 하늘로 막 올라가시는 장면을 자기 눈으로 보니까 이 예수님이 도대체 언제 다시 올 수 있을까 다시 오시는 예수님을 우리는 알아볼 수 있을까 다양한 생각들이 그들에게 있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면서 하늘을 계속 바라보고만 있는 거예요. 그때 천사들이 그들에게 이야기를 하죠.
너희들이 본 그대로 주님께서 다시 오실 것이다.
승천하신 방식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라고 명확하게 이야기합니다.
여러분 지금 이 부분에 대한 거는요. 비유나 상징으로 해석하면 안 돼요. 우리가 예수님의 이 초림도 문자적으로 그냥 정확히 말씀하신 대로만 우리가 보고 그대로 믿었다면 예수님을 그렇게 십자가에 못 박을 수 없었을 겁니다.
근데 그들이 그냥 자기 나름대로 해석해버리고 그렇게 했잖아요. 지금 우리가 20세기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데요. 여러분 지금 이 시대에 자칭 재림주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특히 우리나라가 자칭 일수가 그렇게 많대요.
근데 성경을 명확히 아는 사람은 그 사람들이 다 가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요?
그 사람들은 지금 어떻게 왔어요? 이 땅에 엄마 뱃속에서 태어났어요. 성경에서 명확히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이제는 더 이상 여자의 태로 매개체 삼아서 다시 오시는 것이 아니라 올라가신 그대로 너희들이 본 그대로 오실 것이다라고 명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태양은 공간의 제약을 받기 때문에 지구 전체를 비춰주는 것 같지만 지구 반대편은 못 비춰요. 그렇죠 근데 예수님은 시공간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이시잖아요. 그러니까 이제 다시 오실 재림의 예수님은 우리 모두가 다 알게끔 오시겠다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이단 사이비에게 우리가 헷갈릴 이유가 전혀 없어요. 왜 그들은 엄마 뱃속에서 태어나 놓고 자기가 재림주래요. 예수가 마리아에게 태어났듯이 나도 그렇게 태어났다고 말합니다.
여러 가지 막 무슨 이야기들을 막 갖다 붙여가지고 자기가 재림주이에요. 성경을 명확히 보면 그 자체만으로 거짓말임을 우리는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승천하시고 난 이후에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우리가 지금 사도행전을 묵상하면서 예수님의 말씀하신 것처럼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는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성령으로 이제 영으로 우리와 늘 함께 하시겠다고 하셨고, 진짜 성령의 강림 사건을 통해서 우리와 늘 함께하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요.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보고 그 말씀을 믿고 그 말씀을 따라가는 삶이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하는 줄 믿습니다. 지금 서기관 바리새인들처럼 자기들이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싶은 대로 문자적으로만 해석을 하고, 또 자기들 마음대로 비유나 상징으로 해석하고 싶은 데는 자기 마음대로 그렇게 해석해서 자기에게 유리한 대로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이 지금도 있습니다. 우리들도 그런 우를 범할 수 있어요. 그러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을 간절히 구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멀리 계시지 않으세요? 지금 여러분들과 우리와 함께하고 계시는 줄 믿습니다. 여러분 아무리 어둡고 캄캄한 길도요. 지금 내 옆에 누군가 한 사람만 더 있어도 당당하게 걸어갈 수 있어요. 든든하잖아요. 심지어 어두운 캄캄한 길에 요즘 강아지 한 마리만 데리고 다녀도 여성분들이 아주 담대하게 다니시더라고요. 그 보잘것없는 힘없는 그 강아지 애완견이 뭐라고 얘 한 마리 끌고 가면서도 겁을 안 내는 거예요. 같이 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괜찮아요.
근데 하물며 우리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 성령으로 우리와 늘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여러분 여러분들의 삶 가운데 더욱더 담대함으로 나아가길 원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그 성령님께 우리가 말씀을 읽고 말씀을 묵상하고 하는 과정 속에서 도우심을 구하길 원해요. 제 마음대로 제 뜻대로 해석하지 않게 해주세요. 서기관 바리새인들처럼 저런 우를 범하지 않는 신앙생활을 하게 해주세요. 주의 말씀을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말씀, 그 뜻, 본연의 뜻을 분명히 붙들고 나아가게 해주세요. 내 욕심이나 내 욕망이나 내 경험된 판단 때문에 성경 말씀을 곡해하는 일이 없게 해주세요.
여러분 이런 기도 제목이 필요합니다. 본 그대로 다시 오시리 본 그대로 예수님은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승천하신 그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시겠다라고 말씀하세요.
혹시 여러분들 가족이나 여러분들 이웃 중에 이단 사이비에 빠져 있는 분들이 계십니까?
이 말씀 한 구절만 가지고도 그들에게 우리가 충분히 할 말이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 심각한 말씀의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우리가 전할 수 있는 우리가 되길 원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다시 한 번 정리합니다. 성령님은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 이후에 성령님은 지금 우리와 늘 함께하시는데요. 그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가 말씀을 읽고 듣고 또 묵상할 때마다 성령님의 말씀하신 조명하심을 통해서 우리가 말씀을 분명하게 깨닫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우리가 되길 원합니다. 그럴 때 힘 있고 능력 있는 그리스도의 뜻을 온전히 이룰 수 있는 우리가 될 줄 믿습니다.
특별히 오늘 본 그대로 다시 오시겠다고 말씀하신 그 말씀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은 분명히 우리 모두가 다 알 수 있을 정도로 분명하게 명확한 증거를 보이시며 오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고 혹시 여러분들 주변에 있는 이단 사이비에 빠져 있는 그런 분들에게 여러분들이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