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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인의 세계, 무궁한 미지와 새로움의 재발견
―옥지구, 한재희의 시세계를 중심으로
이영숙 | 시인ㆍ문학평론가
1. 미지의 세계
‘여자치고 능력 있다’와 ‘남자치고 능력 없다’는 문장이 있다. 얼핏 전자에서 여성에 대한 옹호가, 후자에서 남성에 대한 비난이 감지된다. 두 문장을 양팔 저울에 올려놓았을 때 어느 쪽의 무게 비중이 클까. ‘그중에서는 예외적으로’란 의미를 가진 보조사 ‘치고’가 판관이다. 그에 의하면 전자는 ‘여자 중에서는 예외적으로 능력 있다’가 되고, 후자는 ‘남자 중에서는 예외적으로 능력 없다’가 된다. 말하자면 두 문장에는 여성 전반은 능력이 없고, 남성 전반은 능력이 있다는 전제가 공통으로 깔려 있다. 문장 속의 ‘여자’와 ‘남자’만을 비교하더라도 결코 ‘여자’의 능력이 나아 보이지는 않는다. 고정관념이나 성차별적인 언어가 상시 유통되는 사회에서 여성은 물론 약자, 피지배계층은 상대화되고 예외적인 부류로 낮게 평가되기 일쑤다. 2024년 12월에 첫 시집을 낸 옥지구*, 한재희**도 이 자장 안에 있다. 두 시인은 농인이다. 그러나 농인치고 시를 잘 쓰는 게 아니라 시를 잘 쓰는 농인에 방점이 찍히는 시인들이다.
농인 시인은 소수자 중에서도 극소수다. 2024년 12월 31일 기준으로 행정안전부에 따르면 한국의 주민등록상 인구는 51,217,221명이고, 같은 시기 보건복지부의 ‘전국 장애인 현황’에서 농ㆍ청각장애인은 약 430,000명이다. 전체 장애인 중 16%를 차지하는 이들은 장애 유형 중 지체장애 다음으로 2위에 해당하지만, 장애예술인으로 범주를 좁혀보면 지적장애(34.3%), 지체장애(26%), 시각장애(15.0%) 등에 비해 4.1%로 매우 저조하다(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2021년 장애예술인 문화예술활동 실태조사 및 분석연구」). 그중에서도 청각장애 문학인은 더욱 희소하다. 장애인을 위해 구상솟대문학상이 제정된 1996년부터 상이 폐지된 2018년까지 본상 수상자와 신인상 수상자를 합친 46명 중 청각장애 수상자는 시 부문에서 단 1명뿐이었다(방귀희, 『장애인 문학론』). 잘은 몰라도 현재 상황이 크게 나아진 것 같지는 않다. 문학 매체에서 농인의 시를 만날 기회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결과는 음성언어 중심 사회에서 소통의 문제와 관련 있음을 말해준다. 청각장애인과 소통하기 위해서는 수어 통역사, 문자 통역사 등 전문 인력이 추가로 투입되어야 하는데 현실 여건상 쉬운 일이 아니다. 청인이 시에 관심 있는 경우 대학의 문예창작과에 진학하거나 다양한 곳에서 진행하는 시창작 교육을 받을 수 있지만, 농인에게 그 진입장벽은 절대적으로 높다.
미지는 흔히 탐구하거나 탐험할 ‘곳’, 혹은 ‘것’으로 간주된다. 그곳/그것은 현실에 부재하거나 현실 너머에 실재하는 그 무엇이다. 가보지 않은 장소, 알지 못하는 대상과 현상을 수식하는 ‘아직’이라는 부사는 원초적으로 ‘언젠가’를 내장하고 있는데 이는 시간과 정도의 차는 있을지라도 미지가 현실과 사실의 자장 안으로 수렴될 가능태임을 말해준다. 그것은 ‘하나의 사물에 하나의 고착된 관념과 기능이 주어져 있다는 미신을 벗기는 순간 낯선 세계로 돌변한다’(김종진, 『미지의 문』). 농인에게는 청인의 세계가, 청인에게는 농인의 세계가 미지이다. 농인에 대한 무지와 오해를 벗겨 창출되는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기 위해 두 명의 농인 시인이 탄생한 것인지도 모른다.
2. 『어느 누구에게도 다정함을 은폐하기로』(핌 출판사, 2024)
옥지구(1998년생)는 고등학생 때부터 줄곧 혼자 시를 써왔으며 그로 인해 오히려 자신만의 시적 아우라를 가질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시집에서 만나는 다채로운 어휘, 시가 요구하는 구조와 여백에 대한 센스, 긴 호흡 등이 그녀의 시적 재능을 보여준다면, 농인 정체성과 예술에 대한 자의식, 청능주의(오디즘, 청인 우월주의)에 대한 서늘한 시선, 수어의 시적 재현을 넘어 수어로 구축하는 언어의 집에 대한 실험 결과 등은 그간 봉인되어 있던 농인 세계를 처음으로 열어젖히면서(내가 쓴 시집 해설의 제목은 「오디즘, 시로 쓴 최초의 분석보고서」임.) 그것을 시적으로 보편화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준다. 옥지구의 시가 재미있는 것은 시적 화자들이 나이를 넘나들면서 ‘연기’하는 다양한 에피소드에서 유머 감각과 능청스러움, 환상적 사유 방식이 속도감 있게 전개되기 때문이다. 시집 속의 시만으로 시인의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이유이기도 하다. 이런 특징을 드러내는 시 두세 편을 살펴보자.
발음이 왜 그렇습니까 아이고 당신의 가족이 참 고통받으셨겠네요 말씀을 잘 듣고 말 연습을 멈추지 마세요 기도할게요
우리 교회에 오실래요 아니면 제일 친한 의사를 소개해 줄게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그래야 소리 잘 듣지 얼굴이 예쁜데
참 안타깝군 살도 좀 빼 몇 살이야? 시집가야지 너와는 다른 남자를 만나 결혼해야 정상적인 아이도 낳지
예, 감사합니다
지R
―「자유의 시그너처」 부분
시집 해설에도 인용된 이 시를 다시 인용하는 것은 농인에 대한 청인의 ‘미신’이 첨예하게 드러나 있는 대표적인 시여서이다. 처음 만난 ‘나’가 농인이라는 사실을 알고부터(“발음이 왜 그렇습니까”) 말투에서 예의가 사라진다. ‘나’의 고통은 아랑곳없이 ‘나’의 가족을 연민함으로써 ‘나’를 타자화시키며(“아이고 당신의 가족이 참 고통받으셨겠네요”), 상투적인 충고(“말씀을 잘 듣고 말 연습을 멈추지 마세요”)에, 진심이 담기지 않은 약속(“기도할게요 우리 교회에 오실래요 아니면 제일 친한 의사를 소개해 줄게”-이 대목에서 슬그머니 하대로 전환)을 하고, 잔소리(“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그래야 소리 잘 듣지”)에, 노골적으로 인신공격의 무례를 범하며(“얼굴이 예쁜데 참 안타깝군 살도 좀 빼 몇 살이야?”), 존재에 대한 부정이 서슴없이 이루어진다(“너와는 다른 남자를 만나 결혼해야 정상적인 아이도 낳지”). 어쩌면 이 모욕은 상시적이며, ‘나’만이 아니라 농사회에 속한 사람들 모두를 향한 것일 수도 있다. “예, 감사합니다”라는 ‘나’의 지극히 순응적으로 보이는 응대는 내면의 소리인 “지R”(지랄: 필자 주)에서 국면을 전환한다. 냉소적 진실에 자기 검열하듯 취소선을 그었지만 이미 소정의 목적은 이룬 뒤다. 외부에서 발현해 ‘나’에게로 오는 자극에 대해 옥지구는 이렇듯 발랄한 반동을 날린다. 명쾌하다.
잠깐만 잠깐만
사내의 눈이 제대로 감기지 않았어
덜 감긴 눈에 재생 버튼을 눌러
장례절차 신을 다시 찍자고
레디 액션
한여름밤을 빙의한 사내의 부모는 터질 것 같은 안구를 착즙한다
피곤한 새벽의 색이 희망적이기를
조문객들의 고요한 위로가 가늘어진 숨을 부풀린다
컷 컷 컷 잠깐만
되감기를 눌러봐
혼잡하게 느린 스텝 프린팅
아직이야 여름의 백야가 웃을 수 있기엔
저울에 사내의 삶을 올려서 재보자
사내의 아우는 나를 말린다
사내의 누이동생은 내 눈을 가린다
얘야, 흘러내리는 숨결의 파도는 곧 멈출 거야
너 여기에 있으면 안 돼, 어디에 가도 네 아빠가 없단다
그럴 리가
내 정신이 멀쩡해요
이 영상물을 완성해야 돼요
이봐 X세대가 열광했던 그 시절로 돌아가자
지독히 아름다우셨던 왕가위 감독님의 가위손을
슬그머니 훔친 듯이 빌려
사내가 사망 선고를 당하기 전에
사내의 청춘을 되찾아서 재생시켜야 해
엄마 뱃속에서 자의로 내 숨을 버려도 늦지 않아
왜 다들 입이 작아졌나요 왜 그래요
늙은 봄이는 사내의 경직된 심장 위에 소금물을 뿌린다
지켜보던 고독한 상이는 무언가를 고백하기 두려워진다
모두 내게 감독직에서 물러나라고 시위한다
나를 지지하는 동료들은 이 작업을 중단한다
믿었던 카메라 감독마저 포기를 권유하고
난 사진 속 웃고 있는 사내를 깨우러 가겠어요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움직이고 있으니까요
당신들도 멋대로 여름의 백야를 희망하잖아요
나만 재생 버튼을 누르겠어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미 늦었고, 끝났다는 경고음을 듣지 못하고
사내의 몸을 받치고 있는 침대는 비디오가 되어 잠식 속으로
―「미완성인 여름의 영상물」 전문
앞의 「자유의 시그너처」가 옥지구의 자의식에 잇대어져 있다면, 이 시는 그녀의 시적 지성과 연결된다. 이미 “조문객들”이 다녀가고 있는 상황에서도 ‘아빠’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나’와, “사내의 눈이 제대로 감기지 않았”다며 “사내가 사망 선고를 당하기 전에/ 사내의 청춘을 되찾아서 재생시”키려는 ‘감독’은 동일한 시적 자아다. 이 혼선적 자아가 “내 정신이 멀쩡해요”라고 항변할수록 오히려 가족들은 ‘나’를 만류하고, “나를 지지하는 동료들은 이 작업을 중단”하거나 “믿었던 카메라 감독마저 포기를 권유”한다. 객관적으로 ‘아빠’의 죽음은 고조되지만, 화자는 결코 감정적으로 동요하지 않는다. 가족의 일원을 “사내의 아우(삼촌:필자 주)”와 “사내의 누이동생(고모: 필자 주)”으로, “늙은 봄이”와 “고독한 상이” 등으로 호칭함으로써 ‘아빠’의 죽음을 믿는 그들과 달리 ‘나’의 주관은 ‘아빠’가 여전히 죽지 않은 상태임을 유지한다. ‘가족 대 나’의 거리는 그러나 소격효과로서 ‘독자 대 나’의 거리로 확장되며, 그 거리가 멀수록 우기기에 의한 시적 반향은 더욱 증폭된다. 시의 지적 작업은 이렇게 이루어진다.
나는 너무나 시망스레 젊었지
나를 떠나간 이들은 열심히 불행했고
나를 찾아온 이들은 대충 방황했었지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미치지 않는 세상이 없다
어차피 삶은 이미 아름다워질 준비가 돼 있기 때문이고
그때 그랬다
(중략)
나 같은 늙은이들 말이야 우는 방법을 잊어버려서 얼마나 외로운지
자네는 그러지 않기를
눈치 보느라 돈을 낭비하지 않기를
늙어갈수록 포기하기가 수월해지거든
동정은 거절하마, 난 자네처럼 쉽게 나약한 놈이 아니게 된 지 꽤 됐다
(중략)
모든 늙은이가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에고 눈알이 빠져나가고
인공 오른손이 바닥에 떨어졌구만
다시 주워서 오···
(연필이 부러짐)
―「노인의 미성 유언은 왜 완성되지 못했을까」 부분
시집의 세 페이지에 걸쳐지며 이 시는 시종 진지하다. 노인 화자가 자신의 젊은 날의 회한을 전하면서 “자네는 그러지 않기를” 바라고 당부하는 형식을 취하는데, 어조가 너무 진지하기에 읽다 보면 말의 논리와 진위를 생각하기보다는 마치 노인의 바람구멍 숭숭한 육성을 듣는 청자처럼 다소곳해진다. 우리가 시의 말미에서 문득 반전되는 이유는 ‘노인의 미성 유언이 완성되지 못한 이유’를 알게 되기 때문이다. “눈알이 빠져나가고/ 인공 오른손이 바닥에 떨어”져 “다시 주워서 오…”려 했는데 그만 “(연필이 부러짐)”에 직면하는 장면에는 그러나 웃음과 허무와 슬픔과 해학이 들끓는다.
3. 『네가 슬퍼서 참 다행이다』(핌 출판사, 2024)
옥지구가 ‘준비된’ 시인이라면, 한재희(1999년생)는 ‘발굴된’ 시인이다. 고등학교 시절 학교 폭력의 상처와 후유증을 혼자 글을 쓰며 달랬던 그녀는 ‘2024년 예술단체의예비예술인 최초발표지원’(한국문화예술위원회) 사업에 컨소시엄으로 선정된 장애예술단체인 <풍경놀이터>와 <출판사 핌>에 의해 선발되면서 처음으로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사업에서 시 부문을 맡아 강의와 멘토링을 진행한 나로서도 믿을 수 없게 한재희는 맹렬한 속도로 시를 썼다. 하고 싶었던 말이 폭발한 게 아니라면 달리 설명할 방도가 없었다. 농인의 삶을 사는 한 여성 청년의 성장통, 현재적 삶, 미래적 희구가 시집 한 권에 다 녹아들어 간 것이다. 시집 해설 제목처럼 ‘낮은 곳에서 나지막한 시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시적 태도로서의 겸손과 시적 방법론으로서의 감각이 내장되었다.
세상 사람들이 다들 조용한 세상에
사는 줄 알았던 초등학교 일 학년
선생님은 모니터 뒤에서 고갤 숙인 채
꽃과 옷과 못을 받아쓰라고 합니다
큰 목소리는 작게나마 알아듣던 때
그러나 꽃과 옷과 못은 발음이 너무 비슷했어요
뱁새같이 조그마한 손바닥에
빳빳하게 코팅한 단어장 잘 숨겨
몰래 보려 했지만,
들켜버렸습니다
손바닥이 붉게 물들어가는 동안
아픔보다 억울함만 쌓이고
나중에 받게 된 청각장애 2급은
그나마 듣기 평가에서
깍두기 증명서가 되었습니다
어린 나는 몰랐습니다
방문 너머에 소리가 있는 세상을
그림자가 따라다니는 걸음에도
소리가 있다는 것을
―「받아쓰기」 전문
초등학교 신입생이 맞닥뜨린 것은 자신이 농인이라는 현실이었다. 음 소거된 세계가 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을 한재희는 적막하게 그려낸다. 소리가 없으므로 충격에 따른 여파도, 있을 법한 아이다운 반응도 내면으로 잦아들었다. “듣기 평가에서/ 깍두기 증명서가 되”어준 “청각장애 2급” 판정도 위로가 되지 못한다. “입술의 움직임을 읽어내야 하”고 “모두가 바람에 흔들리며 웃을 때/ 이유 모를 웃음을/ 애써 지어야”(「맨드라미의 소원」) 하는 날들이 펼쳐진다. “오산천 다리 위에/ 발송인 없이 수취인만 있던 낙서”는 ‘나’를 향해 “왜 사냐, 나가 죽어라”(「삼만 원」)라고 종용하는 반 친구들의 조롱이었고, “노력으로 잡힌 결괏값이 마음에 들지 않아/ 빈터를 메우려 다른 곳의 허세 같은 걸 떼어다 내게 붙이곤”(「터무니 없는」)하던 방황도 어쩌면 한재희의 성장통의 일부였는지 모른다.
엄밀한 의미에서 1970년대에 지식인 그룹이 주도한 민중시는 지식인층 문학 독자들이 향유한 민중 지향적 문학이었으나, 1980년대 초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노동자 시인들로 인해 비로소 민중시의 한계가 극복된 사례가 있다. 비유컨대 농인 시에 있어서 한재희의 당사자성은 청인 사회가 가닿지 못하는 극지의 전경화라는 측면에서도 의미와 울림을 준다.
교정 철사가 혓바닥을 날카롭게 자극해 입안에 비릿한 맛이 퍼진다
씁, 씁, 아 그래 어른의 맛이야 비리고 쉰내 나는 맛 아픔은 입안에서 혼자 씁, 씁, 삼켜야 해 동전을 양껏 손에 쥐었던
손바닥을 핥는 쇠 맛같이 누구에게 공유할 수 없는 맛
헛구역질이 목구멍에서 올라와 위가 요동치며 힘들다고 말하고 싶은데 붉은 물과 섞인 침을 밖으로 퉤 뱉는다
(중략)
뭘 겨우 이런 걸 가지고 힘들어? 불금에 다 같이 모여 아직 낫지 않은 혓바닥을 알코올로 푹, 푹 적셔 소독하면 월요일에는
괜찮겠지 하는 어른
―「어른의 맛」 부분
태풍 소식이 있던 구월의 오후
나는 갈 곳 없는 새끼 고양이였다
집도 집사도 없는 길 위
울음소리가 삐약삐약 병아리에 가까웠을 때
떠돌이에게 집을 빌려주는 일은
얼마나 이타적으로 보이는가
제 몸집만 한 케이지 속 방 한 칸 화장실 하나짜리 LH 캣타워
깨끗하게 쓰거라
보증금은 츄르 세 박스, 월세는 츄르 다섯 봉지
츄르 세 박스를 대출 받고
동분서주했지만 월세도 이자도 다 내기 어려워
저축은커녕 내 사료통은
채워지지 않았고
―「청년 정책」 부분
감각적 표현의 시가 「어른의 맛」이라면, 사물에 자신을 투사하는 방식은 「청년 정책」에 잘 드러난다. ‘어른의 맛’은 입속의 “교정 철사” 같은 이물감을 비롯해 잇몸에서 배어 나온 피와 침이 섞인 비릿한 맛, 동전을 쥐었던 손바닥에서 나는 쇠 맛과 같은 미각을 거쳐 “뭘 겨우 이런 걸 가지고 힘들어?” 혹은 “불금에 다 같이 모여 아직 낫지 않은 혓바닥을 알코올로 푹, 푹 적셔 소독하면 월요일에는 괜찮겠지”하는 질타와 자기중심적이고 무사안일한 맹목에까지 이른다. “헛구역질”은 그에 대한 정신의 몸의 감각적 반응이다. ‘청년 정책’의 도움으로 “방 한 칸 화장실 하나”짜리에 입주했음에도 불구하고 과도한 보증금과 월세에 허덕이는 청년을 시는 어떻게 그려낼 수 있을까. 현실이 어떠한 시적 필터를 거쳐야 하는지를 한재희는 알아차린 것 같다. 울음소리가 삐약삐약 병아리에 가까운” “새끼 고양이”에 화자를 투사하여 자연스레 “LH 캣 타워”와 “츄르”를 소품으로 사용하면서 그녀는 청년의 취약함과 ‘청년 정책’을 우회적으로 고발하고 비판한다.
내가 말이 많았네, 목으로 넘어가는 술이 멋쩍게 쓰다
귓등으로 내려앉을 안주의 이야기를 묻는다
그래서 요즘 하는 일은 잘 되고? 별일 없지?
(중략)
어쩌면 우리는 똑같다
서로의 이야기에 배부르지 않은 배우
―「배우」 부분
이 시에서 “안주”는 중의적이다. 술에 곁들여 먹는 음식이면서 은유적으로 부수적인 인물을 가리킨다. ‘나’의 입장에서 [술 : 안주 = 나 : 너]의 관계가 형성되는데 마찬가지로 ‘너’ 역시 이 카드의 주인이다. 뒤늦게 소위 ‘현타(현실 자각 타임)’가 왔을 때 인용되지 않은 시의 앞부분에서 했던 나의 ‘토로’는 문득 공허해질 수밖에 없다. 이때부터 “귓등으로 내려앉을 안주”들의 이야기, 곧 “그래서 요즘 하는 일은 잘 되고? 별일 없지?”와 같이 무의미하고 상투적인 대화가 건성으로 오간다. 우정이나 동료애 대신 서로를 “안주”거리로 여기거나 마지못한 ‘역할 놀이’ 정도로 인식하는 사회적 관계의 상투성을 이 시는 예리하게 짚어냈다. 명료하되 부러 힘주어 말하지 않는 것은 한재희 시의 미덕이다.
4. 도약의 시간
농인의 세계는 여전히 무궁한 미지를 품고 있다. 옥지구 시의 광활함이나 한재희 시의 새로움의 보고이며, 청인들이 상상했으나 가보지 못한 미래이기도 하다. 두 시인의 시집 발간은 미지의 문을 여는 상징을 넘어 우리를 직접 농인의 세계로 안내한다. 농인의 세계는 일면 수어의 세계이기도 하다. 옥지구가 수어를 시로 형상화하거나 한재희가 사물과의 친연성을 수어처럼 고요하게 들려주었을 때 우리는 낯선 감각에 노출되는 신비로운 경험을 한다. 특히 문학인들이 수어에 주목할 때 우리는 수어가 문학 안으로 품고 들어올 낯선 어휘와 언어의 전혀 새로운 조합들이 빚어낼 풍경, 문법 너머의 문법들, 그 섬세한 수어의 뉘앙스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우리에게 자연이나 동물, 우주보다 더 멀리 있던 존재인지도 모를 농인의 세계가 이렇게 가까이에 있다는 사실을 나는 ‘2024년 예술단체의예비예술인 최초발표지원’(한국문화예술위원회) 사업에 강사진으로 참여하면서 알게 되었다. 드문 행운이었다.
*옥지구 시인은 1998년 경북 상주에서 태어났다. 인공와우를 착용한 구어와 수어의 이중언어 사용자. 시집 『어느 누구에게도 다정함을 은폐하기로』(2024)를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한재희 시인은 1999년 경기도 오산에서 태어났다. 고등학교 시절 학교 폭력의 상처와 후유증을 혼자 글을 쓰며 달랬다. 시집 『네가 슬퍼서 참 다행이다』(2024)를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생명과문학》 2025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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