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건(吳健)이 낙마한 면상촌(面傷)
면상촌은 산청으로 가는 길과 대원사로 가는 길이 갈리는 지점에 있는 마을 이름이다. 이 마을 이름은 지금 명상마을로 와전되어 표기되고 있다. '면상'이라는 의미를 잊어버려 발음하기 쉬운 대로 '명상'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면상촌에 대한 일화는 삼가에 살던 허유(許愈)의 다음과 같은 기록에 잘 나타나 있다.
8일, 날씨가 매우 명랑했다. 아침밥을 먹고 출발했다. 조형칠(曺衡七:曺垣淳)이 미비한 산행도구를 챙겨 우리와 함께했다. 북천(北川)을 건너10리를 가서 송객정(送客亭)에서 쉬었다. 옛날 남명 선생께서 오덕계(吳德溪:吳健)를 전송하실 적에 반드시 멀리 여기까지 나와 전송하셨다
(송객)정자의 이름이 이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지금은 늙은 고목이 서 있는 곳이다.
(송객)정자 위쪽에 낙마파(落馬坡_언덕) · 면상촌(面傷村)이 있다. 전하는말에 “오덕계가 남명 선생에게 작별인사를 드리고 물러나 여러 동문들과 술을 실컷 마시고 작별했는데, 술에 취해 자신도 모르게 말에서 떨어져 얼굴에 상처가 났다. 그래서 그 고사로 인해 면상촌이라하였다.”라고 한다.
첫댓글 우리 마을인데 면세이가 명상으로 바꾼 것은 1970년대 정도에 변경.
오건(吳健_1521∼1574)
11세에 부친상을 당했으나 효성으로 소문이 났으며, 모친상 때에는 더욱 예의에 힘써 1549년(명종 4) 예조의 포상과 함께 왕으로부터 복호(復戶)주 01)를 받았다. 14세 때부터 경(經)·자(子)·사(史)에 몰두했으나 집이 가난해 선생을 모실 수 없었다.
그래서 홀로 『중용』을 수백 번 반복 연마해 통달하고 『대학』·『논어』·『맹자』 등도 연구하였다. 조식(曺植)이 덕산동(德山洞)에서 강론하자 문인으로 수학했으며, 김인후(金麟厚)·이황(李滉)의 문인이기도 하다. 이황도 오건의 학문이 정밀하고 심오함을 칭찬하였다.
1552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558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67년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가 된 뒤, 이듬해 정언(正言)·헌납(獻納)·지평(持平)·교리(校理)·직강(直講)·사성(司成) 및 호조·예조·병조·공조의 좌랑, 검상(檢詳)·사인(舍人) 등을 역임하였다.
1571년(선조 4) 이조좌랑으로 있으면서 춘추관기사관을 겸해 『명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경연(經筵)에서 학문의 길은 궁리(窮理)와 거경(居敬)에 있다고 논했으며, 소를 올려 학문을 진흥시키고 간쟁을 받아들일
그러나 조정의 분위기가 직언을 싫어하고 사류(士類)들을 외면하는 경향이 강하자, 1572년 이조정랑으로 있다가 관직을 버리고 경상도 산음 덕계리(德溪里)로 낙향하였다. 여러 차례 조정에서 불렀으나 모두 거절하고 서사(書史)를 섭렵하면서 시작(詩作)과 강론으로 여생을 마쳤다.
문인들이 ‘덕계선생(德溪先生)’이라 불렀으며, 산천의 서계서원(西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덕계문집』·『정묘일기(丁卯日記)』 등이 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오건(吳健))]
<남명선생편년>에 의하면 오건이 벼슬을 하다가 잠시 내려온1564년과 1565년쯤에 만났다. 그때 남명선생의 나이가 64~65세이고 오건은 1558~1571년까지 벼슬을 했다.
서계서원은 덕계(德溪) 오건(吳健)을 모신 곳이다. 남명(南冥) 조식 선생의 수제자다. 오건 선생은 서른 살(1551년)에 남명선생을 찾아 배움을 청했다.
출처 https://n.news.naver.com/article/047/0002139851
오건은 남명선생이 삼가에 있을때 찾아가 배움을 청하고 다음해에 진사시에 합격한다.
14~5년후에 덕산으로 찾아가 남명선생을 다시 만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