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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고려와 이슬람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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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이란 이슬람교를 바탕으로 한 문명 전반에 대한 범칭이다. 한국과 이슬람의 첫 만남은 통일신라 때 이뤄졌으며, 고려시대에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초엽에는 아랍 상인들이 대거 몰려와 교역을 하고, 말엽에는 주로 원나라를 통해 이슬람이 본격적으로 한반도에 전해졌다. 그리하여 한반도 안에서 사상 처음 이슬람공동체가 적은 규모나마 형성되었고, 그 흔적은 오늘날까지도 남아있다.
<고려사>나 <고려사절요> 등의 사서를 펼쳐보면, 이슬람을 지칭하는 ‘회회(回回)’나 이슬람교도 무슬림을 일컫는 ‘회회인’에 관한 기사가 간간히 눈에 띈다. 고려 초기인 1024년과 1025년, 1037년 열라자와 하선을 비롯한 회회 상인들이 100여 명씩 무리지어 개경에 와서 수은, 몰약(방부제), 소목(외과용 약) 같은 진귀한 공물을 바쳤다. 고려왕은 객관까지 마련해 후대하고, 돌아갈 때 황금과 비단을 하사하기도 했다. 열린 나라 고려의 아량으로 맺어진 이질적 문명간의 범상찮은 만남이었다.
고려말 원간섭기때 본격 유입
이슬람 세계는 이때가 압바스왕조(751~1258년)의 전성기였다. 이슬람 문명이 세계를 향해 종횡무진 파급되어 급기야 한반도까지 물결이 밀려왔던 것이다. 그러다가 몽골군의 서역원정으로 제국이 붕괴되자 물결은 일시 가라앉고 말았다. 그래서 고려 중기에는 만남의 자취를 별로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만남에 영원한 단절은 없으며, 한때의 멈춤은 또 다른 만남을 위한 쉼표이자 뜀대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 | ![]() △ 대악후보(大樂後譜) 6권에 실린 「쌍화점」악보 <이슬람문명>, 창작과비평 |
고려 말엽 원나라 간섭기와 때를 맞추어 이슬람의 한반도 유입은 본격화된다. 통칭 ‘색목인(色目人)’이라고 불리는 서역 무슬림들이 몽골인들의 후광 속에 밀려왔다. 원 제국에서 색목인들은 몽골인 버금가는 사회적 지위를 누렸다. 내정은 물론, 원정을 비롯한 대외관계에서도 ‘두뇌역할’을 했다. 이슬람 문명의 신봉자도 아니고 이용자일뿐인 유목민들 등에 업혀 이슬람 문화가 반입되었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원대 조정에서 ‘문화교수’의 특수한 입지를 점했던 색목인들은 원 제국의 고려 경략과 간섭에 동참하여 ·역관·근위병·시종무관·겁령구(怯怜口:사속인) 등 여러 직분으로 고려에 파견되었다. 상인이나 민간인들도 다수 고려를 왕래했으며 이런저런 이유로 눌러앉아 귀화한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귀화 무슬림들은 중세 한반도 무슬림의 비조가 되어 한반도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대표적 일례가 삼가(三哥) 장순룡(張舜龍)이다.
귀화 무슬림, 고위관직 역임
![]() | ![]() △ 서역에서 들어온 호적이라 불리는 태평소 (악학궤범) |
삼가보다 뒤늦게 귀화하고 고관직에 오른 무슬림으로 경주 설씨의 시조인 회골(현 중국 신쟝 위구르 지역) 출신의 설손이 있다. 그는 원나라에서 일어난 ‘홍건적의 난’을 피해 망명했는데, 원에 인질로 잡혀갔을 당시 그와 친분을 쌓은 공민왕으로부터 부원후에 봉해지고 전답을 하사받았다. 귀화한 뒤 고려의 대표적 시인으로 활약했으며, 후손들 중에는 조선 개국 때 명나라에 여덟 차례나 사신으로 간 장자 장수(長壽)가 있다. 태조 때 장수가 연산부원군에 봉해지자 계림(옛 경주)을 식읍으로 하사받고 본관을 경주로 정했다. 현재 약 2천명의 후손들이 살고 있다.
고려가요 ‘쌍화점’ 에도 등장
![]() | ![]() △ 덕수 장씨 마을에서 진행되는 ‘장말도당굿’ 장면. 중요무형문화재 제98호. 부천시청. |
이같이 ‘준몽골인’으로, ‘문화교수’로 고려에 온 무슬림들, 특히 귀화한 무슬림들은 고려와의 만남에서 선도적 역할을 하고, 상당한 권력도 행사하면서 나름대로 사회문화적 기여도 했다. 그들은 수도 개경 인근지역에 마을을 이뤄 집단거주하면서 특유의 공동체를 형성했다. 이슬람교 사원격인 예궁(禮宮)에서 일상 예배행사를 열었으며, 회회사문(이슬람교의 스승 이맘)의 인도 아래 집단예배의식인 ‘대조회송축(大朝會頌祝)’을 궁전에서 거행하고 신전에서 왕을 위해 향연을 베풀기도 했다. 충혜왕 때는 무슬림들에게 피륙 판매권을 준 대가로 매일 쇠고기 15근을 상납받았다는 기록도 보인다. 원나라에 보내는 진귀품인 매를 키우고 관리하는 응방 총관도 이들이 도맡았다. 왕실 주변에는 색목인 출신의 최성노 같은 대상인들도 있어 공사무역에 종사하기도 했다.
이처럼 무슬림들이 고려사회에 어지간히 적응하여 ‘고려화’하다 보니, 유행하던 풍자가사의 주인공으로까지 등장한다. 유명한 고려 가요 <쌍화점(雙花店)>이 일례다. 이 속요는 4절로 되어 있는데, 첫 절이 회회 남자와 고려 여인간의 로맨스다. 지금말로 풀이하면, “쌍화점에 쌍화를 사러가니 회회아비가 내 손목을 쥐었다. 이 소문이 상점 밖에 퍼진다면 새끼 광대인 네가 퍼뜨린 것인 줄 알리라“란 내용이다. 이를 혹자는 퇴폐적 사회상의 단면이라고 혹평하지만, 그렇게만 볼 일은 아니다. 이질적인 두 문명의 문화가 어쩔 수 없이 세진 속에서 융합되다 보니 인간 본능인 사랑과 낭만이 자연스럽게 표출된 셈이다. 여기서 ‘쌍화’는 상화(霜花)떡으로 무슬림 고유의 빵(만두)일 것이다. 쌍화와 함께 전래된 무슬림 음식으로는 송도 설(薛)씨가 만든 데서 유래한 설적(薛炙)이 있다. 쇠고기나 소 내장에 고명을 입힌 뒤 쇠꼬챙이에 꿰어 구운 음식인데, 오늘날도 유행하는 중동의 케밥이나 동남아의 사떼와 흡사하다.
전래품 중 으뜸 명물 ‘소주’
![]() | ![]() △ 소주를 내릴때 사용하는 소줏고리. |
고려와 이슬람세계간의 교류품 가운데 오늘날까지 일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명물이 소주다. ‘취중진담’이란 이유를 들어 서양에서는 술을 신이 인간에게 내린 최고의 선물이라고 한다. 이런 술이 이땅과 이슬람의 만남을 주선한 매체가 되었다면 이야말로 신이 두 문명에 하사한 실로 진중하고 신기한 선물이 아닐 수 없다. 흔히 3대 토주의 하나로 꼽히는 소주의 연원을 고려시대로 잡는다. 그런데, 다시 그 연원을 캐올라가면 원조는 아랍에 가닿는다. 세 번 고아내린 증류주라 하여 이름 붙여진 소주는 기원전 3천년께 메소포타미아 수메르에서 처음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 뒤 증류주는 오늘날까지도 중동 아랍지역에서 ‘아라끄’란 이름으로 전승되고 있는데, 몽골 서정군은 1258년 압바스조를 공략할 때 처음 ‘아라끄’의 양조법을 배워간 것으로 전해진다. 몽골군은 이후 일본 원정을 위해 주둔한 고려의 개성과 안동, 제주도 등지에서 이 술을 처음 빚기 시작했다. 원정군이 가죽 술통에 넣고 다니며 마시는 ‘아라끄’를 공급하기 위해 고려인들이 만들어낸 것이 바로 고려 소주다. 고려 소주의 본산인 개성에서는 근세까지도 소주를 ‘아락주’라고 불렀다.
짧은 만남 오랜 흔적
이와같이 고려와 이슬람의 교류는 몽골의 내침과 간섭이란 특수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거의 일방적으로 이뤄졌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런 만남이 있었기에 이슬람 문화의 전파나 수용은 역동적일 수밖에 없었다. 길지 않은 만남이었지만, 그 영향은 자못 커서 오늘날도 흔적이 남아있는 것이다.
(39) 부민교류의 큰별 문익점
![]() | ![]() △ 문익점 영정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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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한 정당인이 동료 의원이 외국에서 들고 온 자그마한 선물용 포장쌀 샘플을 소개하면서 의원 저마다가 ‘문익점이 되어달라’고 독려하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받아들일 만한 외국의 좋은 아이디어로서 그것이 바로 ‘현장정치’라는 것이다. 해석이야 어떻든간에, 600여년 전에 살고 간 문익점이 오늘 우리들 속에 여전히 살아숨쉬고 있음을 직감케 한다. 우리나라 역사인물 중에서 추모를 뜻하는 사당 수가 많기로는 최영 장군과 충선공 문익점이 쌍벽을 이루며, 국가에서 사당을 짓고 논밭과 노비를 내려 후손들이 영원히 제사를 모시도록 한 주요 부조묘의 주인공도 문익점이다. 그만큼 문익점은 우리겨레의 사랑과 모심을 널리, 그리고 오래도록 받는 위인이다.
고려말 문반으로 관직 진출
여말선초의 격변기에 문반 출신으로 여러가지 관력을 거치면서 이러저러한 정치적 사건에 자의반타의반 휘말려 부침을 거듭하다 보니 그에 관한 기록이나 평가에는 이론이나 왜곡이 적지 않으며, 심지어 전설적 요소마저도 끼어있다. 충절이나 효심, 학문도 출중하지만, 무엇보다도 그의 이름을 빛나게 한 것은 백성을 잘 살게 하려는 부민(富民)정신에서 오는 목화씨의 반입이다. 그 옛날 몇 알의 목화씨를 들여다가 우리겨레의 생활문화에 일대 혁명을 일으킨 ‘목면공’, ‘문화영웅’으로서의 그의 교류사적 업적은 커다란 현실적 의미가 있다. 그래서 오늘도 ‘문익점’이 필요한 것이다.
고려 말엽의 문신이며 학자인 문익점은 1328년(혹은 1329년, 1331년) 지금의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배양마을에서 낙향한 선비의 둘째로 태어나 열살 때 대유학자 이곡의 문하생이 되었다. 20살 때 시경만을 가르치는 국립학당 격인 경덕재에 들어갔고, 23살 때는 원이 고려에 설치한 정동행중서성이 주관하는 정동성향시에 급제했으며, 33살 때는 공민왕이 새로 지은 궁궐인 신경에서 실시한 신경동당시에 응시해 급제했다. 과거에 급제한 문익점의 첫 벼슬은 부군수에 해당하는 정8품의 김해부사록이다. 이어 유교교육을 관장하는 성균관의 순유박사로, 그리고는 왕에게 직접 간언하는 핵심기관인 사간원의 좌정언에 발탁되었다. 재사에 따르는 승승장구의 관력이다.
‘충절 행적’ 기록마다 엇갈려
![]() | ![]() △ 목화꽃의 푸근하고 탐스런 모습. 경남 산청군 단성면에 있는 목면시배유지는 사적108호로 지정돼 있다. |
원 유배 귀국길에 목화씨 반입
조선초에 편찬된 <고려사>가 조선조의 건국에 제동을 건 고려인들의 행적을 폄하했던 경향이나, 문익점이 귀국 후 처벌되지 않고 공민왕으로부터 벼슬을 제수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후 여말선초의 여러 군주들로부터도 충신의 예우를 받은 사실 등을 감안할 때, ‘덕흥군 아부설’은 일종의 낭설로 판단된다. 이렇게 문익점의 3년간 귀양살이 여부가 기록에 따라 다르며, 따라서 원으로부터의 귀국 연대도 3년간의 차이(1334년과 1337년)를 보이고 있다. 게다가 당시 원나라에서 목화씨 반출이 금지되어 목화씨 10개를 붓뚜껑 속에 감추고 들어왔다는 기록은 사적에 명시되어 있지 않다. 이것은 아마 그의 절절한 애국애민정신을 강조하기 위해 후세에 가공 윤색한 전설적 일화라고 짐작된다. 2세기 경 중국 공주가 누에씨를 모자솜 속에 감추어 호탄(현 신쟝 위구르자치주)에 전해주고, 6세기 중엽에 네스토리우스파 신부가 인도 북부로부터 역시 누에씨를 지팡이 속에 숨겨 몰래 로마로 반출했다는 유사 일화도 있으니, 굳이 허구라고 나무랄 필요는 없다. 그밖에 당시 원나라에서 목화씨가 반출금지품인가 아닌가와 선비로서 밀반출은 명분에 어긋난다는 등 이러저러한 시비거리도 있다.
![]() | ![]() △ (왼쪽부터) 씨아와 물레 |
아무튼 문익점은 귀국한 후 친원정책에 반기를 들기도 하고, 이성계 일파의 전제개혁을 비난하기도 하여 탄핵과 좌천, 재기와 승진 등을 거듭하면서도 충효의 도는 물론, ‘목면공’의 집념도 실천해나간다. <태조실록>에 의하면 원에서 들여온 목화씨를 장인 정천익에게 나누어주어 3년간이나 시험재배에 고심하던 끝에 겨우 한 그루만이 살아남아 재배에 성공한다. 천익은 호승(서역승)으로부터 실뽑고 베짜는 기술과 기구를 배워 무명을 짜니, 10년도 채 안되어 목화 재배가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1398년(혹은 1400년)에 70살을 일기로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한 문익점은 생전에 나라가 진흥하지 못하고 성인의 학문이 제대로 전해지지 못하며, 자신의 뜻이 확립되지 못한 세가지 점이 걱정된다는 뜻에서 자신의 호를 ‘삼우당(三憂堂)으로 지어 불렀다. 바로 이러한 우국충정의 일념에 불탔기에 그 숱한 사람이 원나라를 오가면서도 무심했던 목화를 그만이 눈여겨 보고 헐벗은 백성들의 옷감을 마련코자 씨를 구해가지고 와서는 만사를 제쳐놓고 면화 재배에 전념해 결국 청사에 길이 빛날 불멸의 위훈을 세웠다.
생활·문화·산업 혁명적 변화
문익점에 의한 목화씨의 전래와 재배 및 목면의 생산은 우리나라 직물사뿐만 아니라, 산업구도나 생활문화에도 일대 혁명을 일으켰다. 포근한 솜과 질긴 무명은 옷감의 개조와 향상에서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하고, 씨아나 물레, 가락, 날틀 같은 면직기구의 제작은 생산도구 제작의 단초를 열었으며, 탈지면은 지혈이나 외과치료용으로 쓰이고, 솜은 초나 화약의 심지로 유용되었다. 내구성이 강한 무명실로 만든 바느실이나 노끈, 낚싯줄, 그물은 일상용품을 일신시켰다. 그런가 하면 무명은 물물교환에서 통화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하고, 일본이나 중국에 대한 주요 수출품의 하나이기도 했다.
![]() | ![]() △ 경남 산청군 단성면사월리에 있는, 문익점이 처음으로 목화를 재배하기 시작한 곳을 기념하는 사적비. |
일본은 전파 100년만에 재배
목면 전파에서 특기할 것은 조선의 목면이 일본에 전해졌다는 사실이다. 15세기 초 조선 태종 때부터 ‘청목면’이란 이름의 목면이 일본사신에 대한 하사품 중에 포함되기 시작하다가 20년도 채 못되어서는 하사품 중에서 주종을 이루었다. 같은 세기 후반에는 일본의 지방 영주들이 앞을 다투어 매해 수천 필씩 조선의 면포를 무역해갔다. 17세기 초 에도시대에 출간된 일본 최고의 농서인 <청량기(淸良記)> 등 사적에 의하면, 일본은 ‘오닌의 난’(1470~1480년)을 비롯한 전란이 발발하여 군복 같은 옷감 수요가 급증하자 해금정책을 취하고 있는 중국 명나라와의 거래가 단절된 상태에서 조선으로부터 면포를 수입하면서 목화씨를 들여가게 됐으며, 우리보다 약 100년 후에 단작작물로 목화재배를 시작했다. 요컨대 교류사에서 보면, 일본의 면직업은 문익점에 의한 간접전파의 결과물이다. 그러던 일본의 면직업은 우리를 앞질러 근대화를 선도한 산업으로 도약했다. 조선조의 면업장려정책으로 인해 17세기 중엽까지도 함경도를 제외한 전국 각지에서 면작이 이루어지고, 명나라 사신들에게 면직포를 하사할 정도로 면업이 발달하고 그 질이 높았으나, 그 후의 쇄국정책으로 인해 우리의 면업은 근대화의 문턱에서 그만 머뭇거리다가, 급기야 망국과 더불어 조락하고야 말았다. 뼈저린 역사의 교훈이다.
(40) 고려 품에 안긴 귀화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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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품어 속넓힌 겨레문화
10년 전 화산(花山) 이씨 종친회 대표들은 선조의 고향 베트남을 찾았다. 선조들이 고려 고종 13년(1226년) 망명한 지 780여 년만이었다. 대통령을 비롯한 3부 요인이 모두 나와 환대하고, 정부는 베트남인과 똑같은 법적 지위를 부여한다면서 왕손 예우를 깍듯이 했다. 이 나라의 왕조가 남긴 유일한 왕손이 금의환향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지금도 해마다 리 왕조 건국기념식(음력 3월 15일)에는 종친회 대표들이 초청되고, 3년 전에는 양국 예술가들 합작으로 ‘이용상 오페라’를 하노이에서 공연하기도 했다. 이웃과의 우의를 소중히 여기는 우리로서도 뜻깊은 일이 아닐 수 없다.
화산이씨 시조는 베트남 왕족
원래 화산 이씨 시조인 이용상(李龍祥)은 베트남 첫 독립국가인 리 왕조(1009~1226)의 9대 왕 혜종의 숙부이자 왕자 신분의 군 총수였다. 그는 한 척신의 권모술수로 왕이 폐출되고 왕족이 몰살 당하는 난국에서 구사일생으로 탈출한 뒤 배에 몸을 싣고 정처없이 떠났다. 어쩌면 최초의 베트남 ‘보트피플’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계절풍을 타고 바람부는 대로 흘러흘러 와닿은 곳이 바로 한반도 서해안 옹진반도의 화산(지금은 북한땅)이다. 비행기로도 5시간이나 걸리는 3,600여 km의 거리다. 때마침 몽골군이 이곳을 유린하자, 이 베트남 왕자는 섬사람들과 힘을 모아 침략자를 물리쳤고, 이 사실이 고려 조정에 알려지자 고종은 행위를 가상히 여겨 이용상에게 화산 일대를 식읍으로 내리고 본관을 화산으로 하는 이씨 성을 하사했다. 그래서 이용상은 화산 이씨의 시조가 되었다. 지금도 화산 인근에는 이용상의 행적을 전해주는 유적이 남아있다. 몽골군 침입을 막고자 쌓았다는 안남토성과 고향이 그리울 때마다 찾아가 고국쪽을 향해 통곡했다는 망국단, 그리고 리씨 왕조의 시조 이름을 딴 남평리와 당시 베트남의 나라 이름을 본받은 교지리 마을이 그 유적들이다.
![]() | ![]() △ 베트남 왕족출신인 화산 이씨 시조 이용상의 사적을 새긴 ‘수항문 기적비각’ |
성을 하사받고 귀화한 이용상 일가 중에는 걸출한 인물들도 여럿 배출되었다. 장남은 예문관 대제학을 제수받고 차남은 안동부사를 지냈으며, 6세손 맹운은 공민왕 때 호조전서를 역임하다 국운이 기울자 고향에 은거하면서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충절을 지켰다. 지금 이용상 후예들이 남한에는 약 260가구에 1400명 가량 살고 있으며, 북한에는 더 많다고 한다. 화산 이씨 외에 베트남 귀화인으로는 이양혼을 시조로 하는 강원도 정선 이씨가 있다. 이 세가 중에는 고려 명종 때(1170~1197) 14년간 정권을 잡고 철권을 휘두른 6대손 이의민이 있다.
국내 275개 성씨 절반이 귀화성
이용상을 시조로 한 화산 이씨의 정착과 귀화, 후손들의 행적 등은 고려 귀화인들의 전형적인 한 사례다. 일반적으로 귀화란 외국인이 국내에 들어와 영주하면서 내국인으로 동화되는 것을 말한다. 귀화는 문명교류의 역사적 배경이 되는 동시에 그 양상이기도 하다. 일종의 인적 교류인 귀화를 통해 이질적인 문명이 전파되고 수용되기 때문이다. 어느 나라 역사에도 정도나 형태 차이는 있어도, 귀화가 배제된 일은 거의 없으며, 그 양상은 나라의 개방성이나 국력과 크게 연관된다. 족보가 발달한 우리 나라의 경우, 275개(1985년 통계) 성씨가 있는데, 그중 귀화성이 무려 136개를 헤아린다. 시대별로 보면, 신라 때 40여 개, 고려와 조선시대에 각각 60여 개와 30여 개인데, 그 가운데 절대다수인 약 130개가 중국계 귀화성이라고 한다. 고려시대의 귀화성을 살펴보면, 중국계로 충주 매씨와 남양 제갈씨 같은 희성이 많으며, 몽골계로는 연안 인씨, 여진계로는 청해 이씨, 위구르계로는 경주 설씨, 회회계로는 덕수 장씨, 일본계로는 우륵 김씨(후에 김해 김씨로 바꿈) 등이 있다. 고려시대에 ‘투화(投化)’나 ’내투(來投)‘라는 말로 표현된 귀화가 가장 많이 성행한 셈인데, 이는 고려가 튼튼한 국력과 문화적 자신감을 바탕으로 귀화인에게 포용과 우대의 선정을 널리 베풀었기 때문일 것이다.
외교·외국어·문물전래 등 활약
![]() | ![]() △ 화산이씨족보 |
고려의 품에 안긴 이들 귀화인들은 고려인들과 동고동락하면서 고려사회를 함께 일구어나갔다. 그들에 의해 새 문물이 들어와 고려사회의 면모는 좀더 다채로워졌다. 원래가 외국인들이었으므로 외국사정에 밝아 외교사절에 기용되는 경우가 많았고, 외교문서 작성이나 외국어 교육에도 종사했다. 고종 때 귀화한 동여진인 주한에 의해 여진문자를 가르치는 이른바 ‘소자지학(小字之學)’이 생겨났고, 귀화한 거란포로 수만명 중에는 뛰어난 의관제작자와 토목기술자들이 1할이나 되어, 그들이 제작된 의상과 기물은 전래의 질박함을 잃을 정도로 화려하고 정교했다고 전해진다. 오늘날까지도 말총으로 의관을 만드는 기술은 유목민 출신의 이들 거란 귀화인들이 남긴 유산이다. 의약과 악무 발전에 기여한 귀화인들도 다수 있었다.
특히 건국 초기에는 문신들이 절대적으로 부족해 조정에서는 중국계 지식인들을 적극 유치해 적재적소에 기용했다. 그 대표적 일례가 중국 후주의 쌍기(雙冀)다. 그는 일찍이 과거에 급제해 지방과 중앙의 사법관청에서 봉직하면서 후주의 개혁에도 참여한 경험이 있는 인물이다. 광종은 그의 건의에 따라 사상 처음 과거제도를 도입했으며, 그를 연거푸 세 번이나 과거제도를 총관하는 지공거(知貢擧)에 임명했다. 물론, 고려 전기에 유수의 귀화인들을 관직에 등용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수요에 의한 선발이었고, 사대주의적인 남용은 아니었다. 광종은 중국계 귀화인을 지나치게 우대한다는 비난을 받았지만, 그 자신은 ‘불러보고 뜻에 맞는’ 자만을 골라서 기용했던 것이다. 사실상 쌍기 같은 몇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처음부터 5품 이상의 품계나 고위관직에 기용한 예는 없다. 대부분 봉공(奉公)과 엄선을 거쳐 승진했으며, 명사를 기록한 <고려사> 열전에도 귀화인은 10명이 올라있는 정도다.
귀화인 건의 따라 과거제 도입
![]() | ![]() △ 덕수장씨종파도 <공숙공약사> 덕수장씨종친회 |
그러면서 고려는 귀화인들을 안착시키기 위한 일련의 사회적 시책도 강구했다. 우선 일괄적으로 주택과 전답, 미곡과 의복, 기물과 가축 등을 나누어주었다. 고려 말엽에 와서는 토지제도 문란으로 토지가 부족해지자 투화전(投化田)이란 명목으로 전답 사여를 제한했다. 투화전은 생전에 경작하되 죽으면 국가에 반납하며, 관직을 맡거나 다른 전답을 소유할 경우는 가질 수 없게 규제했다. 그밖에 일반 귀화인들은 안전을 고려해 대체로 국경지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정착시켰으며, 범법자인 경우도 ‘남계수로(南界水路)’, 즉 남방의 도서지대에 유배시키도록 하는 등 귀화인에 대해서는 배려와 함께 주도면밀한 관리조처도 취했다.
주체적 구심력 바탕 적극 수용책
![]() | ![]() △ 덕수장씨의 재실인 풍덕사. 평택 팽성 분토골 소재, 2002년 10월 20일 건립, 덕수장씨종친회 |
흔히들 우리 겨레는 ‘한핏줄’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성씨 가운에 절반 가까이가 외래 귀화성이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 결코 그렇지만은 않다. 혈통을 따질 때, 우리들 속에서 순혈과 혼혈의 비중이 어느 정도인지는 밝혀진 바가 없으나, 분명한 것은 귀화에 의한 혼혈이 만만찮은 비중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아마 110년 전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1895년)의 저자인 벽안의 새비지-랜도어의 눈에 조선은 다민족의 혼혈사회로 비쳤던 모양이다. 그런데도 우리가 굳이 ‘한핏줄’이라고 말하는 것은 역대로 포용성과 융합성이 남달리 강한 한(韓)민족의 ‘용광로’ 속에서 귀화인들을 ‘용해’시켜 적어도 생활문화나 가치관에서는 동질성이 확보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많은 나라들이 우리와 경우가 비슷하지만, 다민족화를 방치한 나머지 전근대적 민족갈등을 빚고 있는 사정을 감안할 때, 우리는 겨레의 역사에 자부심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주체적 구심력이 강할 때만이 인간을 포함한 외래의 문물을 순기능적으로 수용할 수 있다는 귀중한 역사적 경험이다.
(41) 조선은 닫힌 나라였는가
![]() | ![]() △ 일본에 간 조선통신사 (전충진, 『도자기와의 만남』, 리수, 2001, 88쪽)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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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 향해 열려있던 조선 500년
흔히들 조선시대를 멍들게 한 병폐의 하나로 ‘쇄국’을 꼽는다. ‘쇄국’으로 인해 나라가 근대화를 이루지 못하고 급기야 망국을 자초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논리가 재대로 된 역사인식에 바탕한 정론일까. 이를테면, 조선은 빗장을 걸어잠근, 닫힌 나라였는가. 겨레의 비상을 앞둔 이 시점에서 한번쯤 되돌아볼 일이다.
사실 조선왕조의 쇄국논리를 실사구시의 측면에서 따져본다면, 내적으로는 주로 19세기 후반 대원군이 주창한 쇄국정책에, 외적으로는 그 무렵 서양인들의 뇌리에 각인된 이른바 ‘은둔의 나라’관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그것이 일제의 식민사관과 우리의 자학적 역사관에 의해 부지불식간에 굳어져버린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한 편견이며, 무지에서 비롯된 사견(邪見)이기도 하다.
‘은둔의 나라’ 무지한 식민사관
한 왕조치고 유례가 드물게 519년이란 긴 수명을 누린 조선왕조 전체를 조감하면, 비록 이러저러한 우여곡절은 있었으나, 조선왕조의 내재적이며 자율적인 힘에 의해 바야흐로 정치·경제·문화·사회의 각 방면에서 근대화의 정상적인 길을 걷고 있었다고 본다. 그러다 후기에 이르러 신흥 서구세력과 근대화 후발국 일본의 도전에 직면해 이러한 길이 가로막히게 되자, 대원군은 대응책으로 쇄국정책을 택한다. 18세기부터 이른바 ‘이양선’(異樣船)이라고 하는 서양 함선들이 탐험이니 측량이니 하는 구실을 붙여 한반도 연해에 무시로 출몰하면서 개항과 통상을 강요하고, 19세기 전반에는 아편전쟁을 계기로 영국과 프랑스가 베이징을 강점하며, 북방에서는 러시아가 연해주 일대로 영토를 확장하는 등 외압이 도를 더해갔다.
한편, 이러한 서세의 동점과 때를 맞추어 스며드는 서양의 천주교는 전통 유교사상이나 종교신앙에 반한 일종의 폐단으로 간주되었다. 그리하여 대원군이 서양세력의 침투에 대한 우선대응으로 천주교 박해책을 강구했는데, 그 결과 이를 구실로 프랑스함대가 강화에 침입한 병인양요(1866년)가 일어났다. 뒤이어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대동강으로 몰래 거슬러 올라가다가 저지 당하자 미국이 아시아 함대 소속의 군함을 강화도에 급파해 조선관군과 충돌한 신미양요(1871년)가 일어났다. 여기에다 무지막지한 독일상인 옵페르트가 대원군 부친인 남연군의 무덤을 도굴하는 만행까지 겹치다보니, 대원군으로서는 서양을 불신하고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두 차례의 양요를 격퇴한 대원군은 서양에 대한 자신감을 얻어 쇄국정책을 더욱 강화하게 된다. 이 무렵 일본은 서양문물을 수용해 명치유신을 단행한 뒤 주제넘게 조선에 통상수교를 요청한다. 대원군은 서양을 배척하는 ‘척양’(斥洋)과 똑같은 명분으로 ‘척왜’(斥倭)를 표방한다. 그러면서 그는 양이(洋夷:서양오랑캐)와의 화의를 반대하는 ‘척화교서’를 반포하고 서울 종로와 전국의 곳곳에 “양이가 침범함에 싸우지 않음은 곧 화의하는 것이요, 화의를 주장함은 곧 나라를 파는 것이다“라는, 실로 전의에 불타는 내용의 척화비를 세워 쇄국정책 의지를 더욱 가다듬는다.
이러한 대외적 쇄국정책과 더불어 왕권을 강화하고 혼탁된 정국을 수습하기 위해 대원군이 단행한 일련의 국내 개혁정책은 일정한 실효를 거두었지만, 유림세력을 비롯한 정적들의 반발과 대내외 개화세력들의 압력으로 그는 하야하고 만다. 섭정으로 시작된 그의 쇄국정책은 10년(1863~1873년)이란 단명으로 끝난다. 그 이후로는 양이와 왜이의 내침이 빈번해지고, 갑신정변이나 갑오경장, 광무개혁(대한제국) 같은 일련의 개화운동이 전개됨에 따라 쇄국정책은 더 이상 지탱되지 못하고 막을 내린다. 이렇게 보면 ‘쇄국’은 한순간의 요동일 뿐, 조선의 전시대를 갈무리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더욱이 이 ‘요동기’를 포함해 조선왕조 전 기간에 걸쳐 간단없이 전개된 대외활동이나 교류상을 감안하면, ‘쇄국’이란 일시적 몸부림에 불과했음이 자명해진다. 건국 초기부터 이웃인 명나라와는 전통적인 사대교린정책을 계승해 내왕이 빈번했다. 초기에는 해마다 사신을 7회나 파견하다가 점차 회수가 감소되기는 했지만, 병자호란 때(1636년)까지 242년간 총 186회나 견사하고, 명나라도 정상적으로 사신을 보내왔다. 정치외교관계뿐만 아니라, 사신을 통한 공무역이나 사무역, 밀무역 등 경제문화교류도 활발했다. 여진과는 북방 국경지대에 교역장을 개설하고 서울에는 북평관을 세워 사신들을 맞고 교역을 진행했다. 심지어 여진인들을 받아들여 왕궁을 지키는 시위로까지 기용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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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군 ‘쇄국정책’ 기껏 10년
일본에 대해서도 상당히 개방적이었다. 세종 연간에는 해마다 일본에서 200여 척의 배가 들어오고 5500여 명의 내왕자가 있었다. 그러다가 대마도주의 간청을 받아들여 부산과 제포, 염포의 3포를 중종 때까지 개항하고 일본인들의 거주를 허용했다. 이에 자극을 받은 류큐의 중산왕은 국서를 보내 신하로 자칭하기까지 한다. 임진왜란 직후에는 일본측의 요청에 의해 통신사를 파견(1604~1811년 사이에 13회)하고 일본인들의 내왕무역을 허용하는 을유조약(1609년)을 체결하기도 한다. 그밖에 일찍이 없었던 동남아시아 지역과의 내왕이나 교류도 트였는데, 그곳으로부터는 각종 약재와 향료, 염료 등을 수입했다. 특기할 것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 군대에 소속된 오늘의 타이나 인도 사람들이 성주 지방에서 조선군과 어깨 겯고 왜군과 싸웠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활발한 대외교섭과 더불어 조선은 건국 이래 ‘쇄국기’를 포함한 전 기간에 걸쳐 시종 외국과 폭넓은 교류를 펼쳐왔다. 세종을 비롯한 몇몇 성군들의 선정과 중국을 내왕하던 사신들의 노력, 그리고 여러 선각자들의 혜안에 의해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싹트면서 서역과 서양의 선진문물을 적극 받아들여 근대화의 기틀을 마련하기에 이른다(이에 관해서는 앞으로 몇 회에 걸쳐 논하겠다). 이런 점을 감안하더라도 조선은 결코 닫힌 나라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그 열림이 순탄치 않아 때로는 넓고 때로는 좁았으며, 그런가 하면 일순(10년)의 닫힘도 있었다. 그러나 문명은 모방성이라는 근본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 교류에 ‘쇄국’ 같은 인위적 차단은 있을 수 없다.
중·일·동남아 등과 폭넓은 교류
![]() | ![]() △ 10년간 쇄국정책을 주도한 대원군(흥선군 이하응, 1820∼1998년) |
도쿠가와 막부는 241년간 쇄국
이러다 보니 일본은 선진문물을 수용하는 데서 조선보다 한발 늦곤 했다. 조선에서는 1402년 가장 뛰어난 세계지도의 하나로 손꼽히는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를 완성했는데, 일본은 그보다 무려 390년 뒤(1792년)에야 재중 선교사인 마테오리치가 그린 지도를 본따 처음으로 ‘곤여전도’라는 세계지도를 만들어냈으며, 조선은 세종 때 벌써 원나라와 명나라, 그리고 회회(이슬람)의 역법들을 참고해 조선식 역법인 ‘칠정산내외편’을 편찬한 데 비해 일본은 1684년에야 회회역법에 준한 ‘정형력(貞亨曆)’을 만들어 근 200년 동안 사용했다. 세계지리서의 경우도 이수광의 ‘지봉유설(芝峰類說)’(1614년)은 일본 니시가와 죠겐의 ‘화이통상고(華夷通商考)’(1695년)보다 80여 년이나 앞선다.
이미 15세기때 세계지도·역법
우리 스스로가 조선을 ‘쇄국’이라고 오해하는 것이 일종의 자학적 역사인식이라면, 서구가 우리더러 ‘은자의 나라’라고 하는 것은 무지의 소치이거나 작위적 오도일 것이다. 어느 것이든 사람들의 뇌리에 조선을 ‘쇄국’으로 오인시켰다는 지탄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조선을 가리켜 ‘은자의 나라’라고 이름 아닌 이름으로 붙인 사람은 미국의 동양학자이자 목사인 그리피스다. 그는 일본문화에 매료되어 연구를 시작했는데,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모르고는 일본문화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음을 깨닫고 1871년 조선에 왔다. 이것저것 신기한 것을 보고 돌아가서 <은자의 나라 조선>(1882년)이란 책을 써냈다. 이 책은 전 3부 53장으로 되어 있는데, 제1부는 고대·중세사를, 제2부는 문화사 일반을, 제3부는 근·현대사를 다루고 있다. 그는 대한제국의 멸망을 필연으로 보면서, 조선을 세상이 알지도 못하고, 알려지지도 않은 호젓하고 닫힌 ‘은자의 나라’라고 못박았다. 책 속에 이색적인 서양 식기들로 가득한 식탁을 조선의 ’잔칫상’이라고 그린 삽화만큼이나 그의 조선관은 우스꽝스럽다.
일제식민사학은 당쟁을 한국인의 고질적 ‘민족성’이라고 냉소하면서, 조선시대의 큰 병폐로서 나라를 망하게 하여 결국 한일합방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강변했다. 그 해악을 갈파하고 있는 오늘날, 같은 맥락에서 또다른 병폐라고 꼬집는 이른바 ‘쇄국’에 대해 재고를 요청한들, 정녕 조선은 ‘닫힌 나라’가 아니라 ‘열린 나라’였다고 항변한들, 과연 그것이 무리일까.
(42) 조선인들의 눈에 비친 세계
![]() | ![]() △ 1883년 미국에 도착한 보빙사 일행 (뒷줄 왼쪽에서 세 번째가 유길준, <서유견문>, 서해문집, 2004, 21쪽)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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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세계 향한 당당한 ‘앎의 추구’
500년 조선조는 말엽에 와서 외세의 시달림을 받다가 끝내 일제 강점으로 망국이란 비운을 맞았다. 그러다보니 마냥 파행만을 거듭한 처진 나라로 비쳐져 왔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여느 선진국과 마찬가지로 조선도 시종 내재한 자율적 힘에 의해 근대화의 고지를 향해 한걸음 한걸음 톱아올라갔다는 사실이다. 그 힘의 정신적 원천은 독창적 우주관과 탈중화적이며 개방적인 세계관에 있었다.
조선인들은 서양의 근대 천문지리 지식을 동양의 전통 우주론으로 재해석하거나 서로를 조화시키는 지혜를 발휘했다. 동양에서 우주구조론이 거론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2~3세기 무렵이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 난 평면으로서 서로가 8만리 거리로 마주하고 있다는 이른바 ‘천원지방(天圓地方)’이 최초의 우주관이며, 이것을 ‘개천설’이라고 한다. 그러다가 달걀 껍질이 노른자를 감싸고 있는 것처럼, 공 모양의 하늘이 땅을 둘러싸고 있다는 ‘혼천설’이 나왔는데, 이 설에 의하면 하늘은 알 껍질처럼 땅을 감싸고 평면인 땅은 물 위에 떠있으며 태양이 낮에 땅 위를 지나다가 밤에는 물 속에 잠긴다는 것이다. 조선시대에 천문관찰 의기로 만들어낸 혼천의의 원리는 바로 이 ‘혼천설’에서 비롯된 것이다.
기철학 바탕 독창적 우주관
이러한 ‘혼천설’에 입각한 우주관은 서양의 근대적 천문지리가 소개되고 유입되면서 신이한 철학적 해석으로 치장된다. 일찍이 세 번이나 중국에 사행하면서 현지 서양문물에 감응한 이수광은 조선 최초의 백과사전이라는 <지봉유설>(1614년)에서 땅은 네모나지 않고 둥글다는 ‘지원설’을 주장한다. 두 세기 뒤 성리학자이며 과학자인 최한기는 명저 <지구전요>(1857년)에서 기철학에 바탕해 독창적인 ‘조선식 우주론’을 제시한다. 그는 재중 선교사들의 저서를 통해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과 뉴턴의 만유인력 법칙을 접하고 수긍한다. 그러나 원리에 대한 해석은 전혀 다르다.
최한기는 <신기통>(1836년)과 <성기운화>(1867년) 같은 철학서에서 천체운동과 우주현상에 대한 자신의 기철학을 피력한다. 모든 천체는 둘레에 지구의 대기권과 같은 공기층인 기륜(氣輪)이 있어 항상 서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그는 뉴턴의 만유인력 법칙이 우주의 운동현상을 적시하고는 있지만, 그 원인은 제대로 밝혀내지 못한다고 지적하면서 중력 작용은 천체를 둘러싸고 있는 기륜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생기는 것이며, 지구에 아침저녁이 생기는 것은 지구와 달의 기륜이 서로 접촉하고 작용한다는 증거라고 주장한다. 그는 빛, 소리, 온도와 같은 물리현상에 관한 서양의 과학지식을 소개하면서 그것을 자신의 기철학을 세우는 과학적 기초로 활용하고 있다. 또한 흙, 물, 불, 공기로 우주 변화를 설명한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소설’을 부정하면서 우주에 있는 근원적인 기가 변해 흙, 물, 불, 공기가 된 것이므로 이 4원소를 근본물질로는 볼 수 없다고 통박한다. 이렇듯 그는 서양의 과학지식을 만물의 근원인 기의 운동이나 성질을 설명하는 논리로 활용한다.
![]() | ![]() △ 유길준의 <서유견문> 원본, 보빙사 시절의 유길준 |
이런 독창적 우주관과 더불어 조선인들은 고질적인 중화주의의 좁은 울타리를 벗어나 넓은 세계로 눈을 돌리는 거시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세계관은 그들이 써내거나 그린 지리서나 세계지도에서 뚜렷이 나타난다. 몇 년 전 미국 콜럼비아 대학의 한 교수가 펴낸 <지도학의 역사>란 책은 표지로 조선 초에 제작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152×122cm, 1402년)를 선정했다. 당시의 세계지도로는 가장 뛰어나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 지도는 좌정승과 우정승 등 고관대작들과 학자들의 공동참여 아래 중국과 한국, 일본과 아랍에서 출간된 여러 지도들을 참고하여 국가사업으로 만들어낸, 당시로서는 가장 우수한 세계세도였다. 이 지도의 중요한 특징은 종래 세상을 문명세계인 ‘중화’와 오랑캐세계‘인 ’이(夷)‘로 나누는 이른바 ’화이관‘에서 출발해 중국을 중심에 놓고 그 주변에 몇 개 나라를 배치하던 중화주의적 지리관에서 탈피하고 조선의 ’심리적 크기‘를 강조한 것이다. 물론 중국을 가운데에 크게 배치한 점으로 보아 중화주의 사상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지만, 그 서쪽에 유럽과 아랍 및 아프리카를 그려넣고 있다. 100여 개의 유럽 지명과 약 35개의 아프리카 지명을 기재하고 있는데, 이것은 당시로서는 대단한 일이다. 이 지도에는 우리나라가 일본보다 4배 정도 크게 그려져 있다. 그밖에 지중해가 바다 아닌 강으로 표시된다든가, 인도차이나의 여러 나라들이 바다 위의 섬으로 되어있다든가 하는 오류도 발견된다.
당대최고 세계지도 ‘혼일강리도’
이러한 경향은 이수광의 <지봉유설>이나 최한기의 <지구전요>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며, 유길준의 <서유견문>(1895년)에서는 개화사상으로 굳어진다. 임진왜란과 정유왜란, 정묘호란, 그리고 남북인 간의 갈등 등 혼란이 심해 많은 사람들이 중국만 바라보면서 사대를 일삼던 시대에 이수광은 과감하게 중화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새로운 세계를 향해 시야를 넓힌다. 총 10책 20권으로 된 <지봉유설>에는 천문, 지리, 경서, 문자, 언어, 복식, 심지어 곤충 같은 인문지리나 자연과학의 세세한 부문까지를 설명할뿐만 아니라, 안남(베트남), 섬라(타이), 자바, 말라카, 불랑기(佛狼機: 포르투갈), 영결리(永結利: 영국) 등 여러 나라들에 관해서도 소개하고 있다. 총 3,435항목에 거론되는 인명만도 2,265명에 이르니 그 규모를 가히 짐작할 수가 있다. 같은 시대의 학자 김현성은 이 책을 평가해 “마치 귀머거리에게 세 귀가 생기고, 장님에게 네 눈이 얻어짐과 같아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 | ![]() △ (위로부터) 이수광의 <지봉유설>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일본 교또 류코쿠 대학 도서관 소장 |
동서문물 백과사전 ‘지봉유설’
근대화를 향한 잉태 속에서 이수광과 최한기가 그 주춧돌을 놓은 새로운 세계관의 바톤을 넘겨받은 유길준은 개화의 산고 속에서 그것을 다져나갔다. 최초의 일본 유학생이자 미국 유학생이기도 한 개화운동가 유길준은 미국에서 돌아오면서 유럽을 순방하고 나서 국한문 혼합체로 된 여행 견문기 <서유견문>을 투옥 등 우여곡절 끝에 집필 10년만에 출간했다. 총 20편으로 구성된 이 책의 내용은 크게 여행기록과 서양문물에 대한 소개, 그리고 개화사상의 전개 등 세 부분으로 나눠진다. 내용의 대부분은 세계지리와 서양문물의 소개지만, 그 행간 사이사이에는 개화사상을 관류시키고 있다. 따라서 그가 이 책을 쓴 목적은 근대화로의 전환을 촉진하기 위한 방편으로서 개화사상을 고취시키려는 데 있다. 그래서 비록 저자 자신은 이 책이 “영원히 전해지기를 바라고 쓴 것이 아니라, 일시적인 신문지의 대용품으로나 이바지하고자 한 것”이라고 겸허를 토하지만, 그것을 훨씬 넘어 개화사상의 ‘교본’이라는 높은 평가를 받기에 충분하다.
넓은 세계로 향한 이들의 우주관이나 세계관을 살펴보면, 모두가 새 것을 통째로 삼키는 것이 아니라, 비판적으로, 그리고 실정에 맞게 유익한 것만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공통점을 발견하게 된다. 다들 서양의 선진문물에 매료되어 그것을 적극 받아들이고 있지만, 동양적 전통사상에 의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한다. 유길준의 경우. 서양의 것을 너무 긍정하는 편향이 없지는 않지만, 그는 개화를 하는 데서 외국문화를 자국의 실정에 맞추어 수용하고 소화하여 자국의 우수한 문화도 계승해야 하고, 정치제도의 선택도 자유에 맡겨야 함을 지적하고 있으며, 국가평등주의를 특별히 강조하기도 한다. 그는 “나라 위에 나라가 없고, 나라 아래 나라가 없다”고 하면서 아무리 약소국의 군주라고 하더라도 강대국의 군주와 동등한 예를 주고받아야 하며, 강대국에서 파견된 사신이 약소국의 국왕과 대등한 행동을 하는 것은 잘못된 행위라고 비판한다.
주체적 지식혼 근대로 이어져
우리겨레의 역사에서 세계에 대한 앎을 추구하고 세계와 삶을 더불어하는 세계정신은 한국의 첫 세계인인 신라시대의 혜초로부터 발원된 후 고려시대의 온축기를 거쳐 조선시대에 와서 ‘세계화 서적’을 줄줄이 펴낸 지봉 이수광과 혜강 최한기, 구당 유길준으로 맥이 이어졌으며, 오늘은 또 수많은 새내기 ‘세계인’에 의해 더 알차게 영글어가고 있다. 이 세계정신이야말로 미래를 향한 우리 겨레의 비상을 가능케하는 정신적 자양분인 것이다.
(43) 조선의 ‘서학’ (西學) 수용
![]() | ![]() △ 조선 서학의 조사 이익(1681∼1763)의 초상.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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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일 동양 3국의 근대화는 이른바 ‘서학’의 수용과 밀접한 연관 속에서 진행되었다. 일반적으로 서학이란 서구 근대 문명을 수용하고 연구하는 학문적 활동을 일컬은 말이다. 그 내용은 크게 ‘이적(理的) 측면인 사상과 종교, ’기적(器的) 측면인 과학과 기술의 영역을 포괄하고 있으며, 명칭에서 한국과 중국은 서학으로, 일본은 ‘난학(蘭學)’으로 좀 다르게 부르고 있다. 조선 서학의 경우, 청나라를 통해 들어온 한화(漢化)된 구라파(유럽)문명이란 뜻에서 ‘청구(淸毆)문명’이라고도 한다. 큰 흐름에서 보면 서학은 동서간 교류로서 그 전파와 수용은 이질문명간의 성공적인 융합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17세기 ‘서세동점’ 문화 충격
동양 3국은 근대화와 서구 대응을 위한 방편으로서 서학을 수용한 점에서는 역사의 궤를 같이 했다. 하지만, 그들이 처한 역사적 환경이 각각 다르기 때문에 서학에 대한 수용태도, 서학이 3국 근대화에 미친 영향은 사뭇 다르다. 이런 현상은 한·일 양국의 서학 수용과정에서 극명하다. 흔히들 조선의 서학 수용을 일러 ‘동도서기(東道西器)’, 즉 전통적 제도와 사상은 지키면서 서구의 근대 과학기술을 받아들인다라고 하며, 일본의 난학 수용은 일본 정신 위에 서구의 유용한 것을 가져와 사용한다는 ‘화혼양재(和魂洋才)’로 표현한다. 중국의 경우는 중국 학문을 바탕으로 서구 학문을 받아들인다는 의미에서 ‘중체서용(中體西用)’이란 말을 쓴다. 용어는 달라도 뜻은 그것이 그것이다. ‘동도’나 ‘화혼’, ‘중체’는 ‘이적’ 측면을, ‘서기’나 ‘양재’, ‘서용’은 ‘기적’ 측면을 염두에 둔 낱말들이다. 여기에서 공통된 난제는 서학을 받아들이면서 어떻게 전통을 지키고 계승하는가 하는, 이를테면 전통과 근대의 조화문제다.
한·중·일 서학 수용태도 달라
![]() | ![]() △ 수원성 축조 때(1796) 정약용이 만든 기중기. |
이렇게 약 150년 간에 걸친 북경 사행을 통해 서서히 전래된 서구문명의 산물 가운데는 화포나 천리경, 자명종, 천문관측의기, 역산법 등 근대적인 과학기술 문물과 정보, 한역된 각종 세계지도와 지리서 같은 서학서가 포함되어 있었다. 새로운 과학문명의 도입은 기술을 일종의 ‘잡기(雜技)’로 깔보며 중화주의적 세계관에 젖어있던 조선 유교사회에 커다란 자극을 주었고, 급기야 근대 서구와 만남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 만남이 마침내 조선 후기 실학자들이 선도한 조선의 서학을 낳게한 것이다. 요컨대, 조선 서학은 일본과 같이 외래의 서구인들이나 국가권력의 개입 등 타율에 의한 것이 아니라 조선인들 자신의 자율적 노력에 의해 받아들였다.
18세기 조선선비 필독서로
![]() | ![]() △ 조선 서학의 거장 정약용(1762∼1836)의 동상. |
18세기 중엽에 이르면 조선에서 서학서는 선비들이 유불제가 경서처럼 서재에 꽂아놓고 읽는 필독서로 되고, 다산의 회고처럼 청년학도들이 서양서를 탐독하는 것이 하나의 ‘기풍’(氣風, 유행)일 정도로 서학은 널리 유포되고 있었다. 그만큼 서학 연구가 심도를 더해가면서, 서학에 대한 대응책도 전면 배격과 전면 수용, 그리고 ‘기적’ 측면만 수용하고 ‘이적’ 측면은 배격하는 이원적 대응 등 세 가지로 갈라졌다. 이러한 분파에 앞서 서학의 조사라고 하는 성호 이익(1681~1763년)은 서학의 과학기술 영역에 관해서는 다각적인 검토를 가해 그 선진성을 이해하고, 중화주의적 지리관으로부터의 탈피를 시도했다. 그러나 서학의 윤리종교 영역에 대해서는 기독교가 유교의 상제사상과 상통하는 점이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지옥설 같은 일련의 부조리를 잉태하고 있다고 하면서 배척했다.
서학의 개조격인 이익의 사상을 기조로 해서 학계에서는 대응을 놓고 논의가 분분했는데, 순암 안정복(1712~1791년)을 비롯한 배격파는 서학의 수용을 전면 거부하면서, 서학을 연구하되, 그것은 받아들이려는 것이 아니라, 전통적으로 바른 학문인 유학을 보위하기 위해서라고 주장한다. 이에 반해 다산 정약용(1762~1836년)을 비롯한 남인계 학자들은 서학의 ‘이적’ 측면이건 ‘기적’ 측면이건 간에 다 수용할 것을 설파한다. 다산은 서교(西敎), 즉 천주교에 입교했다가 정조의 명을 받고 스스로 멀리하겠다는 ‘자벽서’까지 지었지만, 바깥은 유교이고 속은 예수교라는 ‘외유내야(外儒內耶)’의 평을 받을 정도로 서교와의 인연은 끊지못했다. 그에게 더 중요한 것은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백성을 유복하게 만드는 이용후생을 위해 서학에서 실용적인 기예(技藝)인 과학기술을 탐구 터득하는 것이었다. 수원성 축조공사 때 거중기를 발명해 돈 4만 냥을 절약한 것은 그 본보기다.
서구 과학기술 도입 한목소리
![]() | ![]() △ 서학자 최한기가 만든 지구의. (19세기 후반, 보물 883호, 숭실대학교 부설 한국기독교박물관 소장) |
일본의 난학은 네덜란드어의 습득과 네덜란드 책의 독파로부터 막을 연 나가사키난학 시대를 거쳐 18세기 말엽에 에도난학 시대를 맞으면서 난학의 학문적 연구가 본격화된다. 소총을 비롯한 화기를 도입하면서 병학이 생겨나고, 총상의 치료를 위해 ‘홍모(紅毛: 화란)의학’이 도입되며, 각종 천문학 서적이 출간된다. 조선의 서학과는 달리 일본의 난학은 장장 2세기 반동안의 가혹한 쇄국정책에 묶여 그 속의 서양 종교는 구교건 신교건 간에 모두가 시종 엄금되어 일본에 발붙일 여지가 없었다. 오로지 과학기술의 수용만이 허용되었다. 물론 일본의 국가적 과학기술 일변도 정책이 명치유신으로 대변되는 근대화의 성공에 크게 이바지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가 없다.
엘리트 중심 수용 한계 드러나
![]() | ![]() △ 조선 최초의 근대적 과학자 홍대용이 만든 혼천의. |
(44) 넉넉하고 질박한 조선 자기
![]() | ![]() △ 넉넉하고 고고한 백자 달항아리 (높이 42.5cm, 18세기 전반, 개인 소장)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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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고도 교토에 있는 다이도쿠샤의 고호안이란 암자에는 일본의 일급 국보인 ‘기자에몬 이도’라는 다구 한 점이 다섯 겹의 상자 속에 꼼꼼히 비장되어 있다. 그것을 한번 친견하는 데는 우리돈으로 300만원(2000년 현재)이 든다고 한다. 알고보면, 놀랍게도 이 일본의 ‘대명물’은 우리나라 경상도 해안지대에서 서민들이 만들어 새 것일 때는 밥그릇으로 쓰다가 허름해지면 막걸리 잔으로나 굴리다가 아무데나 내버린 막사발이다. 막사발이란 말 그대로 흙을 뭉텅 떼어서 대충 빚어 유약통에 텀벙 담갔다가 그냥 꺼내 말린 사발이다. 손으로 마구 빚다보니 문양도 별로 없고 색조도 누르스름하며 기형도 엉성하다.
일본 건너간 ‘막사발’ 국보 대접
![]() | ![]() △ 조선백자의 최고 명품 중의 하나인 백자철화 포도무늬 항아리 (높이 53.8cm, 18세기 전반, 이화여대박물관 소장) |
도공 창의성 물씬한 ‘분청사기’
![]() | ![]() △ 일본의 일급 국보로 지정된 막사발 ‘기자에몬 이도 다완’ (입지름 15.5cm, 16세기, 일본 교토 다이도쿠샤 고호안 소장) |
각지에 흩어졌던 도공들이 다시 모여 청자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제작여건이 고려청자 때처럼 국가가 지원해 주는 것이 아니어서 소재나 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특히 빛깔이 푸른빛이 아니라 회색이나 누런색이다 보니 청자맛이 통 나지 않는다. 이런 칙칙한 빛깔을 감싸기 위해 상감할 때 쓰던 백토로 하얗게 분장을 한다. 흡사 늙은이가 젊어보이려고 얼굴에 분을 두껍게 칠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 ‘분장회청사기(粉粧灰靑沙器)’인데, 줄여서 분청사기라고 한다. 이렇게 분청사기는 고려시대의 상감청자가 퇴화하면서 생긴 자기로서 중국을 포함해 그 어디에도 없는 우리만의 독창적 자기다.
분청사기는 관요가 아니라 민간요에서 구워내는 자기로서 그 형태나 기법이 다양해 자유로운 분위기가 가득한 것이 특색이다. 이것은 세계공예사상 매우 드문 일이다. 공예는 대체로 유한층의 수요나 취미의 산물로서 발달하나 분청사기만은 각 지방의 도공들이 제나름대로 개발한 방식에 따라 창의적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이를테면 조형의 자유를 만끽한 현대적 좌표로서의 서민공예인 셈이다. 20세기 도자공예의 거장이라고 하는 영국의 버나드 리치는 미국의 유명한 알프레드 도자학교에서 연설하면서 현대도예가 나아갈 길은 조선시대의 분청사기가 이미 다 제시했는 바, 우리는 그것을 목표로 해서 나아가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저서 <동서를 넘어서>에서도 이러한 주장을 펴고 있다. 한국 도자기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었던 그는 1936년 덕수궁에서 개인전을 열기까지 했다.
어진 선맛·따뜻한 정감 ‘백자’
![]() | ![]() △ 천하의 명품이라고 하는 백자청화 망우대명 잔받침 (입지름 16cm, 16세기, 개인 소장) |
조선백자는 시기별로 특색을 보이면서 우아한 자기변신을 거듭해왔다. 비록 얼마간 중국 청화백자 기법의 영향을 받기는 했으나, 빛깔이나 조형에서 중국의 것을 훨씬 능가하는 조선식 세련미를 보이면서 발달했다. 천하의 명품이라고 하는 ‘백자청화 망우대(忘憂臺)명 잔받침’(16세기)은 청초한 들국화와 벌 한 마리가 서정적으로 그려져 있고, 잔이 놓인 한가운데에는 ‘망우대’라는 글씨가 쓰여있다. 이 받침대에 올려놓은 술잔을 드는 순간 ‘근심을 잊어버리는 받침대’라는 글귀를 읽게 되니, 얼마나 풍류가 흐르는 멋진 구도인가. 조선백자의 기발함을 말해주는 예로 ‘백자 달항아리’(높이 42.5cm, 18세기 전반)를 들 수 있다. 원래 수동식 물레로는 큰 항아리를 만들어낼 수가 없다. 중국이나 일본, 유럽의 도자기 중에는 조선의 달항아리만큼이나 큰 항아리가 없다. 조선의 도공들은 커다란 대접 두 개를 서로 잇대어 둥그스름한 큰 그릇을 만들어냈다. 그릇 가운데에 이은 자국선이 있는데, 그 선은 컴퍼스로 돌린 딱딱한 기하학적 원이 아니라 자연스러우면서도 넉넉한 둥근 자국이다. 때로는 기우뚱한 것도 있지만, 도공들은 그것마저도 아름다움으로 승화시켰던 것이다. 너그러움의 형태미와 어진 선맛, 따뜻한 흰색에서 오는 정감이 한데 어우러져 있다. 그래서 누군가는 이 항아리를 보면 부잣집 맛며느리를 보는 것처럼 넉넉함을 느낀다고 했다.
‘쇄국정책’ 탓 교류는 부진
![]() | ![]() △ 분청사기 선각 물고기무늬 편병 (높이 25.6cm, 15세기, 호암미술관 소장) |
우리나라는 9세기부터 17세기까지는 중국과 더불어 세계도자문화를 주도해나갔다. 그러다가 우리의 도자문화를 본딴 일본이 이 세계적 도자의 흐름에 합류하고 18세기에는 유럽이 다시 끼어들면서 도자의 세계화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 주역은 여전히 동양이며, 그 한복판에 조선이 서있었다. 그렇지만 돌이켜보면, 도자사에서 중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일본보다는 앞서간 우리의 도자문화가 교류를 바탕으로 한 세계화에서 성가에 걸맞지 않은 부진을 보인 것도 사실이다. 이는 실로 역사의 아이러니다. 그러한 부진의 주원인은 상업(교역)을 경시하는 유교양반문화와 쇄국정책의 폐단에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세계도자문화에 대한 전통 도자문화의 기여를 무시하거나 과소평가해서는 안될 것이다. 왜냐하면 적어도 이웃 일본을 통한 간접적 기여는 확연하기 때문이다.
일본은 임진왜란(1592년) 전까지만 해도 고작 도기나 제작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으며, 그 주산지는 세토를 비롯한 본토 혼슈섬이었다. 그러다가 ‘도자기 전쟁’이라고까지 일컬어지는 임진왜란을 계기로 조선도공들이 끌려간 뒤 일본의 도자기중심은 한반도에 가까운 구슈 지역으로 옯겨졌으며, 그 수준은 도기에서 자기로 일약 뛰어올라 판도가 완전히 바뀌었다.
조선인 손끝 일본백자 ‘제작붐’
일본에 끌려간 아리타 지역의 이삼평가와 사쓰마 지역의 심수관가 등 6대 조선 도공가문에 의해 일본에서 처음으로 한때 유럽 도자기시장을 석권하다시피 한 아리타야키와 사쓰마야키 같은 일본백자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조선 도공들에 의해 일본백자 제작붐이 한창 일어나고 있을 때, 도자기 종주국 중국은 명·청 교체기의 전란에 휩싸여 도자기 수출을 중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사실을 일본에 귀띔해준 사람들이 바로 일본을 드나들던 네덜란드 상인들이다. 호기에 눈이 번뜩 뜨인 일본인들은 도자기 생산을 가속화해 유럽시장에 전격 진출했고, 19세기 드디어 유럽에서 자포니즘(일본풍)의 돌풍을 일으켰다.
우리는 이렇게 우수한 도자문화의 전통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한때 뒤처졌던 사람들마저도 해온 일들을 미처 따라잡지 못했다. 우리만의 울타리 안에서 맴돌다가 우리 도자문화를 보편화, 세계화시키지 못한 탓이다. 단언컨대, 자포니즘 도자기의 어디엔가는 조선백자의 흔적이 묻어있을 것이다. 다만, 우리 연구가 미흡하다보니 발견하지 못했을 따름이다. 그것을 발견했을 때, 우리는 감히 세계에 대고 우리의 도자문화가 유럽에 영향을 미쳤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자신을 세계사적 지평에 올려놓고 우리가 가졌던 것과 갖지못했던 것을 반듯하게 가려내면서 이어가야 할 것은 또한 무엇인가를 깊이 자각해야 할 것이다.
(15) ‘서양인이 본 조선’ 에 대한 기록들
![]() | ![]() △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의 저자인 영국의 여성 여행가 비숍. 남장한 모습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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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막 속의 조선’ 이해하거나 오해하거나
남들과 어우러 사는 세상에서 서로 알게 됨은 그 어우름의 전제다. 일찍이 조선시대에 서세동점의 거센 흐름을 타고 우리 곁에 다가온 서양인들은 의도야 어떻든 간에 우리와의 어우러진 삶을 위해 저들의 눈으로 우리를 보고, 저들의 사고로 우리를 이해하려고 했다. 그래서 그들 나름대로 보고 이해한 것을 적어놓은 기록들이 남아 있다. 그 중에는 우리의 좋은 것을 북돋아주고 모자람을 타일러주는 것이 있는가 하면, 어거지나 왜곡 같은 것들이 있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모두가 ‘자기 성찰’의 거울이 된다.
19세기 후반 닫힌 문 열리다
서양인들이 조선에 관해 쓴 최초의 글은 일본에서 선교활동을 하다가 임진왜란 때 왜군을 따라 남해안의 웅천항(熊川港)에 들어와 포교를 시도하다가 되돌아간 스페인 선교사 세스뻬데스가 현지에서 보낸 네 통의 서간문이 실린 <선교사들의 이야기>(1601년)란 책이다. 그뒤 제주도에 표착해 13년간 억류되었다가 구사일생으로 탈출한 네덜란드의 하멜이 일명 <하멜 표류기>(1668년)란 견문기를 써내 조선을 서양에 알렸다. 그러나 조선이 서양을 엄격하게 경원한 것은 서양인들이 조선에 함부로 범접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하멜 이후 한 세기 남짓한 동안 서양인들은 조선 근방에 얼씬도 하지 못한다. 그러다보니 그들은 중국이나 일본에 관해 쓴 책 속에서 가끔 어깨너머로나 바라본 조선에 관해 몇 토막씩 언급하곤 했다. 이러한 부분서가 19세기 중엽까지 250여년 동안 고작 여남은 책 나왔다.
그러나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닫혔던 문이 열리게 되자 ‘은자의 나라’ 조선에 대한 서양의 관심과 연구는 폭발적으로 급증하며, 이에 수반해 조선에 관한 서양 서적의 출간도 일시에 몇 배로 도약한다. 이 기간에 ,<하멜의 표류기>와 함께 조선 관련 3대 역작이라고 하는 달레의 <조선교회사 서론>(1874년)과 그리피스의 <은자의 나라 한국>(1882년)이 각각 출간된다. 그후 조선에 대한 국제적 관심이 더욱 높아짐에 따라 한국 전반에 관한 각종 서적의 출간은 계속 상승 일로를 걷고 있다. 1920년대를 고비로 17세기 초부터 1940년대 말까지 약 350년 동안에 나온 한국 관련 서양 서적은 약 400종(전서와 부분서)으로 추산된다.
‘비옥한 땅’ 쓸 줄은 모르니…
서양인들이 남겨놓은 이 모든 기록 속에서 우리는 근대와 선진을 자처하던 그들이 조선을 과연 어떻게 보고 이해하였는가를 읽을 수가 있다. 각계각층 사람들이 각이한 수요와 인식을 반영해 정치·경제·문화·사회 등 여러 분야에 걸쳐 나름대로의 이해를 토로했기 때문에 내용이 방대함은 물론, 시각이나 지적 수준도 천차만별이다.
19세기 후반까지만 해도 서양인들의 조선에 관한 지식은 어이없을 정도로 일천했다. 조선을 네 차례나 방문하고 나서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1897년)이란 책을 쓴 영국의 여류 여행가이자 지리학자인 비숍이 조선으로 떠날 때 사람들은 ‘코레아’가 적도나 지중해, 흑해의 어드메에 있다고들 했다. 그런가 하면 그 무렵 조선에는 꼬리가 3피트나 되는 닭, 우수한 모피와 종이, 아름다운 도자기, 인삼이라는 영약, 풍부한 해산물이 있다는 소문이 미국사람들 귀에 들어갔다. 또한 옷을 장식할 정도로 금이 흔하고, 묘에는 호화로운 부장품을 함께 묻는다는 소문도 파다했다. 모두가 서구인들의 귀를 쫑긋하게 만들었다. 이렇듯 비몽사몽간에 ‘안개 속의 땅’ 조선에 들어선 서양인들의 눈에는 조선이 그야말로 낯설고 신비로웠다.
![]() | ![]() △ 조선주재 각국 외교관들 (오른쪽에서 네 번째가 미국 전권공사인 앨런) |
조선의 자연환경에 대한 서양인들의 이미지는 대체로 긍정적이다. 기후는 온화하고 토지는 비옥하여 농업에 유리하고, 유용한 수산자원이나 관광자원은 풍부하다. 그러나 제대로 개발하여 활용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 그들의 일치한 평가다. “한국은 가난한 국가가 아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한국국민의 잠재된 에너지는 거의 사용되고 있지 않다”는 것이 비숍의 지적이다.
당쟁·부패에 대한 신랄한 일침
모두가 서구의 근대정치에 훈육된 내방자들이라서 조선의 전근대적 정치행태에 대해서는 신랄한 일침을 놓는다. 가장 큰 병폐로는 지배층의 학정과 무능을 들고 있다. 헤이그의 만국평화회의 때 고종의 밀사로 파견된 바 있는 <대한제국멸망사>(1906년) 의 저자 헐버트는 지배층 내에서의 관직매매와 횡령 등 부패와 타락이야말로 한국인의 뛰어난 능력과 발전 잠재력의 발현을 가로막는 최대의 장애물이라고 못박는다. 영국의 대표적 일간지인 <타임즈>(1897.9.17.)도 조선의 “양반들은 개혁을 부패나 직권남용 같은 자신들의 공인된 권리의 상실”로, “자신들의 삶의 양식을 빼앗아가는 악”으로 간주한다고 논평한다. 100여년 전 서양인들의 벽안에 굴절 없이 반사된 조선 정치의 참상은 오늘의 우리에게 경종으로 들려온다. 나약한 조선의 지배층은 외세에 대한 대항도 너무나 소극적이고 허무맹랑했다. 서양인들은 배에서 바라본 조선의 해안풍경이 너무나도 황량해 도무지 올라가 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고 회고한다. 그것은 왜구와 서양 오랑캐의 욕심을 불러일으키지 않기 위해 해안을 황폐화시키고 섬에서 주민들을 철수시키는 이른바 공도(空島)정책을 폈기 때문이다. 금이 서구인들이 탐내는 대상이라고 해서 금 채굴을 아예 법으로 금한 것도 그 일례다.
우리는 흔히 이른바 당쟁을 조선을 이그러지게 한 2대 병폐의 하나로 꼽으면서 마치 조선만의 것으로 간주해 왔다. 그러나 이에 대한 <은둔의 나라 한국>(1882년)의 저자 그리피스의 평가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는 당쟁에 해악이 있다면, 그것은 원초적으로 정치라는 행태에서 빚어지는 것이지, 결코 조선의 정치에서만이 유별나게 나타나는 현상은 아니라고 설명한다. 오히려 반역과 패륜이 난무하는 서구의 정치사에 비하면 조선의 당쟁은 그래도 나름의 도덕성과 게임 율이 있다고 판단한다. 조선인이나 조선조의 체질에서 당쟁은 불가피하다는 자해적 식민사관을 자성케 하는 대목이다.
조선인들의 성정(性情)이나 생활관습은 언제 어디서나 이방에서 온 서양인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조선인들의 건전한 도덕과 따뜻한 인정은 서양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음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한반도를 8녀간 12번이나 여행하고 <한영대사전>을 편찬해 우리나라 영어교육에 큰 족적을 남긴 캐나다 출신의 선교사 게일은 저서 <전환기의 조선>(1909년)에서 한국인은 정직해서 신뢰할 수 있고, 신용을 중시하며 문서가 아니라 구두로 한 약속도 철저히 지키는 등 서양인보다 더 휼륭하다는 호평을 내린다. 다블뤼는 저서 <조선사 입문을 위한 노트>(1860년)에서 조선인들의 상부상조 정신에 크게 감동하면서, 서구인들의 ‘근대적 이기주의에 대해 증오와 가증스러움’을 느낀다고 자괴의 심정을 털어놓는다. 그런가하면 두 번이나 조선을 찾은 영국의 화가 새비지-랜도어나 헐버트 같은 이들은 조선인들의 교육열과 언어습득 능력은 중국인이나 일본인들을 뛰어넘는다면서, ‘말귀를 알아듣는 총명함’이나 ‘신속한 이해력과 추론력’에 대한 놀라움도 서슴지 않는다.
![]() | ![]() △ 조선주재 초대 미국 전권공사인 푸트의 부인이 궁중에서 나들이하는 모습 |
정직하지만 게으른 민족?
그런가하면 조선인들의 성정이나 관습에 배여있는 부정적 측면에 대해서도 가차없는 지적과 질타를 가하고 있다. 개중에는 터무니없는 왜곡이나 비하도 있다. 그들이 자주 제시하는 조선인들의 부정적 이미지는 나태와 무기력, 불결과 사치 따위다. 이것 말고도 까다로움이나 탐욕, 수다스러움, 폭식과 폭음, 느슨한 시간과 수량 개념을 흠으로 잡는 이들도 있다.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친구로서 그의 한국관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 케난은 저서 <나태한 나라 한국>(1905년)에서 조선인을 나태하고 무기력하며, 몸도 옷도 불결하고 아둔하며, 매우 무식하고 선천적으로 게으른 민족이라고 악평을 늘어놓는다. 그러나 헐버트 같은 이는 케난 류의 악평은 식객노릇이나 하면서 서울거리를 배회하는 건달들에나 한한 말일 뿐, 그런 계층은 서구에도 얼마든지 있다고 통박한다. 당초 게으름을 조선인의 기질로 여겨오던 비숍은 러시아나 만주에 이주한 조선인들의 근면하고 번영하는 모습을 보고나서는 자신의 오판을 후회하면서 조선사람은 ‘밖에 나가면 더 잘 사는 민족’이라는 체험적 결론을 내린다.
쓰거나 달거나 새겨들어야
서구인들이 조선에 와서 가장 연민을 느낀 것은 여성들의 삶이다. 이런 삶을 가장 적나라고 세심하게 묘사한 사람은 같은 여성 신분인 비숍이다. 사회적 멸시와 남존여비에서 오는 비애와 절망, 힘든 노동, 병, 사랑 부족, 은둔 등이 그를 자극한 조선 여성상이다. 남자들의 방탕한 외도와 축첩을 놓고 조선사람들에게는 ‘집(하우스)은 있으나 가정(홈)은 없으며’, 조선의 딸들은 ‘아버지에 손에 처형되며 아내는 남편한테 살해당한다’는 끔직한 표현마저도 그는 마다하지 않는다.
조선에 대한 서양인들의 이해나 이미지는 서로가 이토록 다르다. 이러한 편차는 근원적으로 보면, 동양에 대한 서양의 지배주의적, 우월주의적 사고방식인 오리엔탈리즘의 인식지평에서든가, 아니면 남을 있는 그대로 발견하고 이해하려는 타자론(他者論)의 인식지평에서 조선을 바라보는 근본입장의 다름에서 비롯된다. 여기에 더해 그들의 조선 체류기간이나 체험의 심도, 그리고 정보수집 대상과 경로의 차이도 그러한 편차를 낳게한 객관적 요인으로 작용한다.
서양인들이 본 조선을 떠올리노라면 비분강개하고 애상이나 회한에 젖기도 하지만, 그럴수록 그것을 피하지 말고 되돌아봐야 한다. 왜냐하면 공자가 말하듯이 “어디로 가야 할지 알고 싶거든 어디서 왔는지 되돌아봐야” 하기 때문이다.
(46) 동서 문명 교역로 실크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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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이음길’ 의 끝은 한반도였다
겨레의 5천년 문명사를 되돌아보면, 어느 순간도 세계와 동떨어져 살아본 적이 없다. 늘 남들과의 어울림 속에서 무엇인가를 서로 주고받으면서 살아왔다. 예나 지금이나 그 주고받음은 공간적 매체인 길을 통해 가능하다. 문명사에서는 문명을 소통시키는 길을 통틀어 실크로드라고 한다. 실크로드를 제쳐놓고 문명의 교류나 세계성을 논할 수 없다. 요컨대, 실크로드는 문명의 유대이고 세계로 가는 이음길이다. 그런데 이 본연의 유대와 이음길이 무시당해 왔으니 실로 개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비단길의 동단은 중국?
지금까지의 통설로는 실크로드를 유럽으로부터 중국까지의 길로 한정시켜 왔다. 즉 실크로드의 3대 간선인 초원로와 오아시스 육로 및 해로는 각기 유럽에서 시발해 중국의 화북(초원로)과 장안(현 시안, 육로), 동남해안(해로)에서 멎었다는 것이다. 이 서구문명 중심주의적 발상대로라면 우리는 실크로드와 무관하며, 따라서 문명교류에서 버림받은 ‘기아’가 되고 만다. 한때나마 우리가 ‘주변문명’의 찬밥신세를 강요당하던 울분이 치밀어 오르는 대목이다. 그 울분을 삭이는 길은 한반도까지 뻗은 실크로드를 원상 복원하는 것이다.
문제의 요체는 중국까지 이르렀다고 하는 실크로드의 3대 간선이 원래부터 한반도까지 이어졌다는 사실을 밝혀 자고로 한반도가 실크로드의 동단이라는 위상을 확인하는 일이다. 그러자면 우선 오아시스 육로의 한반도 연장을 고증해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한반도와 중국간의 육로 연결이다. 고조선시대 한·중간의 육로 교통에 관한 문헌기록은 남아있는 것이 거의 없어서 출토유물의 분포대를 잇는 방법으로 당시의 육로를 추정해 볼 수밖에 없다. 그 대표적인 유물이 바로 중국 전국시대의 연(燕)나라 화폐인 명도전(明刀錢)이다. 그간 명도전은 연나라의 강역이던 중국 하북성은 물론, 고조선 영역이던 랴오닝성과 한반도의 북부지대에서 다량으로 발굴되었다. 화폐로서의 명도전은 틀림없이 교역수단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며, 그 출토지는 교역장소였을 것이다. 아울러 이러한 교역장소들은 교통로에 의해 서로 연결되었을 것이다. 명도전의 출토지들을 연결해 보면, 연나라의 도읍 계(현 북경 서남쪽 대흥현)ㅡ승덕(허베이성)ㅡ요동반도 연안ㅡ통구(압록강 중류)ㅡ동황성(현 강계)ㅡ영변(청천강 상류)ㅡ영원(대동강 상류)ㅡ평양으로 이어지는 길로서, 일단 ‘명도전로’로 불러 본다.
한반도 연장로 복원해야
고조선시대를 이어 3국 시대에는 한반도 북반부와 중국 동북의 태반 지역을 영유하고 있던 고구려가 중국과의 육로를 독점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고구려와 연나라의 새 수도 용성(龍城), 즉 영주(營州: 현 조양) 사이에 전개되었던 남북 전쟁로 두 길을 전하고 있다. 이 두 길은 중국 남북조와 수·당 시대에 이르기까지 줄곧 이용되어 왔다. 이 두 길의 노정을 종합해 보면, 북도는 평양ㅡ동황성ㅡ통구ㅡ심주(심양)ㅡ통정진(신민현)ㅡ회원진ㅡ여주(북진)ㅡ연주(의현)ㅡ영주로 이어지는 길이고, 남도는 평양ㅡ동황성ㅡ통구ㅡ요동(요양)ㅡ광주(요중)ㅡ양어무ㅡ여주ㅡ연주ㅡ영주까지 통하는 길이다. 이 남도는 영주까지는 대체로 앞에 언급한 고조선시대의 명도전로와 노정이 일치한다. 다같이 시발은 평양이고 동황성에서 압록강을 건너 통구로부터 서남행으로 요동반도를 지나 남도는 영주에, 명도전로는 영주 이서에 있는 승덕(承德)에 이른다. 이 남북도 중에서 역대로 남도가 주로이며, 그 길이(평양ㅡ영주)는 약 1,700리로 추산된다.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러서는 육로가 수도 금성(현 경주)에서 출발해 한주(漢州:현 서울)를 거쳐 평양에서 앞의 2도와 연결된다.
한반도를 동단으로 하는 실크로드 오아시스 육로는 영주에서 서남 방향으로 유주(幽州: 현 북경)를 거쳐 서도, 중도, 동도의 세 갈래 길로 남행해 낙양에 이른 다음 장안으로 서행한다. 구간별 거리를 합산하면, 실크로드 오아시스 육로의 동단 금성에서 그 서단 로마까지의 거리는 약 3만6840리(약 14,750km)로 추산된다. 하루 100리를 걷는다면, 꼭 1년이 걸려야 이 긴 여정을 주파할 수가 있다.
실크로드의 한반도 연장선상에서 다음으로 제기되는 것은 중국 동남해안과의 해로 이음이다. 고대 한·중 해로는 조선술과 항해술의 발달, 그리고 양국의 변화무쌍한 정세와 상호관계의 변화에 따라 물길과 기능을 달리하면서 실크로드 해로의 동단 역할을 수행해 왔다. 자고로 두 나라의 해안을 이어주는 해로는 크게 연해로(우회로)와 횡단로(직항로)의 두 갈래가 있었다. 연해로에는 한반도 서남해 연안에서 출항해 중국 요동반도 남안을 따라 서진하다가 노철산에서 발해만을 지나 산동반도에 이르는 북방 연해로와, 거기서 계속 남하해 양자강 하구를 중심으로 한 중국 동남해안으로 이어지는 남방 연해로가 있었다. 일찍이 은나라 때부터 이 연해로를 이용한 흔적이 나타나고 있으며, 제나라의 공자는 뗏목을 타고 바다를 건너 현자들이 사는 동이(고조선)에 가서 살고 싶어했다고 전해진다. 진시황 때 불로초를 구하려 떠난 도사 서복(徐福) 선단도 이 연해로를 따라 제주도까지 왔으며, 한무제는 7천명 수군을 이 해로에 투입시켜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을 공격한 바 있다. 수·당대 몇 차례의 고구려 정벌에 참여한 수군의 도항로도 바로 이 연해로였다.
3국시대 말엽에 이르러 풍랑과 장기 항해를 감당할 수 있는 조선술과 항해술이 발달함에 따라 한반도 서해안과 중국 동남해안을 직접 연결하는 횡단로가 개척되었다. 이 뱃길도 두 갈래인데, 하나는 경기도 덕물도를 비롯한 한반도 서해안에서 산동반도 해안으로 직항하는 북방 횡단로다. 이 길은 고구려에 의해 북방을 통하는 연해로가 막혀버리자 백제가 북위를 비롯한 중국 북방 제국과 통교하기 위해 처음 개척했으며, 뒤를 이어 신라도 이 길을 이용했다. 그러나 고구려의 방해로 이용이 여의치는 않았다.
서역행 육로의 용지, 영주
횡단로의 다른 한 갈래는 북방 해역보다 더 넓고 풍랑도 더 사나운 남방 해역을 넘나드는 남방 횡단로다. 이 뱃길은 뒤늦게 트여 통일신라시대 이후에야 본격적으로 가동되었다. 그러나 모험을 동반한 시험항행은 일찍부터 있어 왔다. 372년 백제 근초고왕은 이 남방 횡단로로 사신을 동진에 파견했으며, 100여 년 후에는 가락국 겸지왕도 이 길로 사신을 남제에 보냈다. 사서에 보면, 당시 백제나 일본에서 출발한 배들이 이 험난한 바닷길에 들어섰다가 조난 당해 실종되거나 제주도 등지에 표착한 기사들이 여러 건 눈에 띤다. 그러다가 당나라 중기 이후에야 비교적 안전하게 이 뱃길을 이용하게 된다. 항해자들은 주로 이른바 항신풍(恒信風:계절풍)을 이용하는데, 당에서는 6~7월에 서풍을, 일본에서는 8~9월에 동북풍을 타고 출항한다. 대부분의 신라승들이 당으로부터 환국한 시기가 7월이었다는 사실은 그들이 탄 배가 바로 이 항신풍을 이용했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한반도 남해안에 위치한 무주나 나주, 전주, 강주, 그리고 중국 동남해안에 자리한 명주(현 영파)나 항주, 천주는 이 남방 횡단로의 쌍방 종착항들이었다. 고려 초(1123년) 송나라 사신을 수행한 서긍(徐兢)이 남긴 견문록 <선화봉사고려도기>에 따르면, 명주에서 예성강까지 항해하는 데는 26일이 걸렸으며, 그 중 정해(定海)에서 흑산도까지의 직항에는 9일이 걸렸다고 한다.
한·중간에 개척된 연해로와 횡단로를 따라 두 나라간에 사신과 승려들이 오가고, 물품이 교역되었으며, 문화 교류가 이뤄졌다. 뿐만 아니라, 서역과 남방의 문물이 이 두 바닷길을 통해 한반도에 유입되었으며, 이웃인 일본은 이 길을 거쳐서야 중국과 통교할 수가 있었다. 이러한 제반 사실은 이 바닷길이야말로 한·중 두 나라간의 교류통로였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명실상부한 실크로드 해로 동단으로서의 기능과 역할도 수행하였음을 실증해준다.
연해·직항로로 나뉜 바닷길
이제 세계로 가는 이음길을 밝히는 데서 남은 과제는 북방의 초원로를 원상대로 한반도에 이어주는 일이다. 스키타이와 흉노를 비롯한 북방 유목기마민족 문화의 영향이 역력하며, 초원지대로 사신을 파견하는 등의 내왕도 있었던 사실로 미루어 한반도가 일찍부터 그들과 교류하였음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 교류의 통로가 바로 초원로다. 그러나 관련 기록이나 유물이 별로 없는 데다 연구마저 일천해 우리는 아직 이 길을 제대로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가까스로 중국쪽 사서에서 그 해결의 단서를 찾아보게 된다.
‘세계속의 한국’ 위상찾기
고구려와 그 뒤를 이은 발해의 서변 출구인 영주는 서역행 육로의 요지일 뿐만 아니라, 여기로부터 화북과 몽골로 이어지는 초원로가 시작되는 기점이기도 하다. 이 점에 유의하면서 관련 기록을 참조하면, 초원로는 다음과 같은 두 갈래의 길로 한반도와 연결되고 있었다. 그 한 길은 영주ㅡ평성로다. <위서>에는 북위의 도무제로부터 태무제에 이르는 45년간 수도 평성(平城:현 산시성 대동)에서 화룡(和龍:영주)까지 7차례에 걸친 왕의 순유나 동정에 관한 기록과 더불어 그 노정이 제시되어 있다. 이 길은 평성에서 유주와 몽골의 오르혼강을 남북으로 잇는 실크로드 5대 지선의 하나인 마역로(馬易路)와 합쳐 북방 몽골초원을 관통하는 초원로로 이어진다. 다른 한 길은 영주ㅡ실위로다. <구당서>에 따르면, 영주에서 서북행으로 실위(室韋)국의 구륜박(현 호륜지)에 이르는 이 초원로는 몽골의 동부 초원로에 연결된다. 이렇게 영주로부터 이어져 간 두 초원로는 실크로드 초원로의 동단으로서 고대 한반도와 북방 유목 기마민족간의 교류통로였다.
이렇게 세계로 가는 이음길이자 문명교류의 통로인 실크로드 3대 간선의 한반도 연장로를 재현하는 것은 단순히 묻혀버렸던 옛길을 파헤치는 작업이 아니라, ‘세계 속의 한국’이란 겨레의 위상을 되찾는 일대 역사다. 우리 스스로가 이 역사를 감당해낼 때, 한반도는 실크로드 전도의 동단에 당당히 자리매김될 것이다.
(47) 긴 여정을 마치며
![]() | ![]() △ 각종 교류상과 생활상을 보여주는 고구려 무용총 현실 천장 벽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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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속의 한국 ‘어제’ 에게 ‘내일’ 을 묻다
타문명과 끊임없이 소통하며 걸어온 길
때로는 세계에 앞장서고 때로는 뒤좇다
지금, 한국의 위상은 어디에 와 있는가
‘문명교류기행’의 장도에 오른지 꼭 1년이 된다. 그간 겨레의 기나긴 문명교류 여정을 대강 되돌아 봤다. 그 여정은 우리 역사를 세계와 고립시켜 통시적으로만 보았던 구태를 벗어나 세계와 연관시켜 공시적으로 눈 높이를 맞추어 본 현장이었다. 세계 속에서 한국의 위상, 그것이 바로 한국의 세계성이다. 이러한 세계성은 교류를 통해 세계와 보편적 가치를 공유함으로써 실현 가능했다는 것을 ‘문명교류기행’은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우리 역사의 세계성을 담보한 보편적 가치의 공유, 즉 보편성은 우선, 일찍부터 우리가 세계와 문명간의 유대로 묶여 살아왔다는 데서 나타난다. 선사시대 우리 즐문토기는 북방 유라시아 초원지대를 동서 관통한 즐문토기 문화대의 동쪽 끝을 장식했다. 실제로 이땅은 세계 거석유물 5만 5천여 기 가운데 4만기의 고인돌(지석) 유물을 보유하고 있어 동아시아 고인돌 문화권의 핵심이자 세계 거석 문화대의 중추로 자리매김 되었다. 6세기께까지 알타이 지방을 중심으로 약 1천년 동안 전개된 황금문화권에서 이 땅은 황금문화의 꽃이라는 금관의 나라로서 단연 전성을 구가했다. 4세기 불교가 전해진 이래 복합문화인 불교문화는 장기간 전통문화의 주류를 이어왔고 오늘날도 그 문화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수천년간 유지되어 온 벼 문화는 우리에게 각별한 의미가 있다. 충북 소로리에서 발견된 볍씨 중에서 가장 오래된 1만 3천여 년 전 볍씨(‘소로리카’)가 발견되어 5대주 110 여 개 나라를 망라한 벼 문화권에서 한반도가 그 원조일 개연성을 짙게 시사하고 있다. 그리고 문명교류의 통로이며 세계로의 이음길인 실크로드 3대 간선이 한반도로 뻗음으로써 이 모든 문명적 유대는 끈끈히 이어져 올 수 있었다.
우리역사의 보편성은 이러한 문명유대와 더불어 다른 문명을 적극 수용한데서도 나타난다. 겨레는 선진문명에 대한 수용성이 남달리 강했다. 신라는 전통문화 바탕 위에서 북방·남방 문화, 멀리 로마를 비롯한 서역 문화까지도 받아들여 유례를 찾기 드문 다원적 복합문화를 일궈냈다. 신라를 일컬어 ‘로마 문화의 왕국’이니, 동아시아의 ‘유리 보고’니 하는 찬탄어린 지칭은 신라 문화 특유의 수용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는 고유의 온돌문화에 당과 말갈의 다른 무덤 양식을 받아들였는가 하면 삼존불 협시보살의 목에 십자가를 거는 식의 독특한 복합문화를 창출했다. 고려 문화의 금자탑이라는 ‘팔만대장경’은 이웃 나라들의 판본을 죄다 가져다 꼼꼼히 검토하고 보완하여 결국 20여 종의 대장경 가운데서 5,200여 만 자로 씌어진 가장 방대하고 완벽한 ‘팔만대장경’을 완성해 불교 경전을 집대성했다. 서양종교를 타율적 선교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율적으로 수용한 나라는 오로지 조선뿐이란 사실또한 이런 수용적 자세를 말해준다.
![]() | ![]() △ 경주 보문동 부부총에서 출토된 금귀걸이. |
나라의 세계성은 보편적 가치의 공유, 즉 보편성에서만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독창적인 가치의 창출, 즉 개별성에 의해서도 보장된다. 사실 모든 보편성은 교류를 통한 개별성의 승화다. 개별성을 떠난 보편성이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고 한다. 이것은 부실한 사변이 아니라 역사적 경험의 응축이다. 이 점에서 우리문화의 창의성을 자랑할 수 있다. 우선, 우리만의 고유한 문화가 있다. 전통 문화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신화에서부터 그 고유성이 감지된다. 예컨대, 고구려와 로마의 건국신화를 비교해 보면, 고구려 신화의 이념적 지향점은 조화와 상생, 합일에 맞춰졌으나, 로마는 갈등과 상극, 분열에만 두고 있으며, 신화소(神話素)나 그 짜임새에서도 차이를 보이고 있다. 세계 도자사를 빛낸 고려의 청자나 조선의 분청사기와 백자는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독창성을 지녔다. 청자장인들은 형언할 수 없는 영롱한 빛깔에다가 누구도 엄두를 내지못한 상감기법을 도입해 특유의 상감청자를 만들어냈다. 조선의 분청사기는 그 다양성과 질박함으로 말미암아 현대도예의 나아갈 길을 밝혔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조선의 백자는 색조나 모양새, 크기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고고한 학문세계에서도 조선시대 성리학자인 최한기는 자신이 개창한 기철학에 바탕해 독창적인 ‘조선식 우주론’을 제시했으며, 그 이론으로 뉴턴의 만유인력 법칙을 새로이 해석하고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소설’을 비판한다.
![]() | ![]() △ 고려청자의 최전성기 때 유물인 청차 참외모양 꽃병. |
세계 속에서의 우리의 위상과 세계성을 살펴보는 과정은 곧 교류사적 이해의 과정이다. 교류사적 이해를 떠난 위상 정립이나 세계성 재량이란 있을 수 없다. 세계와의 공시적인 관계 속에서 가졌던 것과 못 가졌던 것, 잘한 일과 모자랐던 일들을 더욱 또렷이 가려낼 수 있다. 특히 세계사적 지평에서 못가졌던 것과 모자랐던 일들을 추려낸다는 것은 일종의 역사적 성찰로서 그 의미가 자못 크다. ‘일통삼한’의 내재적 한계성으로 인해 발해사가 민족사의 주류에서 밀려나 오늘날까지도 수난을 면치못하고 있다. 이른바 ‘쇄국’과 ‘당쟁’이란 자해적 식민사관의 덫에 걸려 우리 스스로가 조선을 ‘닫힌’ 나라, ‘처진’ 나라로 인지하면서 남이 멋모르고 한 ‘은자의 나라’란 비하에도 무감각해 왔다. 일본사람들이 이른바 ‘임나일본부’설의 물적 증거로 육모창(여섯갈래 창)을 ‘칠지도’(일곱갈래 칼)로 변조해내고 걸어온 무모한 논쟁에 한 세기가 넘게 휘말려들기도 했다. 조선조는 중상주의로 강성했던 고려조를 계승해 남들에 못지않는 활발한 대외교류를 펴고 서학도 받아들인다. 그러나 후기에 와서 보수적 유교사상에 물 젖은 봉건지배층이 기술을 잡기로, 통상을 모리행위로 경시하면서 다름(변혁)을 기피하는 ‘벽이증’(闢異症)에 걸리다보니 결국 근대화의 문턱에서 주저앉고 만다. 같은 맥락에서 17세기까지만 해도 중국과 함께 세계 도자문화를 주도해 오던 조선이 도자기에 한해선 문하생에 불과했던 후발의 일본에 자리를 내주고 아직도 영광을 되찾지 못하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먼저(1377년) 금속활자를 만들어낸 우리 선조들지만, 70여 년 후에 나온 독일 구텐베르크 금속활자의 그늘에 아직도 가리워져 있다. 통절한 역사의 교훈이다.
‘문명교류기행’은 교류사적 이해에서 시동을 건 긴 여정으로서, 그 지향점은 세계 속 한국의 위상, 즉 한국의 세계성을 가늠하는 데 맞춰지고 있다. 비록 영욕이 엇갈린 역사이지만, 그것이 우리와 운명을 같이해 온 역사이고, 또 그 연장선 상에서 살아가야 하기에, 우리는 좀더 냉철하게 어제를 성찰하고 오늘을 점검하며 내일을 설계해야 할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