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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9장 17-30절.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1. 오늘 말씀은 우리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운명하신 내용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죽은 자도 살리고, 풍랑도 잔잔하게 하신 능력의 주님이시지만,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죽기까지 희생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채찍도 맞으시고, 가시관도 쓰시고, 피도 흘리시고, 옷도 다 주시고, 목숨까지도 다 희생하셨습니다.
2. 이처럼,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희생하심으로써, 우리는 죄에서 용서를 받고, 영원한 지옥에서 영원한 천국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3. 이제, 예수님의 희생으로 구원받은 우리는 예수님을 위해서, 성도를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살아야 하겠습니다.
4.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란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17-22절.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17절. 그들이 예수를 맡으매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히브리 말로 골고다)이라 하는 곳에 나가시니
New American Standard Bible: 그러므로 그들이 예수를 맡았고, 예수께서 자신의 십자가를 지시고, 히브리 말로 골고다라고 불리는 해골 장소라는 곳으로 나가셨다. (They took Jesus, therefore, and He went out, bearing His own cross, to the place called the Place of a Skull, which is called in Hebrew, Golgotha.)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καὶ βαστάζων ἑαυτῷ τὸν σταυρὸν
and bearing His the cross
‘지시고’란 단어(βαστάζων)는 현재분사로서(bearing) 지고 가시는 모습을 생생하게 가리키고 있고, 원형(βαστάζω)은 ‘가지고 가다, 지고 가다’(to take up, carry)란 뜻입니다.
해골이라 하는 곳에 나가시니
ἐξῆλθεν εἰς τὸν λεγόμενον Κρανίου τόπον,
He went out to the being called of the Skull place
직역하면 ‘해골이라고 불리고 있는 곳으로 그분이 나가셨다’는 뜻입니다.
‘나가시니’란 단어(ἐξῆλθεν)은 부정과거형으로서(went out) 확실히 나가신 사실을 가리키고, 원형(ἐξέρχομαι)은 ‘나가다’(to go or come out of)란 뜻입니다.
‘불리고 있는’(λεγόμενον)은 현재분사 수동태로서(being called) 불리고 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히브리 말로 골고다
ὃ λέγεται Ἑβραϊστὶ Γολγοθᾶ
which is called in Hebrew Golgotha
직역하면 ‘그곳은 히브리 말로 골고다로 불리고 있다’는 뜻입니다.
‘불리고 있다’(λέγεται)는 현재 수동태로서(is called) 현재 불리고 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1. 당시 십자가형은 로마 시민에게는 가해지지 않았고, 노예나 식민지 백성 중에 극악한 죄수에게 가해진 가장 강도 높은 처형법이었습니다.
2.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길을 지금도 ‘고난의 길: 비아 돌로로사’(Via Dororosa)라고 부르는 순례자들이 많이 찾는 곳입니다.
‘해골이라는 곳’(Γολγοθᾶ은 히브리 말로 골고다(Γολγοθᾶ)라고 하고, 로마어(라틴어)로는 ‘갈보리’(Calvaria)라고 합니다.
이곳은 장지로서 해골이 많았기 때문에, 해골이라는 곳으로 불렀고, 지금도 ‘성묘교회’가 세워져 있습니다.
단지 근래에 고든(Goldon)이라는 학자가 산 모양이 해골처럼 생긴 곳을 발견하여 ‘고든의 갈보리’(Goldon Calvary)라는 곳을 십자가 장소로 보기도 합니다.
3. 저희가 예수를 맡으매
(1)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지 않은 유대교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데는 열성적으로 예수님의 육체를 맡았습니다.
생명의 주님을 영접하지 않던 사람이, 생명의 주를 죽이는 데는 열정적으로 나섰던 것입니다.
이것이 불신자들의 마귀적인 태도입니다.
(2) 이것은 마치 예수님이 그토록 많은 사랑과 선행을 하셨는데도, 유대교인들이 잔인하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과 똑 같습니다.
(3)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가 이렇게 확연히 구별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4장 12-13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에서 불신자들에게 애매한 고난을 당하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생명을 주러 오신 예수님께서 불신자들에게 죽임을 당하신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과 장차 주님의 영광에 동참할 것을 바라보고 기뻐하시기를 축원합니다!
18절. 그들이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새 다른 두 사람도 그와 함께 좌우편에 못 박으니 예수는 가운데 있더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그곳에서 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는데, 다른 두 사람도 함께 좌우편에 못 박고 예수는 가운데 못 박았다. (There they crucified Him, and with Him two other men, one on either side, and Jesus in between.)
그들이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새
ὅπου αὐτὸν ἐσταύρωσαν,
where Him they crucified
직역하면 ‘거기서 그들이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뜻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을새’란 단어(ἐσταύρωσαν)는 부정과거형으로서(crucified) 단호하게 십자가에 못 박은 역사적인 사실을 가리키고, 원형(σταυρόω)은 ‘막대기로 울타리를 치다, 십자가에 못 박다’(to fence with stakes, to crucify)란 뜻입니다.
다른 두 사람도 그와 함께 좌우편에 못 박으니
καὶ μετ’ αὐτοῦ ἄλλους δύο, ἐντεῦθεν καὶ ἐντεῦθεν,
and with Him other two, on this side and on that side
‘못 박으니’란 동사는 원문에 없으나 번역상 첨가한 것입니다.
예수는 가운데 있더라.
μέσον δὲ τὸν Ἰησοῦν.
in between now the Jesus
‘있더라’는 동사도 원문에 없으나 적절히 잘 번역했습니다.
1. 골고다 언덕에 세 개의 십자가가 서 있었습니다.
가운데는 예수님이고, 좌우편에는 죄수들이었습니다.
좌우편 죄수들은 행악자요 강도라고도 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인류의 모든 죄를 자신이 짊어진 하나님의 아들이며, 가장 극악한 죄수로 취급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좌우편의 죄수들은 모든 인류를 대표하는 사람들입니다.
2. 좌편 죄수는 똑 같이 죄를 짓고 살았지만, 마지막까지 예수님을 믿지 않고, 지옥 간 불신자를 대표합니다. (누가복음 23:49)
이 사람은 예수님이 죄 없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을 곁에서 보면서도, 끝까지 죄를 회개하지 않고, 예수님을 욕하다가 지옥 멸망에 떨어지고 만 가련한 불신자입니다.
즉 예수님을 눈앞에 두고서도 진리가 무엇이냐고 물으면서,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죄 없는 예수님을 죽음에 넘겨준 빌라도와 같은 인간입니다.
오늘날 불신자들은 예수 믿는 성도들을 곁에서 보면서도, 끝까지 예수님을 비난하고, 욕하다가 지옥 멸망에 떨어지고 맙니다.
얼마나 가련하고 안타까운 사실인지 모릅니다.
3. 그러나, 우편에 있는 죄수는 비록 평생토록 죄를 짓고 살았지만, 예수님 믿고 천국에 갔습니다. (누가복음 23:40-43).
자신이 죄인인 것을 고백하고, 예수님이 의인인 것을 고백하면서, 예수 믿고 천국 간 성도입니다.
이 사람은 우리 모든 성도들을 대표한 사람입니다.
이처럼, 우리 모두는 죄인이지만, 오직 예수님 믿고, 영생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을 믿는 우편 강도에게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할렐루야!
4. 가운데 서 있는 십자가에는, 우리 예수님께서 죄 없이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우리 대신 죄인으로 못 박히셨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죄가 하나도 없으십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오직 우리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셨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는 가장 큰 죄인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아들이 죄인으로서, 골고다에서 십자가에 높이 매달리신 것은, 오직 우리 대신 못 박히신 것입니다.
이사야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비록 우리가 십자가에 달려 죽을 죄인이지만, 예수님을 믿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자녀로 사시다가, 장차 천국에서 영생복락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찬송가 150장>
갈보리산 위에십자가 섰으니 주가 고난을 당한 표라. 험한 십자가를 내가 사랑함은 주가 보혈을 흘림이라. 최후 승리를 얻기까지 주의 십자가 사랑하리. 빛난 면류관 받기까지 험한 십자가 붙들겠네
19절.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
English Standard Version: 또한 빌라도가 비문을 썼고, 그것을 십자가 위에 붙였다. 거기에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고 썼더라. (Pilate also wrote an inscription and put it on the cross. It read, “Jesus of Nazareth, the King of the Jews.”)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Ἔγραψεν δὲ καὶ τίτλον ὁ Πιλάτος, καὶ ἔθηκεν ἐπὶ τοῦ σταυροῦ·
Wrote then also title the Pilatus, and put on the cross
‘써서’란 단어(Ἔγραψεν)는 부정과거형으로서(Wrote) 확실히 쓴 틀림없는 사실을 가리키고, 원형(γράφω)은 ‘기록하다’(write)입니다.
‘붙이니’란 단어(ἔθηκεν)도 부정과거형으로서(put) 확실하게 붙인 틀림없는 사실을 가리키고, 원형(τίθημι)은 ‘어느 장소에 두다, 놓다, 두다’(to place, lay, set)란 뜻입니다.
기록되었더라
ἦν δὲ γεγραμμένον,
It was being now having been written
‘기록되었더라’에서 뒤의 단어(γεγραμμένον)는 완료 분사 수동태이고(having been written) 이미 기록된 상태를 가리키고, 앞의 동사(ἦν)는 미완료과거로서(It was) 계속 기록되어 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Ἰησοῦς ὁ Ναζωραῖος, ὁ βασιλεὺς τῶν Ἰουδαίων.
Jesus the Nazareth, the King of the Jews
1.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Ἰησοῦς ὁ Ναζωραῖος, ὁ βασιλεὺς τῶν Ἰουδαίων)이란 명패는 라틴어로(Iesus Nazarinus Rex Iudaeorum)으로, 유대나라 히브리어로(יֵשׁוּעַ מִנָּצְרַת מֶלֶךְ הַיְּהוּדִים) 쓰여졌습니다.
영화에 나온 대로 이 이름은 약자로 INRI로 표기되었습니다.
20절. 예수께서 못 박히신 곳이 성에서 가까운 고로 많은 유대인이 이 패를 읽는데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 말로 기록되었더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그러므로 많은 유대인들이 이 비문을 읽었고, 이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곳이 성읍에서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비문은 히브리어와 라틴어와 헬라어로 쓰여있었다. (Therefore many of the Jews read this inscription, for the place where Jesus was crucified was near the city; and it was written in Hebrew, Latin and in Greek).
많은 유대인이 이 패를 읽는데
τοῦτον οὖν τὸν τίτλον πολλοὶ ἀνέγνωσαν τῶν Ἰουδαίων,
this therefore the title many read of the Jews
직역하면 ‘그러므로 많은 유대인들이 이 패를 읽었다’는 뜻입니다.
‘읽는데’란 단어(ἀνέγνωσαν)는 부정과거형으로서(read) 확실히 읽은 사실을 가리키고, 원형(ἀναγινώσκω)은 ‘다시’라는 뜻의 접두어 ἀνά와 ‘경험적으로 알다’(experientially know)라는 뜻의 동사 γινώσκω의 합성어로서 ‘확실히 알다, 알다, 읽다’(to know certainly, know again)라는 뜻입니다.
예수께서 못 박히신 곳이 성에서 가까운 고로
ὅτι ἐγγὺς ἦν ὁ τόπος, τῆς πόλεως ὅπου ἐσταυρώθη ὁ Ἰησοῦς·
for near was being the place, the city where was crucified the Jesus
‘가까운고로’에서 동사(ἦν)는 미완료과거로서(was being) 계속 가까운 상태로 있는 것을 가리키고, ‘못 박히신’이란 단어(ἐσταυρώθη)는 부정과거 수동태로서(was crucified) 확실히 못 박히신 역사적인 사실을 가리킵니다.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 말로 기록되었더라.
καὶ ἦν γεγραμμένον, Ἑβραϊστί, Ῥωμαϊστί, Ἑλληνιστί.
and it was being havinng been written, in Hebrew, in Latin, in Greek
‘기록되었더라’란 단어(γεγραμμένον)는 두 단어로 되어 있는데(ἦν γεγραμμένον: was written), 앞의 단어는 미완료과거로서(was being) 계속된 상태를 가리키고, 뒤의 동사는 완료 분사 수동태로서(having been written) 이미 기록되어 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1.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Ἰησοῦς ὁ Ναζωραῖος, ὁ βασιλεὺς τῶν Ἰουδαίων)이란 명패는 라틴어로(Iesus Nazarinus Rex Iudaeorum)으로, 유대나라 히브리어로(יֵשׁוּעַ מִנָּצְרַת מֶלֶךְ הַיְּהוּדִים) 쓰여졌습니다.
영화에 나온 대로 이 이름은 약자로 INRI로 표기되었습니다.
2. 당시 유대나라에서는 이 세 가지 언어가 쓰였습니다.
히브리어는 유대나라 고유 언어로서 종교를 대표하는 말이었고, 헬라어는 일상생활 언어요, 문학과 철학을 대표하는 언어였고, 로마어는 법률과 권력을 대표하는 언어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예수님은 종교를 대표하는 구세주이시고, 철학과 학문을 대표하는 해답이요 구주였고, 법률이나 권력을 대표하는 구세주였습니다.
21절. 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라 쓰지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 하니
New American Standard Bible: 그래서 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말하기를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지 말고, 그가 말하기를 ‘내가 유대인의 왕이다’라고 말했다고 쓰라”고 했다. (So the chief priests of the Jews were saying to Pilate, "Do not write, 'The King of the Jews'; but that He said, 'I am King of the Jews.'")
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이르되
ἔλεγον οὖν τῷ Πειλάτῳ οἱ ἀρχιερεῖς τῶν Ἰουδαίων
Were saying therefore to the Pilate the chief priests of the Jews
‘이르되’란 단어(ἔλεγον)는 미완료 과거형으로서(Were saying) 계속 말하고 있는 모습을 가리키고, 원형(ἔπω)은 ‘대답하다, 전언하다, 명령하다’(answer, bring word, command)란 뜻입니다.
유대인의 왕이라 쓰지 말고
Μὴ γράφε, Ὁ Βασιλεὺς τῶν Ἰουδαίων,
Not write, The King of the Jews
‘쓰지 말고’에서 동사(γράφε)는 현재 명령어로서(γράφε) 계속 쓰지 말라는 뜻이고, 원형(γράφω)은 ‘기록하다’(write)란 뜻입니다.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 하니
ἀλλ’ ὅτι ἐκεῖνος εἶπεν, Βασιλεύς εἰμι τῶν Ἰουδαίων
but that He He said, King I am of the Jews
직역하자면, “그러나 바로 그가 말하기를 ‘내가 유대인의 왕이다’라고 했다”(고 하라)는 뜻입니다.
‘내가 유대인의 왕이다’에서 동사(εἰμι)는 현재형으로서(I am) 언제나 왕인 것을 가리킵니다.
‘그가’(ἐκεῖνος: He)가 강조되어 있습니다.
‘그가 말했다’(εἶπεν)는 부정과거로서(He said) 과거에 말한 확실한 사실을 가리킵니다.
1. ‘자칭 유대인의 왕’이란 진짜 유대인의 왕이 아니고, 유대인의 왕을 사칭한 가짜 왕이라는 주장이었습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유대인 대제사장들의 요구를 거절하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명패를 ‘유대인의 왕 예수’라고 적었습니다.
2. 이처럼 총독 빌라도가 쓴 명패는 법적인 효력이 있었습니다.
마치 페르샤에서 왕이 인친 포고문은 변경할 수 없는 법이 된 것과 같습니다. (단 6:12)
22절. 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쓸 것을 썼다 하니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빌라도가 대답하기를 “내가 쓸 것을 썼다”고 했다. (Pilate answered, "What I have written I have written.")
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쓸 것을 썼다 하니라.
ἀπεκρίθη ὁ Πειλᾶτος, Ὃ γέγραφα, γέγραφα
was answered the Pilate, What I have written, I have written
‘대답하되’란 단어(ἀπεκρίθη)는 부정과거 수동태로서(was answered) 확실히 대답한 사실을 가리키고, 원형(ἀποκρίνομαι)는 ‘대답하다’(answer)란 뜻입니다.
‘내가 쓸 것을’에서 동사(γέγραφα)는 완료형으로서(I have written) 이미 쓴 것을 가리킵니다.
뒤의 ‘썼다’((γέγραφα)는 완료형으로서(I have written) 이미 쓴 것을 가리킵니다.
1. 죄수를 십자가에 처형할 때는 그 죄패를 머리 위에 붙여놓았습니다.
그런데, 양편의 죄수들에게는 <행악자 강도>라는 죄패가 붙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는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란 명패가 붙어 있었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이 구세주요, 그리스도>라는 뜻입니다.
2.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자세히 연구해보면, 결국 모두 <죄인>이라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아무리 선한 일을 많이 하신 교회의 지도자일지라도, <사람>은 모두 결국 어거스틴(Augustinus Hipponensis, 354~ 30년)처럼 <나는 죄인이었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만은 연구하고 연구할수록, 결론은 구세주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데 도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의 어느 누구를 따를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을 믿고 따라야 할 것입니다.
(3) 그런데,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란 명패가 히브리어와 로마어와 헬라어로 기록되었습니다.
히브리어는 종교를 대표하고, 로마어는 정치를 대표하고, 헬라어는 학문을 대표하는 언어입니다.
그래서, <종교>를 연구해보아도, 결국 예수님이 구세주라는 결론에 도달한다는 것입니다.
또, <정치>를 연구해보아도, 결국 예수님이 구세주라는 결론에 도달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학문>을 연구해보아도, 결국 예수님이 구세주라는 결론에 도달한다는 것입니다.
학문을 해보신 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세계 문화사는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이 sign 곡선을 그리면서, 진행되어 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역사가 예수님의 탄생을 중심으로 BC와 AD로 나뉜 것처럼, 역사의 중심에 예수님이 서 있습니다.
올해도 2025년이라는 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지 2025년이란 뜻입니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믿는 사람은 학자들이 평생 연구해서 얻은 결론에 이미 도달한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예수 믿고, 구원의 사랑에 감사해서 이웃을 사랑하는 성도가 가장 훌륭한 정치가인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예수 믿는 성도는 수백 수천 년 동안 연구한 종교인들의 결론에 이미 도달한 분들인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믿는 사람이 가장 훌륭한 학자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가장 훌륭한 정치가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 믿는 성도가 가장 훌륭한 종교인인 것을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찬송가 204장>
예수로 나의 구주 삼고, 성령과 피로써 거듭나니
이 세상에서 내 영혼이, 하늘의 영광 누리도다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이것이 나의 찬송일세
나사는 동안 끊임없이, 구주를 찬송하리로다
23-27절. 모든 것을 다 주시는 예수님
23절. 군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그 후에 군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 예수의 외투를 취하여 각 군인에게 하 부분씩 네 부분으로 나누어주고, 속옷도 그렇게 하였다: 이 속 옷은 꿰매지 않고, 하나로 짠 것이었다. (Then the soldiers, when they had crucified Jesus, took His outer garments and made four parts, a part to every soldier and also the tunic; now the tunic was seamless, woven in one piece.)
군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Οἱ οὖν στρατιῶται, ὅτε ἐσταύρωσαν τὸν Ἰησοῦν, ἔλαβον τὰ ἱμάτια αὐτοῦ
the then soldiers, when they crucified the Jesus, took the garments His
‘십자가에 못 박고’란 단어(ἐσταύρωσαν)는 부정과거형으로서(they crucified) 단호하게 못 박은 역사적인 사실을 가리킵니다.
‘취하여’란 단어(ἔλαβον)는 부정과거형으로서(took) 단호하게 취한 역사적인 사실을 가리키고, 원형(λαμβάνω)은 ‘취하다, 받다’(to take, receive)란 뜻입니다.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καὶ ἐποίησαν τέσσερα μέρη, ἑκάστῳ στρατιώτῃ μέρος, καὶ τὸν χιτῶνα.
and made four parts, to each soldiers a part, and also the tunic
직역하면 ‘네 부분으로 만들었고, 각 군인들에게 한 부분씩을 주고, 속옷도 (주었다)’라는 뜻입니다.
‘만들었고’란 단어를 ‘나눠’라고 번역한 것은 좋은 번역입니다.
‘만들었고’란 단어(ἐποίησαν)는 부정과거형으로서(made) 확실히 나눈 역사적인 사실을 가리키고, 원형(ποιέω)은 ‘만들다, 하다’(to make, do)란 뜻입니다.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ἦν δὲ ὁ χιτὼν ἄραφος, ἐκ τῶν ἄνωθεν ὑφαντὸς
δι’ ὅλου.
was being now the tunic seamless, from the top woven throughout all
직역하면, ‘속 옷은 꿰매지 않은 것이고, 위에서부터 전체를 짠 것이다’는 뜻입니다.
맨 앞의 동사(ἦν)는 미완료과거로서(was being) 궤매지 않은 상태로 계속 있었던 것을 가리킵니다.
‘호지 아니 한’이란 단어(ἄραφος)는 형용사로서 ‘꿰매지 않은, 한 조각으로 된’(without seam, of a single piece)이란 뜻입니다.
‘짠’이란 단어(ὑφαντός)는 형용사로서 ‘짠, 엮은’(woven)이란 뜻입니다.
1. 예수님의 옷을 네 사람의 군병들이 나누어 가졌습니다.
이 네 사람은 예수님의 두 손과 두 발에 못을 박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중에는 백부장도 있었습니다(막 15:39).
2. 예수님의 옷을 네 부분으로 나누어 가졌다는 것은 첫째 머리와 목을 가린 머릿 수건과, 둘째 흰 수실이 달린 푸른 겉 옷과, 셋째 속옷과 넷째 허리띠와 신발을 가리킵니다.
24절. 군인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그들이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군인들은 이런 일을 하고
English Standard Version: 그래서 그들이 서로 말하기를 “이것을 찢지 말고, 제비 뽑아서 그것이 누구의 것이 되는가 보자”고 했다. 이것은 성경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말씀하기를 “그들이 그들 중에서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위해서 그들이 제비 뽑나이다”고 했다. 그래서 군인들이 이러한 일들을 했다. (so they said to one another, “Let us not tear it, but cast lots for it to see whose it shall be.” This was to fulfill the Scripture which says, “They divided my garments among them, and for my clothing they cast lots.” So the soldiers did these things,)
군인들이 서로 말하되
εἶπαν οὖν πρὸς ἀλλήλους
they said therefore to one another
직역하면 ‘그러므로 그들이 서로 말했다’는 뜻입니다.
‘말하기를’이란 단어(εἶπαν)는 부정과거형으로서(said) 확실하게 말한 사실을 가리키고, 원형(ἔπω)은 ‘대답하다, 말하다, 명령하다’(answer, bring word, command)는 뜻입니다.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Μὴ σχίσωμεν αὐτόν, ἀλλὰ λάχωμεν περὶ αὐτοῦ, τίνος ἔσται·
not we should tear up it, but we should cast lots for it, whose it will be
‘찢지’란 단어(σχίσωμεν)은 부정과거 가정법 동사로서(we should tear up) 단호하게 쫙 찌는 것을 가정한 말이고, 원형(σχίζω)은 ‘쪼개다, 분할하다, 나누다’(to cleave, split, divide)는 뜻입니다.
‘재비 뽑자’란 단어(λάχωμεν)도 부정과거 가정법 동사로서(we should cast lots) 확실히 제비 뽑는 것을 가정한 말이고, 원형( λαγχάνω)은 ‘제비 뽑아 얻다’(to obtain by lot)는 뜻입니다.
이는 성경에 --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ἵνα ἡ γραφὴ πληρωθῇ, ἡ λέγουσα,
that the scripture might be fulfilled, that saying,
직역하면 ‘이것은 --라고 한 성경이 성취되게 하려는 것이었다’입니다.
‘--한’(λέγουσα)은 현재분사로서(saying) 말씀하고 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응하게 하려’란 단어(πληρωθῇ)는 부정과거 가정법 동사로서(might be fulfilled) 확실히 성취되는 것을 가정한 말이고, 원형(πληρόω)은 ‘가득하게 하다, 완성하다, 성취하다’(to make full, to complete, fulfill)는 뜻입니다.
그들이 내 옷을 나누고
Διεμερίσαντο τὰ ἱμάτιά μου ἑαυτοῖς
They divided the garments of Me among them
직역하면 ‘그들이 내 옷을 그들 가운데 나누었다’입니다.
‘나누고’란 단어(Διεμερίσαντο)는 부정과거형으로서(divided) 확실히 나눈 역사적인 사실을 가리키고, 원형(διαμερίζω)은 ‘분배하다, 나누다’(to distribute, to divide)란 뜻입니다.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καὶ ἐπὶ τὸν ἱματισμόν μου ἔβαλον κλῆρον.
and for the clothing my they cast lots
‘제비 뽑나이다’란 말(ἔβαλον κλῆρον)은 두 단어로 되어 있는데, 뒤의 단어(κλῆρον)는 ‘제비’(lot)란 뜻이고, 앞의 단어(ἔβαλον)는 부정과거 동사로서(cast) 확실히 제비 뽑는 역사적인 사실을 가리키고, 원형(βάλλω)은 ‘던진다, 내던지다’(to throw, cast)는 뜻입니다.
군인들은 이런 일을 하고
Οἱ μὲν οὖν στρατιῶται ταῦτα ἐποίησαν.
the indeed therefore soldiers these things did
직역하면 ‘그러므로 군인들은 정말 이런 일들을 행했다’입니다.
‘하고’란 단어(ἐποίησαν)는 부정과거 동사로서(did) 확실히 행한 역사적인 사실을 가리키고, 원형(ποιέω)은 ‘만들다, 하다’(to make, do)는 뜻입니다.
1. 겉옷은 네 조각으로 나누어 가졌고, 속옷은 통으로 짠 것이라 나누어 가지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자세한 표현을 당시 사도 요한이 십자가 밑에서 현장에서 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옷을 나누는 장면은 시편 22편 18절에 예언된 것이었습니다.
인류의 죄를 대신 지고 죽으시는 예수님의 모습과, 죽은 사람의 옷이라도 나누어 가질려는 군병들의 이기적인 모습이 대조적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2.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피도 주시고, 겉옷도 주시고, 속옷도 주시고, 목숨까지 다 주셨습니다.
(1) 평상시 예수님의 복장은, 원피스로 된 속옷을 입으시고, 그 위에 사각형으로 된 겉옷을 입으시고, 머리에는 흰 수건을 두르시고, 신발은 가죽 샌달을 신으셨습니다.
그런데, 로마 군병 네 명이 예수님의 겉옷을 네 조각으로 나누어 가졌고, 속옷은 원피스이므로 제비 뽑아서 한 사람이 가졌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겉옷과 속옷까지 다 나누어주셨습니다.
(2) 예수님은 옷을 다 주시고 벌거벗은 부끄러움을 당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부끄러운 수치를 가려주시기 위한 대속적인 고난이셨습니다.
즉 예수님은 벌거벗은 십자가의 수치를 참으심으로써, 우리들을 대속하시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히브리서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로마서 13:12-14.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3) 예수님은 옷도 다 주셨고, 피도 다 주셨고, 살도 다 주셨고, 목숨까지 다 주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채찍에 맞으시고, 가시관을 쓰시고, 피를 흘리시고, 죄수가 되시고, 가난하게 되시고, 저주를 받으시고, 죽으신 것은, 바로 우리의 모든 죄악과 불행과 저주를 대신 짊어지신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8: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할렐루야!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에서 가난하고, 피 흘리고, 고통스러운 환경을 만나시거든, 이 고통스런 환경을 이미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담당하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님 의지하여, 모든 고통을 믿음으로 극복하시기를 축원합니다!
<397장>
주 믿는 사람 일어나, 다 힘을 합하여
이 세상 모든 마귀를 다 쳐서 멸하세
저 앞에 오는 적군을 다 싸워 이겨라
주 예수 믿는 힘으로 온 세상 이기네
믿음이 이기네, 믿음이 이기네
주 예수를 믿음이 온 세상 이기네
25절.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그러므로 군인들은 이러한 일을 했다. 그러나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의 어머니와, 그의 어머니의 여동생과, 글로바의 아내인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서 있었다. (Therefore the soldiers did these things. But standing by the cross of Jesus were His mother, and His mother's sister, Mary the wife of Clopas, and Mary Magdalene.)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가---섰는지라
εἱστήκεισαν δὲ παρὰ τῷ σταυρῷ τοῦ Ἰησοῦ ἡ μήτηρ αὐτοῦ
Had been standing now by the cross of the Jesus the mother His
‘섰는지라’는 단어(εἱστήκεισαν)는 대과거(pluperfect) 동사로서(Had been standing) 이미 그 전부터 서 있는 것을 가리키고, 원형(ἵστημι)은 ‘세우다, 서 있다’(to make to stand, to stand)는 뜻입니다.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
καὶ ἡ ἀδελφὴ τῆς μητρὸς αὐτοῦ, Μαρία ἡ τοῦ Κλωπᾶ καὶ Μαρία ἡ Μαγδαληνή
and the sister of the mother His, Mary the (wife) of Clopas, and Mary the Magdalene
1. 군병 네 사람은 예수님의 마지막 유품을 나누어 가지고 있었고, 곁에는 예수님을 가장 사랑했던 네 사람이 서 있었습니다.
이 네 사람은 여자가 세 사람이고, 남자가 한 사람 요한이었습니다.
세 여자는 첫째 ‘이모’ 살로메였는데,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이고, 남편은 세배대였습니다. (마 27:56, 막 15:40)
이 살로메는 성모 마리아와 형제간이었고, 예수님과 요한은 이종사촌 간이었습니다.
둘째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는 작은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였습니다(마 27:56, 막 15:40)
셋째는 유명한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이 여성도는 원래 일곱 귀신이 들려서 창녀 노릇을 하다가 예수님이 귀신들을 쫓아내주셨고, 그러자 예수님께 향유를 부어드렸고(눅 8:2), 부활하신 예수님의 무덤에 가장 먼저 찾아간 여성도였습니다. (요 20:1-18)
26절.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New American Standard Bible: 그 때 예수께서 자기 어머니와, 자기가 사랑했던 그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그의 어머니에게 말씀하시되 “여인이여, 보소서 당신의 아들입니다”고 하셨다. (When Jesus then saw His mother, and the disciple whom He loved standing nearby, He said to His mother, "Woman, behold, your son!")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Ἰησοῦς οὖν ἰδὼν τὴν μητέρα καὶ τὸν μαθητὴν παρεστῶτα ὃν ἠγάπα,
Jesus therefore having seen the mother and the disciple having stood by whom He was loving
‘보시고’란 단어(ἰδὼν)는 부정과거 분사로서(having seen)로서 이미 ㅂ모신 사실을 가리키고, 원형( ὁράω)은 ‘보다, 인식하다, 경험하다, 분간하다, 알다’(to see, perceive, experience, perceive, discern, beware)라는 뜻입니다.
‘곁에 서 있는’이란 단어(παρεστῶτα)는 완료분사로서(having stood by) 이미 곁에 서 있는 상태를 가리키고, 원형(παρίστημι)은 ‘곁에 있다, 곁에 서 있다’(to place beside, stand by)는 뜻입니다.
‘사랑하시는’(ἠγάπα)은 미완료과거로서(He was loving) ‘그가 과거부터 계속 사랑해오신’이란 뜻으로서 예수님이 계속 사랑해오신 요한이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 옆에 서 있는 것을 가리킵니다.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λέγει τῇ μητρί, Γύναι, ἴδε ὁ υἱός σου.
He says to mother, Woman, behold, your son
직역하면 ‘그분이 말하시기를, 어머니에게 여인이여, 보소서, 당신의 아들입니다’라는 뜻입니다.
‘말씀하시되’(λέγει)란 현재형으로서(He says) 말씀하고 계신 모습을 가리킵니다.
‘보소서’(ἴδε)는 부정과거 명령형으로서(behold) 확실히 보라는 뜻이고, 주의를 환기시키는 말입니다.
‘여자여’란 단어(Γύναι)는 호격인데, 원형(γυνή)은 ‘여인, 아내, 숙녀’(woman, wife, my lady)란 뜻입니다.
1.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죽기까지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하셨고, 또한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끝까지 신변의 보호 조치를 했습니다.
2. 예수님이 모친 마리아를 사도 요한에게 맡기신 것은 동생들이 네 명이나 있었어도, 요한이 마리아의 이질 조카이면서도 가장 신앙이 좋기 때문에, 어머니를 부탁했습니다.
이후 요한은 마리아를 예루살렘에서 모시다가 나중에는 에베소 교회 담임이 되어서 그곳에서 모셨는데, 마리아는 11년 후 59세에 세상을 떴다고 합니다. (Historia Ecclesiastike 2:3. Synodical Letter of Council of Ephesus).
27절.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그 후에 예수께서 그 제자에게 말씀하시기를 “보라, 네 어머니시라”고 했다. 그 시간부터 그 제자가 그 여인을 자기 집으로 모시고 갔다. (Then He said to the disciple, "Behold, your mother!" From that hour the disciple took her into his own household.)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εἶτα λέγει τῷ μαθητῇ
Then He says to the disciple
‘이르시되’(λέγει)는 현재형으로서(He says) 말씀하고 계신 모습을 가리킵니다.
보라 네 어머니라
Ἴδε ἡ μήτηρ σου.
Behold, the mother yours
‘보라’(Ἴδε)는 부정과거로서(behold) 단호하게 보라는 뜻이고, 주의를 환기시키는 말입니다.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καὶ ἀπ’ ἐκείνης τῆς ὥρας ἔλαβεν ὁ μαθητὴς αὐτὴν εἰς τὰ ἴδια.
and from that the hour took the disciple her into the own.
‘모시니라’란 단어(ἔλαβεν)는 부정과거 동사로서(took) 확실히 모신 사실을 가리키고, 원형(λαμβάνω)는 ‘취하다, 받다’(to take, receive)란 뜻인데, 우리말로 ‘모시니라’고 번역한 것은 잘한 번역입니다.
1.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곁에는 다섯 사람이 있었습니다.
모친과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와 막달라 마리아와 사도 요한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 보면, 여성이 네 사람이고, 남자가 한 사람이었습니다.
비율이 4대 1입니다.
십자가 당시나 오늘날 교회에도, 남녀의 비율은 이렇게 4대 1인 것 같습니다.
2. 예수님께서는 한계를 초월한 극도의 고통 속에서도, 어머니를 부탁한 효도를 잊지 않으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의 효를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자기 가족의 생활이 어렵다고, 부모님을 도외시 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생활이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부모님께 대한 사랑과 효도를 잃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본받아서, 극도의 가난과 고통 속에서도 효도하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예수님께서는 남자 동생만 네 명이 있었으나 (마13:55), 모친을 사도 요한에게 맡기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혈육보다는 영적인 가족을 더 중히 여기셨습니다.
바울 사도도 그랬습니다.
즉 바울은 루포의 어머니를 자기 어머니라고 했고(롬 16장), 디모데와 디도를 참 아들이라고 했습니다(딤전1장, 딛1장).
그래서,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라야,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라>고 하셨습니다(마12:50).
이처럼, 예수님은 육정에 매어 이기적인 가족 사랑을 하신 것이 아니고, 신앙의 가족을 더욱 사랑하셨습니다.
목사는 종종 신앙적 사랑을 약속했던 성도들이 육신적 사랑에 빠져서 배신할 때, 마음속으로 눈물을 흘릴 때가 있습니다.
학생시절부터 정성으로 길러서, <예수님이 좋아서 결혼 않겠다>고까지 하던 청년이, 불신 결혼을 하여, 교회를 떠나갈 때, 마음이 아픕니다.
직장을 얻기 전까지는 목숨이라도 바칠 것 같았던 청년이, 직장 얻자, 술 마시고 죄 짓는 데 빠져서, 교회를 떠나갈 때, 마음이 쓰라립니다.
처음 예수 믿고 성령 받았을 때는, <눈이라도 빼어주겠다>던 집사님이, 어느 날 남편과 함께 목사와 원수가 되었을 때, 목사는 눈물을 흘립니다.
집사일 때는, 그토록 열심히 헌금하고, 무슨 일이든지 앞장서서 하고, 그토록 목사를 호위하며 보호하던 집사님이, 장로가 되더니, 갑자기 목사 위에 군림하여, 사사건건 시비하고 브레이크를 걸 때면, 목사는 마음이 얼마나 아픈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불신 동생들에 대한 육정에 매이지 않고, 신앙 가족인 요한을 귀하게 여겨서 어머니를 부탁하신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들도 신앙 가족을 귀하게 여기시기 바랍니다!
더구나 자녀들이 믿음 생활 잘 하면, 얼마나 영육간에 사랑이 넘치겠습니까?
<찬송가 493장>
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몸
옛 것은 지나고, 새 사람이로다
그 생명 내 맘에 강같이 흐르고
그 사랑 내게서 해 같이 빛난다
영생을 맛보며 주 안에 살리라
오늘도 내일도 주 함께 살리라
28-30절. 운명하신 예수님
28절. 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New American Standard Bible: 이 후에 예수께서 모든 것이 이미 성취된 것을 아시고, 성경을 이루시기 위하여 말씀하시기를 “내가 목 마르다”고 하셨다. (After this, Jesus, that all things had already been accomplished, to fulfill the Scripture, said, "I am thirsty.")
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Μετὰ τοῦτο, εἰδὼς ὁ Ἰησοῦς ὅτι ἤδη πάντα τετέλεσται,
After this, having known the Jesus that now all things have been accomplished
‘이룬 줄’이란 단어(τετέλεσται)는 완료 수동태 동사로서(have been accomplished) 이미 이루어진 상태를 가리키고, 원형( τελέω)은 ‘목표에 다다르다, 완성하다, 성취하다’(to bring to an end, complete, fulfill)는 뜻입니다.
‘아시고’란 단어(εἰδὼ)은 완료 분사로서(having known) 이미 아신 상태를 가리키고, 원형(οἶδα)은 ‘알다, 기억하다, 인식하다’(know, remember, appreciate)는 뜻입니다.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ἵνα τελειωθῇ ἡ γραφὴ, λέγει, Διψῶ.
so that might be fulfilled the scripture, He says, I am thirsty
‘응하게’란 단어(τελειωθῇ)는 부정과거 가정법 수동태로서(might be fulfilled) 확실히 응하게 된 것을 가정한 말이고, 원형(τελειόω)은 본절의 앞 부분을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목 마르다’란 단어(Διψῶ)는 현재 직설법 동사로서(am thirsty) 목마른 상태를 가리키고, 원형(διψάω)은 ‘목 마르다, 갈구하다, 간절히 원하다’(to thirst, thirst for, desire earnestly)는 뜻입니다.
‘하시니’(λέγει)는 현재형으로서(He says) 말씀하고 계시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1. ‘내가 목 마르다’는 것은 많은 출혈로 육신이 극한 고통을 당하신 모습을 가리킵니다.
또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Ἡλεὶ Ἡλεὶ λεμὰ σαβαχθανε: אֵ-לִי אֵ-לִי לְמָה שְׁבַקְתָּנִי)라고 부르짖은 것은 인류의 죄를 담당하신 예수님이 하나님께 버림받은 영적인 고통을 당하신 모습입니다.
2. ‘목 마르다’는 것은 시편 69편 21절의 응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즉 영육간의 극한적인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고 하신 주님의 모습입니다.
29절.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적신 해면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New American Standard Bible: 신 포도주가 가득한 병이 거기에 있었다: 그래서 그들이 신 포도주를 가득히 적신 스폰지를 우슬초 가지에 매달아 그것을 예수의 입에 가져다주었다. (A jar full of sour wine was standing there; so they put a sponge full of the sour wine upon a branch of hyssop and brought it up to His mouth.)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σκεῦος ἔκειτο ὄξους μεστόν·
vessel was being set of sour wine full
‘있는지라’는 단어(ἔκειτο)는 미완료과거 수동태로서(was being set) 전부터 놓여 있는 상태를 가리키고, 원형(κεῖμαι)은 ‘놓여 있다, 있다’(to be laid, lie)는 뜻입니다.
신 포도주를 적신 해면을
σπόγγον οὖν μεστὸν τοῦ ὄξους
sponge therefore filled with sour wine
직역하면 ‘그러므로 신 포도주로 가득 찬 해면’이란 뜻입니다.
우슬초에 매어
ὑσσώπῳ περιθέντες
branch of hyssop having put on
‘매어’란 단어(περιθέντες)는 부정과거 분사로서(having put on) 단단히 매놓은 것을 가리키고, 원형(περιτίθημι)은 ‘묶는다’(to place around)는 뜻인데, 우리 말에 ‘매어’로 번역한 것은 좋은 번역입니다.
예수의 입에 대니
προσήνεγκαν αὐτοῦ τῷ στόματι.
they brought it to the mouth
직역하면 ‘그들이 그것을 그 입에 가져갔다’입니다.
‘대니’란 단어(προσήνεγκαν)는 부정과거 동사로서(brought) 입으로 가져간 확실한 사실을 가리키고, 원형(προσφέρω)은 ‘가져가다, 제공하다’(to bring to, to offer)란 뜻입니다.
1. 처음에 마취제로 주는 포도주를 거부하고 고통을 온전히 감당하신 후에(막 15:23) 죽기 직전에는 신 포도주를 입에 대셨습니다.
이 때는 고통을 감수하지 않으시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단지 사람들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30절.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그러므로 예수께서 신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말씀하시기를 “완성되었다”고 하셨다. 그리고 예수께서 그의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떠나가셨다. (Therefore when Jesus had received the sour wine, He said, "It is finished!" And He bowed His head and gave up His spirit.)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ὅτε οὖν ἔλαβεν τὸ ὄξος ὁ Ἰησοῦς
when therefore took the sour wine the Jesus
‘받으신’이란 단어(ἔλαβεν)는 부정과거 동사로서(took) 확실히 받으신 역사적인 사실을 가리키고, 원형(λαμβάνω)은 ‘취하다, 받다’( to take, receive)란 뜻입니다.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εἶπεν, Τετέλεσται,
He said, It has been finished
직역하면 ‘다 이루었다고 그가 말씀하셨다’는 뜻입니다.
‘다 이루었다’란 단어(Τετέλεσται)는 완료 수동태 동사로서(has been finished) 이미 다 이룬 상태를 가리키고, 원형(τελέω)은 ‘목표에 다다르다, 완성하다, 성취하다’(to bring to an end, complete, fulfill)란 뜻입니다.
‘하시고’(εἶπεν)는 부정과거로서(He said) 단호하게 말씀한 사실을 가리킵니다.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καὶ κλίνας τὴν κεφαλὴν, παρέδωκεν τὸ πνεῦμα.
and having bowed the head, He yielded up the spirit
직역하면 ‘그 머리를 숙이시고, 그가 그 영혼을 넘겨주셨다’는 뜻입니다.
‘숙이시니’란 단어(κλίνας)는 부정과거 분사로서(having bowed) 확실히 숙이신 틀림없는 사실을 가리키고, 원형(κλίνω)은 ‘굽히다’(to cause to bend)는 뜻입니다.
‘떠나가시니라’란 단어(παρέδωκεν)는 부정과거 동사로서(gave up) 확실히 넘겨주신 역사적인 틀림없는 사실을 가리키고, 원형(παραδίδωμι)은 ‘넘겨주다, 버리다, 위탁하다’(to hand over, to give or deliver, abandon, commit)란 뜻입니다.
1.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하신 말씀은 일곱 마디였습니다.
어릴 때 목사님이 가르쳐주시기를 ‘용낙모기 갈성탁’이라고 했습니다.
용: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눅 23:34)
낙: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눅 23:43)
모: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시라 (요 19:26-27)
기: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 27:46, 막 15:34))
갈: 목 마르다 (요 19:28)
성: 다 이러었다 (요 19:30)
탁: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눅 23:46)
2. 예수님이 목마르신 것은 우리의 목마름을 해소시키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목이 마르기까지, 우리에게 모든 피와 생명과 사랑을 다 쏟아 부어주셨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생명과 사랑과 성령이 충만케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님은 <이 세상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7장에서는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무엇에 목이 마르십니까?
인정과 사랑과 칭찬에 목마르십니까?
예수님께 와서, 영원한 사랑과 존귀와 성령을 가득히 받으시기 바랍니다!
돈에 목마르십니까?
예수님께 와서, 영원한 부요가 마음에 가득하시고, 기쁨과 행복이 가득하시기 바랍니다!
향락에 목마르십니까?
예수님께 와서, 마음에 차고 넘치는 영원한 기쁨과 행복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3. 예수님께서는 <다 이루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무엇을 다 이루셨습니까?
우리에게 피와 생명 주시는 일을 다 이루셨습니다.
우리에게 마지막 속옷까지도 다 주시는 일을 완성하셨습니다.
우리에게 명예를 주시기 위해서 수치를 다 당하신 일을 완수하셨습니다.
우리를 고통에서 해방시키시려고, 모진 고통을 당하시는 일을 다 이루셨습니다.
우리에게 영생 천국을 주시기 위해서, 대신 고통과 죽음 당하시는 일을 완수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영생 천국을 얻기 위해서 하나도 할 수 없는 일을, 예수님이 다 이루셨습니다!
우리가 천국 가기 위한 길을, 예수님이 모두 다 이루어 놓으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당당히 천국 길을 걸어가시기 바랍니다!
혼인 잔치에서 신랑이 당당히 걸어 들어가는 것처럼, 이제 당당히 천국에 계신 예수님 앞으로 걸어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도 예수님이 다 이루어 놓으신 모든 구원의 은총들을 모두 다 누릴 수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