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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실력보다, 주님의 은혜로. 人の努力よりは主の御恵みにて。( 2024년 7월 14일 주일예배)
본문 갈 1:1~5
갈 1:1 사람들이 시켜서 사도가 된 것도 아니요, 사람이 맡겨서 사도가 된 것도 아니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리고 그분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임명하심으로써 사도가 된 나 바울이, 2 나와 함께 있는 모든 믿음의 식구와 더불어 갈라디아에 있는 여러 교회에 이 편지를 씁니다. 3 우리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려 주시는 은혜와 평화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빕니다. 4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우리를 이 악한 세대에서 건져 주시려고,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바치셨습니다. 5 하나님께 영광이 영원무궁 하도록 있기를 빕니다. 아멘.
1. 人々からでもなく、人を通してでもなく、イエス․キリストと、キリストを死者の中から復活させた父である神とによって使徒とされたパウロ、2. ならびに、わたしと一緒にいる兄弟一同から、ガラテヤ地方の諸教会へ。3. わたしたちの父である神と、主イエス․キリストの恵みと平和が、あなたがたにあるように。4. キリストは、わたしたちの神であり父である方の御心に従い、この悪の世からわたしたちを救い出そうとして、御自身をわたしたちの罪のために献げてくださったのです。5. わたしたちの神であり父である方に世々限りなく栄光がありますように、アーメン。
지난 주일에는 맥추감사주일을 지키면서 지난 상반기 동안의 은혜와 첫 열매에 대한 감사를 고백하며 예배하였습니다. 또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예수님의 복음에 대해서 은혜를 나눌 수 있었지요. 우리의 존재 자체를 감사하며, 그 어떤 고난과 사악한 환경 속에서도 감사하며 기쁨으로 살 수 있는 것은 복음의 약속을 믿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약속을 분명히 믿고 인정하는 것이 곧 구원의 확신입니다. 구원의 확신을 지닌 인생은 그야말로 모든 것이 형통하며, 주님의 인도하심과 축복으로 알찬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첫 열매의 감사를 통해 구원의 확신으로 알찬 인생을 살 수 있기를 다시금 축복합니다.
오늘부터는 갈라디아서를 순차적으로 강해하며 복음의 약속을 다시금 명확히 찾아내는 기회를 가지려 합니다. 이 서신(편지)은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라고 불리던 지방, 즉 오늘날 튀르키예의 중앙부 지역에 있는 교회들에 보내는 편지인데요. 사도 바울은 아시다시피 태생적으로는 유대교를 열성적으로 믿던 사람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던 사람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사도행전 8장부터 시작되는 내용에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으니 꼭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강렬한 빛 가운데 예수님을 만나는 기적을 체험하고 나서 예수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지요. 그리고 첫 번째 전도여행을 통해 갈라디아 지역에도 교회가 서게 되었습니다. 그때의 여정이 사도행전 13장과 14장에 걸쳐 기록되어 있는데요.
바울이 일어나 그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행 14:20b-21)
비시디아 가운데로 지나서 밤빌리아에 이르러 25 말씀을 버가에서 전하고 앗달리아로 내려가서 거기서 배 타고 안디옥에 이르니... (행 14:24-26a)
여기에 기록된 비시디아, 밤빌리아, 루스드라, 더베 등은 곧 남부갈라디아 지방에 속한 도시였습니다.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던 바울은 후에 이들 지역에 유대교를 믿는 유대인들이 찾아가 복음을 왜곡하는 활동이 심각하게 벌어지고 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래서 갈라디아 지역의 교회와 성도들에게 복음의 약속을 명확하게 정리해 주기 위한 편지를 보냈던 것이지요.
복음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실행하셔서, 완성해 내신 오직 주님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복음을 통해 구원을 선물과 같다고 선언하고 있지요.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엡 2:8)
이 세상의 모든 종교는 인간의 노력을 통해 무엇인가를 얻을 수 있는 것과 자의적인 선택을 말합니다. 그래서 종교를 믿는 데에는 자유가 있다고 하지요. 하지만, 복음은 이 저주스럽고 사악하며 고통스럽고 허망한 삶에서 자유롭게 해방되는 유일한 길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이 약속을 설명하거나 고백하는 것을 곧 전도, 혹은 선교라고 부르고 있고요. 우리의 신앙생활이라는 틀은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기 위한 현실적인 대안으로 허락되는 최소한의 행동양식인 것이지요.
앞으로 갈라디아서를 순차적으로 함께 나누며 더욱 명확한 내용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그중에 인삿말에 해당하는 1절부터 5절까지의 내용에서 주목하며 기억해야 할 구절을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사도 바울이 다른 서신들과 비교해서 조금 독특한 표현으로 시작하는데요. 사람들이 시키거나, 사람들이 맡긴 것이 아닌 사도의 직분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서신서들은 대체로 예수님의 종이라고 하거나, 하나님의 뜻에 따른 종, 혹은 사도라고 말하고 있지요. 그런데 갈라디아서는 사람들의 영향력이나 신용을 거절하는 표현으로 편지를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제자였던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면서 예수님을 대적했던 이력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행 9:4)
하지만, 예수님께로부터 친히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는 사울은 예수님께서 살아계실 때 부름 받은 열두 명의 사도들과는 조금 구별되는 사도의 직분을 받았습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행 9:15)
말씀에서 명확하게 증언하여 주시는 것처럼 단지 유대인들의 범위를 넘어 이방인들에게까지 예수님의 이름을 전하기 위한 그릇으로 사용하시겠다고 천명하신 것인데요. 바울은 이러한 주님의 명령과 약속이 사도로서 사역하는 가장 확실한 증거이며, 유일한 사명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본문에는 ‘사람’들의 권위나 영향력이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께서 임명하셨다는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사람이란 단지 어떤 특정한 인물이나 단체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으로 일컬어지는 이 세상의 모든 세속적인 가치관과 시대정신, 그리고 고정관념을 뜻합니다. 아주 직접적으로 말하면 ‘상식’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물론 상식은 우리가 일상을 살면서 고려해야 할 매우 중요한 행동기준이며 가치라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세속적이고, 사람이 주장하는 가치관에 휘둘리거나 얽매이지 말아야 한다고 해서 몰상식한 사람이 되어도 괜찮다, 혹은 몰상식한 자들이 된다는 말은 아닌 것이지요.
그러나 복음은 상식이나 율법, 혹은 시대정신에 얽매이지 않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구원과 영생을 선물하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런 하나님의 상식을 초월하는 사랑을 본받는 존재로서의 정체성과 사명의식을 갖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상식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몰상식한 행동을 해도 된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주목할 것은 이 땅의 사람들이 세워놓은 질서와 법률, 그리고 시대정신과 상식이라는 가치관은... 장소나 시대, 그리고 상황에 따라 변형되고 왜곡되어 왔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심지어 이 시대가 그토록 의지하고 있는 과학적 상식과 사고방식이라는 것도 몇몇의 법칙을 제외하고는 여건과 형편, 그리고 시대에 따라 항상 재편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 바울이 사람들에게 의지하지 않고, 사람들을 기준으로 하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명령과 그 부르심으로 사도가 되었다는 오늘 본문의 고백을 통해 나의 삶과 사명도 마찬가지임을 발견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삶이란 그저 우연히 주어졌다거나, 혹은 운명과 팔자가 정해져 있다거나, 아니면 어떤 과학적이고 의학적인 인과관계로 생겨난 결과라는 식으로만 여기는 상식과 시대정신에 얽매이지 않기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대부분 삶의 시간이 상식과 시대정신, 그리고 세속적인 지식과 가치관에 노출되어 있기에 자신의 존재가치를 세속적인 시선으로 보게 될 기회가 훨씬 많다는 것은 저도 인정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꼭 주목하기 원하는 첫 번째는 우리의 일상과 존재가치를 눈에 보이는 사람들과 비교하고, 사람들의 만들어가는 상식과 시대정신만으로 헤아리는 자리에서 자유할 수 있기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바울은 갈라디아의 성도들에게 상식을 뛰어넘는 방식으로 인류를 구원하신 예수님과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평화가 있기를 축복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을 통해 우리가 함께 신앙생활을 하고 또한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할 것과 소원할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울은 은혜와 평화를 말하였습니다. 은혜는 말 그대로 받을만한 자격이 없는 것을 받는 것을 말하는데요. 흔히 은혜에 대한 감동을 느낄 때 은혜를 받았다고 표현하는 것을 자주 보았습니다. 하지만, 은혜는 어떤 감정이나 기분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혜택을 뜻하는 말이지요. 그래서 부모님의 은혜, 혹은 어머니의 은혜라고 말합니다. 대체로 위에서 부어지는 것을 은혜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은혜를 받았다고 말할 때에는 먼저 어떤 은혜가 임하였는지는 분별하고 그 은혜에 감동했다는 뜻으로 표현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어주신 은혜 중의 은혜가 있습니다. 바로 구원의 복음입니다.
지난 주일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우리가 구원의 확신을 갖는다는 것은 내가 어떤 것을 느끼고, 구원을 받았다는 증거를 보여주고 자랑할 것이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나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고, 구원을 받기 위해 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음에도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 나에게 분명히 일어났다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확신은 신념이나 확고한 자신감이 아닌 믿음과 순종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또한 개념이 아닌 체험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머리로 판단하고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인생의 경험들이 하루에 하루만큼 쌓여 가는 것이지요.
저와 여러분이 이 자리에 이렇게 앉아 있을 수 있는 것도 실은 은혜의 한 증거이기도 한 것입니다. 비록 하나님이 몸으로 체감되지 않을지라도, 자기의 존재는 부정할 수 없는 것이지요. 우리가 만유인력(万有引力_ばんゆういんりょく)의 법칙을 이해하지 못해도, 이미 그 법칙 안에서 생존하고 있다는 것을 실질적(몸)으로는 체감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저는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우리가 구원받은 것을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롬 5:8)
무슨 뜻입니까? 우리가 구원 받았다는 감정이나 기분이 없더라도 구원의 사실은 분명한 진리라는 것입니다. 혹은 구원을 위해 한 일이 기억에 없더라도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확실한 진리라는 것이지요.
따라서 은혜란 나의 자격여부와 상관없이 나를 구원하여서 영생하게 하시고 부활의 삶을 살게 하시는 주님의 일방적인 선물인 것이지요.
그 은혜를 지켜가는 데는 평화의 태도와 덕목이 가장 유용하다고 믿는데요.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우리가 죄로 인해 창조주 하나님과의 사이가 멀어진 것을 하나 되게 하신 것이 곧 평화이기 때문이지요.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엡 2:14)
여기서 화평은 평화의 다른 말이고요. ‘원수 된 것’이란 수도 없이 많은 갈등과 이기심으로 인해 갈라진 모든 저주와 멸망을 뜻합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지옥과 멸망으로 귀결되는 모든 행동, 태도, 언행심사를 뜻한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희생제물로 드리셔서 그 지옥으로 귀결될 모든 함정과 덫으로부터 우리를 건져내셨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진정한 평화입니다. 평화란 단순히 어떤 트러블이 일어나지 않거나, 혹은 불편한 것이 없는 상태가 아닙니다. 진정한 평화는 우리가 구원을 받음으로... 인생을 살면서도 영생을 살아가는 일에 거리낄 일이 없이 모든 것이 받아들여지고, 관용되는 내면의 상태를 뜻한다고 볼 수 있지요. 예수님께서는 폭풍우가 몰아치는 배 위에서도 아무런 동요함 없으셨습니다.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배가 물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께서는 주무시는지라 (마 8:24)
예수님께서 본을 보이신 것처럼 우리도 폭풍이 부는 바다에서도 두려움 없이 마음의 평화를 얼마든지 누리게 되는 것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은혜와 평화를 기원하는 바울의 축복은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서로를 위해 축복하며 기도하는 기초가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은혜와 평화가 채워지고 나서야 우리의 모든 일상생활은 값어치가 있고, 알찬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을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4절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몸을 바치신 이유에 대해 말씀하실 때 우리를 이 악한 세대에서 건져 주시려고 그렇게 하셨다고 고백하지요. 앞서 말씀 드린 은혜와 평화가 채워진 내면으로 살 때 악하고 비열한 세상의 모든 저속하고 허망한 가치관을 능히 견디고 이겨낼 내구성을 갖추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다른 표현으로 하자면 어떤 질병에 대한 면역력이 생기는 것과 같다고 비유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면역은 대체로 약한 병원균을 직접 경험을 함으로 생기게 되지요. 그런데 영적인 면역력은 예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심으로 형성되는 것입니다. 영적인 면역은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단련이 되고, 이후에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경험을 통해 확증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확증된 경험들을 간증이라고 고백하지요.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고전 10:13)
대부분의 사람들은 개인적인 삶의 시련들을 스스로가 극복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시련과 고난, 그리고 고통을 혼자 몸부림치며 애쓰고 견디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함께 그 고난의 짐을 지시고, 함께 공유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그 고난과 시련을 나의 그릇에 맞게 허락하시고, 견디지 못할 시험을 피할 길을 열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는 이 땅에서 주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은혜와 평화의 내면세계를 통해 감당하며, 또한 일상 가운데 발생하는 악한 모든 것을 능히 이기게 되는 축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 땅에 고난과 문제가 없는 삶은 없고, 갈등과 미움이 없는 관계가 없습니다. 인생은 어찌보면 문제와 고생의 연속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나를 구원하신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삶이 우리에게 최선의 삶이고, 최고의 삶인 것을 믿습니다. 뿐만 아니라 가장 큰 축복을 누리는 일상생활인 것을 믿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사람의 시선과 가치관으로 스스로의 가치를 헤아리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그 뜻으로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말씀의 약속을 통해 발견하실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느라 영생하는 존재로서 살 수 있게 된 사명의 길을 잃어버리지 않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의 삶은 이미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영생에 합당한 존재로 예정된 것이 믿어지시길 소망합니다. 세속의 상식과 시대정신이 가리키는 사람들의 신념으로 사는 일상은 결국 허무함과 어두움으로 사라져 버리는 결말을 말할 뿐입니다. 설득력이 있는 주장으로 소위 위인이라는 사람들이 축적해 놓은 시대정신은 우리를 구원하기보다 더욱 헛된 결론으로 이끌어 왔던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은 우리에게 인생에서 받을 은혜와 함께 영생에 이르기까지 누릴 축복을 약속하십니다. 이제 우리가 취할 것은 창조주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구원의 복음을 믿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저와 여러분은 주님과 동행합시다. 그 분의 임재하심 안에서 예수님의 본을 따라 악한 세대의 풍랑에서도 결코 흔들리지 않고, 휘말리지 않으며, 얽매이지 않는 참된 자유와 평화와 은혜가 충만한 일상을 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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