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15.21.심화과제/이은규
1. 열린 문
산사는 산 속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 매미도 숨을 죽이고 개미도 꽃발을 딛고 산사는 말이 없다. 앞문은 열려 있으나 드나들 땐 東문이다.
부처님 어깨 위에 연화 한 송이 얹어 놓고 합장하는 여인의 얼굴에 부처의 염화미소가 번진다.
대웅전 법당의 열린 문은 부처의 미소와 닿는 문이다.
2. 투명한 벽 속
사거리 남해바다 간판을 단 횟집 수조에는 남해 바다 한 조각을 왈칵 쏟아 놓았다.
돔 뽈락 삼식이 농어 갯장어 등이 모여서 저마다 창 너머 풍경을 그리고 있다.
투명한 벽 속에는 바다가 있고 벽 너머에도 바다가 꾸물거리고 있다.
수조에는 투명한 바다가 있고 바다에는 고깃떼가 짠하게 여유롭다.
3. 둥근 알전구
침대 맡의 둥근 알전구는 방 안의 모든 사실을 알고 있다. 굳이 비추지 않드라도 눈만 뜨고 있으면 Cctv처럼 자동으로 녹화가 이뤄진다.
방 안에는 마른 꽂이 꽃병에 꽂아져 있고 자스민향이 흐르고 모바일 폰이 대기하고 있다. 핑크빛 샨데리아 유리등이 온 방 안을 물 들이고 있다.
둥근 알 전구는 언제나 쉬지 않고 방 안을 지키고 있다.
4 . 필라멘트
전구는 번갯불을 가두어서 오래오래 간직하고 싶은 욕심 이 있다. 둥글게 감싸서 비추고 싶은 욕심이 있다. 번갯불만 있으면 언제든지 모아서 어느 때나 비출 수 있으리라 믿었다. 전구는 필라맨트에 번개빛을 모으기 시작했다.
필라맨트는 불빛이다 번개다.
5. 손잡이
간단한 쇠붙이나 플라스틱으로 만들었지만 이것이 없으면 열 수가 없다. 굳게 잠긴 자물쇠는 열쇠로 풀 수 있으나 이것이 없으면 열 수도 닫을 수도 없다.
이런 문 저런 문에 흔하게 붙어 있어서 아무도 귀한 줄을 모른다. 예쁘게 치장해서 아무도 모르게 나 혼자만 가지고 싶은 손잡이다.
6. 고백하기 좋은 날
무언가를 하기 위해서는 그걸 하기 좋은 날을 가리는 편이다.
꽃이 있으면 좋고 향기가 있으면 더욱 좋은 날이다. 불빛이 적당하고 의자는 딱딱하지 않아야 하고 향기처럼 은은한 리듬이 흐르는 분위기면 더더욱 좋다. 향내좋은 커피잔을 앞에 놓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분위기를 띄우면 고백하기 좋은 날이 된다.
7. 두드려본다
수박이 익었는지는 촉수를 세워서 두드려 본다. 꼭지도 살피지만 잘 익은 수박은 야물고 똑똑한 소리가 나는 것을 고른다. 피아노 건반 두드리듯이 두드려 본다.
잘 익은 수박과 성숙한 인격의 소유자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 말소리가 온화하고 힘이 있으면서도 부드럽고 기품이 담겨 있어야 한다.
귀에 대고 속삭이거나 콧소리는 간계가 들어 있다. 큰소리로 떠들고 하나는 소리는 돌아서면 잊는다.
키타는 현으로 음정을 조율한다. 두드려 본다.
8. 메아리처럼
되돌아 올 줄 알았기에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 메아리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서 부르지 못했습니다.
9. 농담처럼
농담처럼 진담처럼
좋아한다는 둥 사랑한다는 둥
꽃이 되어 다가온다는 둥
죽는 둥 사는 둥 이름을 불러주니 가는 둥 오는 둥
사랑할 때 하는 말 사랑합니다.
그 이름을 부르지 않아도 사랑하게 됩니다. 사랑하였으므로 부르지 않았습니다.
10.달팽이
습기 찬 그늘 밑에 피해 있다가 해가 지면 기어 오른다. 해 바라보다 바라기된 꽃대 위로 기어 오른다. 하늘 높이 기어 오른다. 생기길 돌돌 도는 돌팽이. 하기를 달을 보고 팽이처럼 돌돌 도는 돌팽이 달팽이.
달을 보며 팽이처럼 기어 오른다.
해바라기는 해를 바라보다 해바라기가 되었고 달팽이는 달을 보고 돌돌 돌다가 달팽이가 되었구나.
11.요리를 먹으러 갔다
사거리 길 모퉁이에 음식점이 하나 들어서 있다. 주차장이 꽤나 넓고 음식맛 소문이 나서 가끔 요리를 먹으러 간다. 친구들과도 가고 집식구들과도 가곤 한다. 종업원들이 하나같이 친절하고 카운터 사장이 그렇게 친절하다. 모처럼 가는 사람도 얼굴을 알아보고 아는 체를 한다.
무엇보다도 그 집의 특선 요리인 굴비 정식의 맛이다. 값도 별로 비싸지 않고 굴비를 굽는 정도가 적당해서 맛이 꽤나 괜찮다.
내일의 약속은 그집으로 예약을 해야겠다.
12.명치 부분
화살처럼 예리한 手刀로 번개처럼 명치를 찌르는 고수의 검객, 손을 칼처럼 쓰는 권법의 고수가 등장하는 영화는 주인공의 활약에 숨을 죽인다. 목숨을 거는 잔인한 싸움에 명치를 노리는 주인공은 누구며 흥분하는 관객은 누구인가?
싸움을 연출하며 싸움을 하며 즐기는
영화는 모두가 범죄다.
13.시계
태양이 지나는 길을 따라 가면서 그 길이를 잰다.
태양은 지나는 길에 그 흔적을 남기기 때문이다. 둥근 원을 돌면서 시침으로 길이를 잰다. 어제는 모른다. 내일도 모른다. 지구를 돌면서 부지런히 현재를 잰다. 시간은 언제나 현재다. 시침은 리듬으로 잰다.
14.녹아내리고 있다
요즈음은 아무리 추워도 고드름 보기가 쉽지 않다. 날씨 탓이 아니다. 고드름은 초가집 처마 끝에서 흘러 내리는 물이 얼어서 생긴다. 초가집이 없고 그나마 어렵사리 나타난 고드름은 보는 눈이 없다. 그것이 서러워 고드름은 눈물만 흘리고 있다.
15.서빙하고 있는 그녀
그녀는 연길서 온 유학생이다. 코리안 드림을 안고 할아버지 고향에 유학을 온 것이다. 대형 음식점 서빙을 하면서 고된 학업을 하고 있다. 그 음식점엔 월남인 학생 필리핀 학생 한국교포 3세들이 알바를 하고 있다. 서빙하고 있는 그녀들은 우리말이 서툴기는 해도 생각보다 능숙하다. 연길서 온 그녀는 주인이 시키지 않는 일은 하지 않는 원칙주의자로 능통성이 없다. 답답하긴 해도 원칙을 지키니 좋다.
16.발랄하다
청소년기 때는 하는 일이 다 연어처럼
생기 발랄하고 팔팔하다.
소녀는 마스크를 써도 치마가 길어도 발랄함을 감출 수가 없다. 운동화를 신고 화장을 하지 않아도 소녀일 수밖에 없다.
머리를 묶고 하장을 하지 않고 운동화를 신어도 소녀가 될 수 없다. 슬퍼할 일은 아니다.
17.눈빛으로
그는 말이 없다 꼭 필요할 땐 눈빛으로 말한다. 가끔씩은 한두 마디 하긴 한다 그리고는 입을 닫는다. 상대가 눈빛을 알아듣지 못하면 언젠가 모르게 행동으로 말한다. 눈빛은 말을 하는 빛이다.
18.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녀는 언제나처럼 민들래꽃처럼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녀의 말에는 언제나 서향화같은 향기가 있다. 그 향기가 맡고 싶은 나는 가끔 시간을 내서라도 그녀를 찾는다. 벽에 걸린 그녀의 묵향은 미소다 서향화다.
19.눈빛으로 바라본다
꽃은 나를 바라보고 나는 꽃을 바라본다.
꽃이 나를 바라보니 내가 꽃이 되어 다가간다.
내가 사랑스런 눈빛으로 바라보니 꽃도 나를 사랑스런 눈빛으로 다가온다.
바라본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이다.
다가간다는 것은 그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이다. 그 이름을 불 러준다는것은 사랑한다는 것이다.
20.등진 바다
가오리같은 私船을 타고 총알이 빗발치는 死線을 넘는다.
칠흑같은 바다 한 가운데 넙치같은 관광선은 하늘에 떠서 등진 바다를 가른다.
낭만같은 것은 다 토해나고 폭풍이 내려치는 파도소리는 지옥으로 가는 행진곡이다. 두 시간의 거리를 다섯 시간이나 걸려 목포항에 내리면 생사를 모르는 전화는 다섯 시간 동안 울렸단다.
육지로 가는 길은 멀기만 하다. 태풍이 그치고 떠오른 보름달과 한밤의 코스모스 차창밖은 달빛이 햇빛처럼 쏟아지고 있다. 태풍전야의 고요 태풍후야의 침묵 바다는 말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