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을 붕괴시킨 헬싱키 선언의 人權 조항
독재체제가 人權의 원칙에 동의하는 것은 독을 마시는 행위이다.
소련을 붕괴시킨 헬싱키 선언연구
故黃長燁 선생은 ‘狂犬을 겁내지말라’는 책에서 소련공산주의 체제의 붕괴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건을 네 개로 꼽았다.
1956년 소련공산당 서기장 흐루시초프에 의한 스탈린 격하운동. 스탈린은 소련뿐 아니라 국제공산당운동의 지도자이기도 했다. 스탈린 격하운동은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지도자를 끌어내림으로써 이 운동의 단결이 붕괴되었다. 毛澤東의 중공이 흐루시초프에 반발함으로써 소련과 중국이 분렬되고 미국에 대한 국제공산주의 세력의 공격력은 결정적으로 약화되었던 것이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사건. 흐루시초프가 미국의 코앞인 쿠바에다가 미사일과 핵무기를 반입, 설치하려는 모험주의는 케네디 대통령의 반격을 받았다. 미국이 소련과의 핵전쟁을 각오하고 쿠바를 해상봉쇄하자 소련은 핵무기와 미사일을 철수했다. 이는 소련의 권위를 떨어뜨려 1964년 흐루시초프 실각의 원인이 되었다.
1975년 헬싱키 선언. 소련이 서방세계가 제안한 人權조항을 받아들였다는 것이 공산권 붕괴의 한 계기가 되었다.
1985년 이후 고르바초프의 자진 해체. 그는 공산권 쇠퇴의 원인이 인권사상과 자본주의의 침투 때문이라고 판단하지 않고 계급 독재 등 사회주의에 내재한 모순 때문이라고 확신, 이를 개혁하는 과정에서 사회주의를 해체하고 말았다는 것이 黃長燁씨의 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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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분석관 부연====> 전 2010년 10.10일 노동당 창건일에
사망한 황장엽씨는 가짜 망명했다고 봅니다. 고난의 행군시기에
미유대의 선제 공격을 늦추고 북한붕괴설을 전파하기 위해 망명한
것으로 봅니다. 황장엽비서가 내놓은 소련 붕괴이유는 경청할 만한
가치가 있고, 저의 시각과 정합되는 의견인 것 같습니다.
쿠바 미사일 위기는 흐르시쵸프의 모험주의라고 판단했군요.
예전에 인터넷에 나도는 이야기는 북은 쿠바에서 소련이 비겁하게 물러난 것에
비판적이었다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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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싱키 선언이 한국에 주는 교훈
헬싱키 선언에 대해서는 좀 더 알아본다. 1969년 3월17일 소련의 주도하에 있던 동구 공산권의 집단안보체제인 바르샤바 조약기구는 서방세계에 대해 유럽안보회의의 소집을 공식적으로 제안했다. 소련의 목적은 1년 전에 있었던 체코슬로바키아 봉기를 소련이 무력진압한 데 따른 후유증을 해소하는 한편 취임한 지 얼마 되지 않는 닉슨 미국 대통령에 대해 일종의 선제공격을 거는 것이었다.
소련은 닉슨을 강경파로 인식하고 있었다. 소련이 제안한 議題는 서구와 동구의 화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공산화 과정에서 형성된 현재의 유럽 국경이 변경될 수 없다는 점의 확인, 그리고 독일 내부의 분계선에 대한 재확인 등이었다.
닉슨과 키신저는 이 제의를 선뜻 받아들이지 않고 베를린市에 대한 자유 접근권의 보장 및 유럽의 재래식 군사력 감축과 연결시켜야 회의에 참석하겠다고 답했다.
이 회의가 실제로 열린 것은 1973년6월이었다. 이 회의는 소련에 대해서 현재의 유럽 여러 나라들의 국경선이 침해할 수 없는 것이라는 양보를 해주는 대신 많은 것을 얻었다.
이 회의가 열렸을 때 서독 사민당 빌리 브란트가 시작한 동방정책에 의해 동독과 서독은 내부 분계선에 합의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서독으로 하여금 ‘국경선의 평화적인 변경’이란 조건을 이 회의에서 관철시키도록 뒷받침했다. 즉, “국경선은 국제법에 따라 합의에 의해서 평화적으로 변경될 수는 있다”는 조항을 헬싱키 선언에 포함시킨 것이다.
東歐의 해방을 가져온 인권조항
이 조항은 1990년에 독일 통일 과정에서 주도권을 쥔 서독이 소련을 설득하는 법적인 근거가 되었다. 이 ‘평화적인 변경’ 조항에는 또 “서명국가는 국제조직, 군사적 동맹을 포함한 多者間이나 상호 조약 기구에 가입하든지 가입하지 않든지 하는 자유를 가지며 중립 선택의 자유도 가진다”는 규정이 덧붙여졌다. 이 규정도 東歐 공산권이 해체될 때 위성국가들이 주권을 강조하면서 소련의 개입을 저지하는 법적인 장치가 되었다. 이런 조항을 내심 반긴 것은 소련의 무력적 내정간섭을 두려워하고 있었던 동구 위성 국가들이었다.
이 회의는 유럽 안보 협력 회의(the Conference on Security and Cooperation in Europe=CSCE)로 불리게 되었고 1975년의 헬싱키 선언 이후 존속된 조직체의 명칭은 유럽 안보 협력 기구(the Organization for Security and Cooperation in Europe)였다.
黃長燁씨가 말하는 헬싱키 선언이란 유럽안보회의가 1975년 헬싱키 선언에서 채택한 인권선언을 가리킨다.
이 조항은 사람과 사상의 자유로운 교류, 인권, 기본적인 자유의 보호를 규정한 것이다. 이 조항은 유럽국가들이 제안한 것이다. 그 목적에 대해서 키신저는 회고록 (Years of Renewal)에서 이렇게 썼다.
<우리 목적은 국제협정에 의하여 소련이, 1968년의 체코 및 1956년의 헝가리 봉기나 시위 같은 것을 앞으로는 탄압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벨이나 바웬사 같은 비전과 용기의 지도자들은 헬싱키 선언에 들어 있는 이 조항을 이용하여 공산 전체주의를 반대하는 근거로 삼았으며 마침내 동구유럽의 해방을 가져왔다.>
헬싱키 선언에서 반영된 人權 조항의 교섭을 주도한 것은 프랑스였다. 프랑스 지식인들이 북한인권 문제를 가장 열정적으로 제기하고 있는 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 유럽안보회의는 ‘군사적 신뢰조치’에 대한 합의도 이루었다. 예컨대 사단급 부대를 이동할 때는 30일 전에 관련국가에게 통보해야 한다는 조항을 둔 것이다. 이런 조항도 재래식 군사력에서 우세한 소련의 행동을 제약하는 것이었다.
남북기본합의서는 휴지?
포드 대통령이 헬싱키 회의에 참석하여 한 연설 가운데는 이런 대목이 있다.
“미국은 이 회의가 합의한 원칙들을, 인류를 위해 보전해야 할 유럽 문명의 위대한 유산의 하나로 간주한다. 우리나라에 있어서 이런 것들은 공허한 말이나 진부한 표현들이 아니다. 우리는 이 작업과 말들을 심각하게 여길 것이다. 여러분들은 미국 정부와 국민들이 인권과 기본적인 자유에 대해서 갖고 있는 깊은 신념을 알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포드 대통령은 이렇게 덧붙였다.
“역사는 오늘 우리가 말한 것이나 우리가 약속한 것으로 이 회의를 평가하지 않고 우리가 내일 무엇을 할 것인가, 그리고 우리가 약속을 지켜낼 것인가로 평가할 것이다.”
포드는 이 대목을 이야기할 때 일부러 맞은 편에 앉은 소련 서기장 브레즈네프의 눈을 노려보았다고 한다. 서방세계는 포드의 이 약속을 지켰다. 따라서 헬싱키 선언은 말장난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역사를 바꾸는 강력한 무기가 되었던 것이다. 서방세계는 소련에 대해 헬싱키 선언을 계속해서 상기시킴으로써 이 선언이 소련의 행동을 규제하는, 즉 인권탄압을 못하게 하는 강력한 수단이 되도록 했던 것이다.
1991년에 남북한이 맺은 기본합의서는 우리측의 주도로 이루어진 합의였다. 이 합의대로 하면 남북한은 평화공존의 길을 걸으면서 통일로 가는 前段階의 교류와 협력을 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북한은 이 합의서의 이행을 거부했다. 남한은 이 합의서의 이행을 북한에 강제할 수단이 없었다. 그 뒤의 정권-金泳三, 金大中 정권은 이 합의서를 잊었다. 북한과 대화할 때 항상 이 합의서의 이행을 촉구했어야 했는데 다른 정권에서 만든 것이라고 그랬는지 그런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
1972년의 7.4 공동 성명은 통일3원칙으로서 북한이 주장해온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을 받아들임으로써 그 뒤 북한이 주한미군철수와 국가보안법 철폐 등을 요구하는 빌미를 제공했다. 이 공동성명보다도 훨씬 구체적으로 진전된 실천계획이 남북기본합의서였다. 교류, 경제협력, 군사적 긴장완화 등 거의 모든 부문에 대한 구체적인 합의가 이루어진 이 문서는 대한민국 측의 의지 부족으로 휴지가 되고 있다.
金大中 대통령은 김정일를 만나기 전까진 기본 합의서를 강조하더니 평양 會談에선 우리에게 불리한 7.4공동성명의 연장선상에서 북한의 요구를 많이 받아들인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金大中 대통령은 왜 7.4공동성명과 함께 남북관계를 규율하는 가장 중요한 문서인 남북기본합의서에 대해서 한 마디도 하지 않았던가. 盧泰愚 정부의 가장 큰 성과인 남북기본합의서를 스스로 無力化시킨 것이다. 그러면서도 북한의 연방제 통일방안과 남한의 연합제 통일방안에 공통점이 있다고 합의해준 것은 북한 측으로선 남북 대화 30년만의 일대 성과라고 환호할 만한 일이었다.
남북관계의 기본 문서에 한국 측이 북한의 통일원칙을 받아들이면서 우리의 원칙이어야 할 자유와 인권에 대해서 한 마디도 반영시키지 못한 것은 과연 한국 측이 통일의 주도권을 잡을 수 있을까 하는 회의마저 갖게 하였다.
헬싱키 선언도 휴지가 될 수 있었다. 미국 등 서방세계가 이를 선언으로만 인식했다면. 그러나 미국의 歷代 정권은 헬싱키 선언을 對蘇정책의 기본틀로 생각하고 이를 근거로 소련을 압박하여 공산권의 붕괴를 촉진했던 것이다. 남북간에 아무리 근사한 합의가 있어도 그것을 관철시킬 만한 지도자의 신념과 國力과 국민들의 합의가 뒷받침되지 못하면 선언은 좋은 말로서만 기억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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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소련측에서 본 헬싱키 선언
인간의 사고능력이란 무서운 것이 세계를, 역사를 바꾸는 힘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저는 요사이 어떻게 하면 최소한의 경비를 지불하고 김정일 정권을 붕괴시킬 것인가를 골똘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참고가 될 만한 역사적 事例를 찾아보면 1975년 헬싱키 선언이 있습니다. 소련과 동구 공산권의 붕괴를 가져오는 데 있어서 이 선언이 한 역할에 대해서는 과거 조금 언급했습니다만 이번에는 소련측에서 이 선언을 어떻게 보았는지 검토해보기로 합시다.
아나톨리 도브린이란 사람을 기억하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1962년에 미국 주재 소련 대사로 부임하여 그 뒤 24년간 케네디, 존슨, 닉슨, 포드, 카터, 레이건까지 여섯 대통령과 그 정부를 상대했던 거물 외교관이었습니다.
도브린이 은퇴후에 쓴 회고록 'In Confidence'(비밀로)가 1995년 미국의 타임스 북스(Times Books) 출판사에서 나왔습니다. 여기서 그는 헬싱키 선언을 이렇게 평했습니다.
<헬싱키 선언은 1975년8월1일에 서명되었다. 이 선언은 그 뒤 소련과 동구 공산국가 내부에서 자유화 운동이 오랫동안 골치아프게 진행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것은 결국 이들 국가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와 냉전이 종식되도록 하였다.>
헬싱키에서 열렸던 회의의 공식 명칭은 유럽의 안보와 협력에 관한 회의(The Conference on Security and Cooperation in Euriope)였습니다. 미국을 포함한 35개국이 참여했는데, 이는 나폴레옹 전쟁을 마무리한 1815년 비엔나 회의 이후 최대 규모였습니다.
이 회의는 소련이 유럽과 미국을 이간질시키려고 제안했던 것인데 미국이 거부하는 바람에 묵혀 있다가 1973년 닉슨 대통령의 결단으로 미국이 참석하면서 예비 회담이 2년간 계속되었습니다.
의제는 세 가지였습니다. 안보, 경제협력, 인도적 협력. 소련은 안보와 경협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미국측은 인도적 협력 즉 인권의 원칙을 이 선언에 집어넣으려고 했습니다.
소련은 인권문제는 국내문제라는 전제하에서 국제협정으로 이에 간섭하는 것을 거부하려 했습니다. 미국측은 소련이 인권 조항에 동의하지 않으면 안보 및 경협 부문에 대해서 동의해줄 수 없다고 버티었습니다.
소련은 이 회의에서 2차 세계 대전 이후 새로 책정된 폴란드 등 동구 공산국의 국경선을 서방으로부터 보장받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서방에서 人權조항을 들고나오는 바람에 낭패한 것입니다. 인권조항에는, 서명국은 기본적 인권, 이동의 자유, 사상 교류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습니다.
브레즈네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은 이 선언의 초안을 정치국 회의에 보내 토론하게 했습니다. 정치국 위원 중 수스로프, 코시긴, 포드고르니, 안드로포프는 인권조항을 받아들인다면 국내문제에 대한 국제사회의 간섭을 허용하게 될 것이라면서 반대했습니다.
많은 소련 대사들도 이 조항 때문에 국제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 회의를 준비했던 그로미코 외무장관이 이 초안을 옹호하고 나섰습니다. 그는 '무엇이 內政 간섭인가 하는 것을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소련정부뿐이다. 우리는 우리 집의 주인이다'고 말하면서 걱정하지 말라고 설득했습니다.
브레즈네프도 그로미코 편을 들었습니다. 그는 헬싱키의 거대한 국제頂上회담장에 나가서 세계 언론의 조명을 받는다는 것에 매료되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때 소련이 2천만 명 이상의 人命을 희생시켜가면서 확보한 국경선을 서방이 인정해준다는 것은 기가 막힌 선전 무대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는 또 이것을 소련 국내 선전에 잘 활용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인권조항에 대해서는 소련 국내에 간단하게 소개하면 그만일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소련은 헬싱키 최종 협정(Helsinki Final Act)라고 불리는 선언에 서명했던 것입니다.
도브리닌은 회고록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브레즈네프의 판단은 잘못된 것임이 곧 밝혀졌다. 소련의 反체제 세력은 이 역사적 문서에 의해 크게 고무되었다. 프라우다에 보도된 이 선언의 全文은 소련 정부의 공식 문서와 같은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이 문서는 反체제 자유 세력의 헌장처럼 되었다. 이것은 소련 지도층이 상상하지 못한 사태 전개였다.>
재미 있는 것은 브레즈네프를 함정에 빠뜨려 냉전에서 미국이 승리하도록 한 초석을 놓았던 포드 대통령은 미국 언론으로부터 집중적인 성토를 받았다는 점입니다. 소련에 너무 많은 양보를 했다고. 공화당내 포드의 경쟁자였던 레이건 지사(뒤에 대통령)도 포드를 공격했습니다.
미국 포드 대통령은 키신저 국무장관의 도움을 받아 이 회의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양보를 소련으로부터 받아냈습니다. 동구권 국가의 국경선을 인정해준다면서 단서 조항을 하나 끼웠던 것입니다. 즉, 평화적 방법으로써 국경선을 변경하는 것은 합법적이란 조항이었습니다. 이 조항은 서독 정부의 부탁을 받아 미국이 밀어붙인 것이었습니다.1990년 동서독이 통일될 때 이 조항으로 해서 소련은 동서독 사이의 國境변경에 대해 불법이란 항의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 헬싱키 선언이 동구 공산국가들에게 미친 영향도 큰 것이었습니다. 인권조항 덕분에 폴란드 같은 데서 反共시위가 일어나도 과거처럼 소련 군대를 보내 탄압하기가 논리상 어렵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차린 바웬사 같은 지도자들이 폴란드에서 반공 노조 운동을 열심히 벌여 공산권 붕괴의 불길을 당겼던 것입니다.
자, 위의 헬싱키 선언 공식을 북한의 북한 정권에 어떻게 적용하면 될까요. 김정은이 자멸의 길을 열지로 모르는 인권의 원칙을 수용할 리가 없습니다. 그것을 수용하지 않으면 내가 죽겠다는 판단을 스스로 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예컨대 북한이 또 핵실험을 하면 유엔 안보리 결의로 北核 문제 해결을 위한 더 강력한 對北 경제 제재를 걸어놓습니다. 예컨대 항만과 해운봉쇄도 합니다. 이렇게 해두고 기다리면 김정은 정권은 협상 테이블에 나올 것입니다.
국제사회가 유리한 입장에서 김정은과 협상이 가능해질 때 협상 의제로 인권조항을 넣는 것입니다. 인간 이동의 자유, 사상의 자유, 정치수 수용소 폐지, 이산 가족 재결합 등등을 저들이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북한의 내부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 교두보가 생겨 민주화 운동이 가능해질 것입니다. 만약 김정은 정권이 인권 조항을 지키지 않으면 국제사회의 간섭을 받아야 하게 됩니다.
인권문제는 內政이 아니라 국제사회 공통의 문제이므로 인권탄압을 하는 국가를 국제사회가 응징하는 것은 합법적인 행위, 때로는 경찰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함께 생각해봅시다. 김정은의 핵공갈에 대해 한국 미국이 인권을 들고 나와 대응한다면 누가 이길지. 인권, 즉 사랑의 원자탄이 공포의 원자탄을 녹일 것입니다. 인권은 세계 여론, 특히 NGO와 진보세력의 지지를 끌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북한인권법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북한에서 민중봉기가 나서 김정은이 위태해지면 국군을 보내서 김정일을 보호하자고 할 사람들입니다. 인권이야말로 북한정권을 평화적으로 붕괴시켜 2300만 동포들을 해방시킬 수 있는 사랑의 원자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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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분석관 부연:
조갑제나 숭미수구들이 인권전략에 기대는 것은
헬싱키 선언에 의한 소련과 동구권의 붕괴 경험에서 나옵니다.
미국도 90년대 이후 북미대결전에서 이러한 전략을 줄곧 적용하기 위해
공작적인 노력을 열심히 해왔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이야기는 워낙 공개되고 대중화된 전략이고 누구나
떠드는 이야기일 뿐이죠. 즉 현실적 가치가 없다는 겁니다.
좌우를 떠난 모든 대중이 인지하고 우려하고 선동하는 모토는
실체와 거리가 멉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2007년 이후에는
북이 미유대의 초패권 질서의 내부를 해체하고 붕괴키는
반제 반패권 작업을 진행되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미유대의 기존 질서의 세계는 겉만 멀쩡한 거대한 맘모스일 뿐
안은 해체되어 불고기 파티, 순대 파티가 열리고 있는 셈입니다.
75 헬싱키선언의 인권조항은 그 여파에 대해서
소련 정치국 안에서 논쟁이 있을 정도로 모호한 성격이었지만,
지금 인권전략에 북이 붕괴한다는 주장은 조갑제를 비롯한 수구 똘망이,
그리고 진보쪽의 대부분의 사람들의 머리 속에 있기 때문에
실체와는 거리가 멉니다. ))))
첫댓글 강대국의 국제관계, 외교적 힘겨루기, 참 복잡하네요.
근데 우리 정부는 너무 쉽게, 정권만 유지하면 된다는 논리로 나가는 거 같아 안타깝습니다.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4.11.24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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