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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의 갈릴리 가버나움
마태복음 4:12-17 2025/6/22 성령강림 후 제2주
4:12 예수께서 요한이 잡혔음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4:13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4:14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4:15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4:16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
4:17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평안의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모두에게 그리고 우리 자녀와
고난 받는 이웃들에게 늘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어떤 분이 저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성경이 뭐에요?’
‘성경’이 무엇일까요?
먼저 마태복음을 기록한 마태는 성경을 반드시 성취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마태복음을 읽을 때, 종종 이런 표현과 마주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1:22, 2:15, 2:23)
반면, 마가복음을 기록한 (요한)마가의 성경관은 결이 좀 달랐습니다.
마가 역시 자신의 복음서를 시작할 때, 구약성경(이사야서)을 적극 인용하고 있지만, 마태처럼 ‘성취되는 예언’ 곧 ‘반드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의 관점 보다는 ‘언제’ 하나님의 말씀이 실현했는지에 좀 더 초점을 맞춥니다. 그래서 마가는 ‘즉시, 즉각, 곧’ 이라는 뜻을 가진 부사 ‘εὐθὺς(에우튀스)’라는 단어를 일부러 많이 사용합니다.(40회)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즉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막1:14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1:15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바로 지금’이라는 ‘임박한 시간’을 강조)
* 그리스도를 통하여 즉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말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한 이방인 저자, 누가의 성경관은 역동적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지금도 땅 끝, 어딘가로 힘차게 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대 단원을 이렇게 마무리 짓습니다.
행28:30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①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28:31 ②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③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 모든 사람들에게 전파하고 가르쳐야할 하나님의 말씀
요한복음을 기록한 요한의 성경관은 두 가지입니다.
요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①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②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생명을 얻어야할 하나님의 말씀
여러 서신서를 기록한 사도 바울의 성경관을 어떠했을까요?
(새한글)딤후3:16 성경은 ①다 하나님이 숨을 불어 넣으신 것으로, ②가르치고, 꾸짖고, 바로잡고, 의로 교육하는 일에 유익한 것이네. 17그리하여 ③하나님의 사람이 온갖 선한 일을 하는 데에 제대로 채비를 갖추어 자격 있는 사람이 되도록 한다네.
*하나님의 사람으로 자격을 갖추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
찬송가 199장입니다.
이 찬송가의 가사를 지은 이에게 있어서 ‘성경’은 어떤 책이었을까요?
①나의 사랑하는 책(1절, 후렴 끝)
②어머니의 무릎 위에 앉아서 재미있게 듣던 말(1절, 후렴)
③잊지 않고 기억하는 책(1-3절)
④주의 뜻을 따라 살게 하는 지침서(4절)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서
누군가가 여러분에 ‘성경이 뭐에요?’라고 묻는다면,
여러분은 무엇이라고 답하시겠습니다.
저는 이렇게 답하고 싶습니다.
‘날 사랑하신다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찬송가 202장 1절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신 책은 귀하고 중하신 말씀일세
기쁘고 반가운 말씀 중에 날 사랑한다말 참 좋도다
주께서 나를 사랑하니 즐겁고도 즐겁도다
주께서 나를 사랑하니 나는 참 기쁘다.
그러니 여러분 낙심하지 마시고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께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1. 하나님, 주님은 앞에서 나를 인도하십니다.
주님을 사랑합니다. 아멘
2. 하나님, 주님은 오른쪽에서 나의 힘과 그늘이 되십니다.
주님을 사랑합니다. 아멘
3. 하나님, 주님은 왼쪽에서 나를 붙들어 주십니다.
주님을 사랑합니다. 아멘
4. 하나님, 주님은 위에서 나를 돌보십니다.
주님을 사랑합니다. 아멘
5. 하나님, 주님은 아래에서 나를 업어주십니다.
주님을 사랑합니다. 아멘
6. 하나님, 주님은 뒤에서 나를 안아주십니다.
주님을 사랑합니다. 아멘
7. 하나님, 주님은 모태에서 나를 주님 형상으로 빚으셨습니다.
주님을 사랑합니다. 아멘
8. 하나님, 주님은 내 안에 현존하시며 내 안에서 활동하십니다.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 내가 여기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이 됩니다.
마4:12 예수께서 요한이 잡혔음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13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나사렛’ 고향을 떠나, 예수님이 새롭게 정착한 곳은 갈릴리 호수 북서쪽에 있는 어촌마을 ‘가버나움’이었습니다.
‘가버나움’
그 역사의 뿌리는 가나안 정복기인 여호수아 시대로 올라갑니다.
여호수아 19장에 따르면, ‘가버나움’은 스불론 지파와 납달리 지파에게 분배된 언약의 땅이자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의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주전 732년입니다.
스불론 지파와 납달리 지파 사람들이 앗시리아 제국과의 전쟁에서 폐하고, 단 한 명도 빠짐없이 제국의 노예로 끌려가는 치욕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자 주인이 사라진 그 빈자리를 채운 사람들이 있었는데,
바로 수많은 이방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붙여진 수식어가 ‘이방의 갈릴리’였습니다.
마4:15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가버나움)여
여기서 우리는 이런 합리적인 질문을 하게 됩니다.
왜 하필 ‘이방의 갈릴리’라고 놀림을 받는 ‘가버나움’이었을까?
전통유대인들이 살고 있는 ‘예루살렘’으로 향하지 않고,
왜 ‘이방의 갈릴리’라는 부정적인 딱지가 붙어 있는
‘가버나움’으로 가서 공생애,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사역을 공적으로 시작하셨을까요?
그 이유를 마태는 자신의 성경관에 따라 이렇게 답합니다.
마4:13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4:14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그러면서 마태는 ‘이루어진 하나님의 말씀’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인용합니다. *그리스(헬라)어로 번역된 칠십인역(Septuagint, LXX)
마4:15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4:16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
자 여기서,
마태가 인용한 선지자 이사야의 원문(히브리어 성경)을 보아야겠지요?
(새)사9:1 어둠 속에서 고통받던 백성에게서 어둠이 걷힐 날이 온다.
옛적에는 주님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으로 멸시를 받게 버려두셨으나, 그 뒤로는 주님께서 서쪽 지중해로부터 요단 강 동쪽 지역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이방 사람이 살고 있는 갈릴리 지역까지, 이 모든 지역을 영화롭게 하실 것이다.
9:2 (왜냐하면)①어둠 속에서 헤매던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②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쳤(기 때문이다)다.
그러니까 복음서를 기록한 마태는 ‘이방의 갈릴리’라고 손가락질을 받는 ‘가버나움’에 대해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옛적에는 ‘가버나움’이 버림받은 땅, 저주의 땅이었지만
이제는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가버나움’이
그 어느 지역보다 영화로운 땅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어둠 속에서 헤매던 백성이 가버나움에서 ‘큰 빛’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의 빛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둘째,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땅 곧 가버나움에 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영광’,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대속의 은총)’이 비추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마태는 무슨 근거로,
버림받고 저주 받은 땅 가버나움이 영화롭게 되었다고 했을까요?
그것은 예수님이 가버나움에서 처음으로 선포하신 말씀
바로 이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마4:17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그러니까 마태는 천국이 가까이 오는 회개의 역사, 하나님께 돌이키는 구원의 역사가 이방의 갈릴리 가버나움을 하나님의 구원을 목격하는 땅,
하나님의 은총이 머무는 영광의 땅으로 바꾸어 놓았다고 확신했던 것입니다.
실제로 이방의 갈릴리 가버나움에서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구원의 역사로 넘쳐났습니다.
첫째 이방의 갈릴리 가버나움에서 ‘사람 낚는 어부’가 처음으로 세워지게 됩니다.
마4:18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4:19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하나님나라의 초대된)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그렇게 해서 시몬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그리고 마태복음서의 저자 마태가 ‘사람 낚는 어부’ 곧 ‘하나님의 일꾼’이자 ‘사도’가 됩니다.
어디서요?
‘이방의 갈릴리’라고 손가락질을 받고 놀림을 받았던 ‘가버나움’에서요.
둘째 가버나움에서 벌어진 놀라운 구원의 역사는 ‘팔복’으로 시작되는 ‘산상설교(5-7)’가 선포되었다는 것입니다.
마5:3 ①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5:4 ②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5 ③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5:6 ④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5:7 ⑤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5:8 ⑥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5:9 ⑦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5:10 ⑧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5:11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5: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셋째 이방의 갈릴리 가버나움에서 벌어진 놀라운 구원의 일은 가장 위대한 기도 가장 완벽한 기도, 가장 모범적이고 능력 있는 기도 ‘주기도문’ 탄생했다는 것입니다.
마6: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6:10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6:11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6: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6: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넷째 이방의 갈릴리 ‘가버나움’에서 일어난 놀라운 구원의 일은 천국이 가까워지는 기적이었습니다.
①1-4: 나병환자의 치유
②5-13: 가버나움 백부장 하인의 중풍병 치유
③14-15: 베드로 장모의 열병치유
④16: 귀신들린 자의 치유와 병든 자들의 고침입니다.
마8:16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 내시고 병든 자들을 다 고치시니
8:17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말씀을 마칩니다.
가끔 하나님의 사랑이 의심될 때가 있습니다.
어둠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심지어 죽음의 그림자가 나를 삼키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마치 내 삶이 이방의 갈릴리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이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마4:17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하나님께 돌이키라)
천국(하나님의 구원 하나님의 영광)이 가까이 왔느니라
요즈음 자주 듣는 찬양인데 함께 불러보겠습니다.
그대 폭풍 속을 걷고 있을 때 비바람을 마주해야 할 때
불빛조차 보이지 않아도 그대 혼자 걷지 않을 거예요.
두려움 앞에서 하늘을 보아요. 외로운 그대여 걱정 마요.
꿈꾸는 그 길을 또 걷고 걸어요. 그대 혼자 걷지 않을 거예요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