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상 임상옥과 추사 김정희
어느 정도 술기운이 오르자 임상옥이 입을 열어 말하였다.
"김 생원, 한 가지 묻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무슨 말씀이시오니까."
"어떤 사람이 지금 백척간두(百尺竿頭)에 올라서 있습니다. 오도가도 할 수 없고 꼼짝없이 죽게 되어 있습니다."
백척간두.
백 자나 되는 높은 장대 끝이라는 뜻으로 매우 위태롭고 어려운 지경을 말함인데 임상옥은 위태로운 자신의 지경을 그렇게 표현하였다.
"그러하니, 그 사람이 어떻게 하면 그 백척간두에서 내려올 수 있겠습니까."
"백척간두에서는 내려올 수 없습니다."
김정희가 단숨에 말하였다.
"그러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백척간두 위에서 올 수도 갈 수도 없고, 꼼짝할 수 없으니 그 장대 끝에서 어떻게 하면 살아날 수 있겠습니까."
"백척간두 끝이라 해도 살아나는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옛 중국의 선사 중에 석상(石霜)이란 화상이 계셨습니다. 이 스님이 바로 백척간두에서 살아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신 분입니다."
김정희는 휴대용 붓을 쥐어들고 종이 위에 다음과 같이 글을 써내렸다. 소문으로만 듣던 추사의 운필이었다. 과연 명필 중의 명필로 이는 인간의 솜씨가 아니라 신의 필력이었다. 일필휘지로 써내린 문장은 다음과 같았다.
百尺竿頭須進步(백척간두수진보)
十方世界現全身(시방세계현전신)
글을 쓰고 나서 김정희는 말하였다.
"석상화상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백척간두 위에서 다시 걸어나아가라. 그러면 시방세계의 전신을 볼 수 있으리라. 백척간두 위에서 살 수 있는 방법은 그 벼랑 끝 위에서 다시 한 발자국 나아가는 것입니다."
"백척간두 위에서 다시 한 발자국 나아가면 그것은 죽음이 아닙니까."
"죽음을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오직 죽음 뿐입니다. 백척간두 위에 앉아 있다고 하여 죽음을 물리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임상옥은 추사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이러한 임상옥의 마음을 눈치챈 듯 김정희가 다시 붓을 들어 종이 위에 단숨에 문장 하나를 써내렸다.
"必死卽生 必生卽死(필사즉생 필생즉사)"
임상옥은 그 말의 뜻을 알고 있었다.
'반드시 죽기를 각오하면 살 것이요, 반드시 살기를 꾀하면 죽을 것이다.'
"이 문장을 쓴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계시겠지요."
김정희는 임상옥에게 물어 말하였다. 임상옥은 대답 대신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이 문장을 쓴 사람은 이순신 어른이십니다. 그분의 말씀처럼 죽음을 물리칠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은 반드시 죽는 필사의 길 단 한가지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백척간두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갱일보(更一步)하여 다시 한 발자국 나아가는 방법뿐입니다."
임상옥의 머리 속에 벽력이 번득였다. 임상옥은 손을 들어 무릎을 치면서 말하였다.
"아."
그 한순간 임상옥은 큰스님 석숭이 써준 죽을 사(死)자의 의미를 깨달은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