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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국민학교(초등학교)6학년이었던 1961년 봄, 박정희는 혁명에 성공하고 MBC가 학꾜짝(나무통)라디오가 유선으로 설치되었다. 그리고 라디오를 틀면 나오는 아나운서의 유창한 목소리는 박정희의 혁명을 찬양하는 소리로 일관되었던 시절이었다. "나는 반공을 국시의 제1의로 삼고 지금까지 부패했던......일소하고'''''- 당시 길거리에서 헌병들이 지나가는 학생들에게 이것을 외우지 못하면 무릎을 꿇쳐놓고 기합을 주었다. 또한 학교에서는 선생님이 이것(혁명공약)을 외우지 못하면 교실바닥을 반질반질하게 닦아야 하는 체벌?을 주었던 시절이었다.
==========================이하의 기사출전: “(hani.co.kr)"
친애하는 애국 동포 여러분! 은인자중하던 군부는 드디어 今朝未明(금조미명)을 기해서 일제히 행동을 개시하여 국가의 행정, 입법, 사법의 3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이어 군사혁명위원회를 조직하였습니다.
군부가 궐기한 것은, 부패하고 무능한 현 정권과 기성 정치인들에게 더 이상 국가와 민족의 운명을 맡겨 둘 수 없다고 단정하고 백척간두에서 방황하는 조국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것입니다.
군사혁명위원회는 첫째, 반공을 國是(국시)의 제1義(의)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친 반공체제를 재정비 강화할 것입니다.
(후략)
1961년 5·16 쿠데타 직후 박정희 소장
쿠데타 포고문에 반공이 ‘국시의 제1의’로 등장한 것은 남로당 전력이 있는 박정희 소장이 자신의 이념 성향에 대한 의심을 누그러뜨리기 위한 것이라는 설명이 가장 유력합니다. 동시에 박정희 쿠데타 세력이 본질적으로 분단 체제에 기생하는 기득권 세력이라는 설명이 가능합니다. 사실은 바로 이 5·16 쿠데타 포고문의 ’반공 국시’ 때문에 뒷날 유성환 의원이 ’통일 국시’ 발언을 하게 된 것입니다. 유성환 의원은 생전에 “통일 국시에 대한 생각은 박정희 정권 때부터 마음에 담게 됐다. 박정희 정권에서 ‘혁명공약 1호’로 반공을 국시로 내세웠는데,-참조:
박정희와 루즈벨트는 라디오로 성공?했다.
또한 히틀러의 나치선전장관이자 히틀러가 죽고 난 단 하룻동안(1일 총리)했던 괴벨스도 라디오를 통하여 히틀러의 나치를 정당화했다.
파울 요제프 괴벨스(독일어: Paul Joseph Goebbels, 문화어: 파울 요제프 겝벨스, 1897년 10월 29일~1945년 5월 1일)는 나치 독일의 정치인으로 베를린의 대관구지휘자, 나치당의 최고선전가이자 1933년부터 1945년까지 대중계몽선전국가부의 장관이었다. 그는 아돌프 히틀러의 가장 가깝고 헌신적인 수행자 중 한 명으로, 그는 그의 대중 연설 내용과 그가 공개적으로 밝힌 견해에서 분명히 드러난 그의 매우 악의적인 반유대주의로 유명했다. 그는 홀로코스트에서 유대인을 말살하는 것을 포함하여 더 강한 차별을 옹호했다.
파울 요제프 괴벨스Paul Joseph Goebbels,
작가가 되기를 원했던 괴벨스는 1921년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서 문헌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1924년에 나치당에 가입했고, 나치 북부 지역에서 그레고어 슈트라서와 함께 일했다. 그는 1926년 베를린의 대관구지휘자로 임명되어 당과 당의 계획을 사람들에게 고취시키기 위해 프로파간다(선전)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1933년 나치가 집권한 이후 괴벨스의 선전부는 신속하게 나치 독일 내의 뉴스 매체, 미술과 정보를 장악하고 통제했다. 그는 선전 목적으로 라디오와 영화라는 당시에 새로 등장한 매체들을 이용하는 것에 능숙했다. 당의 선전 주제에는 반유대주의와 기독교 교회에 대한 공격,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 국민들의 사기 향상 시도가 포함되었다.
나는 이 글에서 라디오를 논의하는 게 아니고 여기에 등장하는 3명의 인물들이 시의적절하게 라디오를 이용했다는 이야기다. 다만 히틀러와 루즈벨트가 1930S에 인물이요 박정희는 1960년 대의 인물이라는 것이다. 한국과 미국 그리고 국가경제와 지도자의 결단이라는 이야기가 당시의 미국소설,
"위대한 겟츠비" (참조: 나 보다 더 불리한 사람은 많다) 와
"분노의 포도" Tobacco Road -- John Ford 라는 시대극을 불러일으켰다.
현재의 이재명의 "소비쿠폰"과 케인즈이론을 등식화할 수는 없지만 이쯤해서 케인즈의 "소비경제 이론"을 등판시키자면 이렇다.
" 케인스 경제학(Keynesian economics)은 20세기 영국의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사상에 기초한 경제학 이론이다. 케인스 경제학은 여러 경제학자들이 방임주의의 실패로 인한 것으로 여기는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해 개발되었다.
케인스의 이론은 거시경제적 흐름이 각 개인들의 미시적 행동을 압도할 수 있다고 말한다. 경제적 과정을 잠재 생산의 지속적인 성장으로 보는 18세기 후반 이후 고전파 경제학자들의 관점과는 달리, 케인스는 (특히 불황기에) 경제를 이끌어 가는 요소로서 상품에 대한 총수요를 강조했다. 이런 관점에서 케인스는 1930년대의 높은 실업률과 디플레이션에 대해 거시적인 규모에서 대처하기 위해 정부가 정책적으로 소비를 유도해야 한다고 논했다. 불황기에 정부가 지출을 늘리면 보다 많은 돈이 풀려서 시민들의 소비와 투자가 유도되어 경제가 정상 상태를 회복한다는 케인즈의 주장은 공급측면 경제학에 반대되는 의미로서 소비측면 경제학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케인즈 학파의 주장은 소위 통화주의자들과 많은 논쟁을 겪었다. 특히 통화정책과 재정정책의 장단기 효과에 대해서 두 학파의 학자들간에 많은 논쟁이 있었다. 케인스 학파의 학자들은 재정정책을 선호했지만, 통화주의자들은 재정정책의 구축효과 등을 지적하며 통화정책이 우월하다고 하였다. 경제 대공황 이후에 사람들은 존 케인스의 주장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고, 케인스는 자신의 저서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 이론'에서 완전고용을 실현·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유방임주의가 아닌 소비와 투자, 즉 유효수요를 확보하기 위한 정부의 보완책(공공지출)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1930년대 경제 대공황, 두 차례의 세계전쟁 이후 서구에서 시행하는 복지사회는 케인스의 이러한 주장이 반영되어 나타난 결과이다. (자유방임주의는 1873년부터 1896년까지 20년 넘게 세계를 강타한 최초의 세계적 '대불황', 1930년대 경제 대공황 이후 사실상 막을 내렸다.)
이제, 오늘 이 아름다운 새벽에 온갖88개의 성좌가 빛나던 밤하늘이 밝아지는 이 시점에 나는 불후의 루즈벨트를 구원 등판시키고자 이 글을 독자여러분에게 드린다. - dhleepaul
프랭클린 D.루스벨트 미국의 4선 대통령이자 종신대통령
[ Franklin Delano Roosevelt ]
출생 - 사망: 1882.1.30. ~ 1945.4.12.
1933.3.12 루스벨트 대통령이 국민을 상대로 첫 번째 라디오 연설을 하다
승자를 찬양하고 패자를 경멸하는 미국 문화에서, 그는 가난하고 실패한 사람들의 친구였다. 그는 낙담하고 절망한 사람들을 격려하며, 함께 미국의 새로운 판을 짜자고 외쳤다. 그는 실질적으로 종신 집권을 한 셈이지만, 아무도 그를 독재자라고 부르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민중과 대화할 줄 아는 보기 드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위대한 개츠비"처럼 맹부적 부(富)의 추구로 행복을 찾으려 했던 1920년대 미국
우리는 그를 프랭클린 D. 루스벨트라고 부른다. 루스벨트가 어떤 사람인지 이야기하기 전에, 그가 정치활동을 했던 20, 30년 대 미국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두 개의 소설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위대한 개츠비>를 모르고서는 1920년대 미국을 이해할 수 없고, <분노의 포도>를 읽지 않고는 1930년대 미국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소설들은 모두 아메리칸 드림의 빛과 그림자를 다룬 작품이다. 사람들은 미국을 기회의 땅, 자유의 나라라고 부른다. 미국은 언론과 표현의 자유가 있으며 종교의 자유가 있다. 국가가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지 않기 때문에, 미국에서는 능력만 있으면 누구든 성공할 수 있다. 그것이 아메리칸 드림이다. 덕분에 미국에서는 성공이 개인의 탁월함을 증명하는 유일한 증거가 되었다. 미국인들이(혹은 우리가) 성공에 목을 매는 것은 자신의 존재 가치를 인정받고 싶기 때문이다. 그것은 소설 속의 개츠비도 마찬가지였다.
가난한 집안 출신인 개츠비는 미국인답게 성공을 꿈꾸는 청년이었다. 그는 우연히 데이지라는 상류층 여자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가 아름답고 부유한 데이지에게 사랑을 느낀 것은 당연했다. 그녀는 그가 애타게 원하는 아메리칸 드림을 상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데이지는 개츠비를 버리고 부유한 집안의 톰 뷰캐넌과 결혼한다. 개츠비는 밀수업으로 큰돈을 번 후, 데이지의 옆집으로 이사한다. 그리고 매일 밤 그녀를 만나기 위해 파티를 연다. 불행한 결혼 생활을 하고 있던 데이지는 개츠비를 보자 마음이 흔들린다. 그녀는 개츠비에게 자신이 사랑한 것은 그뿐이었다고 말한다. 그 당시 데이지의 남편 톰은 가난한 정비공의 아내 윌슨 부인과 외도를 하고 있었다. 윌슨 부인 또한 아메리칸 드림에 중독된 사람이었다. 그녀는 부자인 톰을 통해 비루한 일상으로부터 벗어나기를 바랐다. 남편 윌슨은 그런 아내의 불륜을 묵묵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개츠비의 차를 빌려 운전하던 데이지가 윌슨 부인을 차에 치여 죽인다. 아내를 죽인 것이 개츠비라고 오해한 윌슨은 개츠비를 총으로 쏘아 죽인다. 그 후, 데이지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남편에게 돌아간다.
1920년 미국 최대 호황기를 배경으로 아메리칸 드림을 그린 영화 <위대한 개츠비>(왼쪽)
1930년 경제 대공황을 배경으로 힘겹게 살아가는 이들을 그린 영화 <분노의 포도>(오른쪽)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1920년대 미국은 일찍이 겪어본 적 없던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1차 세계 대전 대전이 일어나자, 미국은 연합국 측의 생산 기지 역할을 하게 된다. 덕분에 미국의 경제는 급속도로 커지고 단숨에 큰돈을 번 사람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그 당시 모든 미국인들은 성공을 쫓는 개츠비였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를 등에 업고, 1928년 허버트 후버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의 인생은 아메리칸 드림 그 자체였다. 아홉 살에 고아가 된 후버는 숙부 밑에서 간신히 대학을 졸업한 뒤, 광산일로 큰돈을 벌었다. 그가 대통령 선거전에서 내건 구호는 “모든 냄비에 닭고기를, 모든 차고에 자동차를 약속합니다!
(I will promise you a chicken in every pot and a car in every garage)” 였다. 요컨대 그는 모든 사람들을 부자로 만들어주겠다고 약속했고 그 덕분에 큰 표 차이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마치 개츠비가 부를 통해서 사랑이라는 지극히 정신적인 가치를 얻으려고 했던 것처럼, 1920년대 미국인들은 부를 통해서, 정신적인 안정과 행복을 찾으려고 했다. 그리고 개츠비가 아메리칸 드림에 농락당했듯이 미국인들도 자신들의 꿈에 농락당했다.
승자는 찬양, 패자에겐 냉소적인 미국. 경제대공황으로 '분노의 포도' 싹트다
1차 세계 대전이 끝나면서 미국의 전쟁 특수도 끝났다. 그러나 더 큰 이익을 원했던 기업가들은 설비투자를 줄이지 않았다. 과잉 생산된 상품은 넘쳐났지만 정작 그것을 살 사람이 없었다. 마침내 1929년 10월 24일 ‘뉴욕주식거래소’의 주가가 폭락했다. 그것이 대공황의 시작이었다. 기업은 도산하고 실업자들이 넘쳐났다. 그러나 모두를 부자로 만들어주겠다고 약속했던, 후버 대통령은 실업자를 위해 아무런 대책도 내놓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연방실업청을 설치하자는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했고, 실업자들을 위한 공공사업과 직접원조를 내용으로 하는 법안을 의회에서 부결시켰다. 후버 대통령은 조금만 기다리면 경제가 좋아질 것이라는 낙관론만 되풀이했다. 후버 대통령은 정부가 실업자를 지원하면 그들이 더 이상 일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실업자 지원책은 실업자들을 도덕적으로 타락시키고 재정적인 손실만 가져올 뿐이라는 것이 그의 믿음이었다. 그러나 그가 실업지원책을 반대한 것은 꼭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실 그가 실업지원책에 반대한 것은 아메리칸 드림을 포기할 수 없다는 이유가 더 크다.
아메리칸 드림은 철학적으로는 국가가 개인의 자유를 제한해서는 안 된다는 개인주의와 맞물려 있고 경제적으로는 국가가 개인의 경제활동을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자유방임주의와 맞물려 있다. 후버 대통령이 보기에, 정부가 실업 문제에 개입하는 것은 바로 개인주의와 자유방임주의를 포기하는 일이었다. 개인주의와 자유방임주의는 지금까지 미국을 지탱해온 기본적인 가치가 아니던가? 아메리칸 드림은 능력만 있으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뒤집어, 누군가 실패한다면 그것은 순전히 그 사람의 무능력 탓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승자를 찬양하는 미국 문화는 그만큼 패자들에게 냉소적일 수밖에 없었다. 기회의 땅은 동시에 ‘분노의 포도’가 자라는 곳이기도 했다.
소설 <분노의 포도>는 평범한 노동자인 톰의 가족이 대공황 이후 일거리를 찾아 캘리포니아로 여행하는 과정을 그린다. 그들은 기회의 땅, 캘리포니아에 가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믿었다. 가족을 부양할 돈도 벌 수 있고 새 집도 지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그들이 바라는 소박한 성공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기회의 땅에서 발견한 것은 지주들의 착취와 경찰의 폭력뿐이었다. 절망한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분노의 포도가 익어갔다. 알알이 영근 분노의 포도는 이제 자랄 만큼 자라 가지가 휠 정도였다. 마치 민중 봉기라도 일어날 것처럼.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발달하면 과잉생산으로 인해 공황이 발생하고, 그 결과 노동자들에 의해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했다. 확실히 혁명은 부의 재분배를 가져오는 가장 빠른 길이다. 그러나 기회비용이 지나치게 크다는 단점이 있다. 폭력과 유혈이 따르지 않는 혁명이란 역사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미국인들 앞에는 두 가지 길이 나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나는 계속 아메리칸 드림을 간직한 채 몰락하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이룰 수 없었던 아메리칸 드림에 대해 분노하며 저항하는 것이었다. 요컨대 미국인들은 <위대한 개츠비>와 <분노의 포도>라는 두 개의 시나리오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할 형편이었다. 그때 그들 앞에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나타났다. 그는 미국인들에게 유혈 없는 혁명, 평화로운 개혁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1932년 미국인들은 루스벨트를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그리고 그것은 올바른 선택이었다.
공산주의 혹은 나치의 정책이라 비난 받은 '뉴딜(New Deal)'정책
1933년 3월 4일 루스벨트가 취임했을 때, 미국은 역사상 최악의 불황을 겪고 있었다. 공식적으로 25%의 노동자가 실업 상태였다. 농산물 가격은 60%까지 떨어져, 농부는 농산물을 내다 팔 수도 그렇다고 버릴 수도 없는 처지였다. 대공황이 시작된 1929년 보다 더 많은 공장들이 문을 닫았고 200만 명의 사람들이 집 없이 거리를 떠돌고 있었다. 루스벨트는 죽기 바로 직전인 미국의 경제에 응급조치를 해야 했다.
미국 역사상 최악의 불황이었던 1933년, 제 32대 대통령으로 취임해
경제공황을 극복하며 4선을 연임한 루스벨트
우선 그가 해결해야 할 첫 번째 문제는 천만 명이 훨씬 넘는 실업자들을 구제하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경제를 정상적으로 작동할 수 있게, 경기를 부양하는 것이었다. 세 번째는 지금까지 잘못된 경제 제도를 개혁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내놓은 것이 뉴딜 (New Deal) 정책이었다. 뉴딜 정책의 이론적 바탕은 케인즈의 경제이론이다. 케인즈 이론을 요약하면 이렇다. 정부가 빚을 내어, 그 돈으로 공공복지 사업을 벌여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한다. 다시 수입이 생긴 사람들은 그 돈을 소비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경제가 활성화된다. 솔직히 케인즈의 주장은 기존의 미국 경제 정책인 자유방임주의와는 완전히 반대였다. 차라리 그것은 사회주의 정책에 가까웠다.
처음에 루스벨트는 케인즈의 이론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하버드의 젊은 경제학자들이 케인즈 이론을 지지하고 나섰다. 그들은 금요일 밤이면 보스턴에서 기차를 타고 워싱턴으로 가, 새로운 정책을 만드는 데 자신의 지혜를 빌려주었다. 이러한 젊은 경제학자들 중 하나였던 갈브레이드는 훗날 그때 일을 이렇게 회고한다. “우리는 평화적으로 세상을 개혁하고 싶었습니다. 우리가 케인즈 사상에 끌린 것도 우리의 보수적인 성향 때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케인즈 이론을 주장하면, 사람들은 우리를 위험한 급진주의자라고 비난했지요.”
이들 경제학자들은 보수주의자들에게 공산주의자, 혹은 나치라는 욕을 들었다. 사실 히틀러는 케인즈가 주장한 것처럼 과감히 돈을 빌려 그 돈을 공공사업에 쏟았다. 덕분에 독일은 일찌감치 공황에서 벗어나 완전고용과 물가안정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었다. 그로써 케인즈 이론은 현실에서 옳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그럼에도 루스벨트가 뉴딜 정책을 시행하는 것은 위험부담이 큰 모험이었다. 그의 정적들은 뉴딜정책이 공산주의 혹은 나치의 정책이라고 공격했다. 어떻게 하면 이러한 공격을 피해, 국민들에게 제대로 뉴딜 정책을 이해시킬 수 있을 것인가? 뉴딜 정책이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는 얼마나 국민들이 이 정책을 이해하고 지지하느냐에 달려 있었다. 루스벨트는 국민들을 설득할 방법을 찾아내야만 했다. 뜻이 있는 곳에 길도 있는 법. 그는 새로운 방식으로 국민들에게 다가갈 방법을 찾아냈다. 그것이 바로 라디오를 통한 대국민 연설이었다.
난롯가에서 나누는 정다운 대화처럼 풀어낸 '라디오 연설'
1933년 3월 12일, 루스벨트 대통령은 국민을 상대로 첫 번째 라디오 연설을 했다. 그것은 그가 대통령으로 취임한지 불과 8일 뒤의 일이었다. 그 당시 미국에는 이미 가정마다 라디오가 보급되어 있었기 때문에, 라디오 연설은 모든 미국인들에게 직접 그의 뜻을 전달하는 데 꼭 알맞은 수단이었다. 사람들은 루스벨트의 라디오 연설을 노변정담(爐邊情談) 즉 ‘난롯가에서 나누는 정다운 이야기(Fireside chat)’라고 불렀다. 그의 라디오 연설은 대통령이 국민들에게 전하는 격식 차린 담화문이 아니었다. 또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가르치는 훈시도 아니었다. 그것은 동등한 인간끼리, 난롯가에서 서로의 어깨를 기대며 나누는 친밀한 대화였다. 루스벨트는 ‘좋은 밤입니다. 친구들 (Good evening friends)’이란 인사로 자신의 첫 연설을 시작했다. 그는 뉴딜 정책에서 대해 설명한 뒤, 이렇게 연설을 마무리했다.
“우리의 경제 시스템을 재조종하는 데 있어서, 화폐보다 더 중요하고 금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에 대한 믿음입니다. 믿음과 용기는 우리의 계획을 실행하는 데 결정적인 요소입니다. 우리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루머나 추측에 휘둘리지 말아야 합니다. 공포를 몰아내기 위해서 우리 함께 뭉칩시다. 정부는 경제 시스템을 회복할 도구를 제공할 겁니다. 그러나 그 도구를 가지고 일하는 것은 바로 여러분들 자신입니다. 내 친구들이여! 경제적 위기를 극복하는 것은 나의 문제인 동시에, 여러분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함께 하는 한, 우리는 결코 실패하지 않을 겁니다.”
라디오 연설을 통해 국민과 친근한게 소통한 루스벨트. '난롯가에서 나누는 정다운 대화'라는 애칭이 붙었다.
라디오 연설에서 그는 공황을 극복할 수 있게 뉴딜 정책에 힘을 모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그의 진심 어린 호소는 그대로 국민들에게 전달되었다. 루스벨트는 자신이 약속한 것을 지켰다. 그는 일자리를 제공하기 위해 대대적인 공공사업을 일으켰다. 또한 노동자들에게 노조결성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을 주었다. 은퇴자 연금, 실업보험, 장애자 급여, 빈곤층 급여 등의 사회보장제도를 만들었으며, 소득세, 법인세, 상속세, 물세, 초과이윤세 등을 대폭 인상했다. 미국인들은 그런 루스벨트를 한결같이 지지했다. 그 덕분에는 루스벨트는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4선에 성공한 미국 대통령이 되었다. 1933년 3월 4일 첫 취임한 이후, 1945년 4월 2일 죽는 날까지 루스벨트는 미국의 대통령이었다. 그렇게 루스벨트와 미국인들은 함께 경제 공황을 극복했고 2차 세계 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가 말한 대로, 그들이 함께 하는 한 실패란 없었다.
사람들은 미국을 기회의 땅, 자유의 나라라고 부른다. 미국은 언론과 표현의 자유가 있으며 종교의 자유가 있다. 국가가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지 않기 때문에, 미국에서는 능력만 있으면 누구든 성공할 수 있다. 그것이 지금까지의 아메리칸 드림이었다. 그러나 루스벨트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미국이 가난으로부터 자유롭고, 생존을 위협하는 그 어떤 공포로부터 자유로운 나라가 되기를 원했다. 개인이 자신의 탁월함을 발휘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힘을 모아 공동의 선(善)을 이룩할 수 있는 나라, 그것이 그가 꿈꾸는 아메리칸 드림이었다.
필자가 추천하는 덧붙여 읽으면 좋은 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