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여자에게 다정하게 “여보!” 하고 부르면, 그 부르는 사람은 그 여자의 남편임을 뜻한다. 어떤 남자에게 “아버지!”라고 부르면, 그 부르는 사람은 그 남자의 자식이라는 뜻이고, 어떤 분에게 “선생님!”이라고 부르면, 부르는 그는 제자임을 말한다. 그러나 다들 “대통령 각하”라고 불러도 “아버지”라고 부르면 나는 대통령의 아들이요, 그 대통령을 “아범아!”라고 부르면 그분은 대통령의 부모님이 되신다. 이와 같이 상대방이 여자이든 남자이든, 잘났든 못났든 상대방에 따라 ‘내’가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내가 어떻게 알고 있으며, 내가 어떻게 대하는가에 따라 ‘내’가 결정되는 것이지, 상대방이 나를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서 ‘내’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스승이 “너는 내 제자가 아니다.”라고 하여도 내 마음에서 스승에 대한 공경의 마음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그분은 나의 영원한 스승이요, 임금님께서 “너는 더 이상 내 신하가 아니다!” 하며 귀양을 보내도 그 임금님이 잘되기만을 바라면서 귀양지에서도 임금님에 대한 충성심을 버리지 않으면 그는 영원한 충신이다. 심지어 부모님이 “너는 내 자식 아니다.”라며 집에서 내쫓아도 객지에서 부모님 생신 때마다 부모님 좋아하시는 선물과 용돈을 보내 드리며, 그 마음이 변치 않으면 틀림없는 친자식이요, 부부간에도 부부 싸움 끝에 헤어졌다 하여도 서로가 상대에 대한 정절을 끝까지 지키고, 자식을 돌보며 살아가면 틀림없는 부부요, 지아비, 지어미이다.
그러나 아무리 법적으로 부부지간이라도 마음속에 더 이상 상대에 대한 사랑의 마음이 없으면 빈 껍데기 부부요, 겉으로는 임금님이라고 굽실거려도 그 마음에 임금님에 대한 충성의 마음이 없으면 더 이상 참신하가 아니다. 또한 아무리 임금이 신하를 믿어도, 남편이 그 아내를 지극히 사랑하여도, 부모가 그 자녀를 위해 물불을 안 가려도, 신하가 딴 마음을 품고 있고, 아내가 남편을 마음에 두고 있지 않고, 자식이 부모를 순종치 않으면 더 이상 참된 사이가 아니며, 신하나 아내나 자식은 그 외형적 이름만 있을 뿐 그 이름에 해당하는 참된 ‘나’가 아닌 것이다.
이렇듯 우리의 존재는 상대방과 나와의 외형적 관계나, 상대가 나를 어떻게 대해 주느냐에 따라 결정되기보다는 상대에 대한 내 마음이 어떤가에 따라서 우리의 존재, 나의 존재가 결정된다. 가족 관계에 있어서도 외형적인 호칭이나 핏줄에 의해서 이루어지기보다는 상대방에 대한 내 마음이 어떠한가에 따라서 참가족, 우리와 나의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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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말에 ‘이웃 사촌’이란 말이 있다. 요즘 세상과는 상거가 먼, 말 그대로 옛말이 되어 버린 ‘이웃 사촌’. 이 시대를 사는 사람으로서 자각해야 할 문제가 아닌가 싶다. ‘사촌’이라 하면 나와 한 가족임을 의미한다. 이웃의 아저씨나 아주머니도 내 마음에서 실지로 형님이나 누님, 오빠, 언니, 동생이라고 생각하여 그렇게 부르고 대한다면 이웃도 한 가족 일가(一家)가 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우리의 가리워진 시야와 마음을 넓혀 미국 사람이든지 아프리카 사람이든지, 흑인이든지 백인이든지, 부자든지 가난하든지, 잘났든지 못났든지 모두가 내 마음에서 ‘한 집안 우리 식구’로 받아들여 일가로 대하고 실제로 그렇게 살아간다면 지구는 모두 다 ‘한 가족 일가’가 되는 것이다. |
말로만 ‘국제 협력, 국제 친선…’ 하며 ‘국제화’를 외칠 것이 아니라, 진정한 우리의 존재를 찾아서 세계를 가슴에 품고 한 가족처럼 여길 수 있을 때 비로소 참된 국제 협력, 친선, 혈맹 등이 이뤄질 수 있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살면서 만나는 사람들 모두가 ‘남’이 아니고 진짜로 나의 일가 한식구로 생각하고 마음으로 받아들여서 살면 우리들의 삶은 얼마나 달라질 것인가? ‘부모와 자식, 남편과 아내, 형과 동생’ 사이에서 진정한 참된 ‘나’를 찾고, ‘이웃 사촌’이라는 정겨움 속에서 ‘나’의 참된 의미를 찾고, 국제 협력, 친선 관계에서 참된 ‘우리’의, ‘나’의 존재를 찾는다면 그리고 그러한 삶을 살게 된다면, 이 지구상에는 더 이상 나와 상관 없는 ‘남’이 없게 될 것이다.
나는 키도 작은 황인종에다 내세울 것도 없는데, 저 백인은 키도 크고 잘생겼고 지위도 높고 가진 것도 많다면, 상대에 비교한 나의 모습은 참으로 초라해 진다. 그러나 그렇게 키 크고 멋진 분이 ‘남’이 아니고 바로 나의 친형님이라면, 서로가 그렇게 받들고 사랑한다면 얼마나 마음이 든든하고 흐뭇하겠는가? 또한 아프리카 어린이들이 제대로 못 먹고 앙상하게 말라 쓰러져 죽는 날만 기다리고 있는데, 그들은 아와는 상관없는 ‘남’이라고 여기고 내 자식만 챙기며 산다면 ‘나’는 얼마나 좁은 인생을 살며, 이 땅에 살아가는 모두가 이렇게 산다면 세상은 얼마나 삭막해지겠는가! 그러나 반대로 굶어 죽는 저들이 더 이상 ‘남’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우리의 마음은 얼마나 긍휼이 불붙는 듯 하겠으며, 이런 마음들로 이 지구가 가득하다면 이 세상은 얼마나 살기 좋은 곳으로 ‘남’이 없는 한 가족끼리 오손도순 사는 지상 천국이 되겠는가!
사실 ‘나’라는 존재는 ‘남’으로부터 태어났다. 나 이외의 다른 사람, 즉 ‘남’이 없는 ‘나’는 존재 할 수 없다.
‘아버지’라는 ‘남’이 있기에 자식이라는 ‘내’가 있다. 선생님이라는 ‘남’이 있기에 제자라는 ‘내’가 있고, 형이라는 ‘남’이 있기에 아우라는 ‘내’가 있다.
‘남’이라고 생각한 상대가 없이는 ‘나’라는 존재는 성립될 수 없다. ‘나’는 ‘남’이 있으므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어머니라는 ‘남’이 없으면 자식이라는 ‘나’는 있을 수 없는 것이고, 형이라는 ‘남’이 없으면 아우라는 ‘내’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남’이라고 부르는 상대가 없으면 ‘나’라고 부르는 개체는 존재할 수가 없다. ‘남’이 없는 ‘나’는 존재할 수 없기에 결국 ‘나’는 ‘남’으로부터 출발하였고, 따라서 ‘남’과 ‘나’는 원래부터 ‘한 몸’, ‘하나’이다.
내 마음에서 ‘아내’의 자리가 없어지면 상대인 아내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남편인 ‘내’가 사라지는 것이다. 자식의 마음에 ‘부모님’의 자리가 없어지면 부모님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자식인 ‘내’가 없어지는 것이다. 제자의 마음에 ‘선생님’의 자리가 없어지면 제자인 ‘내’가 없어지는 것이다. 이렇듯 남편인 ‘나’, 아내인 ‘나’, 자식인 ‘나’ 또한 제자가 되었든 대통령이 되었든, 박사나 교수가 되었든 ‘나’를 결정하는 모든 요소는 ‘남’으로부터 오는 것이지 ‘내’가 홀로 독자적으로 원래부터 있었던 것이나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결국 ‘남’이라고 여겼던 모두는 ‘나’라는 존재를 형성하는 모두요 내 삶의 전부로 ‘나의 생명’ 그 자체이다. 따라서 ‘남’은 곧 ‘나’인 것이다.
오늘 우리가 살면서 우리 주위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은 더 이상 ‘남’이 아니다.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나’와 상관없는 ‘남’의 자리에 멀찍이 놔두면 ‘나’의 존재도 내게서 멀어지고 만다.
‘남’이라고 여겼던 모든 사람은 나의 존재를 형성해 주고 귀중성을 부여해 주는, 까맣게 잃어 버린 바로 ‘나’ 자신인 것이다. 모든 사람들 중에 한 명이라도 내 마음에서 무시하여 버리면 내 존재, ‘나’의 일부가 무시되고 떨어져 나가는 것, 결과적으로 나의 생명을 잃는 것과 같다.
부모와 자식은 하나이고, 스승과 제자도 한 몸이며 임금과 백성도 한 몸이며, ‘남’이라고 여겼던 모든 사람들은 내가 까맣게 잃어버렸던 총체적 ‘나’인 것이다. ‘남’이라는 존재는 더 이상 이 세상에 없으며, 우리 모두는 한 몸, 하나로서 누구 한 명이 없어도 완전한 몸을 이룰 수 없고, 완전한 ‘하나’를 이룰 수 없는 한 몸, 하나로서 누구 한명이 없어도 완전한 몸을 이룰 수 없고, 완전한 ‘하나’를 이룰 수 없는 한 몸, 한 생명이다. 따라서 지구에는 더 이상 ‘남’이 없으며, 우주에 생명이 있는 한 모든 생명은 ‘하나’인 것이다.
글. 이광길 님 (現 돌나라 한농복구회 總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