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침에 읽는 오늘의 詩 〈1373〉
■ 파밭 가에서 (김수영, 1921~1968)
삶은 계란의 껍질이
벗겨지듯
묵은 사랑이
벗겨질 때
붉은 파밭의 푸른 새싹을 보아라
얻는다는 것은 곧 잃는 것이다
먼지 앉은 석경 너머로
너의 그림자가
움직이듯
묵은 사랑이
움직일 때
붉은 파밭의 푸른 새싹을 보아라
얻는다는 것은 곧 잃는 것이다
새벽에 조로의 물이
대낮이 지나도록 마르지 않고
젖어 있듯이
묵은 사랑이 뉘우치는 마음의 한복판에
젖어 있을 때
붉은 파밭의 푸른 새싹을 보아라
얻는다는 것은 곧 잃는 것이다.
- 1988년 김수영 시선집 <사랑의 변주곡> (창작과 비평사)
*우리 밥상에 오르는 필수 양념재료인 ‘파’라는 작물은, 우리나라 삼국시대 때에도 재배되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합니다. 한편 파와 관련해서는 파뿌리, 파김치 등 일상화된 표현도 많을 만큼 우리에게 매우 친숙한 작물이라 하겠습니다.
또한 파는 매캐한 냄새로 인해 벌레도 거의 없는 편인 데다 물이 잘 빠지는 곳이면 잘 자라며, 가을에 파종하면 월동을 하므로 농민들에게 꽤나 이쁨을 받고 있습니다. 때에 따라선 경제적인 이득을 크게 안겨줄 수 있기도 하고요.
이 詩는 집 마당의 텃밭에 심은 파를 돌보다가, 붉은 흙 땅에서 파릇하게 자라나는 어린 파의 새싹을 보며 이것으로부터 깨달음을 얻고 있는 작품입니다.
다시 말해 새싹이 흙을 뚫고 나오는 ‘파밭’을 통해 과거의 묵은 것을 버림으로서 새로운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깨달음을 역설적으로 노래한다고 하겠습니다. 시인은 이러한 파의 모습을 통해, 낡고 고착된 사랑에 대한 추억을 떨쳐내고 과거의 집착으로부터 벗어나서 새로운 가치를 추구하고자 하는 굳은 각오로 미래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말해 주는군요. 마치, 서로 편을 갈라 매일 소모적인 논쟁을 벌이는 요즘의 우리 사회에게 보내는 준엄한 경고처럼 말이죠.
그나저나 어제 저녁부터 반가운 비가 내리며 무더웠던 날씨도 한풀 꺾여, 오늘 새벽에는 다시 초여름의 서늘한 기운으로 돌아왔군요. Cho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