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육,해,공군 본부가 위치한 작으마 한 도시
계룡시(市) 중앙 도로에는 국방 도시답게
625 한국전쟁 참가국 국기 16개 가 일 년 내내 계양 되어 있다.
그러나 사실은 틀렸다. 1개국이 애써 외면 되어 빠진 것이다.
전쟁 기간 중 중요했던 국면마다 이 국가는 꼭 끼어 참가하고 있었다.
200여 척으로 구성된 맥아더 장군의 인천 상륙작전의
대 선단 의 50 여 척의 상륙선(LST) 중 38척,
그리고 원산 상륙작전(행정상륙)시 소해 작전에 참가한
모든 JMS(Japan Mine Sweeper) 소해정, 어디 이 뿐 이랴,
역사 이래 최대 흥남 철수작전에서 전투 병력 10만 여명,
인도주의적 피난민 약 10여 만명 더해서 전투 장비를 포함하면
덩케르크 34만 여명 철수 작전 보다 도 훨씬 규모가 컸던
흥남 철수 작전의 MSTS 상선 단의 대부분의 승조원이
패전국(敗戰國) 일본 해군과 선발된 일본 국 선원들에 의해
참전 운영되어 졌다.
우리가 진정한 선진국의 높은 국민 의식을 가지려면
이러한 감정의 품위부터 갖추어야 한다.
도움을 받은 일본에 대해 지나치게 비신사적인 행태는
오늘에 와서 정부 당국에 의해 더욱 악용되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오늘날에도 일본 전역 8개 도시에는 한반도 유사시 사용되어질
미국및 연합군(UN軍) 군수 물자가 일본 사람들에 의해
보관, 관리되어지고 있다.
625 한국전쟁에서 국난 극복으로 기억해야 할 인물이 있다면
*맥아더 장군 *트루만 대통령 *덜레스 장관
그리고 이승만 대통령 이다.
한국전쟁 당시 이승만은 75세 맥아더는 70세 였다.
조선왕조 500 년의 임금들 평균 수명이 47세 였던 점을
감안한다면 이들의 인간 수명은 이미 한참 지났다.
이승만과 맥아더의 인간적 인연은 한참 거슬러 올라 간다.
맥아더 가 1915년 경 갓 소령으로 진급했을 무렵
조선 독립을 외치고 주장하고 다니던 꼬레아 청년을
돕기 위해미국의 유명 인사 몇 분이 도움을 주었다.
후일 미국 대통령이 된 "우드로 윌슨" 프린스턴
대학 총장(이승만 은사)을 비롯 맥아더 소령의 장인도
그중의 한 사람이었다.장인의 소개로
이승만과 맥아더는 우연한 면식을 갖게 되었다.
그후 맥아더 는 승승장구하여 1932년 육군
대장으로 승진,참모총장을 5년 간 수행했다.
인연은 이것으로 끝이었을까...
[에피소드] 이승만 독립투사가 미국에서 독립
운동을 하던 중1923년 상해 임시정부로
부터 제네바 특사 요청을 받게 된다.
우드로 윌슨 미국대통령의 주창으로 설립된
세계 평화를 위한"국제 연맹" 회의가
제네바에서 열리니 회의에 참석하여
한반도에 대한 일본 제국의 식민 지배는
부당하며이를 전세계에 알려 달라는 요청이었다.
당시 미국대통령인 우드로 윌슨은 이승만의
프린스턴 대학재학 시절 은사 였으며 총장
재직 시 공관에 자주 초대되어나라를 잃어버린
이승만의 처지를 위로하고 각별히 격해 주었다.
이들 사이가 얼마나 돈독했는지는 윌슨
대통령의 영애 가결혼할 당시 동양인으로서
유일하게 초청장을 받았으며더구나
하와이에서 초청장을 받은 유일한 인사로서
하와이 교민들 사이에서 크게 화자 되기도 했다.
또한 프린스턴 졸업논문은 매우 유명한
논문으로 윌슨대통령 이미국 의회
기조연설에 활용되었고 오늘날 모교인
프린스턴 대학에 영구 보존되어 있다.
대한민국 백성은 정말로 훌륭한 지도자를 갖는
행운을 누린 셈이다.
제네바 국제 연맹 회의장에는 일본 제국의
반대로 직접 참석은못하게 되었으나
당시 유명한 유럽의 언론 신문사들을 모아
언론 인터뷰를 실시해 회의장에 직접 착석한
것보다 더 큰 반응을일으켰고 일본 제국은
마침내 국제 연맹에서 탈퇴하게 되었다.
이승만의 체포 현상금은 천정 부지였다.
이후 이승만의 한반도 접근은 더욱 불가능
하게 되고 말았다.그러나 국제 연맹 회의
참석 차 제네바를 방문한 덕분에평생의
반려 파란 눈의 오스트리아 처녀
프란체스카 를만나는 행운을 갖게 되었다.
이승만은 1930년대 후반부터 중국의
상해 임시정부를망명 정부로 인정받기
위하여 미국 국무 부를 출입하기 시작했다.
당시에 동양인으로써 와싱톤 대학 학사,
하바드 대학 석사 그리고프린스턴 대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엘리트는 이승만이 유일했다.
오늘날도 그렇지만 장점도 많지만 미국처럼
인종차별, 학벌 차별, 빈부 차별이 보이지 않게
크게 작용하는 역설적인 나라도 없을 것이다.
하이쏘사이어티 속에서는 결혼조차도 아는
가문끼리서로 가려서 하고 있다.
이승만의 고급스럽고 품위 있는 영어 실력
(한성 감옥에서사형 무기 수로 5년 간
복역할 때 그의 미국인 배재 학당 은사 들
그리고 의사,간호사들이 차입해준 미국 감리
교단의 유명 책자와국제 정치 관련 논문
문집을 아예 통채로 외웠던 덕분에
이승만이 구사했던 영어 실력은 당대의
최고 수준이었다.)
6.25 전쟁 당시에도 맥아더 장군을 비롯해
모든 참전 고위 장성들도이승만 대통령이
구사했던 영어 실력에는 주눅이 들었다고 한다.
놀라운 것은 우리나라 최초의 영한사전을 이승만이
한성 감옥 투옥 시절에 집필했다는 사실이다.
이 기간 동안에 유명한 "독립 정신"이라는
책도 집필하여오늘날에도 읽혀지고 놀라워하고 있다.
세종대왕의 장 형인 양녕대군의 26대 손(孫)이요,
출중 한어학 실력 등 민영환 대신의 천거로
1904년 말에 사면 되어미국 "데오도어 루즈벨트"
대통령(26대) 밀사로 미국에 들어와
밀사 협상은 실패하였으나 새로운 세계 정세에
대한 목 마름은이승만을 동부 지역의
명문중에 명문 "아이비 리그" 3개 대학을
아주 짧은 기간 내에 두루 섭렵 하게하였다.
한성감옥에 투옥 기간 중에 세계적인 석학과
시대적 국제정세 현황을 계재한 기사 내용을 통채로
암기했던 실력이크게 효력을 주었다고 전한다.
이승만의 생애를 보면 하나에서 열까지 하늘의
섭리가 아니고 는도저히 당시의 상황으로는
이루어 낼 수 없는 것들 이었다.
배재학당 창립자의 도움과 YMCA 그리고
미국의감리교 재단에서는 아예
조선의 파송 목회자 로 점찍어 두어
명문 대학에 진학하는 데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미 이때부터 이승만의 마음 속에는
대한민국을 기독교를토대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 주의로 세계에 문호가 개방된
기독교 국가로 건설하고 싶은 간절한 소망을
갖게 되었는지도 모른다.열린 마음으로
그는 파란 눈의 프란체스카 라는 오스트리아
규수를 아내로 맞아 평생을 해후 하기도 하였다.
[에피소드] 잠시 미국 내에서 독립 운동을
하던 1930년대후반으로 돌아가 보자.
당시 미국의 국무성에는 대통령 "프팽크린
루즈벨트"(32대)의법률 자문 역, 하바드의
법률 천재로 불리 우는"히스"( 후일 오늘날의
U.N 기구를 입안 창설하는데 주역 업무를
담당하게 된다.) 라는 사나이가 극동 아시아
담당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이승만은 내심 기뻐했다.
아이비 리그 하바드 와 프린스턴 대학의
동문 후배라는학벌 이력을 내세워 조선
독립의 실마리를 풀어 보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히스"의 반응은 냉담했다.
나중에 밝혀진 바에 의하면 1950년대
매카시 선풍(반 공산주의 운동)시에
캘리포니아 하원의원 "리차드 닉슨"의
(후일 대통령이 됨) 고발에 의해 소련
"스타린"의일급 첩자로 밝혀진 사람이었다.
히스는 실력이 워낙 출중 하여 얄타회담을
비롯 각종 주요 연합군수뇌 비밀 회담 시
마다 소아 마비 후유증으로 업무를 제대로
처리 할 수 없었던 루즈벨트 대통령을 대신해
상당히 세밀한잔무 까지 처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 제국의 식민지였던 대한민국의 앞날의
운명이 "스타린"의일급 첩자였던 "히스"라는
스스로 사회주의에 심취 된 사람에 의해
처리되었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히스는 이승만이 어떤 인물인 것을 이미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이승만은 한반도 조선
독립에 공산주의 쏘련의 스타린 이
개입할 것을 염려해 당시 미국 내 유력
인사들에게 일본 제국의
군국주의 못지 않게 공산주의의 위험성을 계속
경고하며 활동하고 있었다.
참고로 후일 1941년 6월에 이승만 은
일본 제국주의를경고하는 "일본 내막기" 라는
책을 저술하여 출간하였다.
[에피소드] 1941년 12월 8일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의 예언이 적중했던 것이다.
"일본 내막기" 출간 후 꼭 6개월 후의 일이었다,
유명한 책 한 권으로 하룻밤 사이에 세계적인
유명 인사가 된 셈이었다.
"대지" 라는 소설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펄벅 여사도극찬을 헀을 뿐 아니라, 당시
항일 전을 펼치고 있었던
중국의 국부 군을 이끌고 있었던 장개석 장군도
크게 감탄하였다고 한다.
이런 연고로 1945년 8월 15일 일본
식민지로 부터 해방된대한민국의 이승만을
더욱 신뢰하였고 6.25 전쟁 후에는
대만 총통으로서 진해에 있는 이승만 대통령의
별장도방문하였고 회담도 하였다.
(당시 해군 사관 생도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
오늘날에도 잘 계시 보존 되어있다.)
또 다른 이승만과 장개석총통 사이에 신뢰와
믿음에 관한매우 중요한 사건은 다음과 같다.
[에피소드] 1920년 당시 중국 상해에서 비밀리에
조선 독립 추진을 위한 임시 정부 수립이 있었다.
임시정부 수반으로서는 하와이에서 망명
독립 운동을 펼치고 있는이승만을 필두로 소련파
공산주의자인 이동휘 그리고오늘의 국회의장
격에 손정도 목사 / 해군을 창설한 초대
참모총장 손원일 제독의 선친 그리고 도산
안창호 선생을비롯한 국내외 독립운동가 다수가 참여하였다.
이때 김구 선생은 이승만과 조직을 보호하는
오늘날의 경호 실장에가름 하는 직책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임시정부 조직은 태생적으로
분란이 일어 날 수 밖에 없었다.
조직 내의 80% 이상이 쏘련, 중국 등 공산주의
추종자들이 대부분이었다.아마도 김구
선생이 공산주의에 비교적 유화적인 태도를
취했던 것도 이때와 무관하지 않는다.
공산주의자들을 극도로 협오 했던 이승만은
크게 실망하였다.결국 상해에 정착하지 못하고
하와이로 돌아온 이승만은 이들로부터 탄핵을 받게 된다.
이때 와해 된 임시정부를 1945년 막판까지
열심히주도해 온 김구 선생의 공로가 매우 컸다.
아니 상해 임시 정부의 수명을 연장 시키고 돌보아 준
중국 국부 군의 총수 장개석 총통의 도움이 컸다고
봐야 할 것이다.
장개석은 작은 나라이지만 안중근과 윤봉길,이봉창
같은독립 투사를 갖은 조선을 매우 부러워 했으며
중국도 이를 본받아야 한다고 누차 말하여 왔다.
그로부터 장개석은 독립군 조직을 항일 투쟁
세력으로 생각하고김구가 1945년 8.15 이후 귀국할
때까지 돌보아 주었다.[에피소드] 상해로
부터 충칭까지 일본 군에 의해 쫓겨 도망
다닐 때 마다 모든 뒤를 돌보아 준 사람이 바로
장개석 총통이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의식주는 물론 은신처와 김구의 가사 돌봄이
까지 그리고숫자가 많지는 않았지만
조선 독립군의 봉급까지도지급해 주었다.
당시에 도움을 받았던 회계 장부가 존재 보관되고
있다.그야말로 대한민국의 은인이었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장개석의 대만을 쉽게 버리고
공산 사회주의모택동을 실리를 위해 명분상
선택했다는 비정한국제 냉엄 주의를 느낄 뿐이다.
이와 같이 장개석과 깊은 내연을 갖고 있는
터라 1945.8월 15일 부터 1948. 8월 15일
대한민국이 새로이 건국될 때까지 인 "해방정국"
시기에 한반도는 이념적 사상 대립은
물론 미-쏘 간의 냉전 체제의 태동으로
국내 정치가 매우 혼란하였고 남한 내에서는
김구를 비롯김규식 등 "민족"이라는 기치
아래 남한 만이라도 우선
건국 하려 했던 이승만 과 크게 대립하고 있었다.
보다 못한 장개석은 김구에게 밀사(유어만)를 보내
이승만과 뚯을 같이 하도록 권고하였으나
김구는 끝내 거절하였다.
결국 각자 운명의 길을 택하게 되었다.
김구가 좀 더 국제 정세를 알았더라면...
아니 긴 안목을 ... 아 !! 대한민국....
못 내 섭섭했을 장개석의 밀서는 영어로
작성되었으며이승만 대통령의 유품으로
오늘날 이화장에 보관되어있다.
[에피소드] 대서양 헌장에 이어서 카이로
선언에서중국대표 장개석과 영부인
송미령 여사 (남편의 통역담당)는대한민국
을 반드시 독립 시켜야 한다고 특별히 강조
해으며미국의 명문대를 유학한 송미령
여사에 의해통역 되어지고 강조되었다.
이때 상대 수뇌들은 루즈벨트, 윈스턴
처칠 그리고철혈의 사나이 스타린 이었다.
후에 대한민국은 장개석과 송미령의 이런
은혜에 보답보다는중공과 수교하면서 외교
단절이라는 배신을 안겨주었다.
앞에서 언급된 "히스"는 루즈벨트 대통령의
특별 법률 자문 역으로
한반도 통일과 일본의 북방 영토 문제에 매우
심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우리가 보편적으로 알고 있는 한반도
분단 과 오늘날러-일 북방 영토 분쟁 문제는
카이로 선언 및 얄타 회담 이전에이미 쏘련
외상 몰로토프 와 루즈벨트 의 보좌관 히스 와의
내통으로 운명적 갈림길에 들어섰던 것이다.
일본 제국과의 태평양 전쟁과 유럽의 독일
히틀러와 치르고 있는두 곳의 전쟁은
미국으로서는 매우 힘든 전쟁이었다.
더구나 사무라이 정신으로 무장 된 일본 군의
잔혹 성은서양인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떻게 해서 라도 태평양 전쟁은 조기에
마무리하고 싶었다.일본의 군사력을 만주로
유인 쏘련의 참전을 독려하기 위해
막대한 군사 자금과 군수 물자지원 협상
그리고 필요하다면부동항(不凍港) 확보를
위한 한반도 전체를 장악하는 문제
그리고 소련의 자존심이 걸린 일-러 전쟁
패배로 빼앗긴북방 도서의 탈환 등, 미국
으로서 별것이 아니었지만일본과 한국에는
매우 중요한 운명적 열쇄를 얄타 회담 이전에
"몰로토프-히스" 라인을 통해 접수되고 말았다.
스타린은 그야말로 꽃 놀이 패를 잡았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1990년 소련이 붕괴 해체된 후
비밀 문서가 공개됨으로 만 천하에 밝혀졌다.
미국 최대의 간첩 "히스"는 이미 나이가 아흔이
넘은고령으로 다음 해에 숨을 거두었다.
지금까지 연구해온 필자의 확신으로는
얄타회담 전후에"히스"와 "몰로토프 문서"가
스타린 에게 한반도 분단,
625 한국전쟁 그리고 일본 북방 도서
처리에 나름의가이드 라인을
주었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이승만은 서둘러 귀국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비자가 발급 되지 않았다.
요로를 통해 알고 보니 국무부 극동 담당
"히스"가길을 막아 선 것이다.
이승만은 1941년 6월에 유명한 태평양
전쟁 예언서"Japan Inside " (일본 내막기)
를 진주만 기습 6 개월 전에
발간하여 미국은 물론 유럽 영국 국방 성에서도
이 책자를 구하려는 소동이 일어났었다.
하루 아침에 유명 인사가 되었다.
철저한 반공 주의자 였던 이승만은 "히스"의
요주의감시 인물로 표적 되었고 815 광복 후
조국으로의 귀향은철저하게
차단되어졌다. 타고 갈 비행기 값도 없었다.
이때는 이미 아내 프란체스카 여사도 곁에 있었다.
맥아더 에게 정중하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맥아더 연합군 총 사령관이자 일본 전역을
관할하는군정 장관으로 국무부에 즉각
해제를 풀고 비자 발급은 물론
그가 즐겨 애용하는 군용 수송기
바탄(Battan) 호를 내어 주었다.
여기에 더해 앞으로 한반도의 운명을
조정하게 될이승만의 인물 됨을 보아 1945년 9월
부터 남한 지역군정 장관 임무를 수행
중인 하지 장군을 도쿄까지 불러내
맥아더와 함께 하네다 공항에서 영접하는 등
최고의 예우를 갗추 어 주었다.
첫댓글 간단 명료하게 정리된 대한민국 현대사
쉽게 풀이한 내용 좋은 참고서가 되겠습니다
옮겨 주셔서 감사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