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필리핀 점령작전 1
출처: http://blog.naver.com/mirejet/110037828731
1941년 12월 8일, 일본군의 남방작전 개시로 남방군은 홍콩, 말레이반도와 진주만을 동시에 기습공격했는데 필리핀도 이에 맞춰 공략하기로 되어있었다.
필리핀은 1899년 미국의 식민지가 된 이후 일본은 1923년 제국국방방침에서 미국을 가상 적국으로 여겨 개전 후 미국의 전초기지가 있는 필리핀을 제압해 동남아지역 남방작전의 위험요소인 극동지역에서 미국 군사력의 배후위협을 쫓아낼 필요가 있었다.
미국도 일본에 의한 공격에 대비해 1924년부터 전쟁작전인 오렌지계획을 구체화했다. 하지만 계획에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었다. 마닐라 항에는 대규모 함대를 지원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 해군기지는 5천마일 바깥의 진주만을 사용할 수 밖에 없었다.
이에 반해 일본의 기지는 필리핀에서 1,500 마일밖에 되지 않아 일본은 단기간에 대병력을 투입할 수 있었다. 이러한 정세에도 개정된 1936년도 오렌지계획에서는 필리핀 전국의 방위는 단념하고 병력을 마닐라 주위에 집중한다는 안 만 세웠놓았다.
이 때 필리핀 주둔지휘관이던 더글러스 맥아더 사령관은 이 안에 불만이 많았다. 맥아더는 1935년 미육군 참모총장을 퇴임하고난 후, 당시 필리핀 독립정부 대통령인 마누엘 케손의 요청으로 필리핀군 군사고문으로 취임해 있었다.
1941년 7월에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의 요청으로 현역으로 복귀한 그는 필리핀주둔 미군 극동군 사령관이 되었다. 맥아더는 미군 10개 사단에 필리핀 군을 육성시켜 이에 더하면 필리핀 방위는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1941년 10월에 오렌지계획을 변경, 개정한 레인보우 계획에서 맥아더는 이 생각을 직접적으로 요구해 필리핀 전지역의 요소요소에 병력을 배치하는 적극적인 방어책으로 전환되었다.
일본에서는 1941년 11월 5일에 어전회의에서 대영, 대미개전이 결의되어 6일에 남방작전 부대의 전투서열이 하달되었다. 싱가포르 점령을 중시한 육군은 말레이 공략에 중점을 두었고, 미군 주력함대의 반격을 예상한 해군은 필리핀 공략에 중점을 두었다. 싱가포르 공략에는 약 100일간의 시간을 요구한 반면 필리핀은 45일만에 공략할 수 있으리라 판단되어 필리핀 공략부대로 제 14군이 편성되어 사령관으로 혼마 마사하루(本間雅晴) 중장이 임명되었다.
제 14군(제 16사단, 제 48사단, 제 65여단)의 병력은 주력 34,856명, 해군전력 4,633명, 제 5 비행집단 3,621명으로 구성되었다. 군의 주력을 담당한 것은 대만주둔군의 제 48사단이었는데 이 사단은 기계화사단으로 병사들은 주로 큐슈출신들이 많았다. 48사단은 필리핀 작전 종료 후 네덜란드령 인도차이나 작전에 투입될 예정이었다.
쿄토의 제 16사단은 필리핀 각지에서 분산상륙해 보조역할을 담당했지만 전력면에서 일류급 야전사단이었다. 제 65여단은 추고쿠, 시코쿠 지방에서 편성된부대로 점령지 수비가 목적이라 편성이나 장비가 야전사단에 비해 조금 열세였다.
2월 이후, 증원부대로 제 4사단, 제 1포병대, 나가노(永野)지대(제 21사단 일부)가 투입되었다. 또 비사야, 민다나오 방면 공략을 위해 가와구치(川口) 지대 (제 18사단 일부)와 가와무라(河村) 지대(제 5사단 일부)가 투입되었다.
이에 맞서는 미군은 1941년 12월 당시 필리핀 군과 합계 약 15만의 병력을 가지고 있었다. 필리핀 군은 맥아더 지휘하래 10개 사단에 소속되어 증강되었지만 훈련을 마치지 못한 부대가 많았다. 미육군 극동사령부 파견병력은 22,532명이었다. 여기에 스카웃해왔다고 농담거리가 된 필리핀 군에 더해 미 본토에서 8,500명이 추가되어 있었다.
당시 필리핀에 있던 미군 극동항공군은 미국이 국외에 주둔시킨 항공부대로서는 제일 큰 규모로 특히 B-17 폭격기는 일본군에게 큰 위협의 대상이 되었다.
웨인 라이트 소장(사진 좌)과 함께 한 당시 맥아더 사령관(사진 우)
당시 미군에게 배치되어 훈련중인 필리핀 병사들, 미군은 이들 필리핀 군을 스카우트 부대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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