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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타부처님과 함께라는 믿음으로 극복한 말기급성혈액암
20대 후반에 결혼해 3대가 함께 살았다.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 아이를 가지면 계속 유산이 되었고, 곁에서 안타깝게 보시던 노할머니께서 어느 날 절에 가보자고 하셨다. 절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절을 가보게 되었다. 노할머니께서 ‘한 마음으로 절을 하라’고 하셔서 시키는 대로 반나절 동안 절을 했다. 그리고는 다리가 아파 겨우 집으로 내려왔는데, 그날 밤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총을 들고 나를 죽인다고 쫓아오는 남자들에게 쫓기고 있었는데, 스님 한분이 바위 위에서 ‘빨리 내 곁으로 오시오’라며 손짓을 하고 계셨다. 그 스님 뒤로 파란 창살이 있는 샛문을 가진 작은 암자가 보였고, 그곳에서 스님은 나를 뒤주에 숨겨 주었다. 얼마간 시간이 지나 밖에서 ‘그 사람들이 다 지나갔으니 안심하고 나오시오’라는 목소리가 들려왔고, 뒤주에서 나오는 순간 꿈에서 깨어났다.
그 다음 날, 노할머니께서는 또 다른 절로 데리고 가셨다. 그런데, 그 절의 모습이 지난 밤 꿈에서 본 그 작은 암자와 똑같았다. 꿈에서 본 절이 지금 마음으로 출가한 사리암이다. 그 인연으로 1000일 기도를 시작하면서 그렇게 원하던 아들과 딸을 낳게 됐다. 그 후로 지금까지 쉼 없이 부처님 가르침을 공부하고 있다.
2011년 정초 신중기도를 하던 날, 절에 들어서는 순간 약사여래부처님께서 윙크를 하셨다. 그 찰나의 순간, 눈을 비비고 또 비벼 봐도 꿈은 아니었다. 어떤 의미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정초 기도가 끝나고 양력 4월 초, 갑자기 몸에서 40도 이상의 고열이 나기 시작했고 상상 할 수 없는 한기가 들면서 하반신 마비가 왔다. 무거운 공 같은 것이 온몸을 돌아다니며 무서운 통증을 유발했고, 혼자서는 화장실조차도 갈 수가 없을 정도였다. 여기 저기 병원을 다 찾아다녀 봐도 병명조차 알 수가 없었다.
대학병원에도 수차례 갔지만 검사결과는 항상 아무 이상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갈 무렵, 죽음이 눈앞에 찾아 왔고 대학병원 응급실에 실려갔다. 열이 올라 의식이 없어질 정도였음에도 도무지 병의 원인을 찾지 못했다. 일주일간 조직을 배양한 결과를 토대로 무슨 병인지 진단을 해야 하는데, 조직을 배양하는 기간 중 조직세포가 계속 변이를 일으켜서 정확한 진단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항생제 투여를 통한 반응으로 병명을 찾아보기 위해 모든 종류의 항생제를 투여해 봤다. 하지만 거부반응이 너무 무섭게 나타나서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또 다시 고열로 인해 너무너무 무서운 오한이 찾아왔고, 해열제를 맞으면 온몸이 땀으로 젖어서 하루에도 몇 번씩 환자복을 갈아입어야 하는 악순환의 연속이었다. 그렇게 나는 고통 속에서 죽어가고 있었다. 내가 기댈 수 있고, 매달릴 수 있는 곳은 부처님 밖에 없었다. 무언가에 홀린 듯 가족과 의사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몰래 대학병원 안에 있는 조그마한 법당에 들어가서 무슨 병인지라도 알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그때부터 자나 깨나 아미타부처님만을 찾으며 기도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21일 기도 회향을 마치고 병실로 돌아오면서 병명을 알게 됐다. ‘악성 림프종’. 즉, ‘급성 혈액암 말기’였다. 그런데 이상했다. 순간 충격을 받기 보다는 아미타부처님께 감사를 올렸다. 초조하고 불안한 하루하루가 끝날 수 있도록 병명을 알게 해주신 부처님께 감사할 뿐이었다.
악성 림프종은 희귀병이라 백신이 없었다. 결국 항암치료를 하기로 결정했다. 이때 중요한 결정을 해야만 했다. 지난 2개월간 병마와 싸우면서 몸이 너무 쇠약해져 곧바로 항암제를 투여하면 위험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급성혈액암’이었기 때문에 체력이 회복되는 것을 기다릴 시간이 없었다. 결국, 항암제를 100%(일반적으로 50~80%로 투여한다)로 투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무서운 후유증이 찾아왔다. 극심한 변비에 폐에는 가스가 찼다. 응급실에서 코에 호스를 꼽고 4일간 가스를 빼냈지만 가스가 빠지질 않았고, 생명이 위험한 상태가 되면서 죽기 전에 간다는 호스피스 병동으로 옮겼다. 그곳에서 28일간 매일매일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며 죽음의 그림자를 느낄 수 있었다. 어떤 환자는 삶에 대한 집착 때문에 염실에 들어갔다가도 그 고통을 안고 다시 호스피스병동으로 나왔고, 어떤 환자는 죽음이 가까워져 왔음을 느낀 듯 거친 숨을 헐떡거리며 시계만 쳐다보면서 누군가를 애타게 기다리기도 했다. 또 어떤 환자는 의사로부터 언제 쯤 가게 될 것이라고 선고를 받았지만, 먹은 음식과 약을 다 토하면서도 살기 위해 다시 밥을 먹고, 혈변을 보면서도 살겠다는 의지 하나로 견뎌낸 끝에 마침내 살아서 나가기도 했다. 그 중에는 다른 사람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차마 견딜 수 없어 병실을 옮기는 환자도 있었다. 의사들은 내게 1인실로 옮길 것을 권유 했으나, 그대로 병동에 남았다. 생로병사가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무서움, 두려움, 괴로움, 탐욕, 애욕, 삶에 대한 집착, 이게 무엇이란 말인가?’ ‘죽음은 하나인데, 죽음으로 가는 모습은 왜 각각 다른 걸까?’ ‘그런 모습들이 불교에서 말하는 업의 모습인 것일까?’ 이런 나의 모습을 보고 옆 침대의 환자가 물었다.
‘나도 종교가 있지만 이렇게 무섭고 떨리는데, 당신은 어떻게 그렇게 젊은 나이에 자식도 어리고, 남편도 있는데 죽음에 초연할 수 있습니까? 당신은 당신이 말하는 종교의 부처입니까? 아니면 신이라도 되는 것입니까?’ 그랬다. 나는 죽음을 앞두고 간다는 호스피스 병동에서도 초연했다. 부처님과 늘 함께 하고 있다는 강한 믿음 덕분이었다. 그 한량없는 밝은 힘은 모든 어두움, 모든 두려움, 모든 괴로움을 뛰어넘는 맑고 밝은 대원력과 대지혜의 힘이었다. 그렇게 정신은 초연했으나 순간순간 찾아오는 육신의 고통은 의지와 상관없이 몸을 죽음으로 인도하고 있었다. 백혈구 숫자는 계속해서 떨어지고 있었고, 의사들은 더 이상의 치료법은 없다고 했다.
‘그래, 이제는 가야되나보다. 이 세상에 와서 내가 해야 할 일 다 끝났나보다’라는 생각을 하면서 유언도 했다. 그런데 이제는 모든 것을 놓고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던 그 순간, 몸이 새털처럼 가볍고 고통이 사라졌다. 찰나의 순간 생과 사의 경계에서 부모님과 가족들이 떠오르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참 생명이신 아미타부처님을 염송하면서 살아났다.
항암제로 인한 후유증이 끝나고, 죽음의 늪을 빠져나와서 첫 검사 때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맞지도 않는 항암제가 효과를 잘 받았는지 모르겠습니다. 목과 사타구니 쪽에 있던 암 덩어리들이 완전히 없어졌습니다.’ 현대의학에서는 기적이라고 하지만, 나는 부처님 법에 나오는 불가사의한 일이 나에게 일어났다고 생각했다. 그 후로 7~8차까지 항암치료를 더 받았고, 그동안 나는 하루도 안 빠지고 기도를 했다. 그때는 너무 고통스러워서 가족도 생각나지 않았다. 어떻게든 빨리 치료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럴 때마다 고통이 오는 것은 부처님을 더 가까이 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했다. 힘든 치료 속에서도 나 같은 환자를 만나면 내 고통은 잊고 그들을 위로해주기 바빴다. 항상 우는 얼굴보다는 웃는 얼굴로 그들에게 힘을 주고 싶었다. 그것이 바로 부처님 자비의 마음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서 모든 항암치료가 끝났을 때, 교수는 ‘이 병을 가지고 5년 내에 생존율이 10%밖에 안 되고 골수를 이식해야 생존율이 20~40%까지 올라간다’고 했다. 그래서 가족들과 상의 끝에 ‘자가 골수이식’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해서 21일간의 무균실 생활이 시작됐다.
무균실에서의 치료법은 처참했다. 핏속에 남아있는 암세포를 없애기 위해서 내 피 속에 있는 건강한 세포를 항암제라는 맹독으로 다 죽여야 했다. ‘왜 내가 죽지 않고 살았을까’ 후회를 한 적도 있었다. 항암 7~8차 치료의 아픔은 아픔도 아니었다. 무슨 말로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지옥’, 지옥이 이렇게 무서울까? 물을 마실 수도 없고, 밥을 먹을 수도 없고, 약을 먹을 수도 없고, 잠을 잘 수도 없고, 앉을 수도 없고, 설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고, 죽은 시체처럼 일주일을 구토와 혈변, 오장육부가 녹아내린 듯, 일주일간 죽은 시체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길고 길었던 암흑의 시간이 지났다.
무균실에는 환자 1명당 간호사 1명이 배정되어 있었다. 다른 환자들은 간호사에게 모든 걸 의지했으나 나는 의지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미타부처님만을 의지했다. 물 한모금만 먹어도 다 토하고, 입안이 다 헐고 헐어서 고름이 생기고, 몸은 욕창이 생겼다. 그렇게 고통스러웠지만 새벽 3시에 일어나서 아미타부처님께 기도했다. 오전에는 ‘금강경’ 사경을 하고, 오후에는 ‘법화경’ 사경을 했다. 항상 ‘관세음보살 보문품’의 ‘독사와 살모사와 무서운 독충들이 독한 기운 불꽃처럼 몸 안에서 뿜을지라도 관세음을 생각하고 크게 부른 그 힘으로 소리 듣고 스스로 피해서 물러가리라’라는 게송에 의지하여 이겨 나갔다.
그곳이 토굴이라 생각했고, 공부하며 늘 깎고 싶었던 머리를 깎을 수 있어서 감사했다. 함께 있던 사람들은 다 저 세상으로 먼저 떠났지만, 아미타 부처님과 함께한 나는 21일의 기도를 마치고 나만의 토굴(무균실)에서 다시 광명의 세계로 나올 수 있었다. 광명의 세계에서 맞은 빛은 눈이 부셨고, 나는 그 빛을 향해 감사의 삼배를 올렸다. 첫 번째는 주불 아미타부처님께, 두 번째는 대자연께, 세 번째는 인연이 있는 모든 분들께 절을 올렸다.
병원에서 퇴원하고 사리암에 처음 왔을 때, 다른 보살들이 ‘저 보살은 그렇게 열심히 기도를 했는데도 저런 무서운 병에 걸렸네’라고 보는 시선들에 가슴이 아팠다. 지금까지 부처님께 살려달라고 기도해 본 적이 없었지만 마음을 바꿨다. “부처님 저를 살리십시오, 저를 살려야만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볼 때 ‘아, 저 보살 부처님께 기도하더니 살았네’ 할 수 있도록 저를 살려야만 합니다.”
아! 그때 생각났다. 정초 기도할 때 약사여래 부처님이 윙크를 하셨던 그 순간이 이런 날이 올 거라는 암시였구나! 나를 더욱 성숙시키고 나를 더 신심 있고, 지혜로운 불자로 만들려고 지금 이 순간의 고통을 주고 있구나. 사람들은 어쩌다 이런 병이 왔냐고 말하지만 난 아프기 전보다 지금이 더 행복하다.
가족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고 내가 살아난 것은 어떤 순간에도 흔들리지 않고 그 누구도 미워하는 마음과 원망하는 마음을 가지지 않고, 오직 부처님을 믿고 부처님 법에 의지하여 살아 온 덕분이다. ‘나’가 있기에 ‘너’가 있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깨닫게 되었고 이 깨달음을 모든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다. 순간순간 부정의 힘 보다 긍정의 힘으로 다시 태어났다. 나의 남은 생명, 얼마나 남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보너스로 받은 이 생명, 자신의 몸을 태워서 어둠을 밝히는 촛불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광명의 빛을 나누어 주고 싶다.
때로는 천수천안관자재보살님처럼 언제 어디서나 상대에게 득이 되고 덕이 되는 그런 참된 불자가 되고 싶다. 부처님께 더 가까이 부처님을 닮아가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나는 부처님의 명훈가피력과 현몽가피력을 받아 광명의 세계에 다시 태어났기에 부처님의 말씀을 변함없이 실천하여 자비광명 충만한 불국정토를 성취하고 싶다.
거룩하신 부처님 덕분입니다. 거룩하신 부처님 고맙습니다. 거룩하신 부처님 감사합니다. 거룩하신 부처님 사랑합니다. 나의 참 생명이신 아미타부처님께 귀의합니다.
출처 : 법보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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