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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예배의 본질과 의미
여는 글
열두 사도를 비롯한 최초의 교회공동체는 예배를 스스로 창안한 것이 아니라, 예수에게서 명령받았다. 이 명령 속에는 예배의 정신뿐만 아니라 예배의 구조와 형식도 포함되어 있다. 이 예배는 열두 사도들과 그 제자들 그리고 그 제자의 제자들에게로 이어져 역사적으로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다. 그러나 중세기, 종교개혁시대, 근대 시대를 거치면서 예배에 대한 오해와 변형이 일어났으며, 19세기 미국에서는 초대교회 예배와는 전혀 다른 형태의 예배가 생겨났고 이 예배는 한국교회로 전래되었다.
한국교회는 선교사들이 전해준 이 변형된 예배의 구조와 형식 그리고 그 속에 깃든 예배신학을 그대로 130여 년간 지켜왔으며, 그동안 달리 예배에 대해 올바른 학습을 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예배는 신학적 성찰 없이 실용주의적 관점에서 다루어지기 시작했고 ‘변화’가 미덕으로 칭송받는 오늘날 ‘예배의 형식파괴’ 마저도 미덕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 기회에, 예배의 제정자이신 예수께서 원하셨던 것, 초대교회가 지켰던 예배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참 뜻을 헤아려 보는 일은 매우 의미있는 일이 될 것이다.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가 원하셨던 것
기독교의 예배는 예수의 분명한 명령에 의해 제정되었다. 예수께서는 공생애를 마치실 때에 마지막 만찬석상에서 제자들에게 떡을 떼어 주시면서 “이것은 나의 몸이다, 너희가 먹을 때마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라.”고 말씀하셨다. 또 잔을 들어서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후에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다, 너희가 마실 때마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라.”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이 예수를 기억할 만한 사건이나 사고는 많았다. 38년 된 혈루병 여인을 고쳐주신 일이나,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사람을 일으켜 세운 일, 심지어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일도 있다.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이런 엄청난 일들을 행하신 예수께서 당신을 기억할 만한 수많은 사건들을 다 제쳐두고 왜 하필 떡을 떼는 일과 함께 당신을 기억하라고 명령하셨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얻기 전에 먼저 우리는 열두 사도들을 중심한 초대교회가 예수의 이 명령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를 보아야 한다. 신약성서는 최초의 교회 공동체가 모임을 가질 때에 ‘떡을 뗀’(breaking bread) 일을 여러 곳에서 증언하고 있다.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썼으며”(행 2:42),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었다.”(행 2:46) 드로아의 교회 역시 안식 후 첫날 즉 주일에 모여서 ‘말씀을 듣고 식탁을 나누었다.’(행 20:7-)
이러한 기록들을 토대로 판단할 때에 최초의 교회는 ‘떡을 떼는 행위를 통하여’ ‘나를 기억하라’는 예수의 명령을 충실히 지켰음을 알 수 있다. 그 뿐이 아니다. 신약시대 이후의 교회도 이 명령을 충실히 지켰다. 신약성서보다 약 60여년 늦게 기록된 순교자 유스티누스(Justinus Martyr)의 『첫 번째 변증문』(First Apology, 165 AD)은 당시의 주일예배가 어떠한 순서로 행해졌는지를 상세히 진술하고 있는데, 여기에서도 ‘주의 만찬’은 매 주일 거행되었다.
그리고 일요일이라 불리는 날에 한 장소에서 도시나 농촌에 사는 사람들의 집회가 있는데, 거기서는 사도들의 언행록이나 예언자들의 글이 시간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낭독됩니다. 낭독자의 낭독이 끝나면 그 집회의 인도자는 강론을 통하여 이러한 고귀한 일들을 본받으라고 권고합니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모두 함께 일어서서 기도를 드립니다. 그리고 기도가 끝난 후에는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떡과 포도주와 물을 가져오고 인도자는 마찬가지 방식으로 힘있게 기도와 감사를 드리며 회중은 아멘으로써 화답합니다. 그 다음에는 성별된 떡과 포도주와 물이 각자에게 분배되고 부제들은 결석자들에게 그것을 가져다줍니다.1)
그렇다면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서, 예수께서는 왜 다른 큰 사건이 아닌 ‘떡을 떼는 일’과 함께 당신을 기억하라고 명령하셨을까? 그 해답은 바로 십자가에 있다. 예수께서는 당신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 위에서 살 찢고 피 흘려 죽게 될 것을 마지막 만찬 석상에서 미리 보여주셨다. 떼어지는 빵은 십자가 위에서 찢어지는 당신의 몸을, 부어지는 포도주는 당신의 몸에서 흘리게 될 피를 설명하기 위한 상징이었던 것이다.
공관복음서들은 주님께서 마지막 만찬을 가지신 날이 유월절이라고 한결같이 말하고 있다.(마 26:17-30, 14:12-26, 눅 22:7-20)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할 당시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라 죽음을 면하고 생명을 얻은 것을 기념하는 절기이다. 다시 말해서 죽임당한 어린양 때문에 구원을 받은 것을 기념하는 절기이다. 예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월절을 기념하기 위해 어린양을 도살하는 그 시각에 제자들과 함께 상에 앉으시고 빵을 떼면서 “이것이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라고 말씀하셨고, 또 잔에 포도주를 부으면서 “이것이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이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최초의 교회는 예수의 이 명령을 충실히 따랐다. 그들은 ‘모일 때마다’ ‘떡을 뗌’으로써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기억하고 감사와 찬양을 주님께 돌렸다. 그 뿐이 아니다. 교회가 주의 만찬을 거행하는 행위 자체가 바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온 세상에 선포하는 것이다. 성만찬은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 위에서 처형한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는 것이며, 또한 어떠한 죄인이라 할지라도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의 보혈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재구성된 신약시대 예배의 형식
우리는 신약성서에서 예배에 관한 체계적이고 구체적인 진술을 찾아볼 수 없다. 고린도교회가 모였을 때에 방언과 예언을 했다는 기록(고전 14장)이나, 교회 공동체가 모였을 때에 떡을 떼었다는 이야기(행 2장, 20장), 그리고 초대교회가 세례를 주었다는 기록(행 2장) 등 여러 곳에 흩어진 단편적인 기록만을 접할 수 있을 뿐이다.
다만, 실제로 초대교회 예배의 구조를 파악할 수 있다고 추론되는 부분은 앞서 언급한 사도행전 20장 7절 이하의 기록이다. 이 본문에는 당시 교회가 주일에 모여서 ‘강론’과 ‘떡 뗌’을 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이 본문이 중요한 이유는 여기에 나타나는 예배의 구조가 신약성경 이후의 여러 문헌들에 나오는 예배의 구조와 일치되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는 위에서 직접 인용된 순교자 유스티누스의 『첫 번째 변증문』이다. 기원후 165년에 기록된 이 문헌은 당시 로마지역에서 행해지던 예배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예배에 관한 구체적인 진술이 담긴 최초의 문헌이다. 이 기록에 의하면 당시 주일 낮 예배는 다음과 같은 여섯 가지의 순서로 이루어져 있었다. 성서봉독-설교-기도-(떡과 포도주의)봉헌-(성찬 감사)기도-성찬참여. 이 여섯 가지의 순서는 크게 두 부분으로 구분되는데, 첫째 부분은 ‘성서봉독-설교-기도’이고, 둘째 부분은 ‘봉헌-성찬기도-참여’이다. 앞의 세 요소는 성서봉독과 설교가 중심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말씀예전’이라고 부를 수 있으며, 뒤의 세 요소는 성찬기도와 참여가 중심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성찬예전’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여기에 기록된 예배의 구조는 사도행전 20장 7절 이하에 기록된 ‘강론’과 떡 뗌’이라는 구조와 정확히 맞아 떨어진다.
예배는 그 속성에 있어서 구조나 형식이 쉽게 변하지 않고 오래 지속되는 경향이 있다. 19세기 후반 미국의 선교사들로부터 복음과 함께 예배의 형식을 전수받은 한국교회가 오늘날까지도 그 예배형식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면 이를 알 수 있다. 물론 최근 일부 교회들이 소위 ‘경배와 찬양’ 형식의 예배를 택하고 있긴 하지만 이러한 예배들조차도 그 밑바탕에 깔린 예배구조는 여전히 19세기 형식이라는 사실에 변함이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2세기 중반에 기록된 순교자 유스티누스의 『첫 번째 변증문』을 가지고 역으로 1세기 후반 또는 그 이전에 행해졌던 예배의 형식을 추론해 볼 수 있다. 사도행전 20장 7절에 기록된 1세기 드로아교회의 주일 예배모임이 ‘강론’과 ‘떡 뗌’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에 관한 좀 더 구체적인 순서를 알아보는 일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다.
먼저 교회에 모인 사람들이 둘러앉은 자리에서 사도 또는 좌장격인 사람이 일어나서 생전의 예수와 함께 다니며 직접 눈으로 보고 들었던 이야기들을 사람들에게 들려주었을 것이다. 예수께서 생전에 행하셨던 많은 일들, 병자를 고치고 죽은 사람을 살리셨던 이야기,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셨던 이야기 등 수도 없이 많은 이야기들과, 또한 예수께서 생전에 하셨던 가르침들을 기억해 내어 회중에게 들려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믿음에 약해지지 말고 주님의 임박한 재림을 기다리면서 믿음에 굳게 서서 그 분의 가르침대로 행하자.”고 권면하였을 것이다. 예수께서 부활승천 하신 직후 수십 년 동안에는 아직 신약성서가 기록되기 이전이므로 이처럼 기억을 떠올려서 말했을 것이고, 데살로니가서나 고린도서 등의 편지들이 기록되면서부터는 그 편지들을 회중이 모인 가운데 봉사자(deacon)가 그것을 읽고 좌장이 거기에 해석과 권면을 더하는 방식이었을 것이다.
강론이 끝나면 모두 일어서서 함께 공동의 기도를 드렸다. 기도가 끝난 후에는 맡은 이가 빵과 포도주와 물을 앞으로 가지고 나와서 좌장에게 건네주고, 좌장은 그것을 들고 감사의 기도를 드린 후에 모두가 함께 그것을 먹었다. 빵과 포도주를 가지고 하는 이 ‘떡 뗌’ 의식은 당시 모임이 저녁에 행해졌다는 점을 감안하면 저녁식사를 겸한 것이었지만, 그 정신과 목적은 앞서 언급했듯이 십자가 위에서 찢기시고 흘리신 예수의 살과 피를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다.
초대교회 예배의 구조에 들어있는 예배신학
지금까지의 언급에서도 이미 다루어지기는 했지만, 좀 더 구체적으로 초대교회 예배의 구조와 형식에 들어있는 예배의 의미와 신학 즉 예배의 본질을 살펴보자. 먼저, 예배에서 성서봉독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순교자 유스티누스의 『첫 번째 변증문』은 성서봉독이라고 하지 않고 ‘예언자들의 글과 사도들의 언행록’을 읽었다고 했다. ‘예언자들의 글’은 구약성서를 뜻하며, ‘사도들의 언행록’은 신약성서를 뜻한다. 당시에는 신약성서가 정경화 되기 이전이었기 때문에 신약성서는 한 권으로 묶여져 있지 않았고 ‘누구에 의한 복음’ 또는 ‘누가 누구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이름의 낱권 형태로 이 교회에서 저 교회로 회람되던 시절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들의 언행록’이라는 말로 표현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예언자들의 글’과 ‘사도들의 언행록’을 읽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 즉 하나님의 아들은 다름 아닌 십자가에 달려 죽은 나사렛 예수 그분이라는 사실, 그리고 사도들이 그분을 따라 다니면서 그분이 일으키시는 기사와 이적 그리고 그분의 말씀 등을 통하여 그분의 메시아 되심을 두 눈으로 직접 목격했다는 사실을 증거하기 위함이었다.
성서가 읽혀진 뒤에는 그것에 관한 해석과 권면이 행해지는데, 이는 설교를 뜻한다. 유스티누스의 변증문은 봉독된 내용에 대하여 좌장 혹은 인도자가 ‘이러한 고귀한 일들을 본받으라고 권면하는’ 순서라고 소개하고 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이러한 ‘독서와 강론’이 유대교의 회당예배로부터 기독교로 도입된 것이라는 점이다. 누가복음 4장 16절은 예수님 당시 즉 서기 1세기 회당예배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 본문에 따르면,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셨고, 그곳에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으셨다. 그때 읽으신 내용은 다음과 같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사 61:1-2)
이 말씀을 다 읽으신 후에 예수께서는 이 읽은 부분에 대한 ‘해석과 권면’ 즉 설교를 하셨는데 그 장면을 누가복음은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그들이 다 그를 증언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바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겨…(눅 4:20-22)
그렇다면 회당에서 행해지던 유대교 예배에서도 구약성서를 읽고, 그리스도인들의 예배에서도 구약성서를 읽었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과연 유대교의 예배와 기독교의 예배는 동일한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그렇지 않다. 유대교인들의 예배에서는 구약성서를 읽고 ‘야웨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서 장차 메시아를 보내주실 것이다.’라고 설교하였다면, 그리스도인들의 예배에서는 동일한 본문을 읽은 후에 ‘야웨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메시아를 이미 보내주셨는데 그분이 바로 나사렛 예수이고, 누구든지 그분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하고 설교한 것이다.
부연해서 설명하자면, 초대교회가 구약성서를 읽은 이유는, 나사렛 예수가 바로 구약에 예언된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이심을 증거하기 위해서이고, 신약성서를 읽은 이유는 이 땅에 오신 메시아를 옆에서 따라다닌 사도들이 그분의 말씀과 행적을 증언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배에서 구약성서와 신약성서를 모두 읽어야 예배의 구속사적 차원이 확보된다. 다시 말해서 예배에서 구약과 신약을 함께 읽는 행위 자체가 바로 예배의 구속사적 차원을 말해주는 것이다. 기독교가 로마의 박해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게 예배하게 된 4세기 이후의 문헌들을 보면 당시 교회들은 예배에서 구약 한 곳과 신약 두 곳 즉 사도서신과 복음서를 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2)
한국교회의 예배에서도 성서봉독과 설교가 행해지고는 있다. 그러나 그 의미는 초대교회의 정신과는 사뭇 다르게 행해진다. 현행 성서봉독과 설교가 지니는 문제점은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 성서봉독이 한 곳만 읽혀진다는 사실이다. 이는 예배형식 자체가 지니는 예배의 구속사적 차원을 상실하는 것이다. 둘째, 한 곳만 읽혀지는 설교 본문은 설교를 위한 ‘근거 본문’을 제시하기 위함인데, 이마저도 본문에 대한 충실한 주석이 이루어지지 않고, 그저 설교자가 말하고 싶은 내용을 설교라는 이름으로 선포한다면 이는 예배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실제로 현재 한국교회의 강단에서 주로 외쳐지는 설교는 ‘긍정의 힘’이나 위로와 위안을 말하는 소위 ‘힐링’류, 그리고 칭찬과 격려 등의 메시지가 주류를 이루는 것이 현실 아닌가?
한국교회 예배의 가장 취약점은 바로 이것이다. 예배의 그리스도론적이고 구속사적 차원을 담보해주는 두 기둥인 ‘말씀’과 ‘성찬’에서 성찬이 배제되어 있고, 그나마 남아있는 ‘말씀’에서마저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이 약화되거나 배제되고 다른 내용의 선포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것 말이다.
다음으로, 예배에서 행해지는 성만찬의 신학적 의미를 살펴보자. 성만찬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먼저는 빵과 포도주를 앞으로 가져와 바치는 순서이고, 둘째는 그것을 들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순서이며, 셋째는 모두 그것을 받아먹는 순서이다.
빵과 포도주를 앞으로 가져와 바치는 봉헌의 행위는 창조신학과 결합되어 있다. 즉, 봉헌자의 손에 들려진 빵은 단순한 빵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햇빛과 비를 내려 자라게 하신 밀(wheat)에다가, 그것을 경작하기 위해 땀을 흘린 인간의 수고와 노동이 합쳐져서 이루어진 결실이다. 그러므로 빵은 하나님의 창조물 중의 일부이며, 이런 의미에서 목사가 두 손에 빵과 포도주를 들고 감사의 기도를 바칠 때에 그는 하나님의 창조세계 전체를 그의 손에 들고 있는 것이다. 교부 이레네우스(Irenaeus)는 ‘피조물인 빵’과 ‘피조물인 잔’이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창조와 구원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주장하였으며,3) 나아가 빵과 포도주는 새 창조의 일부분으로서 하나님께 드려진다.4)
성만찬에서 드리는 감사의 기도는 단순히 빵을 주신 것에 대한 감사를 넘어서 하나님의 인류 구원사 전체를 포괄한다. 즉 예배공동체는 성만찬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창조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공생애, 십자가와 부활, 승천과 재림이라는 구속사 전체를 언급하며 감사를 드린다.
이때에 집례자는 마지막 만찬석상에서 예수께서 행하셨던 네 가지 동작을 그대로 취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빵을 집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떼어’ ‘주는 것’이다. 이 네 가지 동작은 한 덩어리의 빵으로부터 나누어 먹기 위한 실용적인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지만, 그보다는 그 안에 깊은 신학적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주지하여야 한다. 먼저, 떡을 집는 동작은 통상적으로 떡을 성찬상으로부터 집어 올리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신학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이 십자가 위에서 높이 들리신 것을 상징한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이 동작이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을 위해서 필요하고 또 ‘복음의 극적인 선포’(dramatic proclamation of the Gospel)를 위해 필요하다고 하였다.5)
그리고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빵을 두 조각으로 쪼개는 것은 예수의 몸이 십자가 위에서 찢긴 것을 상징하며, 쪼개진 빵을 성반 위에 놓는 것은 돌아가신 예수의 몸이 무덤에 뉘이시는 것을 상징한다. 물론 포도주의 붉은 색깔은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예수의 피를 상징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에 성만찬은 나사렛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로 요약되는 예수 생애의 예루살렘적 국면을 지금 여기에서 요약하고 재연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요약하면, 신구약 성서를 읽고 설교를 하는 이유는 갈릴리에서부터 두루 다니시며 말씀과 기적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신 예수의 사역을 지금 여기에서 재현하고 선포하는 것이고, 성만찬을 하는 것은 십자가 위에서 살 찢고 피 흘려 당신 자신을 주심으로써 인류를 구원하신 예수의 사역을 지금 여기에서 재현하고 선포하는 것이다. 이 구조 속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인류 구원의 역사가 모두 들어 있으며, 예배자들이 이러한 행위를 통하여 창조와 구원의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릴 때에 지상의 예수와 함께 하셨던 성령께서 오늘의 예배자들과도 함께 하셔서 ‘그때’에 일어났던 구원의 역사를 ‘지금 여기에서’도 일어나게 하신다.
닫는 글
예배는 단지 복음을 선포하고 결신자를 이끌어내는 행위만이 아니며, 신자들의 신앙을 강화하기 위한 행위만도 아니다. 예배자들에게 긍정의 힘을 불어넣어 주거나 위로의 말을 전해주는 행위는 더더욱 아니다. 예배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위대하신 구원의 사역 즉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탄생, 공생애, 십자가, 부활, 승천 그리고 재림에서 절정을 이루는 구원사의 총체를 지금 여기에서 기억하고 재현하고 선포함으로써 성령께서 예배자들에게 이 모든 구원사의 은총을 힘 입혀 주시는 신학적 행위이다. 이번 기회에 한국교회가 예배의 신학을 다시 상고함으로써 신학적으로 충실한 예배, 온전하고 통전적인 신앙으로 이끄는 예배, 그래서 영적으로 살아있는 예배를 드리게 되기를 기대해 본다.
조기연 l 교수는 미국 드류대학교(Drew University)에서 예배학을 전공(Ph.D.)하였다. 한국 예배학회 회장과 한국 실천신학회 회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서울신학대학교에서 예배학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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