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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야무지(暮夜無知)
어두운 밤이라 아무도 모른다는 뜻으로, 몰래 뇌물을 주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暮 : 저물 모(日/11)
夜 : 밤 야(夕/5)
無 : 없을 무(灬/8)
知 : 알 지(矢/3)
(유의어)
모야포저(暮夜苞苴)
모야회금(暮夜懷金)
출전 : 후한서(後漢書) 卷54 양진열전(楊震列傳)
이 성어는 후한시대(後漢時代) 청백리 양진(楊震)의 일화에서 연유하며 '사지(四知)'로 널리 알려져 있다. 양진(楊震)은 후한(後漢) 홍농(弘農) 화음(華陰) 사람으로 자는 백기(伯起)이며, 경전에 밝고 박람해서 당시 '관서공자양백기(關西孔子楊伯起)'라 불렸다. 나이 쉰에 비로소 무재(茂才: 중국 한나라 때, 秀才)를 달리 이르던 말이다.
후한의 광무제 유수(劉秀)의 이름을 피하기 위해서 고친 것)로 천거되어 형주자사(荊州刺史)를 지내다 동래태수(東萊太守)를 제수 받아 부임하게 되었다(舉茂才, 四遷荊州刺史, 東萊太守).
부임하는 중에 창읍(昌邑)을 지나가게 되었다. 그곳의 현령 왕밀(王密)은 과거 그가 형주무재(荊州茂才)로 추천했던 사람이었다. 왕밀(王密)이 밤늦게 금 10근을 가지고 와 양진에게 바쳤다(當之郡 道經昌邑 故所舉荊州茂才王密為昌邑令 謁見 至夜懷金十斤以遺震).
양진이 말했다. “나는 그대를 잘 알고 있는데 그대는 나를 잘 모르니 어찌된 일이오(故人知君 君不知故人 何也)?”
왕밀이 말했다. “한밤중이라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暮夜無知者).”
그러자 양밀이 말했다. “하늘이 알고 신이 알고 내가 알고 그대가 알고 있는데 어찌 모른다고 하는가(天知 神知 我知 子知 何謂無知).”
왕밀은 부끄러워 하며 물러갔다. 그는 청렴해서 자식들이 거친 음식을 먹고 외출할 때도 걸어 다녔다.
벗들이 먹고살 도리를 하라고 하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청백리의 자손이라는 명성을 물려주는 것이 더 좋지 않은가(使後世稱為清白吏子孫, 以此遺之, 不亦厚乎).”
모야무지(暮夜無知)
정치란 ‘바르게 함(正)’이라고 성현마다 강조했다. 다산 정약용은 ‘고르게 함(均)’이라고 이에 덧붙인 바 있다. 매사 정직은 기본, 공통분모다.
그래서 다산은 목민심서에서 “청렴하지 않고서는 정치인이 될 수 없다(不廉而能牧者未之有也)”고 단정적인 주장을 폈다. 썩고 병든 세상에 대해 다산은 한없는 서러움을 토로하곤 했다.
부란(腐爛)이다. 세상과 사회의 어느 한 군데도 썩고 문드러진 곳이 없는 현실에 발만 동동 굴렀던 다산이었다. 청백리의 한!
정치권에서 다시 구린내가 나고 있다. 저축은행 금품 로비 사건으로 여야 의원들이 법의 심판을 받고 있는 터에 이번엔 지난 4·11 총선 공천헌금 비리 의혹이 터진 것이다.
공천을 빌미로 한 여당 공천심사위원과 현직 의원 간 돈거래 의혹은 비서 출신 제보자의 내용이 사실로 무게의 추가 옮겨가는 상황이다.
모야무지(暮夜無知) 격이다. 쥐도 새도 모르게 한 일이어서 아무도 모른다는 뜻이지만, 다 들통나게 마련이다.
후한서 양진전(楊震傳)을 펴보자. 중국 후한시대 양진은 형주 자사에서 동래 태수로 승차길에 올랐다.
임지로 떠나가던 도중 항읍에서 날이 저물어 객사에 들었다. 자신에게 은혜를 입은 창읍 현령 왕밀(王密)이 한밤중 그에게 황금을 가져왔다. 청렴한 양진은 거절했다.
왕밀은 양진이 일부러 뇌물을 받지 않는 줄 알고 “밤이 매우 깊어서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暮夜無知者)”라고 말하며 재차 권했다.
양진은 “하늘과 땅이 알고, 그대와 내가 알고 있다(天知 地知 子知 我知)”며 호통을 쳐 돌려보냈다고 전해진다.
공천헌금 의혹은 법이 가려줄 것이다. 한심한 건 따로 있다. 검은 돈은 비판받아 마땅하지만 유유상종일까, 비서가 고발했다는 점이다.
채근담에 “소인배와 원수가 되지 말라(休與小人仇讐)”고 했다. 애당초 불법적인 일을 꾸미지 말고, 평소 정도를 걷는 이들과 교류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암수(暗數)는 꼬리가 밟히기 마련이다.
황금 뇌물을 내친 양진
“하늘이 알고 땅이 안다”
후한서의 ‘양진전’에 ‘모야무지’라는 고사성어가 나온다. 말 그대로 풀면 ‘심야에 하는 일을 아는 사람이 없다’는 뜻이지만 그 본질은 ‘뇌물을 주고받는 행위’를 의미한다.
양진은 후한 시대의 인물이다. 경전에 밝고 두루 아는 바가 많아 사람들은 공자에 견줘 ‘관서의 공자’라고 불렀다.
400여 년 동안 대대로 서한과 동한의 고위 관직을 지낸 손꼽히는 명문 세가에서 태어난 그는 일찍이 현지 관리들이 수십 차례 벼슬에 나서길 권유했지만 거절하다가 50세에 대장군 등즐의 천거로 형주자사와 동래태수를 지냈다.
모난 돌은 사회적 자산
형주자사로 부임하러 가는 도중 창읍현을 지나게 됐는데 한밤중이었다. 사방은 캄캄하고 사물을 구분하기 어려웠다. 그때 창읍의 현령 왕밀이 은밀하게 찾아왔다.
양진에게 바싹 다가온 왕밀은 품에서 황금 10근을 꺼내 양진의 품에 안겼다. “이것이 무엇이오?” 깜짝 놀란 양진이 물었다.
왕밀이 대답했다. “감사의 마음입니다. 받아주십시오.” 왕밀은 양진의 천거로 현령이 된 인물이었으니 그것을 사례하려고 했던 것이다.
강직했던 양진은 되물었다. “그대는 어찌 내 마음을 몰라주는가?” 직접 꾸중을 하면 무안할 것 같으니 돌려 말했다.
그러자 왕밀이 대답했다. “늦은 밤이라 아무도 모릅니다(暮夜無知).” 보는 이도 아는 이도 없으니 무슨 뒤탈이 있겠느냐는 뜻이다.
하지만 양진은 왕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크게 화를 내며 꾸짖었다.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그대가 알고 내가 있는데 어찌 아는 사람이 없다고 하는가!” 이게 바로 이른바 사지(四知)라는 것이다.
왕밀은 양진의 거절과 노여움에 깜짝 놀라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여 황금을 도로 넣고 돌아갔다.
모야무지, 어둡고 깊은 밤이어서 아무도 모르니 마음 놓고 자신의 마음(뇌물)을 받아달라는 뜻이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안전한 뇌물이라는 뜻쯤 될 것이다.
고마운 마음에 혹은 기대하는 이익을 위해 선물을 빙자한 뇌물이 오간다. 뇌물은 공정을 깨뜨리고 제대로 된 평가를 방해해 결국은 그 사회 전체를 부패하고 무능하게 만든다. 당장은 어느 누군가 이익을 볼지 모르지만 사회적 비용은 훨씬 더 커진다.
양진은 청백리의 삶을 끝까지 고수한 사람이다. 탁군태수로 전임한 후에도 그는 사람을 겸손하게 대했고 검소하게 살았다. 자연히 가난한 살림살이였다. 다행히 자식들도 그 본을 따라 검소하게 살았다.
하지만 주변에서 보자니 벽창호처럼 보였고 궁색한 살림이 안쓰러웠던 모양이다. 그래서 받아도 탈 없는 것은 적당히 챙겨 전답과 가옥을 마련해 자식들에게 물려주라고 귀띔했다.
하지만 양진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고 이렇게 타일렀다. “후세 사람들에게 청백리의 자손이라는 명성을 물려주는 것이 가장 귀한 유산이 아니겠는가?”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말이 있다. 강직하고 청렴하면 존경하기는 커녕 모질다거나 혼자만 잘난 척한다며 뒤에서 쑥덕인다. 그러면서 그를 따돌린다.
그야말로 사회적 적반하장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다. 뇌물을 줬다가 거절당하는 자들에게는 직접적으로 원성을 산다.
양진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런 자들에게 양진은 제거해야 할 대상이었다. 몸에 밴 뇌물과 청탁이 자신의 안위와 승진 혹은 이익을 보장하는 것이라고 믿는 이들에게 청백리는 불편하기 짝이 없다. 결국 그들은 양진을 모함해 쫓아냈다.
삭탈관직 된 양진은 고향으로 돌아가던 중 간신들의 나쁜 짓을 보고 분노했지만 그것을 제거할 방법을 찾지 못했으니 무슨 면목으로 돌아갈 수 있느냐며 독주를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는 자신이 죽은 후 선산에 묻지 말고 제사도 지내지 말라고 당부했다. 모함으로 죽는 것보다 그런 불의를 발본색원하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을 탓했던 사람이니 얼마나 자존심이 상했으면 그렇게 당부했을까. 얼마나 억울했을까.
삼성의 김용철 변호사가 엄청난 비리를 고발했을 때 그의 용기를 칭찬하고 그가 몸담았던 대기업의 악행과 불의를 비판하기 보다 주인을 문 개 취급하고 심지어 그의 출신 지역을 들먹이며 불온의 딱지를 붙였다.
그것은 우리 사회가 내부자 고발에 대해 어떤 태도를 지니고 있는지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그 이후 내부자 고발은 위축됐다. 그러니 다시 악과 불의가 발호했다. 그렇게 사회가 점점 더 부패해진다. 부패는 사회적 비용을 증대시킨다.
비리를 고발하고 불의를 거절하는 것은 당장은 고통일지 모르지만 크게 그리고 멀리 보면 환부가 커지기 전에 도려내는 수술과 같다. 그런 점에서 모난 돌은 중요한 사회적 자산이고 조직의 소금이다.
김영란법을 시비하거나 너무 엄격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푸념하는 것은 그만큼 불의와 부패가 만연해 마치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지경이 됐다는 뜻이다.
모야무지를 질책한 양진만큼은 아니더라도 이참에 사회의 부패를 막고 미래의 가치를 키운다는 각오로 제대로 그 법을 지킬 일이다. 쓸데없는 밥자리 술자리 접대가 줄어 자연스럽게 집에 일찍 들어가거나 자신의 시간을 누리는 것은 덤이다.
모야무지(暮夜無知)
어두운 밤이어서 아무도 알지 못한다는 뜻으로, 깊은 밤중에 하는 일이라서 보고 듣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알 사람이 없다는 것을 말한다.
중국 위진남북조시대 송(宋)의 역사학자 범엽(范曄)은 상서이부랑(尙書吏部郎)의 관직에서 선성태수(宣城太守)로 좌천되면서 역사 연구에 몰두, 10여 년 각고의 노력 끝에 ‘후한서(後漢書)’를 편찬했다. 건무(建武) 원년(서기 25년)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가 후한(後漢) 정권을 세운 후부터 건안(建安) 25년(서기 220년) 헌제(獻帝) 유협(劉協)이 조비(曹丕)에 의해 폐출될 때까지 후한 196년의 역사를 기술했다.
그가 비록 지부(志部)를 완성하지는 못했으나 본기(本紀) 10권, 열전(列傳) 80권의 이 기전체 역사서는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반고(班固)의 '한서(漢書)'와 더불어 중국의 '삼사(三史)'로 꼽힌다. 문장이 유려하고 설명이 적확하기로 유명해 후한의 역사서 중 제일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그는 열전에서 문원(文苑), 열녀(烈女), 술사(術士), 일민(逸民), 독행(獨行), 당고(黨錮), 환관(宦官)의 일곱 가지 새로운 전(傳)을 첨가해 독특함을 더했다.
'후한서' 권 54의 '양진열전(楊震列傳)'을 펼치면 강직한 한 관료의 '사지(四知)'에 대한 아름다운 내용이 소개돼 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후한 제6대 안제(安帝) 때의 관료 양진(楊震)은 자(字)가 백기(伯起)다. 관서(關西)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학문에 전념해 박학다재하고, 인격이 출중하며 청렴결백해 '관서의 공자(孔子)'라는 칭송을 받았다. 이처럼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던 양진(楊震)이 형주자사(荊州刺使)에서 동래군(東萊郡)의 태수(太守)로 부임을 받고 동해로 가던 중 창읍(昌邑)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당시 창읍(昌邑) 현령으로 있던 왕밀(王密)은 양진이 형주자사로 있을 때 은혜를 입은 적이 있던 사람이었는데, 그가 동해태수로 부임하자 옛 상관을 다시 모시게 되어 한없이 기뻤다.
왕밀은 밤이 되자 예물로 황금 열량을 싸들고 태수의 관사로 찾았다. 그가 이렇게 많은 예물을 준비한 것은 옛날에 입은 은혜에 사의를 표하기보다는 앞으로 더 큰 도움을 받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양진은 굳이 사절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대를 친구로 알고 있는데, 그대는 나를 친구로 대하지 않으니 어찌된 일인가?"
그러자 왕밀은 그가 체면상 사양하는 생각하고 다음과 같이 둘러댔다. "어두운 밤이라 아는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慕夜無知者/모야무지자)"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네가 알고 내가 아는데 어찌 아는 사람이 없다고 하는가?"
양진의 준절한 나무람을 듣고 왕밀은 얼굴이 벌게져 몸 둘 바를 모르다가 황금을 도로 집어 들고 나갈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이 어두운 밤중에 하는 일이어서 아무도 모른다는 뜻에서 남몰래 선물이나 뇌물을 주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양진은 태복(太僕), 태상(太常)을 거쳐 삼공(三公)의 지위인 사도(司徒)가 되었다. 양진은 국정의 폐단을 충간(忠諫)하여 시정을 요구하다가 권신(權臣)들의 미움을 사서 도로(徒勞)에 그치자 "내가 나라의 은혜를 입어 고위직에 있으면서 교활한 간신을 미워했으나 주벌을 가하지 못했고, 혼란을 조장하는 요녀(妖女)를 싫어하면서도 금지시키지 못했으니 무슨 면목으로 일월(日月)을 대할 수 있겠는가?"하고 독배(毒杯)를 마시고 죽었다.
사회가 발달할수록 조직 내외를 막론하고 반칙을 더욱 교묘하게 포장해 자기의 이해관계를 위해 왕밀과 같은 비겁한 유혹으로 밤을 틈타는 재주꾼들이 생겨날 수 있다는 것이다. 명심하자. 네가 하려는 일, 그리고 어제 밤에 한일을 하늘과 땅과 너와 네가 알고 있으므로 모야무지(暮夜無知: 밤이 깊어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다)의 글귀를 명심하자.
중국 춘추시대 송나라에 청렴하기로 유명한 대부가 살고 있었다. 대부의 이름은 희(喜)요 성은 낙(樂)이었다. 대부의 자(字)는 자한(子罕)이요 벼슬은 사성(司城)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자한에게 보옥을 가지고 온 관리가 있었다. 물론 이 보옥은 뇌물이었다. ”나으리. 이 보옥을 받으소서. 이 보옥은 아주 값진 것이옵니다.“ 엽관배는 보옥을 두 손으로 받쳐 자한의 앞에 놓고는 큰절을 올렸다.
자한은 보옥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엽관배에게 물었다. ”그래?, 그렇다면 이 귀한 보옥을 자네가 가지지 왜 나에게 주나?.“
”예, 하도 귀한 것이오라 나으리께 바치고 싶었사옵니다. 원컨대 소관의 원이오니 받아 주옵소서.“ 엽관배는 두 손을 맞잡은 채 저두굴신했다.
”그러니까 더더욱 가져가라는 말일세.“
”나으리, 이 보옥이 혹시 마음에 안 드셔서 그러시는지요?, 다른 보옥을 구해 드리면 되시겠는지요?.“
”어허, 이 사람 말을 듣나 씹나?. 나는 탐내지 않는 것을 보배로 삼고 그대는 옥을 보배로 삼고 있어. 그러니 내가 만일 이 보옥을 받으면 우리 두 사람은 다 같이 보배를 잃고 마네. 그러니 도로 가져가게.“
이 이야기는 '춘추좌씨전' 양공(襄公) 15년 조의 몽구(蒙求)란 책에 나오는 자한사보(子罕辭寶)의 고사로서, '화는 탐하는 마음보다 더 큰 것이 없다'는 화막화어탐심(禍莫禍於貪心)을 일컬음이다.
'채근담'에서는 말하기를, "사람이 자칫 시장 바닥의 거간꾼으로 전락하면 깨끗이 살다 더러운 구렁텅이에 떨어져 죽는 것만 같지 못하다." 했다.
사서(四書)의 하나인 '대학(大學)'에도 이와 비슷한 말이 있는데 이 책에서 맹헌자는 "벼슬아치의 집에서는 백성의 재물을 거둬들이는 부하를 기르지 않아야 하며 만일 백성의 재물을 거둬들이는 부하가 있다면 차라리 도둑질하는 부하가 낫다"고 했다.
사지(四知)란 '세상에는 비밀이 없다'는 말이다. 나와 당신은 눈을 감았지만 하늘과 땅은 검은 거래를 지켜보고 있다. 한 정치인의 투기 의혹으로 나라가 시끄럽다. 당사자는 해명에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논란은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국민들은 '부적절한 행동'임이 분명하다며 싸늘한 시선을 보내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욕심이 있다. 그런데 욕심이 지나치면 탐욕으로 변질한다. 탐욕은 큰 화를 불러온다. 누군가 보는 사람이 없다 해도 양심에 어긋나지 않도록 행동해야 한다.
모야무지(暮夜無知)
이슥한 밤중에 하는 일이라 아는 사람이 없다는 뜻으로, 일명 네 가지가 알고 있다는 사지(四知), 곧 천지(天知), 지지(地知), 자지(子知), 아지(我知)로 더 많이 알려져 있는 말이다. 하늘이 알고(天知), 땅이 알고(地知), 거기다 그대고 알고(子知), 나도 알고(我知) 있다는 말이다. 청렴결백(淸廉潔白)한 벼슬아치에 비유하는 말이다.
12월 25일은 온 인류가 축복으로 하루를 보내는 성탄절(聖誕節)이다. 바로 2022년 전, 원죄(原罪)의 사슬에서 고통 받고 있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가장 낮은 자리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탄생일이 되는 날이다. 그는 약자(弱者)를 위하여 행동하였고, 죄인을 구원하는 실천으로 이때부터 인류의 영생(永生)은 시작되었고, 그날을 기억하며 영광과 축복과 찬양으로 하루를 거룩하게 보내고 있다.
이어서 5일만 지나면 한 해[一 年)를 보내는 아쉬움과 새로운 희망(希望)의 한 해를 맞는 세모(歲暮)의 분위기에 젖어 나름대로 한 해를 되돌아보곤 한다. 지난 한 해의 나 자신을 잠시 돌아보는 양심(良心)의 기준을 짚어보고자 한다.
후한시대(後漢時代)는 환관(宦官)들이 활개치고, 나아가 관료(官僚)까지 부정부패(不正腐敗)한 시대였으나, 반면에 고결(高潔)한 관리도 없지는 않았다. 제6대인 안제((安帝)때의 양진(楊震)도 그러한 부류의 한 사람이었다. 양진(楊震)은 관서(關西)지방 출신으로 박학다식(博學多識)했고, 또 청렴결백(淸廉潔白)한 인물이었으므로 당시 사람들은 '관서(關西)의 공자(孔子)'라고 찬양했다.
그 양진이 동래군(東萊郡)의 태수(太守)로 임명되었을 때의 일이다. 부임하는 도중 창읍(昌邑)에서 여관에 들었다. 그런데 그날 밤 늦게 창읍현(昌邑縣)의 현령(縣令)인 왕밀(王密)이 남모르게 찾아왔다. "태수님, 반갑습니다. 형주(荊州)에서 저를 이끌어 주신 왕밀(王密) 입니다."
"오오~ 오래간만이군." 양진은 왕밀을 기억하고 있었다. 전에 형주자사(荊州刺史)를 지냈을 때 그 학식을 아껴 수제(秀才)로 올려준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여러모로 옛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그런데 왕밀이 품안에서 금 10근의 거액을 꺼내 놓았다. 양진에게 드린다고 했다. 양진은 온화하게 그러나 단호히 거절했다. "나는 옛 친구인 그대의 학식(學識)과 인품(人品)을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네. 그런데 그대는 내가 어떤 인간인지 잊어버렸나?"
"아닙니다. 태수님! 태수님이 얼마나 고결한 분인지 뼈에 새기고 있습니다. 허나 이것은 뇌물(賂物)이 아닙니다. 그저 옛 은혜에 보답하기 위한 저의 작은 성의입니다."
"그대는 내가 예견한대로 훌륭히 성장해서 현령이 되었네. 앞으로 더욱 정진(精進)해서 나라를 위해 진력(盡力)하게. 내게 대한 보은은 그것이면 끝일세!"
"아닙니다. 태수님. 그리 냉정하게만 생각하시지 마시기 바랍니다. 게다가 지금은 야밤중이고 또 이 방에는 태수님과 저와 두 사람밖에 없어 아무도 모릅니다."
여전히 양진은 온화하게 왕밀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일순 그의 눈이 번쩍 빛남과 동시에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무도 모른다고는 할 수 없지. 우선 하늘이 알고(天知), 땅이 알고(地知), 거기다 그대고 알고(子知), 나도 알고(我知)있지 않는가?"
어지간한 왕밀도 양진의 양심적인 행동에 부끄러워하며 물러났다. 그 후 양진은 한층 고결한 자세를 유지(維持)하여 이윽고 태위(太尉/ 현 국방부장관)에 오르게 되었다.
훗날 양진은 모함을 받아 목숨을 끊을 때도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내가 죽으면 잡목(雜木)으로 관을 짜고, 포(布)로 한 번만 쌀 것이며, 조상의 무덤 옆으로 운반하지도 말고 제사도 지내지 말라." 양진이야 말로 청렴을 온몸으로 실천한 인물이다.
복잡했던 임인(壬寅)년이 저물었다. 이 해에 우리는 희망(希望)도 보았고, 절망(絶望)도 겪었고, 기뻐도 했고, 슬퍼도 했으며, 분노(憤怒)도 했고, 벅찬 마음으로 응원도 했다.
금년도는 유난히 세계 각국이 모두 경제적 어려움 속에 힘들어 하고 있다. 질병(疾病/코로나)이 발목을 잡아 경제를 위축(萎縮)시키고, 전쟁(戰爭)이 많은 희생을 강요한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약자(弱者)편에 서는 따뜻한 온정(溫情)과 양보(讓步)와 배려(配慮)의 훈훈한 풍속마저 멀어져 가는 느낌이다.
사서삼경 중 '대학'이 주논 교훈을 소개해본다. "국가의 어른이 되어 재물을 쓰는데만 힘쓰는 자는 반드시 소인(小人)이니, 소인으로 하여금 국가를 다스리게 하면, 재앙과 해로움이 함께 이루리라. 그 가운데에는 잘 하려고 하는 자가(소수인원)있더라도 어찌 할 수 없는 것이니 이것을 일러 나라(國家)는 이로움을 이익으로 여기지 않고, 의(義)로 이익을 삼아야 한다."
長國家而務財用者(장국가이무재용자)
必自小人矣(필자소인의)
국가의 지도자가 되어서 재물의 사용에 즐겨 나서는 사람은 반드시 소인입니다.
彼爲善者(피위선자)
小人之使爲國家(소인지사위국가)
菑害並至(재해병지)
국가 지도자가 잘 하려고 하더라도 소인의 품격으로 국가를 다스리면 재앙과 해로움이 함께 찾아옵니다.
雖有善者(수유선자)
亦無如之何矣(역무여지하의)
비록 착한 신하가 있다고 하더라도 닥치는 재앙을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니,
此謂國(차위국)
不以利爲利(불이이위이)
以義爲利也(이의위이야)
국가는 이득으로써 이로움을 삼지 말고 정의로움으로써 이로움을 삼아야 합니다.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서는 이득으로써 이로움을 찾지 않고 정의로움으로써 이로움을 찾아야 합니다. 매사를 처리함에 이득을 앞세우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나라의 지도자가 되어서 재물을 마구 쓰는 것은 소인으로서 저지르는 것이니, 소인으로 하여금 나라를 다스리게 해서는 안 됩니다. 백성을 다스리는 사람들은 물질적인 재물로써 이득을 추구할 것이 아니라 의로움, 즉 백성을 사랑하는 인(仁)과 의(義)의 덕을 이득으로 삼아야 합니다. 재산을 거둬들임으로써 이득을 삼지 말고 백성을 평안하게 해 줌을 이득으로 삼아야 합니다.
통치자가 덕으로써 백성을 돌보려 하지 않고, 백성들에게서 가혹하게 재물을 거두어 들이려는 정책을 펴는 것은 나라의 패망을 재촉하는 행위입니다. 통치자가 스스로의 이성을 잃고서, 재물을 거두어 들이려고 하는 소인들에게 국사를 맡긴다면 재앙을 면치 못할 것이요, 백성들의 원망과 반란을 야기하게 됩니다.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서 통치자는 이득 추구를 앞세우지 말고 정의로움을 존중해야 합니다. 나라의 최고 권력자라고 해서 백성이 생산한 것들을 모조리 착취하려 하지 말고, 적절한 세금을 매겨서 거두어야 합니다. 나라 지도자는 자기에게 주어진 권력을 남용해서 이득을 추구해선 안 되며, 어질고 정의로운 정책을 세워서 백성의 안위를 먼저 돌봐야 합니다. 이득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정의로움을 추구하겠습니다.
곧 위정자가 정의롭지 못하고 개인의 이로움만 챙기면(부정, 부패, 탐욕 등) 나라는 망할 수밖에 없다는 강한 경고의 메시지를 한해를 돌아보며 꼭 기억해야 할 것이다.
세상에 비밀은 없다.
중국 송말(宋末) 원초(元初) 사람인 증선지(曾先之)가 편찬한 '십팔사략(十八史略)'를 보면, 양진(楊震)이라는 사람이 나온다. 중국 후한(後漢) 제6대 임금 안제(安帝) 때 청렴결백한 관리로 이름을 날리던 인물이다. 게다가 학문도 출중해서 사람들이 모두 그를 '관서(關西) 지방의 공자(孔子)'라고 불렀다.
그런 양진이 동래태수(東萊太守)로 임명되어 임지로 가던 때이다. 날이 저물어 창읍(昌邑)이라는 현(縣)에 머물게 되었는데, 창읍 현령인 왕밀(王密)이 저녁에 찾아와서 인사한다. “태수님, 오랜만입니다. 오래전 형주에 계실 때 신세 졌던 왕밀이올시다. 아시죠?” “아, 잘 알지, 정말 오래간만일세.”
왕밀은 양진이 형주 자사로 있을 때 관리로 천거해 주었던 인물이다. 그때부터 벼슬살이를 순조롭게 하고 있으니, 양진은 왕밀의 출셋길을 열어준 은인인 셈이다. 그러니 얼마나 반가웠겠나? 두 사람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깊은 밤까지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었고, 이윽고 헤어질 시간이 되자 왕밀이 옷깃 속에서 황금 열 냥을 꺼내 놓았다. “갑작스러운 일이라 드릴 게 없습니다. 약소하나마 제 성의로 아시고 노자에 보태십시오.”
노자에 보태쓰라고 황금 열 냥을 내놓는 것이다. 어찌 보면 기특한 일이다. 은혜를 갚을 줄 아는 사람이니까. 그런 왕밀에게 양진은 어떻게 했을까? 양진은 부드럽지만 엄숙한 표정으로 물었다. “나는 옛날부터 자네를 잘 알고 있네. 자네의 학식과 인물에 대해 잘 알고 있지. 그런데 자네는 내가 어떤 사람이라는 걸 모르는가?”
“아, 아니올시다. 태수 어른, 태수 어른이 고결하신 분이라는 건 누구보다 제가 잘 알지요. 저는 다만 제 마음속에 새기고 있는 고마움을 표하자는 겁니다. 사실 이게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태수 어른께 무슨 뇌물로 드리는 게 아닙니다. 보잘것 없는 제 성의입니다.”
“자네는 지난날 내가 짐작했던 것처럼 훌륭하게 성장하고 출세해서 오늘날 현령이라는 벼슬에 올랐네. 앞으로도 더욱 훌륭한 벼슬아치가 될 것이고. 그러니 그것으로 나에 대한 보답은 충분하네. 안 그런가?”
“태수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너무 부끄럽습니다. 섭섭하고요. 게다가 이 방 안에 누가 또 있습니까? 태수님과 저 말고는 아무도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 모르는 척 소인의 정으로 받아 주십시오.”
왕밀이 보잘것 없는 것이고, 게다가 아무도 모르게 드리는 것이니, 받으시라고 말하자, 양진은 왕밀을 똑바로 쏘아보며 말했다.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자네가 알고, 내가 아는데, 어찌하여 아무도 알지 못한다고 하는가(天知 地知 汝知 我知 何謂無知)?"
하늘과 땅, 그리고 듣는 이와 말하는 이가 알고 있는데, 어찌 아무도 모른다고 하냐는 것이다. 세상에 비밀은 없다고 꾸짖는 것이다. 아무도 몰랐을 것 같은 양진과 왕밀의 일이 200년이 지나서 출간된 '후한서(後漢書)' 양진전(楊震傳)에 기록된 사실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세상에 비밀은 없다고 꾸짖을 때 양진은 틀림없이 '관서 지방의 공자'답게 다음과 같은 공자 말씀을 떠올렸을 것이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의 삶은 정직해야 한다. 정직하지 않은 삶은 요행으로 죽음을 면한 것일 뿐이다(子曰 人之生也直 罔之生也幸而免)."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힘, 사람을 사람이게끔 해주는 힘이 정직이라는 것이다. 세상에 비밀이 없고, 거짓은 통하지 않는 법이니, 늘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세상을 살다 보면, 정직하지 못하게 사는 사람이 오히려 떵떵거리는 잘 사는 모습을 보기도 한다. 착하고 정직한 사람은 어렵고 힘들게 살아간다. 정말 이렇게 살아가야 하는가 한탄할 때도 많다.
그런데도 사람은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고 공자는 목소리를 높인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 사는 건 다 똑같을 텐데, 그래서 공자도 세상 물정을 모르지 않을 텐데,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고, 아주 단호하게 말한다. 정직하지 않아도 잘 사는 건 살아도 사는 게 아니니, 정직성에서는 어떠한 타협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참으로 무서운 말씀이다. 누구나 고개를 끄덕이긴 하지만 누구도 지키기는 어려운 말씀이다.
누군가가 말했다. 몇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모두를 속일 수는 없고, 모두를 속일 수는 있어도 자기 자신을 속일 수는 없다고. 잠깐은 속일 수 있어도 영원히 속일 수도 없고. 당장은 어렵고 힘들더라도 정직하게 사는 게 좋다. 게다가 커다란 붕괴는 조그마한 틈에서 비롯되는 법이니, 작은 일부터 진실하게 말하고 행동하도록 노력해야 하겠다. 어렵고 힘들더라도 정직하게 살면서 자신을 지키는 일만큼 아름다운 것도 없으니까.
혼탁한 세상에서는 정직한 사람이 못살고, 정직하지 못한 사람이 잘산다고 생각하기 쉽다. 실제로 그런 일들이 적지 않게 일어나니까. 정직한 사람은 한숨 쉬며 쩔쩔매며 사는데, 정직하지 못한 사람이 오히려 큰소리 탕탕 치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참으로 슬픈 일이다. 한심한 일이다.
그러나 좀 더 깊이 생각해보면, 꼭 그런 건 아니라는 이도 있다. 현재 정직하지 못한 사람이 잘사는 것을 볼 때, 이런 게 정직하지 못한 사람이 잘사는 본보기라고 섣불리 판단하지 말고, 그 사람의 어릴 때 모습이나 집안 내력을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어릴 때부터 정직하지 못하게 살던 사람이 성공하는 경우는 없다. 거짓말하는 사람은 남들이 믿지 않는다. 남들에게 신뢰받지 못하고, 남들에게 신뢰받지 못하는 사람은 성공할 수가 없다. 성공은 혼자서 하는 게 아니다. 많은 사람이 도와주고 밀어주어야 성공할 수 있다. 성공한 사람이 정직하지 못하게 사는 건 성공한 뒤의 일이다. 사람이 성공한 뒤에는 성공을 지키고 싶은 욕심이 생기기 쉽다. 성공한 사람들이 거짓말하는 건 바로 그런 욕심 때문이다.
조상의 덕으로 성공하는 사람도 많다. 착하고 정직한 부모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대체로 착하고 정직하기에 성공할 가능성이 크다. 또 부모나 조부모가 남들에게 베푼 게 많아서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 그 후손에게라도 보답하고 싶어 한다. 그런 까닭에 훌륭한 조상에게서 태어난 사람들이 성공하는 수도 있다.
그러나 성공한 뒤에 정직하게 살지 않으면 말년에 가서 망하게 되고, 자녀들도 망가뜨리게 된다. 세상일은 어느 것이고 뿌린 대로 거두는 법이다. 정직하지 않게 살아가는 건 살아도 사는 게 아니라는 공자의 말씀은 조금도 틀림이 없다. 제법 그럴듯한 말이다. 그런데 정직하게 사는 게 무슨 말인가?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만 정직하게 사는 것일까?
▶️ 暮(저물 모)는 ❶회의문자로 莫(모)는 동자(同字)이다. 해가 풀숲에 숨은 모양을 나타내며 해질녘을 뜻하는 莫(막)이 없다의 뜻으로 빌어 쓰이게 되자 나중에 날 일(日; 해)部를 더하여 暮(모)를 해질녘의 전용(專用)글자로 하였다. ❷회의문자로 暮자는 '(날이) 저물다'나 '(시간에) 늦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暮자는 莫(없을 막)자와 日(해 일)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莫자는 풀숲에 해가 잠긴 모습을 그린 것이다. 그래서 본래 '저물다'라는 뜻은 莫자가 먼저 쓰였었다. 그러나 후에 날이 저물어 해가 사라졌다는 의미가 확대되면서 '없다'라는 뜻으로 가차(假借)되었다. 그래서 해서에서는 여기에 日(날 일)자를 더한 暮자가 '저물다'라는 뜻을 대신하게 되었다. 그래서 暮(모)는 ①날이 저물다 ②시간에 늦다 ③늙다, 노쇠하다 ④밤 ⑤저물녘, 해질 무렵 ⑥끝, 마지막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저녁 석(夕),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아침 단(旦), 아침 조(朝)이다. 용례로는 늦봄이나 음력 3월을 모춘(暮春), 늦여름으로 음력 6월을 모하(暮夏), 늦가을으로 음력 9월을 모추(暮秋), 이슥한 밤을 모야(暮夜), 늘그막을 모년(暮年), 날이 저물어 가는 어스레한 빛을 모색(暮色), 저물녘의 구름을 모운(暮雲), 저녁 때의 슬픈 생각을 모사(暮思), 저물게 오는 눈을 모설(暮雪), 늙바탕으로 늙어 버린 판을 모경(暮境), 저물녘에 내리는 비를 모우(暮雨), 절이나 교회 등에서 저녁 때에 치는 종을 모종(暮鐘), 해가 질 무렵의 경치를 모경(暮景), 늦 겨울을 모동(暮冬), 근래의 세상을 모세(暮世), 한 해의 마지막 때를 모세(暮歲), 저녁 무렵의 연기를 모연(暮煙), 저녁 때에 잠깐 하는 참선을 모참(暮參), 저물녘의 하늘을 모천(暮天), 그 해가 저무는 때를 세모(歲暮), 아침 저녁을 단모(旦暮), 한 해의 마지막 때를 연모(年暮), 아침 때와 저녁 때를 조모(朝暮), 저녁이나 늘그막을 만모(晩暮), 차차 나이가 많아지는 것을 지모(遲暮), 하루의 해 질 무렵을 일모(一暮), 해가 진 뒤로 껌껌하기 전까지의 어둑어둑하여 지는 어둠을 박모(薄暮), 길을 가다가 날이 저묾을 행모(行暮), 해가 진 뒤로 껌껌하기 전까지의 어둑어둑 하여지는 어둠을 혼모(昏暮), 깊은 밤중에 하는 일이라서 아무도 보고 듣는 사람이 없음을 이르는 말을 모야무지(暮夜無知), 저녁 빛이 짙어 어둑어둑함을 일컫는 말을 모색창연(暮色蒼然), 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라는 뜻으로 당장 눈앞에 나타나는 차별만을 알고 그 결과가 같음을 모름의 비유를 일컫는 말을 조삼모사(朝三暮四), 아침에 명령을 내리고서 저녁에 다시 바꾼다는 뜻으로 법령의 개정이 너무 빈번하여 믿을 수가 없음을 이르는 말을 조령모개(朝令暮改), 날은 저물었는데 갈 길은 멀다는 뜻으로 이미 늙어 앞으로 목적한 것을 쉽게 달성하기 어렵다는 말을 일모도원(日暮途遠), 아침에는 동쪽에 있다가 저녁에는 서쪽에 머문다는 뜻으로 일정한 거처가 없이 여기저기 옮겨다님을 일컫는 말을 조동모서(朝東暮西), 아침에는 구름, 저녁에는 비라는 뜻으로 남녀의 언약이 굳은 것 또는 남녀의 정교를 이르는 말을 조운모우(朝雲暮雨), 아침에는 파리 저녁에는 모기가 떼를 이룬다는 뜻으로 소인배가 발호함을 이르는 말을 조승모문(朝蠅暮蚊), 매일 아침과 매일 저녁이라는 뜻으로 아침 저녁으로 언제나 변함이 없음을 이르는 말을 조조모모(朝朝暮暮), 아침에는 동쪽에 있다가 저녁에는 서쪽에 머문다는 뜻으로 일정한 거처가 없이 여기저기 옮겨다님을 이르는 말을 조동모서(朝東暮西), 아침에 모여들었다가 저녁에 흩어진다는 뜻으로 이합집산의 무상함을 이르는 말을 조취모산(朝聚暮散), 아침에는 고사리를 먹고 저녁에는 소금을 씹는다는 뜻으로 몹시 곤궁한 생활을 이르는 말을 조제모염(朝薺暮鹽), 아침에 얻어 저녁에 잃는다는 뜻으로 얻은 지 얼마 안 되어서 곧 잃어 버린다는 말을 조득모실(朝得暮失) 등에 쓰인다.
▶️ 夜(밤 야, 고을 이름 액)는 ❶형성문자로 亱(야, 액)은 통자(通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저녁 석(夕; 저녁)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亦(역, 야)의 생략형이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亦(역, 야)는 사람 몸의 양 겨드랑, 夜(야)는 하루를 사람의 몸에 비겨 그 옆구리에 달을 그린 모양으로 새벽녘을 이른다. 夕(석)은 月(월; 달)과 같다. 나중에 해질녘에서 새벽까지의 전체를 가리키게 되었는데 낮에 대하여 밤은 곁에 있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❷회의문자로 夜자는 ‘밤’이나 ‘저녁 무렵’, ‘한밤중’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夜자는 夕(저녁 석)자와 亦(또 역)자와 결합한 모습이다. 亦자는 사람의 겨드랑이에 점을 찍어놓은 모습을 그린 지사문자(指事文字)이다. 夜자는 이렇게 겨드랑이를 가리키고 있는 亦자에 夕자를 더한 것으로 깜깜한 ‘어두움’을 뜻하고 있다. 금문에 나온 夜자를 보면 사람의 겨드랑이에 夕자가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달빛조차 보이지 않는 깜깜한 어두움을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夜(야, 액)는 성(姓)의 하나로 ①밤 ②저녁 무렵, 새벽녘 ③한밤중, 깊은 밤 ④침실 ⑤어두워지다 ⑥쉬다, 휴식하다 그리고 ⓐ고을의 이름(액) ⓑ진액, 즙(액)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밤 소(宵),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낮 주(晝)이다. 용례로는 밤중을 야반(夜半), 밤 사이를 야간(夜間), 밤중을 야중(夜中), 야광주 따위가 밤 또는 어둠 속에서 스스로 내는 빛을 야광(夜光), 밤중을 야분(夜分), 밤에 내리는 비를 야우(夜雨), 밤의 경치를 야경(夜景), 밤에 하는 싸움을 야전(夜戰), 밤에 곡함을 야곡(夜哭), 밤에 하는 일을 야근(夜勤), 낮과 밤을 주야(晝夜), 깊은 밤을 심야(深夜), 어떤 일을 하느라고 잠을 자지 않고 밤을 새우는 것을 철야(徹夜), 한밤중을 반야(半夜), 깊은 밤을 중야(中夜), 가을 밤을 추야(秋夜), 새벽녘을 잔야(殘夜), 이슥한 밤을 모야(暮夜), 어젯밤을 전야(前夜), 한밤중에 몰래 도망함을 야반도주(夜半逃走), 수놓은 옷을 입고 밤길을 걷는다는 뜻으로 공명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음을 이르는 말을 야행피수(夜行被繡), 밤에 시작하여 낮까지 계속함의 뜻으로 어떤 일을 밤낮으로 쉬지 않고 한다는 야이계주(夜以繼晝), 밤에 세상을 밝혀 주는 밝은 달을 야광명월(夜光明月), 밤에 대문을 닫지 아니한다는 뜻으로 세상이 태평하여 인심이 순박하다는 야불폐문(夜不閉門) 등에 쓰인다.
▶️ 無(없을 무)는 ❶회의문자로 커다란 수풀(부수를 제외한 글자)에 불(火)이 나서 다 타 없어진 모양을 본뜬 글자로 없다를 뜻한다. 유무(有無)의 無(무)는 없다를 나타내는 옛 글자이다. 먼 옛날엔 有(유)와 無(무)를 又(우)와 亡(망)과 같이 썼다. 음(音)이 같은 舞(무)와 결합하여 복잡한 글자 모양으로 쓰였다가 쓰기 쉽게 한 것이 지금의 無(무)가 되었다. ❷회의문자로 無자는 ‘없다’나 ‘아니다’, ‘~하지 않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無자는 火(불 화)자가 부수로 지정되어 있지만 ‘불’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갑골문에 나온 無자를 보면 양팔에 깃털을 들고 춤추는 사람이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무당이나 제사장이 춤추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춤추다’가 본래의 의미였다. 후에 無자가 ‘없다’라는 뜻으로 가차(假借) 되면서 후에 여기에 舛(어그러질 천)자를 더한 舞자가 '춤추다'라는 뜻을 대신하고 있다. 그래서 無(무)는 일반적으로 존재(存在)하는 것, 곧 유(有)를 부정(否定)하는 말로 (1)실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 공허(空虛)한 것. 내용이 없는 것 (2)단견(斷見) (3)일정한 것이 없는 것. 곧 특정한 존재의 결여(缺如). 유(有)의 부정. 여하(如何)한 유(有)도 아닌 것. 존재 일반의 결여. 곧 일체 유(有)의 부정. 유(有)와 대립하는 상대적인 뜻에서의 무(無)가 아니고 유무(有無)의 대립을 끊고, 오히려 유(有) 그 자체도 성립시키고 있는 듯한 근원적, 절대적, 창조적인 것 (4)중국 철학 용어 특히 도가(道家)의 근본적 개념. 노자(老子)에 있어서는 도(道)를 뜻하며, 존재론적 시원(始原)인 동시에 규범적 근원임. 인간의 감각을 초월한 실재이므로 무(無)라 이름. 도(道)를 체득한 자로서의 성인(聖人)은 무지(無智)이며 무위(無爲)라고 하는 것임 (5)어떤 명사(名詞) 앞에 붙어서 없음의 뜻을 나타내는 말 등의 뜻으로 ①없다 ②아니다(=非) ③아니하다(=不) ④말다, 금지하다 ⑤~하지 않다 ⑥따지지 아니하다 ⑦~아니 하겠느냐? ⑧무시하다, 업신여기다 ⑨~에 관계없이 ⑩~를 막론하고 ⑪~하든 간에 ⑫비록, 비록 ~하더라도 ⑬차라리 ⑭발어사(發語辭) ⑮허무(虛無) ⑯주검을 덮는 덮개 ⑰무려(無慮), 대강(大綱)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빌 공(空), 빌 허(虛)이고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있을 존(存), 있을 유(有)이다. 용례로는 그 위에 더할 수 없이 높고 좋음을 무상(無上), 하는 일에 막힘이 없이 순탄함을 무애(無㝵), 아무 일도 없음을 무사(無事), 다시 없음 또는 둘도 없음을 무이(無二), 사람이 없음을 무인(無人), 임자가 없음을 무주(無主), 일정한 지위나 직위가 없음을 무위(無位), 다른 까닭이 아니거나 없음을 무타(無他), 쉬는 날이 없음을 무휴(無休), 아무런 대가나 보상이 없이 거저임을 무상(無償), 힘이 없음을 무력(無力), 이름이 없음을 무명(無名), 한 빛깔로 무늬가 없는 물건을 무지(無地), 대를 이을 아들이 없음을 무자(無子), 형상이나 형체가 없음을 무형(無形), 아무런 감정이나 생각하는 것이 없음을 무념(無念), 부끄러움이 없음을 무치(無恥), 도리나 이치에 맞지 않음을 무리(無理), 하는 일 없이 바쁘기만 함을 무사분주(無事奔走), 한울님은 간섭하지 않는 일이 없다는 무사불섭(無事不涉), 무슨 일에나 함부로 다 참여함을 무사불참(無事不參), 즐거움과 편안함에 머물러서 더 뜻 있는 일을 망각한다는 무사안일(無事安逸), 아무 탈없이 편안함을 무사태평(無事泰平), 재미나 취미나 없고 메마르다는 무미건조(無味乾燥) 등에 쓰인다.
▶️ 知(알 지)는 ❶회의문자로 口(구; 말)와 矢(시; 화살)의 합자(合字)이다. 화살이 활에서 나가듯이 입에서 나오는 말을 말한다. 많이 알고 있으면 화살(矢)처럼 말(口)이 빨리 나간다는 뜻을 합(合)하여 알다를 뜻한다. 또 화살이 꿰뚫듯이 마음속에 확실히 결정한 일이나, 말은 마음의 움직임을 나타내는 것이므로 알다, 알리다, 지식 등을 말한다. ❷회의문자로 知자는 '알다'나 '나타내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知자는 矢(화살 시)자와 口(입 구)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知자는 소전에서야 등장한 글자로 금문에서는 智(지혜 지)자가 '알다'나 '지혜'라는 뜻으로 쓰였었다. 그러나 후에 슬기로운 것과 아는 것을 구분하기 위해 智자는 '지혜'라는 뜻으로 쓰이게 되었고 知자는 '알다'라는 뜻으로 분리되었다. 智자는 아는 것이 많아 화살이 날아가는 속도만큼 말을 빠르게 한다는 뜻이다. 그러니 知자도 그러한 의미로 풀이될 수 있다. 그래서 知(지)는 (1)사물을 인식하고 판단하는 정신의 작용하는 힘. 깨닫는 힘 (2)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알다 ②알리다, 알게 하다 ③나타내다, 드러내다 ④맡다, 주재하다 ⑤주관하다 ⑥대접하다 ⑦사귀다 ⑧병이 낫다 ⑨사귐 ⑩친한 친구 ⑪나를 알아주는 사람 ⑫짝, 배우자(配偶者) ⑬대접(待接), 대우(待遇) ⑭슬기, 지혜(智慧) ⑮지식(知識), 앎 ⑯지사(知事) ⑰어조사(語助辭)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알 인(認), 살펴 알 량/양(諒), 알 식(識),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다닐 행(行)이다. 용례로는 알고 있는 내용이나 사물을 지식(知識), 사물의 도리나 선악 따위를 잘 분별하는 마음의 작용을 지혜(知慧), 지적 활동의 능력을 지능(知能), 지혜로운 성품을 지성(知性), 지식이 있는 것 또는 지식에 관한 것을 지적(知的), 알아서 깨달음 또는 그 능력을 지각(知覺), 지식과 도덕을 지덕(知德), 아는 사람 또는 사람의 됨됨이를 알아봄을 지인(知人), 새로운 것을 앎을 지신(知新), 은혜를 앎을 지은(知恩), 지식이 많고 사물의 이치에 밝은 사람을 지자(知者), 제 분수를 알아 마음에 불만함이 없음 곧 무엇이 넉넉하고 족한 줄을 앎을 지족(知足), 자기 분에 지나치지 않도록 그칠 줄을 앎을 지지(知止), 거문고 소리를 듣고 안다는 뜻으로 자기의 속마음까지 알아주는 친구를 지음(知音), 여러 사람이 어떤 사실을 널리 아는 것을 주지(周知), 어떤 일을 느끼어 아는 것을 감지(感知), 비슷한 또래로서 서로 친하게 사귀는 사람을 붕지(朋知), 기별하여 알림을 통지(通知), 인정하여 앎을 인지(認知), 아는 것이 없음을 무지(無知), 고하여 알림을 고지(告知), 더듬어 살펴 알아냄을 탐지(探知), 세상 사람들이 다 알거나 알게 함을 공지(公知), 서로 잘 알고 친근하게 지내는 사람을 친지(親知), 자기를 가장 잘 알아주는 친한 친구를 일컫는 말을 지기지우(知己之友), 적을 알고 나를 알아야 한다는 뜻으로 적의 형편과 나의 형편을 자세히 알아야 한다는 말을 지피지기(知彼知己), 참 지식은 반드시 실행이 따라야 한다는 말을 지행합일(知行合一), 누구나 허물이 있는 것이니 허물을 알면 즉시 고쳐야 한다는 말을 지과필개(知過必改)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