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궁을 그리워함_박철(1960 ~ )
지리산, 아직 산내에서부터 비포장도로에
남원에서 뱀사골까지 하루 두 차례 직행버스가 다니던
시절
달궁 눈 속에, 빗속에 묻혀 나 거기 살았네
산사람들 겨우내 토방에 모여 고스톱을 치고
여름이면 뱀 잡고 밀렵을 하고 벌을 치고
나는 밤새 찰칵찰칵 타자기를 치다 간첩으로 신고를
당하기도 하고
그 덕에 노루며 뱀에다 꿀 따먹고
큰사람 되면 찾아오리라던 맹세가 이젠 영영 약속조차
잊혀지고
오래전 구례로 넘어가는 관통도로가 생겼다고 하고 마
을, 마을사람들은 모두
관광지, 장사꾼이 되었다고도 하는데 그래도 뭔가 옛
모습이 있겠지 하여
빨치산이 기어들듯 한번 밤을 도와 지리살 달궁이며
심원 마을 찾을까 하다
한번 다녀오면 이 그리움마저 관통 고속도로를 타고
어디론가
빠져나갈 듯하여, 인월 어디쯤에서 잃어버릴까 하여
그리움 그냥 지닌 채 멀리 남쪽 하늘을 바라보네
그리고
내가 먼저 깨달아야 할 것은 과연 큰사람이란 뭐냐 하
는 것이네
[2005년 발표 시집 「험준한 사랑」에 수록]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이원규(1962 ~ ) 詩, 안치환(1965 ~ ) 작곡
안치환 2007년 발표 9집 앨범 수록곡입니다.
https://youtu.be/YDI5BqtpqJE?si=b-TM7eaUC30tbfpr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_이원규(1962 ~ )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천왕봉 일출을 보러 오시라
삼대째 내리 적선한 사람만 볼 수 있으니
아무나 오시지 마시고
노고단 구름바다에 빠지려면
원추리 꽃무리에 흑심을 품지 않는
이슬의 눈으로 오시라
행여 반야봉 저녁노을을 품으려면
여인의 둔부를 스치는 바람으로 오고
피아골의 단풍을 만나려면
먼저 온몸이 달아 오른 절정으로 오시라
굳이 지리산에 오려거든
불일폭포의 물 방망이를 맞으러
벌 받는 아이처럼 등짝 시퍼렇게 오고
벽소령의 눈 시린 달빛을 받으려면
뼈마저 부스러지는 회한으로 오시라
그래도 지리산에 오려거든
세석평전의 철쭉꽃길을 따라
온몸 불사르는 혁명의 이름으로 오고
최후의 처녀림 칠선계곡에는
아무 죄도 없는 나무꾼으로만 오시라
진실로 지리산에 오려거든
섬진강 푸른 산 그림자 속으로
백사장의 모래알처럼 겸허하게 오고
연하봉의 벼랑과 고사목을 보려면
툭하면 자살을 꿈꾸는 이만 반성하러 오시라
그러나 굳이 지리산에 오고 싶다면
언제 어느 곳이든 아무렇게나 오시라
그대는 나날이 변덕스럽지만
지리산은 변하면서도 언제나 첫 마음이니
행여 견딜만 하다면 제발 오지 마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