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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일 밤 11시에 시모노세키를 떠나 부산으로 항해하던 관부연락선 도쿠주마루가 4일 오전 4시경 쓰시마섬 옆을 지날 즈음 양장을 한 여자 한 명과 중년 신사 한 명이 서로 껴안고 갑판에서 돌연히 바다에몸을 던져 자살했는데, 즉시 배를 멈추고 부근을 수색했으나 종적을 찾지 못했다. 승객명부에 남자는 전남 목포부 북교동 김수산(30세), 여자는 경성부 서대문정 2정목 273번지 윤수선(30세)이라고 씌어 있지만 본명이 아니고, 남자는 김우진, 여자는 윤심덕으로 밝혀졌다. 관부연락선에서 조선 사람이 정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현해탄 격랑 중에 청춘남녀의 정사’, ‘동아일보’ 1926년 8월5일자) |
기사는 김우진과 윤심덕이 ‘서로 껴안고’ 현해탄에 몸을 던졌다고 전했지만, 실제로 두 사람이 자살하는 장면을 직접 목격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승객 모두가 잠든 새벽 4시에 두 사람이 사라진 것을 발견했으므로 그들이 언제 어느 지점에서 투신했는지,
과연 투신한 것이 맞는지조차 확실하지 않았다.
윤심덕의 유류품에는 현금 140원과 장신구, 김우진의 유류품에는 현금 20원과 금시계가 있을 뿐 유서는 발견되지 않았다.
윤심덕은 최고의 소프라노로 대중의 인기를 한몸에 받던 음악가였고,
김우진은 목포 백만장자 김성규의 장남으로 와세다대학 영문과를 졸업한 전도유망한 극작가였다.
목격자도 없고 유서도 남기지 않아 두 사람이 무엇 때문에 어떻게 동반 자살했는지 정확히 알 길이 없었지만,
언론은 정사라 단정하고 앞 다투어 추측기사를 쏟아냈다.
도쿠주마루에 몸을 실은 수백 명의 승객들은 제각기 그리운 고향을 꿈꾸며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갑판 위에는 다만 두 사람의 젊은 남녀가 서 있었다. 남자는 고개를 깊이 숙이고 사납게 출렁거리는 물결을 굽어보며 가끔 길게 한숨을 내쉬어 무엇인지 비상히 한탄하는 것 같았다. 여자는 멀리 남실거리는 수평선 저쪽을 바라보며 애조(哀調)에 넘치는 애련(哀戀)한 목소리로 ‘사의 찬미’를 불렀으니 그의 오장에서 끓어 나오는 처량한 노랫소리는 다만 으르렁거리는 모진 파돗소리와 함께 수평선 저쪽으로 멀리멀리 사라져 버릴 뿐이었다. 그 순간 그들은 푸른 바닷물 속에 몸을 날렸다. (‘윤심덕 김우진 정사사건 전말’, ‘신민’ 1926년 9월호) |
윤심덕(왼쪽)과 동생 윤성덕.
사고 발생 사흘 후인 8월7일 밤, 김우진의 동생 김철진은 목포 자택으로 찾아온 기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는 비보를 듣고 부산까지 갔다가 오늘 낮차로 돌아왔소이다.
형님이 투신한 곳은 시모노세키와 부산 사이 한가운데랍디다. 그런 까닭에 지금껏 시체를 찾지 못했고, 앞으로도 찾기 어려울 것 같다고 합디다.
형님의 사고에 대해 각 신문에서 단편적인 사실 몇 가지를 부풀려 기사를 실었는데 각 신문에 발표된 내용은 가족의 견해와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현장에서 유서가 발견돼 경찰의 손에 들어갔다 함은 낭설이올시다.
저는 이에 대해 철저히 조사하여 세상의 오해가 없도록 발표하려 합니다.” (‘김씨 투신과 가족의설움’, ‘조선일보’ 1926년 8월10일자)
김우진의 가족은 현상금 500원을 걸면서까지 시신을 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두 사람의 시신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유서도 없고 시신도 없는 의문의 정사였다.
사고 발생 이틀 후, 윤심덕이 사고 직전 오사카 닛토(日東)레코드에서 27곡을 녹음한 사실이 알려졌다.
원래 계약은 26곡을 녹음하는 것이었지만, 윤심덕은 이바노비치의 왈츠곡 ‘다뉴브 강의 잔물결’에 자신이 가사를 붙인 노래 한 곡을 더 녹음하자고 제안했다. 윤심덕이 노래하고 동생 윤성덕이 피아노로 반주한 그 노래가 바로 ‘사(死)의 찬미’다.
‘사의 찬미’가 포함된 윤심덕의 유고 음반은 사고 발생 일주일 후부터 오사카를 시작으로 일본과 조선 전역에서 대대적으로 발매됐다.
‘사의 찬미’는 일본에서 발매된 최초의 조선어 노래였다. 정사 사건에 관한 사회적 관심에 힘입어 ‘사의 찬미’는 전대미문의 판매고를 올렸다.
한 시간 남짓 이어진 인터뷰가 끝나갈 때 윤성덕은 언니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지나친 관심에 불만을 표시했다.
그가 “남이야 살았든지 죽었든지 무슨 걱정이냐, 죽었으면 죽었고 살았으면 살았지.
도대체 조선사회는 왜 이렇게 남을 칭찬하기도 잘하고 욕하기도 잘하는지 모르겠다”고 되묻자, 김을한 기자는 인터뷰에 응해주어 고맙다는 말로 자리를 물러나야 했다.
윤심덕이 살아 있다는 윤성덕의 확신만 확인했을 뿐 뚜렷한 증거를 얻지 못한 채였다.
윤심덕과 김우진의 생존설은 두 사람이 정사한 직후부터 지속적으로 제기됐다.
두 사람 모두 유서도 시체도 발견되지 않았으니 가족들이 그렇게 믿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정작 두 사람의 생존설을 확대 재생산한 것은 호사가들과 언론이었다.
두 사람의 정사 덕분에 엉뚱한 사람이 돈방석에 앉았으니 호사가들이 입방아를 찧을 만도 했다.
동반자살한 이후의 상황도 의문이었지만, 자살 동기나 두 사람 사이의 관계는 더 큰 의문이었다.
윤심덕과 김우진은 제각기 아픔과 고민은 있었지만 함께 정사해야 할 뚜렷한 이유는 없었다.
윤심덕에게 김우진은 여러 남자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고, 김우진 역시 함께 죽어야 할 만큼 윤심덕을 사랑하지는 않았다.
‘왈녀’라 불리던 여인
윤심덕은 1897년 평양 순영리에서 부친 윤석호와 모친 김씨 사이의 1남 3녀 중 둘째딸로 태어났다.
윤심덕이 태어난 직후 그의 가족은 진남포로 이주했다. 부모는 모두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윤석호는 나물장사를 하고 김씨는 병원에서 허드렛일을 하면서 힘겹게 살았지만 네 자녀를 모두 훌륭히 교육시켰다.
맏딸 윤심성은 이화학당을 졸업하고 경상북도 안동으로 출가했고, 막내딸 윤성덕은 이화학당을 졸업한 후 모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윤심덕의 하나뿐인 남동생 윤기정은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고 도쿄음악학교와 오하이오대학에서 성악을 공부했다.
모친 김씨가 윤심덕을 임신했을 때 쌍둥이를 임신한 듯 보일 정도로 배가 불렀다.
윤심덕은 ‘6척(180cm) 장신’이라 불릴 만큼 키가 컸고, 어려서부터 성격이 사내아이같이 활달해 ‘왈녀’라 불렸다.
둘째였지만 4남매의 리더 노릇을 했고 동생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희생도 감수할 만큼 우애가 남달랐다.
여기까지가 학계에 공인된 윤심덕의 가정환경이다. 하지만 이와는 다른 기록도 전해진다.
김우진과의 만남
도쿄에서 윤심덕은 유학생들과 폭넓게 교유했다.
윤심덕은 왈녀라는 별명처럼 성격이 남성적이고 쾌활해서 남학생에게도 내외하는 법 없이 몇 번 만나면 서슴없이 말을 놓았다.
홍난파, 채동선, 김우진 등 숱한 남학생과 염문을 뿌렸지만, 자기가 싫으면 아무리 구애해도 받아주지 않았다.
니혼(日本)대학 문과에 다니던 박정식은 윤심덕에게 반해 약혼하자고 하루에도 몇 번씩 연애편지를 보냈다.
꽃다발과 사랑의 시를 전하면서 전력을 다해 구애했지만, 윤심덕은 냉정하게 뿌리쳤다.
박정식은 실연의 충격으로 정신이상이 생겨 학업을 중도에 포기하고 귀국해 몇 년 동안 총독부병원 8호실에 입원해 치료를 받았다.
박정식의 친구들이 윤심덕에게 찾아와 “사람이 그 지경까지 되었는데 사랑을 받아줄 수 없느냐?”고 부탁하자 윤심덕은 짜증을 내며 퉁명스럽게 답했다.
“그것이 왜 내 탓이냐. 아무리 내게 반해 실성했기로 내가 싫은데 어떻게 사랑을 받아주느냐?”
윤심덕은 싫은 사람에게는 한없이 쌀쌀맞게 대했지만,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주위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서슴없이 애정을 표시했다.
윤심덕이 동경에 있을 때 특히 친하게 지내는 청년이 두세 사람 있었다. 그의 성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윤심덕과 그 청년들이 사랑하는 사이라느니 어쩌느니 하고 아주 본 듯이 말하는 사람도 있었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윤심덕의 정숙지 못한 행동을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어서 웬만한 사람의 입에는 거의 오르내릴 정도로 소문이 자자했다. 남들이 자신에 대한 험담을 하면 할수록 윤심덕은 자기와 가깝게 지내는 청년들에게 더욱더 노골적으로 애정을 표했다. 그러다 보니 윤심덕을 헐뜯는 사람들이 제풀에 지쳐 다시는 그 같은 말을 입에 담지 않은 일도 흔히 있었다. 다시 말하면 윤심덕은 자기 속만 결백하면 세상에서야 아무렇게 떠들거나 머리털 하나 까딱하지 않는 뱃심이 있었다. (‘석일은 악단의 명성 윤심덕 3’, ‘동아일보’ 1925년 8월4일자) |
1921년 윤심덕은 여름방학을 이용해
김우진, 홍난파, 조명희 등 30명의 청년들과 함께 일본에 거주하는 조선인 노동자 단체 동우회의 운영비 모금을 위한 고국 순회공연에 나섰다.
이때 윤심덕은 김우진과 처음 만났다.
그때만 해도 김우진은 목포에 아내와 딸이 있었던 데다 도쿄에서 일본인 간호사와 사랑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선머슴 같은 윤심덕에게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윤심덕도 동우회 순회공연단에 참여한 다른 청년과 친밀한 관계여서 김우진에게 관심을 가질 겨를이 없었다.
동우회 순회공연단은 일본을 떠나 부산에 도착해서 여관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그날 밤 공교롭게도 여관방이 모자라서 윤심덕은 독방에서 자지 못하고 남자들과 함께 하룻밤을 지내야 했다. 윤심덕과 가장 가깝다는 그 청년도 같은 방에서 잤다. 밤이 조금 이슥해서 같이 자던 청년이 윤심덕의 정조의 단물을 한번 맛보고자 윤심덕에게 수상한 행동을 했다. 그때 윤심덕은 갑자기 일어나며 그 남자의 뺨을 치고 “나는 네가 그 같이 더러운 남자인 줄 모르고 가깝게 사귀었더니 이것이 무슨 금수의 행동이냐?”며 준열히 책망했다. 그러자 그 남자는 너무도 무안하고 민망해서 당장 백배사과하며 이후 다시는 그 같은 마음을 먹지 않겠다고 애걸복걸했다. 이런 일이 있은 이후에도 윤심덕은 여전히 그 남자와 가깝게 지낸다 한다. (‘석일은 악단의명성 윤심덕 3’, ‘동아일보’ 1925년 8월4일자) |
1930년 제기된 윤심덕 생존설이 놓치고 있는 한 가지 의문은 두 사람이 과연 정사할 만큼 사랑하는 사이였는가 하는 점이다.
윤심덕은 김우진만 사랑한 순간이 단 하루도 없었다.
언제나 동시에 여러 사람과 사랑을 나눴다.
김우진은 유부남이었고, 일본인 간호사를 사랑했다는 기록은 남아 있어도 윤심덕을 진심으로 사랑했다는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두 사람이 살림을 차린다고 손가락질하거나 뜯어말릴 사람도 없었다.
1920년대 조선사회에는 ‘제2부인’이라는 용어가 있을 정도로, 유부남과 처녀가 살림을 차리는 것이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드문 일도 아니었다.
두 사람이 정사할 이유가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죽음을 가장해 로마에서 신분까지 속이고 함께 살 이유도 없었던 것이다.
1931년 11월, 이탈리아 주재 일본영사관은 김우진의 유족에게
“로마에는 김우진과 윤심덕이라는 이름을 가진 조선인이 살지 않으며, 동양인이 경영하는 악기점도 없다”고 공식적으로 통보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생존설에서 제기한 것과 같이 중국 여권으로 신분을 가장하고 살 경우에 대해서는 확인하지 못했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윤심덕과 김우진이 1926년 8월4일 현해탄에서 동반자살한 것은 사실인 듯하다.
그렇다 하더라도 두 사람의 동반자살이 정사라는 믿음은 언론이 만들어낸 신화에 지나지 않는다.(전봉관의 옛날 잡지를 보러가다 발췌)
♪ 윤심덕 // 산의 찬미 ♪
♪ 김정호//사의 찬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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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관
● 1971년 부산 출생
● 서울대 국문과 졸업, 동 대학 석·박사(국문학)
● 서울대, 아주대, 한신대, 한성대, 덕성여대에서 강의
● 現 한국과학기술원 인문사회 과학부 교수
● 저서 및 논문 : ‘1930년대 한국 도시적 서정시 연구’ ‘황금광시대’ ‘경성기담’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