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삼덕동집
 
 
 
카페 게시글
논단, 칼럼, 관심 글 스크랩 인물탐구 시인 박인환
이연 추천 0 조회 34 11.10.26 14:0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시인 박인환(朴寅煥.1926.8.15∼1956.3.20)

 

 

 

   시인. 본관은 밀양(密陽). 강원도 인제 출신. 아버지 광선(光善)과 어머니 함숙형(咸淑亨)의 4남 2녀 중 장남이다. 1939년 서울 덕수공립소학교를 졸업하고 경기공립중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941년 자퇴하고, 한성학교를 거쳐 1944년 황해도 재령의 명신중학교를 졸업하였다. 그 해 평양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였으나 8ㆍ15광복으로 학업을 중단하였다.

   그 뒤 상경하여 [마리서사(茉莉書肆)]라는 서점을 경영하면서 김광균(金光均)ㆍ이한직(李漢稷)ㆍ김수영(金洙暎)ㆍ김경린(金璟麟)ㆍ오장환(吳章煥)ㆍ김기림(金起林) 등과 친교를 맺기도 하였다. 1948년 서점을 그만두면서 이정숙(李丁淑)과 혼인하였다. 그 해에 자유신문사, 이듬해에 경향신문사에 입사하여 기자로 근무하기도 하였다.

   1949년에는 김병욱(金秉旭)ㆍ김경린 등과 동인지 [신시론(新詩論)]을 발간하였으며, 1950년에는 김차영(金次榮)ㆍ김규동(金奎東)ㆍ이봉래(李奉來) 등과 피난지 부산에서 동인 ‘후반기(後半紀)’를 결성하여 모더니즘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1951년에는 육군소속 종군작가단에 참여한 바 있고, 1955년에는 직장인 대한해운공사의 일 관계로 남해호(南海號) 사무장의 임무를 띠고 미국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1955년 첫 시집 <박인환선시집(朴寅煥選詩集)>을 낸 뒤 이듬해에 심장마비로 죽었다.

   그의 시작 활동은 1946년에 시 <거리>를 [국제신보(國際新報)]에 발표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이어 1947년에는 시 <남풍>, 영화평론 <아메리카 영화시론>을 [신천지(新天地)]에, 1948년에는 시 <지하실(地下室)>을 [민성(民聲)]에 발표하면서부터 본격적인 시작 활동이 전개되었다.

   특히, 1949년 김수영ㆍ김경린ㆍ양병식(梁秉植)ㆍ임호권(林虎權) 등과 함께 낸 합동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은 광복 후 본격적인 시인들의 등장을 알려주는 신호가 되었다. 1950년 후반기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 <밤의 미매장(未埋藏)> <목마와 숙녀> 등을 발표하였는데, 이런 작품들은 도시문명의 우울과 불안을 감상적인 시풍으로 노래하여 주목을 끌었다.

   1955년에 발간된 <박인환선시집>에 그의 시작품이 망라되어 있으며 특히 <목마와 숙녀>는 대표작으로 꼽히는 작품으로서 우울과 고독 등 도시적 서정과 시대적 고뇌를 노래하고 있다. 1956년 작고 1주일 전에 쓰여진 <세월이 가면>은 노래로 만들어져 널리 불리기도 하였다. 30세로 요절하였다.

   1976년 그의 20주기를 맞아 장남 세형(世馨)이 <목마와 숙녀>를 간행하였다.

 

【유적지】

(1) 생가터 : 강원도 인제군 남북리 303번지에서 살았다는 이야기(확인 불명)

(2) 시비 : 군축령에 세워졌던 시비는 도로 확장 관계로 철거, 군청 창고에 보관

 

【작품세계】

   1949년 5인 합동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발간하여 본격적인 모더니즘의 기수로 각광을 받았다. 1940년대의 모더니스트로 알려진 이들의 모더니즘 운동은 김기림이 제창한 반자연(反自然)ㆍ반서정(反抒情)의 기치에 1940년대 후반의 시대고(苦)가 덧붙여진 것으로 확대되었다. [후반기] 동인으로 모더니즘 운동을 계속하면서도 도시적인 동시에 인생파적인 비애를 그려내고 있다는 점이 기타 동인의 시와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

   1930년대 김기림을 중심으로 한 모더니즘을 계승한 1950년대의 후기 모더니즘의 대표적 존재이다. 이러한 후기 모더니즘의 형식적 새로움은 새로운 현실 인식과 새로운 사회적 실천에서 불가피하게 일어난 것이 아니라, 현대 서구문학의 학습을 통해서 받아들여진 것이었다. 소재는 주로 해방 후의 혼란, 6ㆍ25, 도시생활에서 취했으며, 현대 도시 문명의 퇴폐적인 모습과 그에 따른 우수(憂愁)를 표현하였다.


   해방 후 <신시론>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 [후반기] 동인을 주도하며 1950년대 전후문단의 총아로 군림했던 박인환, 10년간의 문단 생활을 통하여 숱한 일화와 화제를 뿌리다가 비극적인 삶을 마감한 박인환에 대해서 우리는 그 풍문들에 갇혀 그의  시세계의 실상을 소홀히 해온 것이 사실이다. 1950년대 풍운아, 앙팡테리블, 문단의  게릴라 명동 백작 등등 박인환에게 부여된 수많은 익명의 형상들에 의해서 시인으로서의 박인환의 참모습이 오히려 가려진 형국이다.

   박인환은 가장 1950년대적인 삶을 산 사람이다. 그가 고백했듯이 어떤 시대보다 혼란하고 불안정한 연대에 살다가 31세의 짧은 나이로 비극적 생애를 마감했다. 젊은 나이에 청소년기를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보내고, 해방 후의 극심한 좌우익의 혼란 상황을 겪었으며, 동족상잔의 비극의 현장을 종군 기자로 생생하게 체험했다. 박인환의 30년간의 삶은 격동의 한국현대사를 압축해 놓은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박인환의 시세계는 격동의 현대사를 조망하는 하나의 관측구의 의미를 갖는다.

   박인환의 시세계는 두 가지 베일로 가려져 있다.

   하나는 문단사적인 베일이고, 또 하나는 모더니즘의 베일이다. 이러한 현상은 그가 문단의 풍운아였던 만큼 당연한 결과였는지 모르나 문단의 화제에 의해서 박인환의 시가 재단되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문단인과 시인은 다르다는 점이다. 경박한 포즈로 문단 주변에 화제를 뿌렸을망정 시세계 역시 경박하라는 법은 없다. 또 하나는 박인환의 시를 모더니즘의 자로만 평가하려는 경향이다. 이 역시 모더니스트의 기수로 자처했던 박인이었던 만큼 자연스런 결과였는지 모르나  분명 또 다른 시세계가 그의 시에 자리 잡고 있다. 그의 댄디한 풍모 뒤에 깊은 우수가 숨어 있었던 것처럼 암울한 리얼리즘의 시세계가 모더니즘의 이면에 펼쳐져 있다.

   따라서 박인환의 시를 올바로 평가하기 위해서는 그에게 가려진 이러한 두 가지 베일을 벗겨내야 한다. 그 동안 박인환에 대한 기존 평가는 대체로 부정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대부분 모더니즘 쪽에 관한 것이었다. 분명 후반기 동인을 중심으로 전개된 1950년대 모더니즘 문학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끝난 것은 사실이다. 심지어 1930년대 모더니즘 문학은 에도 미치지 못했다는 평이 나올 정도이다.

   그러나 박인환은 모더니즘의 세계로만 매달린 것은 아니다. 박인환이 모더니즘의  기수로 자처했지만 실로 모더니즘의 정신과 기법에 훨씬 못 미치고 있다.  다시 말해 박인환 역시 모더니즘에는 실패한 시인이었다. 그러나 8ㆍ15 직후에 씌어진 비판적 리얼리즘 시나 6ㆍ25 체험을 바탕으로 한 현실 인식의 시에서는 일정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 아울러 1950년대적인 한계 상황을 인식하고 절망과  좌절의 불안과 고독 등 실존적 포즈를 취함으로써 1950년대 전후문학의 당대성을 획득하는데 성공하고 있다. 박인환의 시세계는 도시 문명을 소재로 한 모더니즘  계열의 시, 해방 현실과 6ㆍ25 체험을 형상화한 리얼리즘 계열을 시로 나눌 수 있다. 이 두 축이 박인환 시세계를 형성하는 기본 구도이다.


   일제 강점기 8ㆍ15와 6ㆍ25로 이어지는 현대사의 격랑 속에서 온몸으로 문학과 예술의 혼을 불태워 한국 문학사의 새 길을 밝히고자 했던 박인환. 만 30세의 짧은 여정이었지만 그의 삶과 문학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늘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해방과 함께 찾아온 새시대의 문화 공간과 정신사적 지표의 중심에 서서 화전민 세대로서 이 땅의 척박한 문화 풍토를 개간코자 했던 의 노력이 있었기에 우리 문학사는 그만큼 풍요로울 수 있었던 것이다.

   1950년대를 한국 문학사의 뒤안길에서 숱한 화제와 풍문들을 뿌려 한국 문학의 신화를 잉태했던 박인환, 그래서 그의 문학은 그의 삶과 뗄 수 없는 운명적인 관계에 놓여있다. 그의 시에 보이는 도저한 허무의식과 죽음 의식은 1950년대를 풍미한 실존적 정신 상황에 그대로 직결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그의 문학은 가장 당대적인 것이고 박인환 자신 역시 전문 문단의 대표적인 개인이요, 문제적인 개인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위안으로서의 문학, 박인환 문학의 본질은 그것이다. 전쟁의 극한 상황과 허무와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당대인들에게 한줄기 눈물과 위안의 악수를 건넴으로써 조그마한 정신적 안식처를 마련해 준 것이 <목마와 숙녀> <세월이 가면>이었다.

   시인의 역할이 당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정신적 위안을 주고 삶의 등불을 밝혀 주는 일이라면 박인환은 시인으로서 그의 임무를 충실하게 수행해 냈던 것이다. 지금도 우리는 1950년대 정신 풍토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분단의 질곡과 정신적 아노미 상황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시가 지금도 정서적 공감 속에서 잔잔한 울림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박인환의 꿈과 좌절 뒤에는 이카로스의 신화가 자리잡고 있다. 초날개를 만들어 비상의 날갯짓을 하다 지중해 바다에 추락한 이카로스의 꿈과 좌절 그래서 그는 한국문단의 이카로스일 수밖에 없다. [후반기]의 열망과 만 30세의 요절이 박인환의 꿈과 좌절을 상징하고 있다. 박인환의 꿈과 문학은 완료형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으로 살아 있다. 그가 살던 시대와 정신이 지금 우리에게도 유효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삶과 문학을 살피는 일은 우리들이 지향해야 할 현재와 미래를 점검하는 일이 된다.

 

【연보】

1926년 강원도 인제 출생

1944년 황해도 재령 명신중학교 졸업. 관립 평양의학전문학교 3년제 입학

1945년 광복 후 학교를 중단하고 상경. 종로 3가 2번지 낙원동 입구에 서점 [마리서사]를 개업

1946년 12월, [국제신보]에 <거리>라는 작품을 발표하여 시인으로 데뷔

1948년 입춘을 전후하여 [마리서사]를 폐업. 김경린, 양병식, 김수영, 임호권, 김병욱 등과 동인지 [신시론] 제1집을 발간. 자유신문사에 입사

1949년 김경린, 김수영, 임호권, 양병식 등과 5인 공동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 발간. 경향신문사에 입사. 동인 그룹 [후반기] 발족.

1951년 경향신문사 본사가 있는 부산과 대구를 왕래 종군 기자로 활동. [후반기] 동인 활동.

1952년 경향신문사를 그만두고 대한해운공사에 취직

1953년 환도 직전. 부산에서 [후반기]의 해산이 결정됨

1955년 화물선 남해호의 사무장으로 미국을 여행. 귀국 후 [조선일보]에 <19일간의 아메리카>를 기고. 대한해운공사 퇴사. <박인환선시집(選詩集)>간행

1956년 심장마비로 자택에서 사망

 

【작품】<거리>(1946.국제신보) <남풍>(1947) <군상(群像)>(1947) <나의 생애에 흐르는 시간들>(1948) <인도네시아 인민에게 주는 시>(1948.신천지) <지하실>(1948.민성)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1949.5人 합동시집) <열차>(1949.개벽) <인천항>(1949) <종말>(1952) <눈을 뜨고도>(1954) <밤의 미래장>(1954) *<목마와 숙녀>(1955) <투명한 버라이티>(1955.현대문학) <죽은 아포롱>(1956.동아일보) <뇌호내해>(1956.문학예술) <침울한 바다>(1956.현대문학)

【시집】<새로운 도시와 시민의 합창>(1949.합동시집) <박인환선시집>(1955.산호장), <목마와 숙녀>(1976.근역서재)

    --------------------------------------------------------------------------------------------------

 

  <박인환의 시세계> - 이동하(문학평론가)

   한국의 근대시사 가운데서 1945년의 해방으로부터 1960년의 4ㆍ19에까지 이르는 시기의 시는 가장 덜 알려지고, 가장 덜 논의된 부분에 속한다. 그 이전의 시, 즉 20년대에 나온 시나 30년대에 나온 시들은 학계와 비평계 양쪽에서 거듭거듭 다루어졌고, 그 시대를 대표하는 시인들의 작품을 모은 앤솔러지도 심심찮게 발간되었기 때문에, 그 시대의 시인들은 전문적인 연구자들에게나 일반 독자들에게나 똑같이 친숙한 존재가 되어 있다. 그리고 4ㆍ19 이후의 시들 역시, 전문적인 연구자들에게나 일반 독자들에게나 똑같이 친숙한 존재가 되어 있다는 점에서는, 20년대 혹은 30년대의 시와 다를 바 없다. 이 시기의 시들은 아직 학술적인 연구의 대상으로는 좀처럼 등장하지 않고 있지만, 비평계의 조명을 집중적으로 받아 왔다는 점, 그리고 신작시집이나 시선집의 형태로 일반 독자들에게 거듭거듭 소개되어왔다는 점으로 해서, 별다른 어려움 없이 ‘친숙한 존재’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에 비하면. 해방에서 4ㆍ19에까지 이르는 시기의 시는 사정이 크게 다르다. 해방 이전에 이미 등단했던 시인들과 김수영, 김춘수, 신동엽 등 몇몇 ‘스타 시인’의 경우를 제외하고 보면, 이 시기의 시들은 전문적인 연구자들에 의해서나 일반 대중에 의해서나 거의 외면되어 오다시피 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그 결과 이 시기의 많은 시와 시인들에 대해서는 별다른 객관적 근거를 갖추지 못한 풍문들만이 막연하게 흘러 다니는 사태가 빚어지게 되었다. 왜 이 모양이 되고 말았을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은 대략 세 가지로 나누어서 정리해볼 수 있을 듯하다.

   첫째, 해방에서 4ㆍ19에 이르는 시기 자체가 현재의 시점에서 보면 다소 모호한 위치에 놓인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보수적인 학계의 시각에서 보면, 이 시기는 현재의 시점으로부터 너무 가깝기 때문에 학술적인 연구의 대상으로 삼기에는 부적당하다는 결론이 내려진다. 그런가 하면, 비평계나 일반 독자층의 시각으로 볼 때는, 이 시기는 현재의 시점으로부터 너무 멀기 때문에 동시대적인 관심의 대상으로 삼기에는 부적당하다는 결론이 내려지는 것이다. 너무 가깝다는 이유로 외면당하고, 또 너무 멀다는 이유로 외면당하는 역설적인 상황 속에 이 시대의 시는 놓여 있는 셈이다.

   둘째, 해방 이전에 이미 등단했던 시인들이나 해방 이후에 등단했다 하더라도 예외적인 위치에 도달하는 데 성공했던 몇몇 시인들(여기에는 앞서 이름을 들었던 김수영, 김춘수, 신동엽뿐 아니라 그 밖에도 몇 명이 더 추가되어야 마땅하다)의 경우를 제외하고 보면, 이 시기에 나온 시작품들은 오늘날의 전문적 연구자나 일반 독자를 끌어당길 만한 매력을 결여하고 있는 게 일반적이라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 이렇게 된 이유는 물론 하필 그 시대에 재주 없는 사람들이 시단으로 많이 몰렸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시대에 활동한 시인들 가운데 상당수가 일본어로 교육을 받고 자라난 까닭에 우리말을 다루는 데는 지극히 서투를 수밖에 없었다는 점, 그리고 대체로 성년의 문턱으로 접어들거나 청년기를 끝내갈 무렵에 4ㆍ19의 대지진을 만나 심각한 혼란을 경험하게 되었다는 점, 이 두 가지가 바로 진정한 이유인 것이다.

   셋째, 아무리 위에서 말한 시기상의 모호성과 이 시대 시 자체의 매력 없음을 강조한다 하더라도 역시 완전히 빼놓을 수는 없는 또 한 가지 원인으로서, 우리 시대 비평가들의 지나친 편식증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엄밀히 따져보면 지금까지 언급한 두 가지 이유란 학계와 일반 독자층을 위한 변명으로는 성립이 가능한 것이지만 비평계를 위한 변명으로는 성립이 불가능한 것이다. 얼핏 보기에 동시대적인 관심을 촉발하지 않더라도, 또 별다른 매력이 없는 것처럼 여겨지더라도 일단은 성실하게, 폭넓게 읽고서 올바른 자리매김을 시도하는 것이 비평가의 직분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 시기에 활동한 시인들 중 해방 전에 등단한 사람들과 김수영, 김춘수, 신동엽 등 소수만을 주목하고 나머지는 내몰라라 방치해온 대다수 비평가들의 자세는 결코 정당한 것이었다고 할 수 없다. 지금까지 나는 해방에서부터 4ㆍ19까지에 이르는 시기의 우리 시가 다른 시기의 우리 시에 비할 때 상대적으로 적은 관심밖에 모아오지 못했으며, 그 결과 별다른 객관적 근거를 갖추지 못한 풍문들만이 막연하게 부유하는 사태가 현출되었음을 말하고 그렇게 된 이유를 내 나름대로 분석해본 셈이거니와, 박인환(1926∼1956)은 지금까지 내가 해온 이야기를 전형적으로 예증해주는 인물 가운데 하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점에서 그와 같은 판단이 가능하다.

   첫째, 박인환이 시작 활동을 전개한 시기는 <거리>라는 작품을 [국제신보]에 발표하여 데뷔한 1946년 12월부터 <죽은 아포롱>을 발표한 1956년 3월까지에 걸쳐 있으며, <죽은 아포롱>이 발표된 지 3일 후에는 그 자신이 세상을 떠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거니와, 이로써 볼 때 그의 시적 생애 전체가 해방에서 4ㆍ19까지에 이르는 시기 안에 포함됨을 알 수 있다. 즉, 그는 이 시기를 떠나서는 전혀 논의될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둘째, 그의 시세계에 대한 본격적 접근이 지금껏 전혀 행해지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그 수는 매우 적다. 특히 일관된 프로그램에 근거하여 다수의 시인론을 기획, 청탁, 수록한 논문집 혹은 평론집이 만들어지는 바람에 덩달아 언급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던 경우를 제외하고 순전히 그에 대한 연구자 자신의 자발적 관심에 기초하여 논문이나 평론이 씌어진 경우는 극히 희소하다.

   셋째, 그의 시세계에 대한 본격적 접근이 이처럼 희소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그에 대한 가십 차원의 풍문은 대단히 풍부하고 또 화려한 편이다. 박 인환은 아마 이 점에 있어서는 1950년대의 많은 시인들 가운데서도 1.2위를 다투는 존재일 것이다. 마리서사 시절의 낭만과 관련된 풍문들, 후반기 동인회를 둘러싼 얘기들, 환도 후 감상적 실존주의와 폐허의식의 물결에 휩싸인 명동을 누비고 다닌 이른바 명동백작 시절의 에피소드들, 박 인환이 시를 쓰고 이진섭이 곡을 붙인 작품 <세월이 가면>에 얽힌 얘기들, 영화광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는 얘기들, 그리고 그의 불행한 요절에 관련된 얘기들, 이런 풍문 차원의 얘기들이 그를 빽빽하게 둘러싸고 있어 정작 그의 시작품 자체는 거의 보이지 않을 지경인 것이다.

   넷째, 그가 남긴 시작품들 가운데 대부분에는 오늘날의 전문적 연구자나 일반 독자를 끌어당길 만한 매력이 갖추어져 있지 않다. 여기서 내가 ‘전부’라 하지 않고 ‘대부분’이라 한 것은, 예컨대 <목마와 숙녀> 같은 예외적 존재가 있음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목마와 숙녀>는 전문적 연구자들의 경우에는 평가가 엇갈리고 있는 작품이지만, 일반 독자들로부터는 의심할 바 없이 대단한 인기를 누리고 있는 작품이다. 그러나 이런 작품은 위에서도 말한 것처럼 어디까지나 예외적인 존재이다. <목마와 숙녀>나 이진섭에 의해 작곡되어 널리 불리고 있는 <세월이 가면> 정도를 제외하면, 박 인환의 시 가운데서 대중의 폭넓은 사랑을 받고 있는 작품은 거의 없다.

   다섯째, 박인환이 이처럼 상당히 한정된 수준의 성과밖에 남기지 못한 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그 중 일부로서 우리는 그가 일본어로 교육을 받고 자라난 세대에 속하며 또한 청년기에 4ㆍ19를 겪고 깊은 정신적 상처를 입은 세대에 속한다는 사실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우선 그가 일본어로 교육받은 세대에 속한다는 사실은 그가 살아 있는 우리말을 다루는 데 서툴렀다는 사실과 직결되는데, 이것은 사실 시인으로서는 커다란 불행이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그가 청년기에 4ㆍ19를 겪고 깊은 정신적 상처를 입은 세대에 속한다는 사실은 그가 세계를 침착하게, 깊이 있게 이해하고자 애쓰는 태도를 갖추지 못하고 추상적인 울분과 센티멘털리즘으로 시종했다는 사실과 직결되는데, 이것 역시 시인으로서는 커다란 불행이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상에서 정리한 다섯 가지 항목을 잘 음미해보면, 박인환이야말로 해방에서 4ㆍ19까지의 시기에 이루어진 우리 시의 전개과정에서 나름대로 하나의 전형성에 도달한 인물이라는 사실을 새삼 확인할 수 있으리라. 물론 앞으로 이 시기의 우리 시에 대한 본격적 연구가 꾸준히 이루어질 경우, 어쩌면 이 시기의 우리 시에 대한 지금까지의 일반적 인식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할 날이 올지도 모르며, 그때에는 지금 내가 박인환에게 붙인 전형성의 패찰을 도로 떼어야 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현재의 시점에 있어서는 위와 같은 결론이 가능한 것이다.


<문단수첩 - 박인환> - 이근배 : 동아일보(1990. 10. 19)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우리의 한 시대를 휘젓고 간 모더니스트 시인 박인환은 그가 낙서처럼 술집에서 썼다는 <세월이 가면>의 노래 속에서 더 널리 기억되기도 한다. 사실 명동의 네온사인은 한두 개의 이름만으로 찬란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청동, 돌체, 서라벌, 갈채 등 내가 머물렀던 자리들 말고도 휘가로, 모나리자, 동방싸롱 같은 다방들과 골목에 박혀있던 유명무명의 술집들이 명동의 혼을 키운 숱한 예술가들의 이름과 더불어 명동의 역사를 남기고 갔다.

   그 명멸하는 불빛 속에서 명동적인, 너무도 명동적인 시인이 박인환이다. 그는 해방 직후 종로3가에 [마리서사(唜莉書肆)]라는 서점을 하고 있었는데 단골손님이던 소설가 송지영(宋志英)을 만나 1946년 시 <거리>를 [국제신보]에 발표하여 시인이 된다.

   1949년 김경린(金璟麟), 양병식(梁秉植), 김수영(金洙暎), 임호권(林虎權) 등과 함께 모더니즘의 운동으로 합동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의 합창>을 시인 장만영(張萬榮)이 경영하는 [산호장]에서 출판하여 단조롭던 한국시단에 새바람을 불어넣는다.

   박인환은 늘씬한 키에 잘생긴 얼굴로 단박에 문단의 기린아로 떠오른다. 조병화(趙炳華), 김수영(金洙暎), 박태진(朴泰鎭), 김광주(金光洲), 전봉래(全鳳來) 등과 다방과 술집에서 마음껏 시인의 삶을 누리고 있었다. 조병화 시인은 그때의 풍경을 이렇게 회고한다.

   “나의 시(하늘)가 실린 석간이 나오자마자 인환 군은 나를 찾아다녔다. 그러자 ‘휘가로’에서 만났다. ‘병화, 네 시 좋더라’하면서 신문을 내밀었다. 나는 그때 김기림씨와 자리를 하고 있었다. 나는 시를 신문 지상에서 읽기는 처음이었다. 그때 감동을 난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때 그 ‘휘가로’의 분위기, 나는 처음 문학의 기쁨을 황홀하게 느꼈었다.”

고. 그렇게들 한 편의 시가 사건적이었고 아름다운 우정들이었다.

   박인환은 6ㆍ25 때 미처 피난을 가지 못했다. 그가 마지막까지 살다간 청진동집에 숨어 살면서 김광균, 이봉래, 김경린 등과 답답한 마음을 달래기도 했다. 국군이 서울을 탈환하자 그해 겨울 가족을 데리고 대구로 피난 가서 [경향신문] 기자로 부산을 오르내리면서 [후반기] 동인의 재건에 힘쓴다.

   아무래도 박인환의 절정은 처삼촌의 힘을 빌려 화물선 ‘남해호’를 타고 타코마, 에베레트, 안나코데스, 포틀랜드 등 미국과 태평양 연안을 순항하고 서울에 귀환한 1955년 무렵이었다.

   <박인환 시선집>을 산호장에서 출판하고 왕성한 시작의 불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그는 1956년 2월 어느 날 ‘휘가로’ 다방에서 만난 송지영, 이진섭 등과 옆 골목의 허름한 술집 ‘경상도집’으로 자리를 옮긴다. 거기서 가수 나애심(羅愛心)이 와 있었는데 술기운이 오른 그들이 나애심에게 노래를 시켜도 듣지 않았다. 그때 박인환은 주머니에서 백지를 꺼내 <세월이 가면>을 써 내려갔다. 음악 평론가인 이진섭은 즉석에서 작곡을 했고 그것을 나애심에게 노래부르게 한 것이다.

   작사, 작곡, 노래가 모두 즉석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 자리에 모였던 다른 술꾼들에게는 더 없는 횡재였을 것이다. 나애심이 가고난 뒤 이봉구(李鳳九)와 테너 임만섭(林萬燮)이 등장, <세월이 가면>은 다시 임만섭의 신곡 발표로까지 이어진다.

   박인환은 그 뒤 류지에 쓴 <세월이 가면>을 김경린에게 보였다가 ‘이게 무슨 모더니스트의 시냐’고 핀잔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신(神)은 박인환의 시재(詩才)를 질투했음인가 그를 만 서른 살의 나이로 데려간다.

   <세월이 가면>을 쓴 뒤 한달쯤 뒤인 1956년 3월 술집 ‘바카스’와 ‘신신바’에서 술을 마시고 집에 돌아가 ‘가슴이 답답하다. 생명수(약)를 다오’ 하고는 떠나고 만 것이다.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