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여군 장정마을 천진전내 단군영정 모본(사진=윤한주 기자)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단군 영정은 어디에 있을까? 부여박물관에 있다. 원래는 장정마을 천진전에 봉안되어 있었다. 독립운동가 강석기 선생이 평양 숭령전에 있는 단군영정을 고향으로 가져왔다. 그의 아들인 강진구는 1920년경 아버지로부터 단군의 영정인 천진(天眞)을 물려받는다. 이어 1949년 고향에 천조궁(天祖宮, 현 천진전)을 건립하고 이곳에 봉안했다.
소장자 강규성 씨는 “아버지(故 강현기)께서 부여박물관에 기탁했다”라며 “거의 20년은 된 것 같다”라고 말했다.
사연은 이랬다. 어느 날 천진전을 찾은 강현기 씨의 어머니가 영정을 훔치려는 도둑을 발견한 것이다. 도둑은 도망가고, 그 뒤로 영정은 천진전이 아니라 집 벽장 뒤에 모시게 됐다고 한다. 이후 국립부여박물관에 기탁하게 됐다. 기탁은 기증과 다르다. 박물관에서 관리할 수 있도록 맡겨둔 것이고 언제든 소장자의 뜻에 따라 돌려받을 수 있다. 영정은 충청남도 문화재 자료 369호이다.
단군 영정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일십당 이맥(1455-1528) 선생이 지은 <태백일사太白逸史>에서 찾을 수 있다.
“무오년에 아들 아갑이 등극했다. 경오년에 천왕이 고유선을 보내어 환웅과 치우와 단군왕검의 세 분 시조의 상을 반포하여 관청에서 봉숭하게 했다.”
임채우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국학과 교수는 “치우와 환웅과 단군의 삼신상을 그렸다는 내용은 일단 단군 영정에 관한 기록으로는 최초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라고 밝혔다.
또 최초의 화가는 신라 진흥왕 때의 솔거(560~?)이다. 김교헌의 <신단실기>에서 작자 미상의 <동사유고東事類考>를 인용하며 쓴 글에서 그 이야기가 나온다.
“솔거는 두메산골의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여 그림공부를 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너무도 가난하고 두메산골에 살았기 때문에 스승이 없어 배우지도 못 하고 끝내 성공할 길이 없었다. 그는 뜻을 굽히지 않고 산에 나무를 하러 가서는 칡뿌리로 바위에 그림을 그렸다. 들에 나가 밭을 맬 때면 호미 끝으로 모래에 열심히 그림공부를 하면서 밤낮없이 명화공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고 진심으로 한배검께 빌었다. 이렇게 공부하고 빌기를 1년이 지나는 어느 날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서 말하기를 “나는 신인 단군이다. 네 지성이 이 신필神筆을 주도록 느끼게 하였노라”하고는 사라지셨다. 그는 이내 황홀히 감격하고 감읍하여 더욱 열심히 공부하니 유명한 화가로 대성하였다. 솔거는 단군 신은에 감명하여 그 꿈에 뵈었던 단군어진 천 본을 그렸고, 고려 시대 평장사平章事 이규보가 찬한 시에 이르기를, ‘고개 밖 집집마다 모신 神祖의 상은, 당년에 절반은 명공의 작품이었네(嶺外家家神祖像 當年半是出名工)’란 기록이 있다.”
▲ 부여군 장정마을 천진전(사진=윤한주 기자)
박성수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는 “솔거는 황룡사의 ‘노송도’를 그린 명인이니 그가 그린 단군화상은 여간 명작이 아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솔거가 그린 단군영정은 전해지지 않는다.
부여 단군영정 vs 전남 단군영정
경향신문은 1987년 4월 9일 자에 ‘국내최고(最古) 단군영정(檀君影幀) 발견’을 보도했다. 전남 해남에서 가장 오래된 단군영정을 찾았다는 것이다.
영정은 해남 출신 휘문고 재학생 이종철(李鍾轍, 1879-1938)씨가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三聖祠) 수학여행길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이에 관해서는 <단군문화기행>에 자세히 나온다.
이점용 씨는 “그때 인솔교사가 홍암 김 선생이라는 분이셨다고 한다. 구월산에 가보니까 삼성사 건물이 허물어져 금방이라도 넘어질 듯했다. 그래서 우리 재당숙이 몰래 영정을 가져와서 고향에 성전을 짓고 제사를 지내왔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박성수 교수는 “구월산 단군영정을 이곳에 가져온 정확한 경위는 알 길이 없다”라며 “홍암 김 선생이라는 이름은 1916년 구월산에서 자결한 홍암 나철 선생이다. 이종철 씨는 1879년 을묘생으로 만일 그가 나철 선생을 따라갔다면 1916년경이나 그 전후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나철은 휘문고 교사를 재직한 일이 없다. 따라서 이점용 씨의 말은 사실이 아니다.
박 교수는 “현진건의 <단군성전순례기>를 보면 일제는 1911년에 구월산 삼성사를 공매에 붙여 헐어버렸다고 한다”라며 “그러니까 이종철 씨는 그 뒤에 삼성사를 찾아가서 단군영정과 제기를 옮겨왔던 것”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설명에 따르면 해남 단군영정은 1911년 이후로 추정된다.
반면 부여군 천진전 단군영정은 조준희 국학인물연구소장에 따르면 1910년 홍암 나철에 의해 봉안된 것이라고 고증했다.
나철은 1909년 단군교(檀君敎, 이후 대종교로 개명)를 중광했다. 이듬해 3월 15일 어천절에 한 노인이 찾아왔다. 그의 이름은 고상식(高上植, 또는 공공진인)이고 강원도 석병산(해발 1,054m)에서 왔다고 전했다. 이를 증언한 일석 백남규(1891-1956)의 말을 들어보자.
“공공진인은 황금빛 비단에 싼 아주 오래된 초상화 한 폭을 전하면서 “내 집에서 대대로 모셔온 천진이요. 이 초상화는 신라의 명공 솔거가 그려서 지금까지 전해온 유일본이니 잘 모시도록 하시오.”하고는 일어선다. 대종사는 “이 밤중에 어디를 가시려고 일어섭니까?” 붙들며 만류하였으나, 가야 한다고 기어이 나가더라는 것이다. 그러나 대종사께서는 그 진상 여부를 몰라 모시지 않고 있었다. 어느 날 대종사의 꿈에 한배검이 현몽하셨는데, 공공진인이 전한 그 초상화대로의 모습이시며, 눈부신 광채를 발하시고 그윽한 향기가 자욱했다. 이윽고 한배검께서는 미소 지으시면서 “무엇을 머뭇거리느냐, 나를 모시어라. 그러면 마음마다 평화요, 집집마다 경사요, 나라마다 영광이 오리라”하시는 것이 아닌가! 대종사께서는 이 영몽(靈夢)을 얻으시고 그 당시 유명한 백련 지운영(1852∼1935) 화백에게 그대로 모사(模寫)케 하여 경술년(1910) 8월 21일에 천진을 시봉(始奉)하였다. 이 천진은 강호석(姜湖石=호석 강석기, 대종교 이름은 강우) 도형이 대교 남도지사에서 봉안하여 오다가 지금은 충남 부여군 장암면 장하리 단군전에서 봉안하고 있다. 그리고 이 천진을 사본으로 하여 숨겨 모시거나 가슴에 품고 다니면서 대교를 신봉하고 조국광복을 위하여 신맹을 바쳐왔다.”
▲ 부여군 장정마을 천진전단군영정 원본(사진=윤한주 기자)
조 소장은 “기록들을 비교 분석해 볼 때 현전하는 부여 천진전 단군 영정이 확실하다. 해남 단군전의 단군 영정 사진은 나철이 봉안했던 당시의 사진본이거나 아니면, 그 뒤 대종교선교회에서 1926년 삼성사 중건을 시행하는 과정에서 다시 봉안했던 본일 수도 있다. 그것이 아니라면 이종철의 증언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천진전 단군 영정은 1946년 당시 대가였던 지성채(池成採) 화백이 모사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동시에 1949년 국회의 동의를 받아 이 천진이 대한민국 국조성상으로 확정됐다.
최초의 영정은 확인됐다. 그런데 문제가 남았다. 지성채 화백이 모사하기 이전에 부여군 단군 영정을 그린 화가가 누구인가? 라는 질문이다. 이를 연구한 임채우 교수는 2가지 설이 있이 있다고 밝혔다.
“<대종교중광육십년사>에 의하면 궁중화가 김 씨가 모사했다고 했는데, 이는 김은호라고 한다. 하지만 <대종교요람>에 의하면 지운영 화백에게 모사하게 했다고 기록하고 있어서, 두 설이 다르다.”
임 교수는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서화 전문가에게 필체를 감정해보는 것이라고 제안했다. 소장자인 강규성 씨는 코리안스피릿과의 전화통화에서 감정에 응할 의향이 있다고 밝혔다.
앞으로 전문가 감정을 받으면 우리나라 최고의 단군영정은 온전하게 밝혀진다.
글. 윤한주 기자 kaebin@lycos.co.kr
■ 참고문헌
대종교총본사, <대종교중광육십년사>, 1971
대종교총본사, <대종교요감>, 1987
박성수, <단군문화기행>, 석필2000
조준희, 단군영정, 알소리 5호, 한뿌리2007
임채우, 대종교 단군영정의 기원과 전수문제, 선도문화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