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오후 3시 서울 조계사 앞. 10여 분 기다리자 버스가 왔다. 8000번, '청와대행' 버스다. 승객은 기자를 포함해 2명. 한국일보 앞, 경복궁 서문을 지나 청와대 길로 들어서자 경찰이 버스에 올라탔다. "어디 가십니까?" "청와대요." "누구 만나러 가십니까?" "아뇨. 그냥 구경하러요." "혼자서요?" "네? 네." 기자와 달리 이 동네 주민으로 보이는 할아버지 승객은 늘 겪는 일이라는 듯 태연하다. "효자동 갑니다."
▲ 8000번 버스가 청와대에서 출발, 국립민속박물관 앞을 지나고 있다. 버스 안은 늘 한산하다. /이준헌 객원기자 heon@chosun.com 청와대 사랑채를 구경한 뒤 오후 3시 40분쯤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8000번 버스에 다시 올랐다. 승객은 기자 포함 2명. 국립민속박물관에서 1명이 더 승차했지만, 안국동에 도착하자 기자만 빼고 모두 내렸다. 버스는 교통체증이 심한 롯데백화점 앞을 지나 서울역으로 향한다. 버스를 기다리는 수많은 백화점 쇼핑객 중 8000번 버스에 올라타는 사람은 4명뿐. 숭례문에도 손님이 없어 통과, 종착역인 서울역에 승객을 내려놓고 버스는 다시 텅 빈 채로 청와대를 향했다.
승객 없는 8000번 버스 사라진다?
'국민과의 거침없는 소통', '누구나 찾을 수 있는 관광명소 청와대'란 구호를 걸고 2008년 5월 1일 야심 찬 시동을 걸었던 8000번 버스. 청와대가 기획하고 서울시가 예산을 지원하는 이 버스가 시동 2년여 만에 운행 중단까지 논의되는 등 최대 고비를 맞고 있다. 아침저녁 출퇴근 시간대를 제외하고는 거의 승객이 없는 상태로 운행되기 때문이다. 출퇴근 시간에도 많아야 10명 내외. 청와대나 인근 국립민속박물관이 직장인 사람들이다.
8000번 버스는 청와대 사랑채 앞을 출발해 국립민속박물관·조계사·롯데백화점·숭례문을 지나 서울역에서 순환한다. 3대의 버스가 15~20분 간격으로 운행되며 하루 6명의 기사가 교대로 근무한다. 8000번 버스 운행을 전담한 8명의 기사는 서울시로부터 운행을 위탁받은 D여객이 특별히 선발한 '얼짱' 드라이버들이다.
문제는 터무니없이 적은 승객 수다. 3대의 버스를 이용하는 하루 승객 수가 500명이 채 되지 않는다. 일반 시내버스와 똑같은 요금(1000원)을 받는 중형버스로는 치명적인 숫자다. 일반 시내버스의 경우 1개 노선당 많게는 1만 명 승객을 넘는다. 버스 운행은 당연히 적자. 하지만 2004년부터 실시된 시내버스 준공영제에 의해 적자는 서울시가 메워준다. 8000번 버스의 경우 하루 120만원꼴로 서울시의 지원을 받고 있다. 운행 2년6개월 동안 서울시 예산 10억여원이 지원된 셈이다.
광화문에서 을지로로 바꿨지만…
지하철도 운행되지 않는 청와대 앞길로 가는 유일한 시내버스인데 왜 이렇게 승객이 없는 걸까. 10년 넘게 시내버스 기사로 일해온 김모씨는 "서울 같은 대도시에서 운행간격이 10분 이상 늘어나면 시내버스의 기능은 상실한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8000번 버스의 운행간격은 15~20분. 삼청동·경복궁 방향으로 가는 비슷한 노선의 마을버스들 운행 간격은 5~10분 이내이니 굳이 8000번 버스를 탈 필요가 없다.
노선에도 문제가 있다. 버스에서 만난 한 승객은 "노선도 짧고 특색이 없는데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밀린다는 명동 쇼핑가를 지나니 누가 이 버스를 일부러 타겠느냐"고 말했다. 30분씩 버스를 기다리는 일도 예사라고 했다. 개통 당시 시청―광화문을 지나던 노선을 올해 1월부터 유동인구가 많다는 을지로 쇼핑센터 구역으로 바꾼 것이 결국 악수(惡手)였던 셈이다.
'청와대행 버스'라는 이름에 걸맞은 품격과 고객서비스도 찾아볼 수 없다. 특색있는 버스라면 휠체어나 유모차가 쉽게 들고나는 '저상버스'인 것이 더 타당하지만, 기자가 시승한 버스 3대 모두 계단식 버스였다. 버스 요금에 대한 불만도 크다. 노선은 짧은데 버스 요금은 같으니 굳이 8000번 버스를 이용할 이유가 없다. 서울시 관계자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참 난감하다"면서, "노선을 시청―광화문 앞으로 환원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고, 운행을 중단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얘기도 나온다"고 털어놨다.
베를린의 시내버스 100번처럼
청와대 앞길을 지나는 시내버스를 만든 것은 빛나는 아이디어였다. 독일 수도 베를린의 경우 시내버스 100번과 200번은 여행가이드 북에 꼭 실리는 대표적인 성공사례다. 베를린 중심지 초역(동물원역)에서 출발하는 100번은 카이저 빌헬름 교회를 지나 전승기념탑, 벨뷔 대통령궁, 연방의회 의사당, 브란덴부르크문, 베를린 대성당 등 주요 관광포인트를 순환한다. 200번 버스 역시 초역에서 출발, 필하모니 하우스, 포츠담 광장을 거쳐 훔볼트대학, 붉은 시청사 등을 지나간다. 5~10분 간격으로 운행하는 이 버스는 2층버스로 제작됐지만 가이드나 안내방송이 있는 관광버스는 아니다. 요금도 일반 시내버스와 동일해서 베를린 시민들이 일상적으로 승차하며, 절반 이상은 관광객이다. 독일관광청 페터 블루멘스텡겔 아시아총괄국장은 "베를린의 하이라이트 명소를 지나가는 노선, 2층 버스, 전형적인 베를리너인 버스기사들의 유머가 성공비결"이라고 말했다.
여행전문가들은 ▲베를린 100번 버스처럼 8000번 노선에 청와대를 비롯한 서울의 주요 관광포인트를 넣고 운행간격을 10분 이내로 줄이는 방안 ▲아예 청와대와 광화문 광장만 오가는 무료 혹은 저렴한 요금의 셔틀버스를 마련하는 방안 등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