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1년 황해도 평산전투를 마지막으로 한반도에서의 의병투쟁은 종말을 고했다. 일부 의병장은 부대를 거느리고 중국 동북 지역과 연해주로 이동하여 무장 투쟁을 계속하거나,조선 청년들을 모아 독립 운동을 하고자 했다. 일부 민족주의자는 일본의 탄압을 피해 중국 관내의 상해.북경.천진 등지에서 항일 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이들 지역에는 조선인 수가 적어 이런 운동을 지원해 줄 기반이 전혀 없었다. 이리하여 중국 동북 지역은 조선의 관리.유학자.군인.지식인들이 이주 조선인과 후세대를 지도하는 애국 계몽 운동의 기지가 되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상해에 임시정부가 수립되었고 광복을 위한 운동은 새로운 공화국 탄생을 위한 민권주의 운동으로 성격이 변해갔다. 그 동안 연해주와 중국 동북 지역에서 의병활동을 하던 민족주의 단체 지도자들은 항일 무장 단체를 조직하여 일본 군경과 무력으로 투쟁하였다. 이에 일본은 군경을 동원하여 조선인 항일 무장 단체와 격전을 벌였으며 조선인 집거지를 토벌하였다. 그 결과 조선인 항일 민족주의 투쟁의 중심이 연변에서 길림성 남부와 요녕성으로 이동하였다가 다시 흑룡강성으로 이동하였다. 항일 지도자들은 항일기지를 건설하려고 했으나 흑룡강성은 조선인의 수가 적고 분산되어 기지 건설에 적합하지 않았다. 그래서 조선인의 수가 많은 길림성 남부와 요녕성에 항일기지를 건설하고 무장 단체를 통합하여 대동단결을 추진하려고 했다. 그러나 민족주의 지도자 내부의 권력 다툼.이기주의.파벌주의.지방주의 등으로 단결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때 볼세비키 식민지 혁명론을 받아들인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이 조선인 집거지인 연변에 마르크스의 사회주의를 소개하자 관리.유학자.군인들이 가졌던 민족주의 이념은 마르크스 사회주의 이념으로 대체되었다. 이제 조선 독립 운동은 식민지 혁명의 일환으로 파악되었으며 식민지 혁명을 달성하기 위한 반제국주의와 반봉건 투쟁으로 전환되었다. 공산주의는 대다수가 가난한 농민이던 중국 동북 지역의 조선인에게 급속히 영향력을 확대했다. 이에 조선인 지도층은 좌.우익 이념으로 분열하여 파벌끼리 대립하고 군벌과 일본의 탄압을 받는 과정에서 공산주의자들은 대규모로 군중을 조직하여 항일 투쟁 운동을 전개했다. 중국 동북 지역은 조선 공산주의자의 혁명기지가 되었다. 중국 공산당보다 먼저 중국 동북 지역에서 활동하던 조선 공산당은 1928년 여름 국제 공산당 기관인 코민테른 제 6회 대회에서 한 국가에는 한 개의 당만이 존재할 수 있다는 "일국일당"원칙이 채택되자 해산되었다. 이런 까닭으로 중국에서 활동하던 조선 공산주의자들은 개인자격으로 중국 공산당에 가입하였다. 조선 공산당원 다수가 중국 공산당에 가입함으로써 중국 공산당 만주성 위원회의 당원과 간부 다수가 조선인이었다. 중국 공산당 무장 집단은 조선인 거주 지역에서 활발하게 활동해온 조선인 항일 단체 조직을 기반으로 홍군을 조직하고 유격기지를 설립한 후 소비에트를 건설했다. 중국 공산당은 국민당군에게 쫓겨 많은 소수 민족 집거 지역을 거쳐 가야만 했던 "장정(1934~1935)"과정에서 중국 동북 지역에서 조선인의 항일 투쟁이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어 조선 민족을 중국 소수 민족 중 하나로 인정하였다. 코민테른이 1935년 여름에 반파쇼 통일전선을 노선으로 채택하자 중국 공산당 중앙은 8월 1일 발표한 "항일 구국을 위한 전국 동포에게 고하는 서"에서 민족해방통일 노선을 제기했다. 조선 공산당의 제일 목표가 식민지 혁명을 통해 사회주의 조선을 건설하는 것이었다면,중국 공산당의 목표는 일본의 중국 침략에 반대하는 반제국주의와 반봉건주의였다. 그러므로 중국 공산당에게 조선의 독립 문제는 민족해방 통일 노선 전술의 일부였다. 한편 연안의 공산 정권이 겨우 명맥만 유지하던 1936년,봉천 군벌 장학량이 장개석을 납치한 '서안사변'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국공합작이 다시 이뤄졌고 1937년 7월 7일 노구교 사건으로 중.일전쟁이 일어났다. 1938년 후반부터 100만 일본 관동군과 만주국 군경이 벌인 대규모 토벌 작전으로 조선 무장대의 항일 투쟁은 아주 어려운 상황에 처했고 중국 동북 지역에서 항일 무장 통일전선을 확대하기 위해 편성된 항일연합군은 소규모 부대로 분산될 수밖에 없었다. 1940년 말에는 소부대만이 동북지역에 남고 주력부대는 시베리아로 이동하여 항일연합군의 활동은 실제로 종말을 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