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삶은 서 있으면 더 높고 화려한 것을, 앉아 있으면 편안한 것을 추구합니다.
강한 힘이 되는 것들을 손으로 잡으려 하고 발로 움직일 때는 빨리 도달할 수 있는 목표를 정합니다.
원하는 것은 명예, 권세, 부이며 끊임없는 욕망을 채우려는 몸짓입니다.
이 일로 넘어지고 상처를 입으며 죄로 죽어가는 영혼이 병든 자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사회가 구조적으로 형성되어 있고 피할 수 없는 현실로 인식하며 걸어갑니다.
• 구유에서의 출발
출생 신분에 따라 삶의 환경이 달라지는 시대는 여전히 존재합니다.
하지만 출생 목적이 분명하면 환경에 지배받지 않습니다.
하늘의 하나님이지만 이 땅에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의 시작은 크게 달랐습니다.
예상을 뒤엎고 시골동네 여관에 딸려있는 구유였습니다(7절).
가장 낮은 곳에서 삶을 시작하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높은 곳에는 없고 낮은 곳에 많은 것이 고통입니다.
높은 사람은 있어도 느끼려 하지 않고 더 올라가 비구름 위로 피해버립니다.
낮은 곳의 사람들은 피할 수 없는 소낙비처럼 온 몸으로 맞고 지나가기만을 기다립니다.
구원의 손길은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났지만 행복을 느끼지 못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로부터 시작됩니다.
고통의 치료제는 사랑입니다.
사랑을 받아서 따뜻해지고 사랑할 때는 더 따뜻합니다.
구유의 역할은 허기진 가축이 먹이를 먹고 힘을 내도록 하는 공급 통입니다.
밖에서 일하다가 지친 체 들어오면 편하게 먹을 수 있도록 낮은 곳에 위치합니다.
낮아진 나를 찾아 더 낮게 찾아오신 분이 그리스도입니다.
생명의 떡인 그 분을 먹는 자는 영혼이 회복되어 삽니다(요6:51절).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주님이 너무 낮은 곳에 있음으로 지나치기 쉽지만 그 사랑의 눈높이와 맞으면 은혜가 넘칩니다.
• 마지막 십자가까지
배를 채우는 것뿐만 아니라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생명까지 내어주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예수님 삶의 시작은 구유이고 마지막은 십자가입니다.
생명까지 내어주는 십자가는 육체적으로 고통스럽지만 마음으로는 평화를 얻습니다.
목자들이 구유에 탄생하게 될 그리스도의 소식을 들었을 때 천사들이 찬양한 내용은 무엇입니까?
높은 곳에는 하나님께 영광이고 땅에서는 하나님이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평화로다’입니다(14절).
예수님은 죄인과 하나님 사이에 평화를 이루고 죄인끼리 용서하며 평화를 이루고자 하는 목적으로 오셨습니다.
죄를 지었다고 처단하려는 돌멩이를 던지지 않고 죄를 깨닫게 하고 용서를 구하면 새롭게 출발하는 것이 평화입니다.
죄를 법리적인 공방으로 따지면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피곤해 집니다.
힘의 논리가 커서 공의가 무너지면 분노하고 허망해 집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긍휼과 사랑을 통해 회복되는 평화를 강조합니다.
맹인이 눈을 뜨고 병든 자가 회복되는 기적이 일어나서 평화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사랑의 치유로 구세주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을 원하셨습니다.
주님이 행하셨던 받아주심, 감싸주심, 함께하심처럼 외면하고 싶은 사람을 위해
기도해주고 축복하는 것은 아주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그 일로 내 자신이 행복해지며 하나님의 은혜가 넘쳐납니다.
땅의 평화를 추구하는 것과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은 하나로 일치합니다.
내가 평화를 만드는 삶을 살면 하늘에서는 영광이 됩니다.
낮아진 구유에서 희망을 보고 사랑의 십자가에서 평화를 느낍니까?
섬김을 받을 자가 섬기는 자로 본을 보이고 사랑 받는 자에서 사랑을 주는 자로 낮아질 때,
나 역시 사회에 평화의 도구가 되며 큰 희망이 됩니다.
창영감리교회 남강현목사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