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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최경주, 한국인
첫 PGA 제패 - PGA 컴팩클래식 우승
최경주 선수가 컴팩클래식대회에서 우승
함으로 한국인으로는 처음 미국PGA투어
챔피언에 오르는 쾌거를 이룩했다.
최경주 선수가 컴팩클래식대회에서 우승함으로 한국인으로는 처음 미국PGA투어 챔피언에 오르는 쾌거를 이룩했다. 최경주는 2002년 5월6일(한국시각) 뉴올리언스의 잉글리시턴골프클럽에서 끝난 대회 최종 라운드에서 5언더파 67타를 쳐 4라운드 합계 17언더파 271타로 우승, 상금 81만달러를 차지했다. 최경주에 앞서 동양인으로는 일본의 아오키 이사오(1983년)와 마루야마 시게키(2001년), 대만의 첸지충(1987년)이 PGA투어에서 우승한 바 있다.
1970년(실제로는 1968년) 전남 완도에서 출생한 최경주는 화흥초등학교 시절부터 역도 선수를 하다가 완도수산고 1학년 때 생긴 골프부에 뽑혀 난생 처음 골프라는 운동을 접했다. 완도의 한 연습장에서 볼을 치던 그를 눈여겨본 서울 한서고 재단이사장 김재천씨가 다시 한서고 골프부에 스카우트했고, 거기서 골프에 본격 입문했다. 1993년 프로테스트를 단번에 통과, 직업 골퍼의 세계에 뛰어든 최경주는 1995년 팬텀오픈에서 첫승을 거머쥐며 상금랭킹 7위에 오른 데 이어 1996, 1997년에 2년연속 상금 1위에 올라 국내에선 더 이상 적수가 없다는 평가를 받았다.
1999년까지 국내에서 7승을 거둔 뒤 일본에 진출, `꿈의 무대`라는 미국PGA투어로 향하는 문을 열어 젖혔다. 1999년 말 가족을 데리고 플로리다주 잭슨빌로 이주한 최경주는 2000년 1월 소니오픈에 턱걸이로 참가했다. 결과는 컷오프. 투어 카드만 있으면 될 줄 알았던 미국PGA투어 벽은 높았다. 에어캐나다챔피언십에서는 톱10(공동8위)도 한번 경험했지만 그해 상금액 30만5745달러(랭킹 134위)로는 2001년 출전권을 얻을 수 없었다. 그래도 뚝심의 최경주는 좌절하지 않았다. 두 번 b가기 싫다는 `지옥` 같은 Q스쿨을 또 거쳤다. 2년차의 여유를 찾은 그는 2001년 29개 대회에 참가, 19개 대회에서 상금을 받았고 톱10에 다섯 차례 들었다. 80만326달러로 상금랭킹 65위. 2002년 출전권은 자동 확보됐고 출전대회의 격도 달라졌다. 미국그린에 적응이 빨라지면서 그의 성적도 일취월장했다.
2002 시즌 들어 첫 대회인 소니오픈에서 공동7위로 톱10을 장식한 최경주는 마침내 컴팩클래식에서 우승 트로피를 품에 안았다. 10년 계획이라지만 내심 5년을 바라보고 있던 그로서는 최소 2년은 앞당긴 우승이다. 1m72의 크지 않은 키이지만 82kg의 탄탄한 체구에 역도로 단련된 강한 다리힘과 어깨 근육을 바탕으로 외국 선수들에게 뒤지지 않는 스윙을 갖췄다.
▶2011년 이명박 대통령 개각 단행
▶2010년 서울 수복 ‘태극기 게양’ 박정모 대령 별세
6·25전쟁 당시 ‘9·28 서울 수복(1950년 9월 28일)’ 전날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했던 박정모 예비역 대령이 2010년 5월 6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84세.
1926년 전남 신안군 도초면에서 태어난 박 대령은 1944년 일본 후쿠오카 오리오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의 명령으로 이듬해 1월 다나베 해병단에 입대했다.
박 대령은 광복 때 일본군을 탈출한 뒤 대한민국 해군에 다시 입대해, 1950년 1월에 해병대 소위로 임관했다. 6·25 때는 해병 소대장으로서 인천상륙작전, 금곡 전투 등에서 공을 세웠다.
특히 1950년 9월 27일 오전 6시 10분에 중앙청 옥상에서 인공기를 걷어내고 태극기를 올려 미국 트루먼 대통령으로부터 “세인에게 알려지지 않은 숨은 공훈”이라는 표창을 받았다. 박 대령은 1961년 7월 대령으로 예편했고, 을지·충무·화랑 무공훈장 등을 받았다.
▶2010년 GMS제3회 아시아 미션 포럼
개최,주제 '아시아 상황에서의 선교와
섬김' 총회 세계 선교 센터 경 기도 화성시
팔탄면 월문리 110-1)에서열림.
▶2009년 350m '한강전도' 그린
김학수 화백 별세
▶2009년 산악인 오은선, 히말라야
칸첸중가봉 무산소 등정 성공
한국의 간판 여성 산악인 오은선(43·블랙야크)이 2009년 5월 6일(이하 현지시각) 네팔 히말라야 칸첸중가봉(Kanchenjunga·해발 8586m) 무산소 등정에 성공했다.
오은선씨가 칸첸중가봉 정상
등정하기 직전의 모습
이로써 히말라야 14좌(해발 8000m 이상) 중 10개 봉 등정에 성공한 오 대장은 세계 여성 산악인 최초의 히말라야 14좌 정복의 꿈에 한걸음 더 바짝 다가섰다. 4일 해발 5600m 베이스캠프를 출발한 오 대장은 5일 오후 10시10분 캠프4(해발 7600m)를 떠나 19시간30분 만인 6일 오후 5시40분 칸첸중가 정상을 밟았다. 지난 3월 19일 인천공항을 통해 칸첸중가 원정에 오른 지 49일 만이다.
네팔과 인도 국경에 위치한 칸첸중가는 히말라야 14좌 중 최동쪽에 위치해 '히말라야에서 가장 먼저 해가 비추는 산', '하늘 위에 빛나는 보석'이라 불린다.
현재 칸첸중가 베이스캠프에는 오 대장을 비롯해 미국, 스페인, 네덜란드 등 모두 7개팀이 모여 정상 정복에 도전했으나 오 대장이 가장 먼저 성공했다.
오 대장은 1997년 갸셔브롬 2봉(8035m)에 오르며 히말라야 정복에 나섰다. 2004년 아시아 여성 최초로 세계 최고봉인 에베레스트(해발 8848m)를 등정했고, 지난해에는 마칼루(8463m), 로체(8516m), 브로드피크(8047m), 마나슬루(8156m) 등 4개 봉 연속 등정에 성공해 '철(鐵)의 여인'으로 불렸다.
히말라야 14좌는 1986년 이탈리아의 전설적인 산악인 라이홀트 메스너가 처음으로 등정한 뒤 국내에선 박영석·엄홍길·한왕용씨가 차례로 완등했지만 여성 산악인은 아직 세계 어느 누구도 정복하지 못했다.
스페인의 에두르네 파사반(36)과 호주의 겔린데 칼텐브루너(39), 이탈리아의 니베스메로이(48) 등 세계의 간판 여성 산악인 3명이 모두 11좌 등정에 성공했고, 한국의 오 대장과 고미영(41·코오롱스포츠) 대장이 각각 10개봉과 8개 봉 정상에 올라 바짝 추격하고 있다.
오 대장은 "내 나이도 적지 않지만 여성 산악인 중 히말라야 14좌 등반 최초 기록이 없고 서로 경쟁하고 있다"며 "올해 안에 14좌를 모두 오르는 것이 목표"라고 당찬 각오를 밝혔다.
▶ 2009년 서울에서 전재희 보건 복지
가족부 장관과cheng yonghur주한 중국
대사간에 서명된" 대한민국 정부와 중화
인민 공화국 정부간 의 청소년 교류 약 정"
서명
▶2009년 제18회국무회의 심의를 거쳐
2009년5 월11일 타쉬켄트 에서 유명환
외교 통상부 장관과 블 라디미르노로프
외교부 장관간 에 서명된"대한민국 정부와
우즈 베키스탄 공화국정부 간의 외교관
여권소지자.의사증 면제에 관한협정"이
,발효일로 부터 30일후 인 2009년6월
10일자 로 발효될 예정
▶2007년 여성 작곡가 김순애씨 별세
▶2007년 프랑스 대선에서
우파 사르코지 당선
▶ 2005년 목원대학교 개교51주년 기념
(기념관헌 정):이호운 기념관 (신학관),
도익서 기념관(중앙도서 관),
남기철 기념관(콘서트홀)
▶2005년 간호사들의 ‘신생아 학대’ 사진 논란
신생아 부모들 모임 인터넷 카페 등에 신생아의 콧구멍에 볼펜 2개를 끼워 놓은 사진이 공개돼 논란이 일었다.
인터넷에서는 모 사이트에서 가져온 글이라며 “자는 아기 깨워 온갖 반사실험을 다했다. 머리 온갖 데 다 눌러보며. 애기 고생 좀 했겠지만, 나는 배운 거 실제로 해봐서 좋고. 서로서로 좋은 일이었다”라는 글이 돌아다녔다.
이밖에도 카트형 장바구니에 두 살 전후의 어린아이를 접어 넣어 끌고 가는 사진과 인큐베이터에 있어야 할 미숙아를 소파에 앉혀 젖병을 굴리는 사진 등이 유포됐다. 누군가가 두 손으로 신생아의 얼굴을 감싸안고 찍은 ‘인간 복숭아’ 제목의 사진이 공개되기도 했다.
콧구멍에 볼펜을 끼우고 있는 신생아 사진에 대해 조사를 벌인 경찰은 “사진의 주인은 간호사가 아닌 일반 사무직으로 2003년 그만뒀으며, 사진 속의 신생아는 신생아실에서 착용이 불가능한 털모자 등을 쓰고 있는 점 등으로 미뤄 신생아실이 아닌 다른 장소에서 찍힌 사진일 가능성이 크다”고 밝혔다.
한편 대구 동부경찰서는 8일 병원에서 신생아를 괴롭히는 모습을 연출해 사진을 찍고, 이를 인터넷 미니홈페이지에 올린 혐의로 간호조무사 이모(여·24)씨와 김모(여·25)씨, 장모(여·24)씨 등 3명을 불구속 입건했다.
이씨와 김씨는 직장인 대구 A, B산부인과에서 신생아의 얼굴을 손으로 일그러뜨리거나 비닐팩 속에 집어넣는 가학적인 장면을 연출해 사진을 찍은 혐의다. 장씨는 같은 병원에서 근무하는 이씨를 도와 신생아를 괴롭히는 사진을 찍은 혐의다.
경찰은 또 A산부인과 원장 배모(36)씨에 대해 노동복지법상의 관리책임을 물어 형사처벌키로 했다.
이씨 등은 경찰에서 “아기들이 예뻐서 미니 홈페이지를 꾸미려고 그랬을 뿐 괴롭힐 의도는 없었다. 아기들과 보호자들에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2004년 한국산 토종늑대
30년 만에 재탄생
▶2003년 미국 싱가포르와 아시아 국가
최초로 FTA(자유무역협정) 체결
▶2002년 최경주, 한국인 첫 PGA 제패 -
PGA 컴팩클래식 우승
▶2001년 최초의 우주 관광객
데니스티토 60 를.태운 러시아 우주선
소유스TA-31호가 오후2시35 분(이하
한국시간 카자호스탄 사막에 착륙
▶2001년 이란 북부의 테헤란 남동쪽
250Km에 있 는 모타키 축구 경기장 에서
축구 경기장 에서 6일 경기 도중 지붕이
무너져 수백명 의 사상자가 발생 했다.
▶2001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6일 가톨릭 역사상 처음으로 이슬람
사원을 방문
▶2001년 대우조선,노르웨이·영국등서
10억달러 수주
▶2001년 이형택 선수, ATP 공식 투어 결승 진출
한국 테니스의 희망 이형택(25·삼성증권)이 마침내 세계남자프로테니스협회(ATP) 공식 투어대회 결승 진출이라는 전인미답의 길에 발을 올려 놓았다.
세계 81위 이형택은 6일(한국시각) 미 텍사스주 휴스턴에서 열린 US클레이코트 챔피언십(총상금 35만달러) 단식 준결승에서 체코의 미할 타바라(73위)에게 2대1(4―6, 6―2, 6―1)로 역전승했다. 남녀를 통틀어 한국선수가 공식투어대회 결승에 진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남자는 이형택이 지난해 영국 삼성오픈에서, 여자는 94년 박성희(은퇴)가 인도네시아 오픈에서 각각 준결승에 진출한 것이 최고 성적이다. 이형택은 랭킹 포인트 24점과 최소 2만7000달러의 상금을 확보했다. 대회 우승상금은 4만6000달러다.
지난해 US오픈 16강 진출로 세계 테니스계의 주목을 받았던 이형택은 이로써 ‘반짝 스타’가 아니라 ‘노련한 강호’로 성장하고 있음을 스스로 증명했다.
전날 8강전에서 세계랭킹 59위 앤드루 일리에(호주)를 2대1로 제압한 이형택은 1세트에서 지나치게 공격적인 샷을 날리다 에러를 남발하며 4―6으로 졌다. 이형택은 2세트부터 잘 쓰지 않던 백핸드 슬라이스를 적극 활용, 상대의 공격을 봉쇄한 뒤 과감한 역습을 퍼부어 분위기를 반전시켰다.
이형택은 2세트 1―2로 뒤진 상황에서 내리 5게임을 따내 동점을 만들었고, 3세트에서 단 1게임만을 내주는 완벽한 게임을 보여줬다. 휴스턴 교민 100여명도 코트에 나와 열띤 응원을 보냈다. 이형택은 제롬 골마르를 2대0으로 제압한 미국의 앤디 로딕(19·세계 69위)과 7일 오전 트로피를 다툰다.
▶2000년 아일랜드공화군(IRA)
무기사찰 수용
▶1999년 이승엽, 최연소 100호 홈런 달성
▶1999년 임진각에 21톤 `평화의 종` 건립
▶1999년 인류최고(最古)로 추정되는
`돌 연장` 케냐서 발견 후 공개
▶1997년 교육부, 1998년부터
교원 차등보수제 도입
▶1997년 광주시 5.18묘역 유골서
탄두 발견
▶1996년 전 합참의장 한신씨 별세
▶1996년 콜비 전 미국 CIA국장,
실종 9일만에 시체로 발견-CNN방송.
▶1996년 호주, 사상 첫 원주민 판사
(보브 벨레어) 탄생
▶1994년 영국-프랑스간 해저터널 개통
1994년 5월 6일 영-불간 도버해협을 연결하는 해저터널을 이용한 특급 열차 ‘유로 스타’가 개통했다. 부슬비 뿌리는 워털루 역에서 프랑스 미테랑 대통령과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함께 기차에 몸을 실었다. 쏜살같이 달린 '유로 스타`는 시속 300㎞로 3시간 만에 런던과 파리를 이었다.
해저터널이 관통하는 순간, 영국과 프랑스
기술자들이 국기를 교환하고 있다.
영국 신문은 이날 “말고기를 먹는 나라와 육지로 연결됐다”고 썼다. “나치에 협력한 땅과 이어졌다”고 쓴 곳도 있었다. 프랑스라고 가시돋힌 반응이 없을리 없었다. 언론의 독설을 즐거운 배경 음악으로 깔고 이날 유럽 대륙과 섬나라 영국은 심리적으로나 물리적으로나 명실상부하게 연결됐다.
금세기 최대의 토목공사인 이 해저터널은 세계 첨단기술이 총동원된 기술혁신의 상징이자 지금까지 항공편이나 배편으로만 건널수 있던 도버해협을 사상 처음으로 육로로 연결한 것이었다.
영-불해저터널은 지난 1986년 미테랑 대통령과 마거릿 대처 전 영국총리가 서명한 건설협정에 따라 총공사비 1백50억달러(약 12조원)를 투입, 약 7년 만에 완공한 것으로, 도버해협의 최단거리인 프랑스 칼레와 영국 폭스톤 사이의 해저 약 50㎞를 3개의 지하터널로 연결하고 있다.
철도전용의 이 해저터널은 영-불합작 그룹인 유로터널사가 오는 2052년까지 운영하며 ‘르셔틀’이라고 불리는 관광객 및 화물용 왕복열차와 파리~런던과 런던~브뤼셀 노선을 왕래하는 초고속열차 유로스타가 운행된다. 이 터널의 개통으로 지금까지 배편으로 최소한 2시간 걸리던 것이 35분으로 단축되었고, 유로스타는 파리~런던을 3시간에 런던~브뤼셀을 3시간15분에 주파할 수 있게 됐다.
▶1991년 제6회 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
대회 남북단일팀 훈련차 서울에 도착
▶1990년 러시아 공화국, 사회민주당 창당
▶1987년 제9차 한국.미국 안보회의
워싱턴서 개막
▶1987년 중국 서북부 산림 대화재,
사망 193명 피해면적 1만1000km2
▶1986년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민주화위한 시국성명서 발표
▶1985년 도시가스 연쇄폭발사고 발생
1985년 5월 6일 12시20분쯤부터 40여분 동안 서울 마포구일대 11개동과 서대문구의 3개동 등 14개동에서 도시가스가 누출되거나 폭발하는 가스사고가 발생했다. 수많은 가구의 가스레인지에서 불길이 솟아오르고 곳곳에서 지하가스매설관과 도로가 터지는 등 일대소동을 치렀다. 이 사고로 1만여가구가 피해를 입고, 10여집에 불이 나고, 10여개의 맨홀이 터졌지만 다행이 사망자는 없었다.
사고의 1차적 원인은 서울도시가스공장의 압력자동조절장치에 이물질이 끼여 고장이 일어난데 있었으며, 또 서교정압실 주위의 배관이 잘못돼 고압가스가 정압실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저압관을 통해 가정으로 공급된 것이 2차원인이었다.
마포경찰서는 서울도시가스부사장, 기술부장, 생산과장 등 3명을 도시가스사업법위반 및 업무상과실치상 업무상실화 등 혐의로 구속하고, 기술상무, 도관과장 등 2명을 불구속입건했다.
▶1985년 5월 6일이던 성년의 날을
5월 3째주 월요일로 변경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2세
여의도서 우리나라 천주교 순교자 103명
성인으로 시성
▶1983년 호남고속도로
대전∼광주 4차선 확장 기공식.
▶1981년 미국, 국제테러행위 지원혐의로
미국주재 리비아외교관에 추방령
▶1981년 공정거래위원회 발족
▶1981년 한국 아르헨티나
무역해운협정 체결
▶1977년 서울대, 여주군에서
석기시대 농경기구 발견
▶1976년 아시아청소년축구대회서
해방후 최초 남북대결. 1 : 0으로 패배
▶1975년 성년의날 5월 6일로 변경
▶1974년 브란트 서독 수상 보좌관의
스파이사건으로 인책 사퇴
▶1974년 정부 정부미 혼합곡으로만
방출한다고 발표
▶1971년 유진산 신민당수 지역구 출마
포기, 전국구1번 등록.
당내반발 유발 (진산파문)
▶1969년 경제기획원 제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지침 발표
▶1968년 프랑스 사상 최대의 학생 데모
▶1965년 서민들의 질박한 삶 그린 화가 박수근 사망
새벽에 일어나 이불 개고 청소한다. 오전부터 시작한 작업을 오후 서너시쯤 얼추 끝내고 아내 일을 돕는다. 하루 서너마디뿐, 말도 없다. 오후 늦게나 돼서야 발걸음을 시내로 돌려 전시회 등을 돌아보고 동료 화가들과 대폿집에서 한잔하면 어느덧 늦은 밤이다.
한국 현대 회화사의 전설 박수근(1914~1965) 화백
비라도 내리는 날 과일을 사러 나가면 가족들은 답답하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사람들에게 골고루 팔아주기 위해 이집저집을 드나들다보니 늦었단다. 아기를 업고 뜨거운 뙤약볕 속을 다니는 아내가 측은해 양산을 훔친 적도 있다.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아내로부터 핀잔을 들으며 돌려주긴 했지만…. 평생을 궁핍 속에서 살면서도 정직하고 우직하게 그림만을 그려온 박수근의 하루다.
한 미술평론가의 말처럼 박수근은 천부적인 소질을 타고났을 뿐 천재들에게서 흔히 목격되는 정열과 광기, 드라마틱한 삶의 역정을 찾아볼 수 없는 사람이다. 소박한 소시민이었고 보통사람이었으며 더없이 자상한 아버지였다. 그림에서도 평범한 사람들의 질박한 삶이 묻어 나온다.
가난과 전란 속에서 춘천, 평양 그리고 서울의 창신동을 떠돌며 때로는 도청 서기로, 때로는 미군부대 초상화가로 가족을 부양하면서도 언제나 꿈을 잃지 않았고 화필을 놓지 않았다. 그러나 평생 그의 벗이 되고 만 가난 탓에 아들을 잃었고, 화가에게 생명같은 눈이 실명되는 불은을 겪었다. “천당이 가까운 줄 알았는데 멀어, 멀어…. ” 1965년 5월 6일 그가 숨지면서 한 마지막 말이었다.
▶1965년 신아일보 창간
▶1963년 아동 문학가 강소천 선생 별세
수많은 동요와 동화를 창작하고, 아동문학 진흥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는 등 일생을 어린이를 위해 바친 강소천 선생이 1963년 5월 6일 별세했다. 함남 고원군에서 태어난 선생의 본명은 용률. 소천은 필명이다.
아동문학에 한 획을 그은 강소천 선생
선생은 24세 되던 1939년, 동화 `돌멩이`로 본격적인 아동문학가로 나서 조선일보와 어린이 잡지 `아이생활` 등에 동화를 게재했다. 광복 후 고원중-청진여중에서 교사로 있으면서 아동문학 활성화에 애쓰던 선생은 6.25가 터지자 월남, 문교부 편수국에서 교과서를 만들면서 아동 교육에도 관심을 두었다. 1957년 어린이 날, 선생이 기초해 아동문학가협회 이름으로 발표한 어린이헌장은 어린이 사랑운동의 결실이었다. 선생은 1959년 이후 연세대와 이화여대에서 아동문학 강좌를 맡아 어린이 신문발간 등을 강의하기도 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동요 시집 `호박꽃 초롱`, 동화집 `조그만 사진첩`, `꿈을 찍는 사진관`, `인형의 꿈` 등이 있다.
1965년 선생이 한국의 아동문학에 남긴 업적을 기리기 위해 소천아동문학상이 제정되었고 이후 제6회 시상 뒤부터 강소천 아동문학상 운영위원회가 발족돼 연간 발표된 작품 중 우수작을 선정, 매년 5월 5일 어린이날 시상했다. 1972년부터 선생의 기일(忌日)인 5월 6일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55년 서독 북대서양조약기구
(NATO) 가입
▶1953년 미국에서 인공심장을 사용한
심장수술 성공
▶1952년 장택상, 제3대 국무총리 취임
▶1952년 이탈리아의 교육자 몬테소리 사망
1952년 5월 6일 이탈리아의 교육자 마리아 몬테소리가 82세로 작고했다. 몬테소리는 안코나에서 태어나 로마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그 부속병원의 정신과 조수로 직업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이탈리아 최초의 여자 의대생이었고, 최초의 여성 의사였다. 19세기 말까지도 이탈리아의 의과대학에서는 여학생을 받지 않았던 터라, 몬테소리는 왕과 교황에게 탄원한 끝에 입학 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
마리아 몬테소리
그러나 첫 근무지인 로마대학 부속병원 정신과에서의 경험은 그녀의 인생행로를 바꿔버렸다. 정신지체 아동들이 빈방에 갇힌 채 죄수처럼 다루어지고 있는 수용시설을 보고는 그들을 위한 교재개발과 교육방법을 고민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의 경험으로 그녀는 아동교육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됐으며 본격적으로 교육학자의 길을 걷게 됐다.
이후 로마대학에서 다시 심리학 및 교육학을 전공한 뒤 1907년 1월 6일 3세∼6세까지의 노동자 자녀를 위한 유치원인 `어린이의 집`을 열어 몬테소리법에 의한 교육을 실시했다. 로마 시내의 산 로렌조에 있는 빈민가의 한 아파트였다. 몬테소리는 어린이의 권리를 존중하고 어린이가 스스로 자발적인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한 상태에서의 자유로운 교육을 강조했고, 특히 어린이의 독립심과 지적발달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준비된 환경이 필요하다고 보고 감각교육에 치중한 구체적인 교구를 연구하고 개발했다. 아이들의 촉각, 시각, 청각을 자극하는 감각교구들과 일상생활을 연습하게 하는 생활교구들이 장난감 대신 사용됐다.
1909년에는 '몬테소리 방법'을 출간했으며 유아원의 기적으로 불린 그녀의 교육방법은 곧 세계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1913년에 정식으로 국제 몬테소리 교원양성 코스가 창설됐고 1929년에는 국제몬테소리협회가 독일 베를린에 설립됐다.
▶1952년 서울-부산간 민간전화 개통
▶1950년 여성 저널리스트
아그네스 스메들리 사망
▶1949년 변호사 시험령 제정
▶1948년 김구-김규식,
남북협상에 대한 공동성명
▶1946년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무기휴회
▶1941년 스탈린 소련 수상에 취임
▶1937년 독일 호화 비행선 ‘힌덴부르크’ 미국 상공서 폭발
1937년 5월 6일 오후 3시30분, 프랑크푸르트를 떠난 독일 비행선 ‘힌덴부르크호’가 뉴욕 맨해튼 상공에 모습을 드러냈다. 객실과 식당, 오락실까지 갖춘 호화 여객선이었다. 1년 전 상업운행을 시작한 이래 독일·미국 간을 10여차례나 오가며 1002명이나 되는 승객을 실어날라 시민들 눈에는 익숙한 광경이었지만 축구장 3배 크기의 비행선이 낮은 고도로 하늘을 가를 때면 언제나 장관이었다.
착륙도중 폭발, 화염에 휩싸인 힌덴부르크호.
이 날은 이 해의 첫 운행일이었다. 비행선이 뉴저지주 레이크허스트 해군비행장에서 착륙준비를 하며 고도 23m를 유지하고 있던 오후 7시 10분쯤, 갑자기 비행선 뒤쪽에서 한 줄기의 불꽃이 번쩍이면서 작은 폭발음과 함께 수소가스주머니가 파열됐다. 삽시간에 번진 불로 뒤쪽이 내려앉아 11명이 떨어지고 곧 몸체도 요란한 소리와 함께 지상으로 추락했다. 최초의 폭발로부터 불과 32초밖에 걸리지 않은 짧은 시간이었다. 승객 13명, 승무원 22명, 지상요원 1명 등 36명이 숨졌고 61명은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수소가스 때문이라고 조사결과가 발표됐지만 정전기 방전설, 나치에 항의한 태업설 등 다양한 설이 제기됐다. ‘힌덴부르크호’ 폭발과 함께 대형 비행선 시대도 막을 내렸다.
▶1932년 프랑스 대통령 두메르 암살
▶1921년 독일-소련 통상조약 조인
▶1916년 우리나라 최초의 실내경기장인
YMCA실내경기장 신축
▶1910년 영국 에드워드 7세 사망,
조지 5세 즉위
▶1906년 러시아 헌법 공포
▶1904년 독일 화가 프란츠 폰 렌바흐 사망
▶ 1893년 위당 정인보 출생
독립운동가이자 민족사학자로 국혼 환기 운동을 전개한 위당 정인보 선생이 1893년 5월 6일 출생했다.
위당은 1923년 연희전문 교수로 부임한 이후 국학 관련 논설을 조선일보 등에 활발히 게재했으며 1930년에는 `5천년간 조선의 얼`을 발표, "육체의 죽음보다 더한 것인 마음의 죽음으로, 우리 민족의 마음이 되살아나야 한다"고 역설했다. 또 단군 없이 한국과 한국인은 없다고 강조해 단군연구 운동을 진작했으며, 우리 역사가 낳은 큰 인물로 단군과 세종대왕, 충무공 이순신, 다산 정약용을 들기도 했다.
8.15 해방과 더불어 대한민국 건국 준비사업에 참여, 건국 후 초대 감찰위원장을 맡아 관기를 바로잡으려 애썼다. 그러나 6.25 전쟁중 병상에 납북된 후 소식이 끊겼다. 문화관광부는 위당을 2000년 `7월의 문화인물`로 선정했다.
▶ 1861년 인도 시인 타고르 출생
아시아 최초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 라빈드라나트 타고르
“나는 여러 날 동안 이 번역된 원고 뭉치를 가지고 다니면서 기차 안에서도, 버스에서도, 혹은 식당에서도 읽었으며, 또 낯선 사람이 내가 얼마나 감동하는지 알아볼까 두려워 가끔 그 원고를 덮어두어야 했다.” 영국의 저명한 시인이며 훗날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W. B. 예이츠는 1912년에 우연히 한 친구로부터 어느 무명의 인도인 작가가 썼다는 시 원고를 건네받아 읽어보고 크게 감동했다. 예이츠의 추천 덕분에 마침내 영국에서 간행된 그 시집의 제목은 [기탄잘리(獻詩)]였고, 이듬해인 1913년에 그 저자인 라빈드라나트 타고르는 아시아인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부유한 집안의 대학 중퇴생에서 작가로 변신
라빈드라나트 타고르는 1861년 5월 7일, 인도 벵골 주 캘커타의 저명한 브라만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부는 19세기 초에 영국 동인도회사가 해체되는 과정에서 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쌓았으며, 부친 데벤드라나트 타고르는 힌두교의 개혁에 관심을 두어 ‘마하르시’(위대한 성자)라는 호칭을 얻은 인물이었다.
열네 번째 자녀이며 막내로 태어났지만 라비(라빈드라나트)는 여러 가지 일로 바빴던 부모의 사랑을 차지하지는 못했다. 대신 다섯째 형인 조티린드라나트와 형수 카담바리가 라비에게는 부모 노릇을 대신해 주었다. 라비는 7세에 학교에 들어가고 8세에 처음으로 시를 썼다. 가문의 배경 덕분에 최고의 교육을 받았지만, 억압적이고 무미건조한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해서 성적은 바닥에 머물렀다. 12세 때인 1873년에 라비는 부친을 따라 히말라야 여행을 다녀온다. 여행 중에 두 사람은 가문의 소유인 벵골 서부의 평야 마을 산티니케탄에 들렀는데, 이곳은 훗날 라빈드라나트 타고르의 교육 실험의 무대가 된다.
하지만 그건 한 세대 뒤의 일이었고, 14세 때인 1875년에 라비는 결국 정규 교육을 포기한다. 그의 시가 처음으로 잡지에 간행된 것도 이 즈음의 일이었다. 타고르 가문은 당대의 다른 인도 명문가와 마찬가지로 서구 문화에 호의적이었고, 특히 ‘벵골 르네상스’로 일컬어지는 사회 및 문화 운동에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덕분에 라비는 일가친척이 발행하는 여러 문학잡지를 무대로 문학적 재능을 일찌감치 뽐낼 수 있었다. 하지만 젊은 시절에만 해도 문학은 어디까지나 소일거리였으며, 가족은 라비가 관직이나 사업 같은 보다 버젓한 분야로 진출하도록 독려했다.
1878년에 라비는 영국 유학길에 올라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에 입학했지만, 이곳에서의 학교생활 역시 인도에서와 마찬가지여서, 불과 1년 반 만인 1880년 말에 아무런 성과 없이 귀국하고 말았다. 이후 라비는 부친의 명령을 받들어 가족 재산 관리를 담당하는 한편 시, 희곡, 단편소설, 비평, 수필 등 여러 가지 분야의 작품을 발표하며 다양한 실험에 몰두한다. 22세인 1883년에는 10세의 평범한 소녀 바바타리니를 아내로 맞이했으며(그 직후에 라비는 아내에게 ‘므리날리니’라는 새로운 이름을 지어주었다), 두 사람은 이후 17년 동안 함께 살며 5명의 자녀를 낳았다. 1890년에는 유럽을 여행했고, 그해 말에 귀국하자마자 시집 [마나시](1890)가 간행되어 문단에 신선한 반향을 일으키며 진지한 작가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
[기탄잘리]와 노벨 문학상 수상부터 사망까지
1912년 영국 방문 중의 타고르. <출처: Wikipedia>
타고르는 1901년에 사재를 털어 산티니케탄에 학교를 설립했고, 1912년에는 인근 스리니케탄에 농업 공동체를 설립했다. 교육 및 농업 분야에서의 이런 개혁은 간디보다 20년, 인도 정부보다 50년이나 앞선 것이었으며, 타고르는 훗날 노벨 문학상으로 받은 상금 전액을 그 운영비용으로 쾌척할 정도로 큰 애정을 쏟고 일생일대의 사업으로 여겼다. 특히 타고르는 인도 국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민을 계몽하지 않고는 어떤 변혁도 힘들다는 자각을 지녔었는데, 농민에 대한 이런 깊은 관심은 타고르와 간디가 당대의 여타 인도 지식인과 가장 차별화됐던 요소로도 평가된다.
하지만 이 즈음에 타고르는 개인적으로 큰 시련을 겪어야만 했다. 아내와 부친, 심지어 아들과 딸이 수년 사이에 연이어 사망하는 불상사가 일어나는가 하면, 야심만만하게 시작한 학교 및 공동체 사업도 재정난에 부딪치고 말았다. 결국 타고르는 그때까지 나온 저서의 판권을 헐값에 출판사에 넘기고 말았다. 20세기 초의 10여 년간 타고르가 겪었던 온갖 고통과 울분은 고스란히 시로 승화되어 1910년에 발표된 한 권의 시집 속에 차곡차곡 쌓이게 되었다. 타고르는 이 가운데 50여 편을 직접 영어로 번역해서 우연한 기회에 해외에 알리게 되었으니, 그것이 바로 그의 대표작 [기탄잘리(獻詩)]였다.
타고르는 1912년에 영국으로 가는 배에서 벵골어로 간행된 [기탄잘리]에 수록된 157편의 시 가운데 일부를 번역했고, 런던에서 만난 한 영국인 친구에게 그 원고를 보여주었다. 화가였던 그 친구는 이 원고를 주위의 문인들에게도 보여주었고, 시인 W. B. 예이츠가 원고를 읽고 크게 감탄한 나머지 적극적으로 출간을 주선했다.
그해 말에 이르러 예이츠의 서문을 덧붙여 영어판 [기탄잘리]가 영국에서 간행되었다. 동명의 벵골어 시집에서 52편, 여타의 시집에서 51편을 골라 모두 103편을 수록한 이 작품집 덕분에 타고르는 하루아침에 인도를 대표하는 시인으로 전 세계에 각인되었다. 이듬해인 1913년에 타고르는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는데, 아시아인으로는 최초의 일이어서 더욱 주목을 받았다. 이때부터 타고르는 명사가 되었고, 마침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의 정치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가면서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더욱 주목받게 되었다.
간디의 협력 요청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길이 다르다는 이유로 끝내 거절하고 말았던 타고르였지만, 영국의 폭압을 가만히 두고 보지는 않았다. 1919년 4월 13일, 인도인 수백 명이 시위 중에 영국군의 총격으로 사망한 암리차르 학살 사건이 터지자 분격한 타고르는 노벨 문학상 수상 직후에 영국에서 받은 작위를 총독에게 반납했다. 이후 타고르는 간디와 함께 인도를 대표하는 지식인 겸 유명인사로 존경받았다. 1931년의 70세 생일에는 전 세계에서 축전이 답지했다. 1940년에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명예 박사학위를 받았는데, 이는 타고르가 평생 받은 유일한 학위증명서였다. 1941년 7월 30일에 타고르는 병으로 수술을 받았고, 그래도 병세가 악화되어 8월 7일에 결국 사망했다. 타고르는 생전에 죽음을 대비하여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저 평화로운 바다에
위대한 조타수가 배를 띄우네
그대 영원한 반려자여
죽음의 사슬이 사라지고
광대한 우주의 품에 그대 안기리
두려움 모르는 그대 가슴 속에서
위대한 미지를 감지하리.
간디와 타고르
타고르의 후반생에 해당되는 20세기 초반의 인도는 격동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의 출신지인 벵골에서는 1905년에는 동서 분리가 이루어지고, 1915년에는 수도가 캘커타에서 델리로 이전되었다. 민족주의 운동에 대한 탄압도 본격화되어 1898년에 난동금지법이 통과되었다. 1915년에 남아프리카에서 인권 변호사로 활동하던 간디가 귀국했고, 1919년부터 본격적인 ‘스와라지(자치)’ 운동을 시작했다. 타고르는 간디에게 ‘마하트마’(위대한 영혼)라는 유명한 별칭을 붙여주었고, 간디는 8세 연상인 타고르를 ‘구르데브’(위대한 스승)라고 부르며 존경했다.
간디는 귀국 직후부터 산티니케탄을 여러 차례 찾아와 자신이 벌이는 투쟁에 대한 동참과 지지를 요청했지만, 타고르는 끝까지 조심스럽게 거리를 두었다. 브라만이며 명문 부유층 출신이라는 배경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타고르는 오히려 세계시민적인 사고방식을 지니고 있었다. 물론 인도의 독립이란 대의명분은 지지했지만, 간디의 노선만이 유일한 방법은 아니라고 보았다. 그는 오히려 정신의 근대화를 지지했고, 격하기 쉬운 인도인의 기질에서 선민주의나 비합리성을 배격해야 한다고 보았다. 타고르는 간디의 방법이 지나치게 과격하다고 보았고, 아직 서구에서 배울 것이 많다며 교육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보통 간디라고 하면 비폭력, 무저항의 원칙을 떠올리게 마련이므로, 타고르의 이러한 평가는 어딘가 의외로 여겨진다. 하지만 타고르는 간디조차도 종종 군중을 통제할 수 없을 때가 있음을 지적하며, 자칫 국수주의가 되기 쉬운 민족주의에 대한 주의를 당부했다. 두 사람의 입장을 잘 보여주는 일화 가운데 이런 것이 있다. 언젠가 두 사람이 타고르의 집에서 만난 적이 있었다. 마침 간디를 따라온 지지자들이 집밖에서 큰 소리를 지르며 시위를 벌이자 타고르가 이렇게 말했다. “베란다 너머로 당신의 무저항주의와 당신의 추종자들이 벌이는 난동을 보시오. 저것이 무저항주의입니까?”
타고르와 간디는 서로를 존경했지만, 인도의 독립을 향한 길이 무엇이냐를 놓고서는 의견이 갈렸다. 1940년 산티니케탄에서 만난 두 사람. <출처: Wikipedia>
물론 간디도 가만있지는 않았으며, 현재 인도의 상황은 마치 “불난 집” 같은데, 그런 급박한 상황에서도 타고르는 현실을 수수방관한다며 비판했다. “모든 사람은 인도의 실을 잣고 있어야 한다. 타고르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인도의 실을 잣고 있어야 한다. 타고르는 자신의 외국산 옷을 불태워야 한다. 그것이 오늘의 의무이다. 내일은 신만이 아실 것이다.” 이에 타고르는 “새들은 먹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노래도 한다”고 응수했다. 물론 간디와 타고르는 공통점도 많았다. 비록 전폭적 지원까지는 아니었지만, 간디의 옥중 단식 소식을 듣고 맨 먼저 달려간 사람 중 하나가 바로 타고르였다.
타고르과 간디의 엇갈린 행보는 이상과 현실, 또는 예술과 정치의 전형적인 갈등을 연상시킨다. 간디는 정치에서 정의를 추구했으며, 타고르는 문학에서 미를 추구했다. 간디가 이상보다 실천이 강한 인물인 반면, 타고르는 실천보다 이상을 앞세운 인물이었다. 누군가의 말마따나 “타고르는 산과 같은 인물이었고, 간디는 밑에 있는 사람들에게로 내려오는 폭포 같은 인물이었다.” 그러나 타고르의 사후에 산티니케탄을 다시 찾은 간디는 이렇게 두 사람의 공통점을 강조했다. “타고르와 나의 친교는 의견의 차이에서 출발하여, 우리는 결국 일치했었다는 영예로운 자각으로 끝났다.”
타고르의 문학, 그리고 타고르의 교육
수많은 민족이 공존하는 인도에는 공용어인 힌디어와 영어 말고도 22개에 달하는 지역어가 있다. 그중에서도 벵골어의 전통에 속한 타고르의 작품은 벵골어로 집필되었다. 결국 같은 인도인이라도 벵골 지역 이외의 사람들은 영어 번역본을 통해서만 타고르를 접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타고르의 작품에 과연 인도 문학을 대표할 만한 자격이 있느냐 하는 의문이 제기되는 것도 당연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인도 문학에서 타고르의 지대한 영향력을 무시할 수는 없다. 무엇보다도 그는 인도 각지의 지역어로도 충분히 훌륭한 작품을 쓸 수 있다는 자신감을 인도인에게 심어주었기 때문이다.
비록 ‘인도 문학’의 대표성까지는 차마 장담할 수 없더라도, 타고르의 문학이 적어도 ‘인도인의 문학’으로서 최초로 주목받았음은 사실이었다. 가령 전형적이고 낭만적인 인도의 이미지와는 다른, 인도의 현실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타고르의 업적은 결코 폄하할 수가 없는 것이다. 나아가 형식 면에서도 타고르는 현대 인도문학의 거의 전 분야에서 새로운 시도를 한 개척자로 평가된다. 대표작으로는 시집 [기탄잘리](1910), [초승달](1913), [정원사](1913), 희곡 [우체국](1914), [암실의 왕](1914), 소설 [고라](1910), 평론 [인간의 종교](1931), [문명의 위기](1941) 등이 있다.
1930년 7월 13일, 타고르는 베를린에서 아인슈타인을 만났다. 이듬해에 아인슈타인은 타고르의 70세 생일을 축하하며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온화하고 자유분방한 당신의 사상을 만방에 전하여, 전 인류에 지대한 기여를 하였습니다.” <출처: wikipedia>
타고르의 시가 낭만적이고 신비적인 성향을 지녔음에 비해, 단편소설은 농민의 삶을 소재로 한 것이 상당수이며 문학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흥미로운 사실은 비록 외부에는 인도를 대표하는 작가로 각인되긴 했지만, 타고르의 작품은 정작 당시 인도 독자의 취향과는 거리가 있었다는 점이다. 어쩌면 타고르가 인도 국내보다도 해외에서 더 크게 인정받은 것도 바로 그런 국제성, 또는 보편성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노벨 문학상 수상 직후에는 유색인종의 수상을 노골적으로 비난하는 기사가 나왔고, 심지어 인도 내에서도 타고르의 명성은 과장된 것이라며 헐뜯는 목소리가 없지 않았다.
타고르 본인도 노벨 문학상 수상 직후의 과열된 반응에 불편함을 표시했다. “이 사람들은 나 자신에게 갈채를 보내는 것이 아니고, 나에게 붙은 명예에 환호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타고르 본인은 문학보다도 1901년에 산티니케탄에 설립한 학교를 더 큰 업적으로 여겼다. 처음에는 본인의 자녀를 가르치기 위해 학생 다섯에 교사 다섯으로 시작한 작은 학교였지만, 지금은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망라된 교육도시로 성장했다. 1998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아마티아 센을 비롯해서 수많은 인재가 산티니케탄에서 배출되었다. 타고르는 훗날 자기 작품이 모두 잊혀져도 노래는 남을 것이라고 했는데, 흥미롭게도 오늘날 인도와 방글라데시의 국가(國歌)가 바로 그의 작품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친숙한 타고르의 시는 [동방의 등불]이다.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시기에
빛나던 등불의 하나인 코리아
그 등불 다시 한번 켜지는 날에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
1929년에 일본을 방문한 타고르에게 <동아일보> 기자가 찾아가 조선 방문을 요청했으나, 일정상 불가하다며 사과의 뜻에서 이 시를 써 주었다는 일화가 있다. 그의 조국 인도 역시 식민지 상태였으니만큼 조선을 향한 타고르의 공감은 이심전심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시아 최초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라는 이유로 타고르는 생전에 일본에서 큰 인기를 누렸다. 인도의 사회 개혁에 관심을 보인 타고르 역시 질서의식 투철한 일본인의 성향에 흥미와 호감을 느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타고르는 1916년에 처음 일본을 방문한 자리에서도 제국주의적 야욕에 관해 경고를 서슴지 않았다. “일본이 다른 민족에 입힌 상처로 일본 스스로가 고통을 당하게 될지도 모르며, 일본이 주변에 뿌린 적의의 씨앗은 일본에 대한 경계의 장벽으로 자라날 것이다.” 타고르의 예언이 정확했음은 태평양 전쟁과 이후의 역사가 고스란히 증명하는 셈이다.
▶ 1856년 오스트리아 정신분석학자 프로이드 출생 - 정신분석의 창시자, 지그문트 프로이트
▶ 1856년 북극 탐험가 로버트 피어리 출생
▶ 1840년 세계최초의 우표, 영국에서 발행
1840년 5월 6일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우표가 영국의 교육자 로랜드 힐에 의해 탄생했다. 우표가 탄생되기 전에도 공식, 비공식으로 우편증지를 사용했지만 그때는 주로 편지를 받는 사람이 우편요금을 부담했고 거리별, 무게별로 요금도 모두 달랐기 때문에 몹시 번거롭고 복잡하여 그리 효과적이지 못했다.
영국에서 발행된 세계최초의 우표, 페니블랙 원페니(왼쪽)와 펜스블루 투펜스
이때 마침 힐이 우편제도 개혁의 실효성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면서 각계의 큰 호응을 얻었다. 힐은 거리와 지역에 관계없이 보내는 사람을 부담자로 한다는 취지로 우편제도 개혁을 제안, 1839년 영국 의회에서 채택된 후 빅토리아 여왕의 서명을 받아 1840년 1월 1일부터 정식 발효됐다.
하지만 최초로 붙이는 식의 우표를 구상해낸 사람은 로랜드 힐이 아닌 스코틀랜드의 한 책방주인이자 인쇄소의 주인이었던 제임스 찰머스였다. 이 제안이 로랜드 힐에 의해 받아들여진 후 우표 디자인을 고심하던 힐이 빅토리아 여왕의 즉위식 기념 메달을 소재로 디자인해 이날 1페니 짜리 흑색 우표가 발행됐다. 이것이 바로 세계최초의 우표 ‘페니블랙 원페니(One Penny)’ 이다. 이틀 후인 5월 8일에는 2펜스 짜리 우표 ‘펜스블루 투펜스(Two Pence)’ 가 발행됐다. 이는 우표의 색깔이 흑색과 청색이어서 붙여진 이름들이었다.
최초로 우표를 탄생시킨 힐은 1846년부터 1864년까지 영국의 우편업무를 총괄하는 직책을 수행하며 근대우편제도를 정착시키는데 큰 공헌을 해 후에 기사작위까지 받는 영광을 누렸다. 그는 또한 새로운 우편제도의 실시에 따른 우편업무의 효율적인 운영을 위해 우편함이 설치되도록 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우표는 세계 최초의 우표가 탄생된 지 44년 후인 1884년 11월 18일 홍영식 선생에 의해 5문과 10문(문(文):당시 화폐단위) 2종의 우표가 발행됐다.
▶ 1758년 프랑스 혁명가 로베스피에르 출생
▶ 1618년 조선조의 무신 강항 사망
▶ 973년 신성로마황제(1002~1024) 하인리히 2세 출생
https://youtu.be/NTeHvxMMImQ
출처 네이버지식백과,반가운의hi스토리, 편집 뜨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