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대는 건물이 단조롭고 이상하게 생겼지만 더 이상한건 그런 건물이 한두개가 아니라는 것이다. 마치 쌍동이 형제나 되는 것인양 그 모양이 그 모양이다.
아주대를 찾아온 외부인이 교문에서 본관이 어디냐고 물었다고 하자. 우리는 아무 생각없이 저쪽에 있는 빨간 벽돌건물로 가라고 말하지만 그곳에는 무려 4개의 빨간 벽돌건물(본관,도서관,인문관,경영관)
이 있고 그 모양새도 너무나도 비슷해서 어느 것이 본관인지 전혀 구별을 하지 못한다. 결국 그 손님은 빨간벽돌건물에 이를 때마다 이것이 본관이냐고 묻는 수고를 되풀이한다.
심지어는 아주대병원을 찾아온 사람들이 병원측면에 '아주대병원'이라고 큼직하게 붙어있음에도 불구하고 학교안으로 들어와 아주대병원이 어디냐고 물어보는 조금은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이 발생하는가 하면 의학관과 신이공관을 착각하는 심각한 사태마저도 일어나고 있다.
도대체 왜 서울건축은 이리도 성의없게 똑같은 건물들을 만들어냈단 말인가? 설계능력이 얼마나 없기에 한번 지은 건물을 계속해서 똑같이 만들어낸단 말인가? 아무리 머리를 굴려보고 이해하려 노력해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다. 대다수가 그렇듯이 우리학교 설계한 사람은 지지리도 설계못하는 사람인가보다 라고 생각하는 것이 속편할지도 모른다.
▶ 건물의 외관은 모두 같아야 한다고 생각한
미스 반데 로헤(MIES VAN DER ROHE)와 그 제자
우리는 건물이란 사람의 얼굴이 모두 다르듯이 달라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이 생각은 단지 말 그대로 '생각'일 뿐이다. 건물이 달라야 한다는 절대적 당위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그것이 대다수의 '생각'이기에 마치 '진리'인양 받아들여질 뿐이다.
마찬가지로 미스(MIES)도 건물이 모두 달라야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그는 건물은 모두 똑같이 생겨도 되며 심지어는 같아야 한다고까지 생각했다. 이 생각이 자신의 독특한 건축관으로 자리잡게 되면서 그는 이를 실천에 옮겼다. 사무실을 설계할 때 썼던 외관을 아파트에도 적용하는가 하면 학교 강의실에도 적용하고 심지어는 개인 별장에까지 적용하곤 했다. 물론 설계를 의뢰한 사람중엔 상당히 불쾌해 하며 화를 낸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바뀌지 않았고 죽을 때까지 자신의 입장을 고수했다.
그의 제자인 김종성 교수 또한 스승의 생각을 완벽하게 그대로 따랐다. 그는 한국에 정착한 이후 많은 사람들의 공격을 받으면서도 자신의 스타일을 변함없이 유지하고 있다. 미스는 건물의 외관이 건물마다 다를 필요가 없다는 이유를 사회와 관련지어 생각했다. 대개 사람들은 건물을 지을 때는 용도를 먼저 생각하고 그 용도에 걸맞는 외관을 디자인한다. 그래서 건물마다 용도가 다른만큼 수도없이 다양한 형태의 건물이 만들어진다. 관공서는 거대하면서도 권위가 있는가 하면, 사무실은 정숙하고 단정하며, 미술관은 아름답고 품위가 있다. 주택은 주택 나름대로의 편안함이 있다. 그러나 미스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여겼다. 20세기라는 신세계는 발전이 워낙 빠른 사회이기 때문에 건물이 각자 자신의 용도에 걸맞는 외관을 갖는다고 해도 그 용도란 영원하지 못한 것이며, 필연적으로 건물의 외관 또한 바뀌어야 되는 상황이 곧 올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따라서 건물이 용도에 맞는 외관을 가지는 것은 일시적일 뿐이며, 용도가 바뀌자마자 그 건물은 해체되든지 개조되어야 하므로 건물에 특정 이미지를 부여하는 것은 건물을 단명시킬 것이라고 했다. 건물이 영원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특정용도가 아닌 어떠한 용도변경에도 적용이 가능한 외관을 지녀야 한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면 한 설계자가 한적한 주택가에 바로크풍의 아름다운 미술관을 디자인했다고 가정을 해보자. 이 건물은 지은지 대략 10년까지는 별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도시가 확대되면서 이 주택가는 땅값이 오르고 얼마 안되어 상업지역으로 변모하였다. 주변에 있던 주택들은 헐리거나 개조되어 상가로 탈바꿈하기 시작한다. 이제는 미술관은 이 지역에서는 경제성도 없고 더 이상 필요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차라리 이 땅을 팔고 교외에 새 건물을 지어 이사가는 것이 더욱 실리적이다. 이런 경유로 미술관은 내부는 온통 철거되고 외관은 뼈대만 남긴채 뜯겨지고 모습을 바꾼 채 상가나 사무실로 용도변경이 된다. 이쯤되면 애초에 미술관을 미술관처럼 보이게끔 디자인했던 수고는 공허한 물거품일 뿐더러 오히려 새로운 용도에 지장마저 주게된다. 만약 이 건물을 아무런 성격이 없는 추상적인 모습으로 디자인했더라면, 만약 전시를 위한 내부벽체를 그리 많이 만들지 않았더라면 용도변경은 매우 수월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미스(MIES)의 생각이었다. 그는 특정용도를 대변하는 건물은 어리석으며 비경제적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미스는 이로부터 다음과 같은 결론은 이끌어냈다.
건물의 용도가 무엇이든지 간에 어떠한 용도에도 적용이 가능한 만능의 건물을 만들자! 이것이 바로 이 시대가 요구하는 건축물이며 그런 건물이라면 아무리 세월이 가고 용도가 바뀌어도 모습을 바꾸지 않은 채 영원히 이 땅에 존재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상식을 뒤엎어야만 한다. 건물은 용도에 걸맞는 옷을 입어야한다는 역사의 상식을......
미스는 이 상식을 실천을 통해 뒤엎었다. 주택이건 공장이건, 또는 사무실이건 가리지 않고 모조리 똑같은 하나의 모습으로 만들었다. 내부는 가능하다면 벽을 만들지 않으려 했고 만약 어쩔 수 없이 만든다 하더라도 쉽게 개조가 가능하도록 디자인했다. 외관이 모두 같은 대신 엄격한 세부(Detail)처리와 극도의 단순함을 통해 아름다움을 얻으려 했다. 그 형태는 정교한 사각입방체였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보편적 공간(UNIVERSAL SPACE)라 불리는 미스(MIES)의 독특한 디자인 개념이다. 역사를 통틀어 전무후무한 일이다. 이 초역사적인 일에 여러 제자들이 모여 들었으니 그 중의 한 사람이 바로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고 너무나도 친근한 김종성 교수님이시다!
김종성 교수는 끝까지 위대한 스승의 가르침을 어기지 않았다. 아주대의 모든 건물은 한 핏줄을 이어받은 형제들의 모습이다. 스승의 가르침대로 인문관은 언제라도 사무실로 개조 가능하고, 도서관은 언제라도 강의실로 바뀔 준비가 되어있다. 신이공관은 당장에라도 사무실 또는 오피스텔로 변신가능하다. 단대끼리 건물을 바꾸는 것도 물론 가능하다. 아마도 아주대가 다른 지역으로 이사간다 하더라도 아주대 건물들은 모두 제값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미래의 일을 우리가 어찌 예측할 수 있겠는가! 서울 D대학은 모든 건물이 헐린 채 아파트 단지로 변하고 있지 않은가!
아주대 건물이 똑같이 생긴 데에는 미래를 준비하는 이토록 심오한 뜻이 담겨있는 것이다.
<<역사를 통해본 아주대의 건축>>
* 개교에서부터 유신학원의 몰락까지
아주대의 건축의 시작은 73년 개교와 함께 시작한다. 처음으로 세워진 건물은 지금은 아주대의 상징처럼 되어버린 구이공관이다. 초창기엔 본관이라 불리었고 실지로도 과거의 마스터 플랜에는 본관으로 계획되었던 건물이다. 구이공관과 거의 때를 동시에 하여 건립된 것은 서관이다. 서관은 구이공관을 축소하였다고 할만큼 비슷한 내부공간을 보여주며, 디자인 요소 또한 일치한다. 동관은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지어진 것으로 알고 있는데 시공중에 상층부가 붕괴하는 사고가 발생했었다고 한다. 다행히 1층은 무사하였는데 강도가 많이 떨어져 보 밑에 피아노 끈 비슷한 것으로 보강을 해놓았다. 동관서쪽 입구홀에서 천장을 바라보면 V자형의 파이프가 있는데 그 당시 보강한 흔적이다. 대략 이 시기를 전후하여 구기숙사가 완공된다.
이 당시의 건물은 모두 동일한 설계사무소에서 한것으로 보이는데 왜냐하면 건축의장요소나 공간구성수법이 매우 비슷비슷하기 때문이다. 건물의 모습이 바뀌기 시작하는 것은 시간이 더 흘러 지금의 대우학원이 유신학원을 몰아내고(?) 아주대를 차지하면서부터이다.
우선 유신학원하에 지어진 건물들을 살펴보자. 이 시기의 건물은 한마디로 백색주의 시대라 할 수 있다. 지금은 구이공관(이하 이공관이라 함)에 회색빛의 우중충한 페인트가 칠해져 있지만 몇년전만 해도 이 건물은 눈부신 백색의 석고조각과도 같은 건물이었고 그 인상은 상당한 것이었다. 아마도 때 타지 말라고 미리 때 탄 색을 칠해버린 것 같다.(이 불행과 안타까움....)
우리는 이 건물에 일종의 자부심을 가져도 되는데 왜냐하면 이 건물이 지니는 역사적 가치 때문이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책에도 나오는 건물이다.(국립현대미술관의 한국현대미술사 참조)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르고 있겠지만 이공관은 70년대 한국의 대표적인 건축물 중의 하나이다. 이와 더불어 지금은 산상교회로 이름이 바뀐 예전의 아주대 강당도 꽤 괜찮은 건축물이다. 내부를 들어가 보라. 금방 실감할 수 있다. 산상교회는 유신재단이 기독교 계열인 이유로 아주대의 교회 겸 강당이었으나 대우가 아주공대를 인수한 이후 우리와는 전혀 상관없는 건물이 되어버렸다. 이곳에서 했던 졸업식을 이제는 노천극장에서 하고 있다. 지금도 울타리 너머로는 학교와 교회 사이에 왕래를 할 수 있는 계단이 있는데 유신고 학생들이 아주대에 자주 출몰한다는 이유로 학교측에서 막아버렸다.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자. 이공관이 세워진 시대의 건물로는 우리가 잘 아는 것 중 서울국립극장, 여의도 국회의사당, 한국과학기술원, 중대 학생회관, 세종문화회관, 남대문 옆의 동방생명빌딩, 단국대 체육관 등이 있다. 이 건물들은 대부분이 우리가 모더니즘 양식, 또는 국제건축양식이라 부르는 건물들이지만, 관공서 건물들은 한국식 절충주의 양식을 취하고 있다. 어려운 이야기는 생략하고 간단히 설명하면, 모더니즘 건축은 대개 백색표피와 가벼운 입면, 수평창, 입방체적 형태(라면박스형이라고 이해하면 쉽다), 장식의 배제 등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가장 주목할 만한 점은 장식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장식에 의한 아름다움보다는 논리적으로 해결된 명쾌한 공간구성과 기하학에 기반한 형태의 구성으로 순수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다. 미술에 비유한다면 모더니즘 건축은 미술 입문시 처음 대하는 하얀빛의 석고상과도 같은 것이다. 석고상은 기교나 채색에 의해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그 순수함으로 아름다운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모더니즘은 순수주의적이고 금욕주의적인 청교도적 건축이다.
모더니즘은 20세기초에 완결된 형태를 보이는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인상주의나 구성주의, 피카소, 몬드리안 등등은 모두가 모더니즘의 형성에 크나큰 기여를 한 운동이나 사람들이다. 모더니즘 건축의 추상성은 미술에서의 추상과도 일맥 상통하는 것이다.
어려운 이야기는 모두 접어두고 하던 이야기를 진행해보자. 그런데 모더니즘이 풍미하던 70년대의 건물 중엔 세종문화회관이나 국립극장, 국회의사당과 같은 모더니즘이 아닌 것 같은 건물들이 있다. 머리는 크고 서양것도 우리것도 아닌 해괴한 기둥들이 서있고 사람을 압도하는 분위기...... 박정희의 유신 분위기다. 박정희는 정권의 정통성을 일련의 민족정기 사업으로 확보하고자 했다. 건축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자신과 같은 군인이라는 이유 하나로 이순신을 성웅으로 만들기 위해(이순신이 위대해지면 군인이 위대해지고 군인이 위대해지면 박정희가 위대해진다)온갖 방법을 동원한 끝에 현충사같은 건축물을 만들어 냈다. 여기에서 강조된 것은 민족성이다. 민족의 위대함을 과시하기 위해 민족적인 건축물을 만든다?? 결과는 기와를 뒤집어쓴 콘크리트다. 외관은 밋밋한 계란색! 세계 어느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양식이다. 기와건물이 아닌 건물들은 민족의 권위, 또는 국가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하여 머리가 커지고 엄청난 기둥들이 세워졌다. 당시의 분위기였다. 국회의사당을 보라! 민주의 전당이라는 건물은 그 앞에 서있는 사람을 한없이 왜소하게 만든다. 엄청난 도움과 열주...... 끝없는 계단...... 세종문화 또한 예외는 아니다. 국민을 위한다는 문화회관이 엄청난 무게의 돌로 치장된 머리(지붕)와 열주로 사람을 짓누른다. 번쩍번쩍한 휘장의 수위는 건물사진 한장이라도 찍을라치면 어디서 나타났는지 위압적 자세로 가로막는다. 이것이 70년대 한국의 건축분위기였다. 모더니즘과 한국 민족주의가 뒤섞인채 나타나던 시기......
아주대로 돌아와보면 그런 시대의 분위기가 우리에게도 있었음을 알게 된다. 이공관을 보라! 엄청난 크기의 머리(5층)와 이를 떠받치고 있는 3개층 높이의 열주, 엄청난 크기의 계단, 상식을 초월하는 건물 길이 등등.... 다행히도 기와지붕을 올리거나 계란색은 안칠했고, 기본적인 양식은 모더니즘이다. 앞서 기술했지만 모더니즘 건축은 절대로 무게감을 지니지 않는다. 오히려 유리와 백색입면 등으로 경쾌하기까지 하며 한편의 산 독한 추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아마도 이공관이 모더니즘이면서도 지금의 모습을 가지게 된 것은 당시의 시대분위기와 유신정권의 직접적 영향으로 보인다. 프랑스의 지원으로 이루어진 아주공대에 당시 박정희 정권은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배려를 했던 것이다. 박정희는 수원 근처에만 오면 아주공대를 들렀고 올 때마다 선물을 던져주고 갔다. 기숙사를 짓는데 국고를 지원했고, 비포장이던 진입로를 포장해 주기도 했다. 아주공대는 한국과학의 이끌어갈 선두집단의 학습장이어야 했고 그 권위와 위용을 과시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재미있는 점은 정작 독재정권에 의해 탄생된 이 건물은 80년대 들어서는 독재정권 타도를 위한 시위와 집회의 주무대가 되었다는 점이다. 이공관 앞의 드넓은 삼각잔디는 많은 학생들이 모이기 쉬웠고 엄청난 크기의 2개층 높이 계단은 훌륭한 무대였다. 더우기 뒤에 서있는 열주는 운동권의 권위를 한층 올려주었고 짓누르는 듯한 건물의 웅장함이 사람들을 흥분시켰다. 독재를 위한 건물은 독재의 몰락을 부르는 것이다.
사실 이공관의 내부공간은 별 볼일이 없다. 외관은 엄청난 위압감과 권위를 지니고 있지만 그런 기대를 안고 홀에 들어서는 순간 누구나가 당황하게 된다. 기대되었던 훌륭한 홀이나 라운지는 없고 그리 넓기 않은 평범한 홀과 계단이 눈앞에 들어온다. 홀은 건물에 비해 상당히 왜소한 편이다. 아무런 감흥도 없다. 아주대 병원이나 의대에서 느껴지는 공간감은 거의 없다 .양쪽으로 복도가 단조롭게 뻗어있을 뿐이다. 이상한 점은 4,5층엔 화장실이 없다. 그나마 있는 화장실도 건물에 비하면 매우 작다. 70년대에는 학교건물에 수세식 화장실을 설치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었다. 지금도 오래된 대학에 가면 상당한 높이를 가진 건물들이 화장실이 없거나 나중에 설치하여 열악한 것을 볼 수 있다.
<<도서관이 네모난 이유(80년대의 아주대 건축)>>
<들어가며>
아주대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라면박스 건물! 이름하여, "아주대학교 중앙도서관"! 너무나도 싫어하는 건물일 것이다. 못생겼는지 잘 생겼는지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밋밋하게 생겼다. 세상에 이런 건물도 있구나 싶을 정도로........
하지만 이 건물을 세계적인 大건축가(?)가 설계했다면 믿겠는가 ? 또한 이 건물이 당시에는 국내 최고의 시설을 갖춘 최첨단 건물이었다면 믿겠는가?
<80년대의 상황>
도서관이 지어지던 80년대 초로 돌아가보자. 아주대는 77년에 대우그룹에 의해 인수된다. 그러나 그토록 탐나던 학교를 정권의 힘에 기대어 손에 넣은 대우는 80년대 들어 아주대를 지원하던 프랑스가 손을 떼자 약삭빠르게 특수학교와도 같던 아주대를 평범한 종합대로 승격시키고 한발 물러서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아주대는 건축역사상 제2의 전환기를 맞이하게 된다. 종합대에 걸맞는 시설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종합대를 위한 시설 중 극히 일부에 해당하는 도서관과 인문관만을 우선적으로 짓게 된다. 이 과정에서 대우는 70년대 유신학원 시절 이공관 등을 설계했던 사무소와 결별하고 자신이 소유한 설계사무소에 건물 설계를 맡긴다.
<대우의 친구 '서울건축'>
대우가 소유한 설계사무소는 [(주)서울건축]이라는 대규모 설계사무소다. 서울건축은 서울 여의도에 위치하는데 규모면에서나, 설계능력에서나 국내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엘리트급 사무소다. 이 사무소가 대우와 관계를 가지게 되는 것은 순전히 대우의 노력이다. 70년대에 모든 면에서 열세를 면치 못했던 대우는 건축에서만큼은 그런대로의 안목을 지니고 있었다. 국내에는 이렇다할 세계적으로 이름난 건축가가 없는 상황에서 김우중 회장은 '김종성'이라고 하는 상당한 실력의 재미 건축가를 한국으로 불러들였다. 막대한 돈을 들여...... 그리고 '서울건축'이라고 하는 사무소를 설립하여 이곳에서 '김종성'씨가 활동하도록 만들어주었다.
이로부터 몇년 후 아주대는 종합대로 승격되고 아주대에서는 처음으로 '서울건축'이 설계한 도서관과 인문관이 세워지게 된다. 그때 이후로 지금까지 아주대는 줄곧 서울건축이 설계를 해오고 있다.(시공은 물론 대우건설이 한다) 우리가 지금 라면박스라고 부르는 빨간색 벽돌건물들이나 회색빛 건물들은 모두 서울건축의 '작품'들이다. 가장 최근의 작품으로는 '경영관'이 있다.
<도서관이 네모난 이유>
도서관만이 아니라 아주대의 모든 건물들이 박스인 데에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다시 한번 '서울건축'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가 없다. 서울건축의 지도자인 김종성 교수(그곳에선 이렇게 부른다)는 소위 말하는 모더니즘의 대가이다. 문학을 하는 분들이나 미술쪽에서 일하는 분들은 모더니즘에 대해 잘 알 것이다. 건축에도 또한 모더니즘이 있는데 건축에서는 간단히 줄여 '모던건축'이라고 부른다. 모던건축은 20세기초에 완성된 양식으로 현대건축의 뼈대가 되고 있고, 당시에 모던건축을 완성시킨 몇명의 건축가가 있는데 이 중에는 '미스'(MIES)라고 하는 독일출신의 미국건축가가 있다. 유독 이 건축가를 거론하는 이유는 바로 이분께서 아주대를 박스로 만드는데 지대한 공헌(?)를 해주셨기 때문이다.
<김종성 교수의 스승, 미스(MIES)>
미스는 간단히 말해 건축이란 단순한 입방체로부터 시작한다고 믿은 사람이다. 덧붙여 그는 건물의 정밀성, 깨끗함을 추구했던 결벽증 비슷한 증세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최초로 외부면이 모두 유리로 감싸여진 세계최초의 마천루를 설계하기도 한 인물이었다. 그가 주로 애용한 건축재료는 유리와 철, 그리고 벽돌이었다. 우리가 TV에서 많이 보는 맨허턴이나 서울의 고층 빌딩들은 모두 미스가 고안해낸 디자인이다.
미스가 단순입방체를 계속하여 만들었던 것은 건축의 근원을 찾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는 단순한 기하학 속에 가장 위대한 아름다움이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는 한평생을 어떻게 하면 가장 완벽한 입방체를 만들 수 있을까라는 문제로 씨름을 하였다. 완벽한 입방체를 위해서는 재료가 신성해야 했고 그러하기에 그는 강철과 유리, 벽돌을 주로 사용하여 건물을 만들었다. 유리를 쓸 경우엔 최대한 건물을 투명하고 경쾌하게 만들었고, 벽돌을 쓸 경우엔 최대한 평평한 벽면이 연출되도록 하였다. 강철은 1mm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게 상호 결합되었다. 정밀하지 못한 것은 아름답지 못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의 건물은 순수함과 간결함, 정밀함의 표본이었고, 그 속에서 공간은 최고의 지고함을 유지할 수 있다. 이러한 미스의 건축관은 김종성 교수에게도 그대로 전수되었다.
김종성 교수(이하 김교수라 함)가 미스와 인연을 가지게 되는 것은 그의 대학 시절부터다.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으나 그는 서울대 재학 중 홀연히 미스(MIES)가 학장으로 있던 미국의 IIT라는 학교로 유학을 떠난다. 그 후 그는 미스의 제자가 되어 열심히 공부한 끝에 그곳에서 대학원 과정까지 밟고 미스가 타계한 후에는 그를 이어 건축학과 학장에까지 오른다. 명실공히 그는 미스의 훌륭한 수제자가 된 것이다. 그것도 마지막 수제자가.......(이런 의미에서 그는 국제적인 인물이다)
김교수의 설계수법은 미스의 수제자답게 완벽하게 미스풍이다. 건물은 항상 네모난 형태였고 엄격함과 정밀함은 그의 특징이었다. 그런 김교수가 70년대 말 한국으로 귀환하자 한국의 건축계는 작은 충격을 받게 된다. 당시만 해도 한국에는 제대로 된 정통(!)모던건축이 없었던 탓이다. 특히 미스 풍의 모던 건축은........
<김종성 교수, 도서관을 설계하다>
80년대 초 대우학원으로부터 아주대 도서관 설계를 의뢰받은 그는 고민에 빠진다. ..........................................................................................................................................마침내 영감이 떠오른다!! 자신의 스승이 설계했던 미국의 IIT가 머리를 스친 것이다. IIT는 MIT비슷한 학교인데 20세기 초에는 별 볼일 없다가 미스가 나찌의 탄압을 피해 미국으로 이주한 후 이 학교의 건축학장으로 초빙되면서 일약 유명해진 학교다. 이 학교의 수 십동에 이르는 캠퍼스 건물들은 마스터 플랜부터 문 손잡이 하나까지 몽땅! 미스가 설계하였다. 김종성 교수는 바로 그 학교에서 건축학과장까지 지냈고 IIT는 항상 그의 이상향이었다. 한국에 온 이후 드디어 스승의 작품에 비견되는 건물을 설계할 기회가 그에게 온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좀 엉뚱한 것이었다..................................................................사실 도서관은 미스의 IIT를 거의 원형에 가깝게 모방한 것이다. 어느 정도이냐면 건물의 명칭부터 똑같다. 아주대 도서관은 원래 명칭이 '본관 겸 도서관'이다. IIT에 있는 똑같은 건물도 '본관 겸 도서관'이다(실지로 아주대 도서관은 당시엔 본관 겸용으로 쓰이다가 90년 들어 현재의 본관이 완성되면서 말그대로 도서관이 되었다). 심지어 가운데 있는 중정과 그곳에 심어진 나무의 수와 수종마저 거의 같은 정도이다. 생각해 보라! 우습지 않은가? 우리 학교와 똑같은 학교가 미국에도 있다는 사실이! ??...!!
아주대가 IIT의 모방에서 벗어나는 것은 90년대 들어서이다. 그 이전에 지어진 도서관과 인문관은 사실상 IIT의 아류작인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도서관을 무작정 사이비로 몰아부칠 수는 없다. 왜냐하
면 건축분야에서는 그 속성상 일정부분 모방의 논리가 용인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한국건축이 중국건축과 비슷하다고 해서 무작정 한국건축이 중국의 아류라고 물아부치지는 않는다. 따라서 이제는 도서관의 구체적인 특징을 세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초일류를 향한 아주대 도서관>
도서관의 모델이 된 IIT가 건축사적으로 너무나도 유명하고 뛰어난 건물들이기에 아주대 도서관 또한 상당한 수준을 지니고 있다. 우선 시설을 살펴보자.
미국의 건물은 대개가 인공환기 시설을 지니고 있다. 쉽게 말해 한 여름에도 창문한번 열지 않고 시원한 공기속에 일할 수 있는 설비를 갖추고 있다. IIT의 건물들이 그런 것들이기에 아주대 도서관도 또한 마찬가지의 설비를 갖추었다. 요즈음이야 이런 건물이 흔하지만, 당시 한국의 대학에 그런 건물이 있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그게 가능했던 것은 김우중 회장이 개교 10주년을 기념해 50여억(당시 시가)에 이르는 돈을 도서관 건설에 투자했기 때문이다. 그 50억원 중 약10억에 이르는 돈이 냉난방 설비를 갖추는데 쓰였다. 기계 또한 최고수준으로 하였다. 국내에 없는 것은 외제를 갖다썼다.
도서관 내부를 유심히 살펴보면 창문 밑으로 기다랗게 생긴, 앉아 있기에 안성맞춤인 환기구 비슷한게 주욱~ 뚫린 턱이 있다. 바로 이것이 난방기구이다. 그리고 천장에는 스피커처럼 생긴 환기구가 드문드문 있는데 이것은 여름에 에어컨 바람이 나오는 구멍이다. 구멍이 뚫린 천장판도 외제다. 냉난방만 되는 것이 아니라 항상 깨끗이 정화된 공기도 공급된다. 습도도 물론 맞추어 준다. 도서관은 난로도 없고 선풍기도 없이 건물자체가 온풍기요, 에어컨인 완벽한 건물이다. 여름에도 창문을 열 이유가 전혀 없다. 그래서 도서관 창문은 잘 열리지도 않고 열어도 안쪽으로 열리게 되어있다. 반대로 닫으면 외부로부터 완전히 밀폐된다.
<도서관을 망쳐버린 설계변경>
시설은 첨단인데 모양은 왜 그럴까? IIT도 그렇게 생겼나? 밋밋해도 유분수지......하지만 원래 도서관은 지금과 같은 모양이 아니었다. 초기안을 보면, 지금은 4층이지만, 3층으로 설계되어 있고, 그 모습은 대단히 세련된 형태이다. 검은색 유리에 새하얀 띠가 수평으로 뻗어나가고 몸체는 대지에 밀착한 날카로운 형상이었다. 4층의 일부만이 채광을 위해 가볍게 솟아 있었다. 건물 구석구석은 정교함으로 가득하고 주문제작한 창문과 문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형태이다. 미국의 IIT가 한국에서도 실현될 작정이었다. 라면박스는 도무지 연상되지 않는다.
그 모양이 바뀐건 공사가 진행중일 때였다. 김우중 회장의 지원속에 최고의 건물을 만들기 위해 많은 고민을 했던 서울건축의 노력이 허망해진 시점이다. 설계도에는 없는 4층을 학교측의 요구로 올리게 된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아마도 공간이 부족했던 당시의 상황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는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았다. 세련된 모습이었던 도서관은 4층이 올라가면서 말그대로 라면박스가 되어버린 것이다. 언뜻 생각하기에 건물 한층을 더 올린다고 해서 모양이 바뀌겠느냐 싶겠지만, 실지로는 그렇지가 않다. 더우기 도서관과 같이 단순한 형태에서는 창문하나만 크기가 바뀌어도 이미지 자체가 바뀌어 버린다. 쉽게 예를 들면, 우리가 잘 아는 모나리자라는 그림은 누구나가 아름답다고 느낀다. 하지만 모나리자의 입이 지금보다 약간만 커진다면 아주 이상한 모양이 되어버린다. 도서관을 증축한 것은 모나리자의 입을 크게 바꾼것과 같은 것이다.
이는 건축에 대한 무지로부터 기인한다. 건축설계란 건축시공과는 다르다. 시공은 공학이나 제조업에 가깝지만, 건축설계는 일종의 조형예술이며, 설계자는 작품의 창조자이다. 이를 망각하게 될 때 우리는 건축의 실패를 경험하게 된다. 4층의 증축을 요구한 학교측의 무지는 도서관을 결국 라면 박스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이런 일은 정확히 10년
후 신이공관의 건축에서도 발생하게 된다.
<수난의 길에 오르는 아주대 도서관>
도서관은 완공과 함께 아주대의 자랑이 되었다. 아니, 사치였다. 당시의 학보는 도서관을 여러차례에 걸쳐 아주의 자랑으로 내세우고 있다. 하지만 영화는 영원하지 못하다. 불과 몇 년만에 지하실의 거대한 기계는 멈추게 된다. 유지비가 너무 많이 드는 것이 이유였다. 사실 건물전체를 냉난방하는 데는 엄청난 비용이 든다. 대우학원은 그 많은 비용을 감당할 수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여름이 되자 더위를 못이기고 창문을 열기 시작했다. 그러나 문제가 발생했다. 창문이 제대로 안열리는 것이다. 그도 그럴것이 애초에 인공냉난방을 염두에 두고 설계를 했으니 제대로 열릴리가 없다. 겨울엔 그나마 인체발열로 버티겠으나 통풍이 문제! 환기도 예전에 기계로 했던 것이다. 거기에다 대우학원은 있지도 않던 지하실을 도서관에 만들었다. 학생회관이 좁아 동아리방을 만든다는 이유였다. 세상에............!
그렇게 해서 위로는 4층이 올라가고 밑으로는 땅굴이 파헤쳐진 도서관의 수난은 시작되었다. 도서관이 완공된 84년으로부터 불과 몇 년이내에 일어난 일이었다.
지하의 동아리방은 사용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인간이 거주할 만한 곳이 못된다. 창문이 없는 것은 물론이요. 난방도 안되고 환기도 안된다. 어떻게 건축허가를 받아냈는지 신기하기만 하다. 급기야 사고는 일어나고 말았으니 92년인가 93년인가에(기억이 확실하지 않다)불이 나고 말았다. 모학과의 여학생이 잠을 자다가 난로를 넘어뜨린 것이다. 다행히 불이 크게 번지지는 않았지만, 학교측은 상식이하의 동아리방을 만들어준 자신들의 잘못은 알지 못하고 오히려 그 학생을 징계처분한다. 말이나 되는 일인가? 한편 한쪽에서는 불이나는 동안 지하실의 비싸디 비싼 기계는 계속하여 썩어들어만 갔다. 적어도 93년까지는 그랬다.
지금까지는 땅속에서 일어난 일이고 지상에서는 더 심각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아주대의 자랑이었던 첨단난방기구가 온통 담배꽁초로 뒤덮힌 것이다. 이유인즉, 마치 재떨이 모양을 하고 있는 창문밑의 난방구가 가동을 중지하자, 재떨이로 쓰인 것이다. 실제로 당시에 이 구멍을 재떨이로 착각하고 있는 사람도 많았다.
열람실은 열람실대로 문제가 있었는데, 그 문제란 앞에서도 말했듯이 도무지 환기가 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허구헌날 잠에 빠져드는 일이 많아졌다. 산소가 부족하니 머리는 띵~하고 정신은 흐려진다. 창문을 열어보지만 속수무책! 더욱이 미국식으로 지어져 처마나 햇빛 가리개가 없어 직사광선이 말그대로 '직사'로 들어왔다. 복도 또한 담배 연기로초만원을 이룬다. 이런 일은 90년에 본관이 새로 지어지면서 도서관의 학교직원이 대부분 새건물로 옮기고 난 후 더욱 심해진다.
<도서관을 살리기 위한 모교수님의 노력>
도서관이 완공된 84년이후로 90년까지는 아주대에 새로 세워진 건물이 없었다. 81년 3개 단과대학, 10개학과, 학생수 3000명으로 종합대가 되기엔 도저히 불가능했던 아주공대는 또한번 대우의 힘으로 종합대로 승격하지만, 말만 종합대일 뿐 여전히 공대위주의 단과대학에 가까웠고,이를 반증이나 하듯 새로 지어진 건물은 인문관과 도서관 뿐이었다. 90년이나 되어서야 고작 본관이 새로 지어졌을 뿐이다. 건축의 입장에서 아주의 역사를 본다면 80년대는 그야말로 암흑의 시대이다. 하지만 이 암흑시대의 대표적 수난 대상이었던 도서관은 93년 이를 참다못한(?) 한 용기있는 교수님에 의해 회생의 기회를 맞이한다.
도서관장은 해가 바뀌면서 학교내의 교수님들이 돌아가며 맡아보도록 되어있다. 93년도와 함께 이 교수님은 도서관장을 맡게 되면서 혁신적인 방침을 천명(!)한다. 일명, 도서관을 도서관답게 하기위한 대수술을!!!!
아마도 경제학과의 교수님으로 기억되는데(나는 기억력이 상당히 나쁜 편이다) 여하튼 이 교수님은 미국에서 제대로 된 도서관을 이용해 보았음에 틀림없다. 그것도 완벽한 개가식 도서관을 말이다.
그 당시의 도서관 내부는 지금과 상당히 다른데 살펴보면 이렇다. 1층에는 은행과 가방보관실, 전산실, 사무실 등이 있었고, 2층과 3층은 북쪽엔 서고실, 남쪽엔 열람실이 있었으며, 4층은 일부가 서고실이었고 대부분이 열람실이었다.각 방은 동쪽과 서쪽에 놓은 기다란 복도로 연결되었다. 평면은 매우 복잡했고 여러 가지 용도의 방들이 뒤섞여 있었다. 또한 지금처럼 남쪽과 북쪽이 분리되어 있지 않았다.
이런 도서관을 바꾸기 위한 교수님의 기본적인 아이디어는 다음과 같다.
우선, 도서관과 상관없는 시설-은행, 전산실, 휴게실 등등-은 모두 이전한다. 본관으로 사용하던 시절 만들어진 많은 벽들을 모조리 헐어내 환기와 채광이 수월한 거대한 내부공간을만든다. 그리고 크게 도서관을 두 구역으로 나누어 북쪽에는 전용 서가실을 배치하고 남쪽에는 열람실만 배치한다. 청결을 유지하기 위하여, 모든 구역이 금연이고 각종 자판기와 휴게실을 없앤다. 단, 변하진 않는 것! 외관은 그냥 놔둔다. 그리고 서고는 완전 개가식으로 하되 입구에 도난방지 센서를 설치하여 이전과 달리 가방을 비롯한 개인물품을 자유롭게 가지고 들어가도록 한다. 이 계획은 학교 측의 승락을 받아냈는데 학교가 이를 승낙한 이유는
도서관을 개조하면 안 그래도 모자르는 공간을 조금이나마 늘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당시의 상황은 도서관이 더이상 책을 집어넣을 수 없을만큼 포화상태였고, 심지어는 강의실이 모자라
9교시까지 수업을 하던 때였다) 하지만 여전히 학교측은 도서관 신축의 방안은 발표하지를 않았다.
여하튼 이같은 한 교수님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도서관은 몇 달 동안의 공사를 거친 후 지금의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 그리고 아주의 자랑이었던 공기조화시설도 수리를 하고 다시 가동을 하기 시작했다(단, 기계가 녹슬지 않을 만큼만 가동한다) 그리고 이후 대우학원은 2000년대를 향한 TOP5계획을 발표하면서 그동안 미루어왔던 투자를 왕창하게 되고 도서관도 전산망을 새로이 갖추는 등 TOP5의 길로 매진하고 있다.
<<아주대의 마스터 플랜>>
저한테 문의 온 글의 내용 중에 마스터 플랜에 특히 관심이 가더군요. 아주대학교에는 마스터 플랜이 있는가? '없다'라고 말할 수 있겠죠. 하지만 예전에는 있었습니다. 제가 아는 바로는 2차례에 걸친 대규모 계획이 있었습니다. 유신학원시절 만든 것이 하나이고 대우가 인수한 이후 종합대로 승격한 이후의 것이 있습니다. 처음것은 우리학교 도서관 2층 자료실에서 70년대의 아주공대 학보를 보면 소개가 되어있고 나머지 하나는 신이공관 4층 건축과 로비에서 모형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마스터 플랜이 없습니다. 그 이후 아주대는 계획대로 되지 않고 말그대로 필요에 따라 지어집니다. 장기적인 안목의 투자를 하지 않은 것이지요.
투자가 없으니 마스터 플랜이 폐기된 것은 기정사실이고 이 문제가 새삼스럽게 대두되는 것은 투자가 급격히 늘어나는 최근 들어서입니다. 사실 지금은 돈이 많습니다. 경제적인 이유로 박스로 지은 것은 아닙니다. 돈 때문이라면 라면박스같은 건물에 시청각자료나 전산망, 공기조화시설 등의 첨단기자재를 설치하지 않겠죠. 최근에 완공된 건물들(신이공관,의학관,경영학관)은 모두가 100억대가 넘는 건물들입니다. 사용된 재료 또한 상당히 고가의 것들이죠. 저는 사실 요근래 경영관을 가보고 작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학교시설로는 한국실정에 비추어 볼 때 매우 훌륭하다고 봅니다.
제가 생각하기로는 결국 디자인에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건물은 일단은 외관으로 평가됩니다. 내부는 아주 엉망이어도 옷차림이 괜찮으면 사람들은 멋있다, 또는 이쁘다라는 말로 긍정정인 평가를 내립니다. 그런데 우리 학교는 내부는 아주 좋은데 외관이 그야말로 네모난 붕어빵 일색이어서 좋지않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싸구려하는 말도 듣지요. 엎친데 덮친격으로 공간도 모자라는 상황에서 마스터 플랜까지 없으니 그 비난은 커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아주대의 건물들은 상당히 세심한 설계를 통해 지어진 것들입니다. 필요에 따라 그때 그때 지어내기는 했지만 막 지어낸 건물이 아니라는 점입니다.(단, 마스터 플랜이 없어 건물들이 조화롭게 일관적으로 배치되지 못했고 실지로 수준이 떨어지는 건물도 있습니다) 개개의 건물들은 저마다 강한 개성과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들을 읽어내지 못할 뿐입니다.
아주대의 디자인이 사람들에게 환영받느냐? 받지 못하느냐, 다시 말해 아름다우냐? 아름답지 못하냐? 라는 문제는 일단 접어두어야 할 것같습니다. 아름다움에 대한 미적판단의 기준은 저마다 다를 수 밖에
없고 어떠한 건물이라도 100%의 만족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심한 설계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모더니즘을 잘 따르고 있기 때문에 아름답다는 주장은 할 필요도 없고 할 이유도 없지요.
제가 글을 시작하고자 하는 목적은 다음의 세가지입니다.
첫째는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아주대에 대한 기존 관념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아주대는 막지은 집장사 집들이 아니고 저마다 뚜렷한 자신의 미학을 가지고 있는 하나의'작품'들입니다. 비록 환영받지 못하는 스타일이지만...... 이들 작품에 담겨진 설계자의 의도를 파악하고 이를 감상하는 방법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각 건물은 저마다 하고픈 말들이 있습니다. 피카소의 그림도 이해가 없이는 한낱 낙서에 불과하죠.
둘째는, 아주대는 자신의 미학과 더불어 아주대의 역사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유홍준씨가 한반도는 그 자체가 박물관이라고 했던가요? 아주대는 그 자체가 아주대의 20년입니다.
세째는, 아주대가 건물 하나하나는 상당한 수준의 것임에도 불구하도 왜 마스터 플랜은 없는가?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같은 캠퍼스 안에 우수작(병원)과 열등작(신이공관)이 생기는 이유는 무엇인가를 밝히는 것입니다. 더불어 건축물의 주인인 학교측과 학생은 건축에 어떻게 관여해야하는가를 살펴보겠습니다. 점거하는 것만으로는 필요한 방을 얻어낼 수 없습니다.
네째로, 아주대 캠퍼스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지금 아주대는 많은 돈과 투자계획을 가지고 있지만, 건축에 대한 잘못된 인식내지는 무지, 유치함을 벗어나지 못하는 학교측의 미의식으로는 캠퍼스가 망가질 수도 있습니다.
<<이공관은 과연 붕괴하는가?>>
이공관은 저번에도 언급했듯이 상식을 초월하는 상당한 길이의 건물이다. 당시로서 이런 건물을 짓는 것이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건물이 길어지게 되면 어려운 일이 발생한다. 여름에 태양을 많이 받으면 늘어나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라고 생각하지만 이건 엄연한 사실이다. 지하철을 타면 일정한 간격으로 덜컹덜컹 소리가 나는데 그 이유는 철로가 뜨거워지면 팽창해서 휘어지므로 이를 방지하기 위해 철로 중간중간을 간격을 두고 연결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여름보다는 겨울 지하철이 더 시끄럽다. 인간이 느끼기에는 미세한 차이지만.......
그래서 이공관도 여러토막으로 잘라 만든후 연결을 하였다. 그냥 통건물로 만들면 여름엔 곳곳에 금이 가고 급기야 붕괴할 수도 있다. 이공관을 자세히 보면 3등분으로 되어있는데, 그 틈새는 얇고 반짝반짝한 스테인레스로 감추어져 있다. 그래서 이공관은 일단은 안전하다. 그러나...........
예상을 했는지 안했는지 모르겠지만 건물이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지반이 약한 탓이다. 세 토막중 한 토막의 지반이 내려앉는 것이다. 따라서 그 토막이(인문관 쪽 일거다)옆에 토막에 기대어 서있는 형국이다. 이런 연유로 건물에 보이지 않게 서서히 금이 가고 있는 중이다. 무너지면 어떡하지????
또 한가지 문제!!! 5층이 내려앉고 있다. 원래 이공관은 4층 건물이었다. 나중에5층을 올린 것이다. 그것도 무지막지 하게 큰 5층을....... 구조계산이야 당시에 물론 했겠지만 내려앉는다. 자세히 보면 5층이 4층보다 크기 때문에 5층은 기둥으로부터 얼마만큼 튀어나와 있다. 이런 구조를 켄틸레버 구조라 하는데 이정도 시공은 요즈음 식은죽 먹기다. 그런데도 내려앉는걸 보면 원인은 둘 중 하나다. 구조계산을 잘못했던지, 아니면 시공을 부실하게 했든지......
이런 하자들은 또 다른 하자를 부르게 되어 있으니 바로 비가 새는 것이다. 날마다 포크레인이 지붕을 긁어내고 다시 포장을 하지만 한번 새는 건물은 계속 새는 것이 건축계의 관례다. 그래서 요즈음!!!!!!!!! 일부 교수들 중에는 빨리 헐어내자는 의견이 자주 대두된다고 한다. 낡았으니 건전지 갈아끼우듯 새 건물 세우자는 것
그러나 만사가 새것으로 모두 해결되는가? 건물은 쉽게 없앨 수 있지만 그 건물이 담고 있는 아련한 그 때 그 시절 아주의 추억과 기억, 낭만과 분노, 숨결과 역사는 어쩌란 말인가? 이런 것도 새로 만들 수 있나??? 사실 건물을 헐자는 이야기는 아직까지는 일부의 의견이고 실지로 건물에 약간의 무리는 있겠지만 당장 무너지지는 않는다.(예외적으로 삼풍은 무너졌지만..) 그 정도의 부실은 아닌 것이다. 일반적으로 건물이 노후화되면 나타나는 현상들이다. 대개 콘크리트 건물의 수명은 30년 전후로 잡고 있는데 이것은 사회적 생명이고 물리적 수명은 200년까지 간다. 실지로 미국에만 가도 그런 건물이 수두록하다.
우리는 항상 경제발전만을 내세우며 과거를 지우기에 바빴다. 서울이 600년된 역사도시라면 어느 외국인이 믿겠는가? 고작 남은 흔적이라야 빌딩 숲속에 외로이 서있는 기죽은 남대문, 겨우겨우 살아남은 경복궁, 박제되어 보관되는 창덕궁.... 그리고 몇개의 궁궐과 종묘.... 조선 이전의 건물을 싸그리 사라졌는다. 찬란한 문화의 영예와 흔적을 간직한 그들의 도시를 보며.... '역시 선진국이야' 라며.....
사실 구닥다리 건물을 보수비만 엄청나게 들여가며 살려놓을 필요는 없다. 그럴 바에야 없애느니만 못하다. 하지만 보수만 적절히 잘 해주고 관심을 가져준다면 경제적으로 살아남을 건물은 너무나도 많다. 이공관도 한 사례가 아닌가 싶다. 또한 경제적 이유 때문에 살려놓아야 하는 것만은 아니다. 사회역사적 이유도 한가지이다. 쉽게 말하면 우리가 우리의 어릴적 색바랜 사진을 버리지 못하고 고이고이 간직하는 것과 같은 이유에서이다. 아주의 20년이 역사로 남기 위해서 우리는 아주 그 자체를 역사로 인식해야한다. 우리의 선배와 우리의 숨결이 스며있는 아주의 모두를......!!!
<<80년대의 건축 제2편: 겸손의 아름다움-인문관>>
부제 : 아주대가 수원에 있는 이유...
<시작하며>
아주의 80년대는 종합대 승격과 함께 시작된다. 73년에 공업초급대학으로 시작하여 불과 일년만에 공과대학으로 승인된 아주공대는 또다시 만7년만에 종합대로 승격하였으니 이는 실로 믿기지 않을만한 일이다. 한국 현대사가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듯한 압축된 고도성장이라고는 하나 아주대만큼 급속하게 모습을 바꾸어 나간 학교도 없다. 더욱이 최근에는 TOP5선언을 하고 다른 학교의 비방(성대?)마저 들어가며 학교의 세계화, 일류화에 정신없이 뛰고
있지 않은가.....
이처럼 짧고도 숨가쁜 파란만장한 역사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대우'라고 하는 재벌을 재단으로 가지고 있기 때문이리라. 재벌의 역사는 곧 한국의 현대사이고 이는 곧 아주의 역사이기도하다.
<아주대가 수원에 있는 이유>
요근래 천리안 성대동에서 아주대를 비방하는 악의에 찬 글이 올라 많은 이들의 눈을 핑핑~ 돌아가게 한 일이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성대 또한 아주대와 마찬가지로 수원에 위치하고 있고, 그들도 이를 억울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성대 공대생의 글 중에는 '공대가 수원에 있는 것이 죄도 아니고....'운운하는 글이 있는데 이는 수원에 학교가 있음으로해서 얻는 모종의 불이익이나 억울함을 반증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왜 아주대는 수원에 있는 것일까? 서울에 있었더라면 훨씬 발전이 빨랐을 텐데.....서울에 땅이 없어서일까? 사실 아주대가 수원에 있어서 얻는 이익보다는 불이익이 더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대체 왜?! 수원에 학교를 세운 것이란 말인가?
이 문제에 답하기 위해서는 언젠가 한번은 아주대와 관련지어 들어봤던 프랑스라고 하는 나라를 곰곰히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학교는 프랑스와 세계사를 들먹여야 할 정도로 국제적인 학교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세계 2차대전의 발발과 종말은 세계사의 흐름을 엄청나게 바꾸어 놓았음은 물론, 세계의 패권국을 뒤바꾸어 놓았으니, 산업혁명 이후 온 지구를 종횡무진하며 닥치는대로 식민지 수탈을 일삼던 유럽의 나쁜(!)나라들이 빛을 잃고, 문화후진국이던 미국이 일순간에 세계의 주도자로 빛나게 짜안~떠오른 것이다. 또한 유럽의 나라들에게는 자신들의 뒷마당을 위협하고 있는 소련도 두려운 상대로 떠올랐고, 다 죽은 줄 알았던 일본은 어느새 집안의 화장실 변기마저 MADE IN JAPAN으로 바꾸어 놓지 않았는가?
부르주아 혁명이후 유럽의 강국이며 유럽의 중심이라 자처하던 프랑스의 수모는 2차대전 나치의 파리 점령에서부터 시작되어, 전후에는 식민지 베트남을 잃는데 이어 숙적 독일과 영국에게 유럽의 주도권 상당량을 빼앗기게 되는 운명에 처하게 된다. 세계사적으로는 미국과 일본에게 기존시장의 대부분을 빼앗기는 등 열세에
처하게 된다. 이런 상황하에 70년대가 도래하자 프랑스는 약삭빠르게 잔머리를 굴리게 되는데 이들에 의해 아주대는 탄생하는 것이다.
그 전모는 이러하다. 프랑스는 자신들이 잃어버린 제3세계의 시장을 되찾기 위해 신흥 공업국을 중심으로 기술협력협정을 체결한다. 그리고 그들의 선진기술을 이전시켜 주면서 학교도 설립해준다. 학교는 물론 프랑스식이고 프랑스 내 일류대학 못지않는 시설과 교수를 지원해준다. 그 학교를 졸업한 학생은 사회에 나가서 분명히 공업 분야에서만큼은 지도적 위치에 오르게 될 것이고 프랑스의 은혜(?)를 입은 이들은 나사못 하나를 사더라도 자신들의 손에 익은 프랑스제를 살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이러한 원대한 포부 속에 프랑스는 한국과 문화 및 기술협력협정을 체결하게 되는데 바로 박정희가 신흥공업국을 꿈꾸며 한국을 무대포로 지배하던 1971년의 일이었다. 그리고 약속대로 73년에 프랑스는 공업대학을 세워주게 되니 이 학교가 바로 지금의 아주대인 것이다. 이러한 증거는 구이공관 2층에서 3층을 올라가는 계단에 새겨진 명문에서 확인할 수 있다. 70년대에 아주공대 본관(이공관)에는 지금은 없어진 옥상의 깃대에 태극기와 프랑스기, 학교기(아니면, 새마을기)가 펄럭였고, 강의실에는 프랑스 교수가 불어로 수업을 했던 것이다. 당시에 불어는 학생들의 필수과목이었고 이 때문에 우리의 선배들이 세운 밤은 수도 없이 많다고 한다. 또한 물건너 도착한 최신 실습기계 중엔 프랑스 학생들도 만져보지 못한 최신 기종까지 있었으니 박정희가 아주공대를 자주 들러볼만한 이유가 충분히 있었던 것이다. 프랑스 정부사람들 또한 한국 방문시엔 아주대를 자주 들렀었다.
서문이 너무 길어지는 것 같은데 본론으로 들어가야 할 것 같다. 아까 한 질문! 왜 수원에 세웠는가를 답할 때가 온 것같다. 대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프랑스가 수원에 세우기를 바랬던 것이다. 이유인즉, 수원은 6.25때 UN군으로 참전한 프랑스군이 인민해
방군과 맞서 싸우다 떼죽음을 당한 장소이기에 이를 기념하고자한 것이다. 프랑스 사람들에게 수원은 자신들의 피가 어려있는 성스러운 곳임에 틀림없다. 이를 기리는 기념비와 공원이 수원에서 안양으로 넘어가는 지지대 고개 한켠에 지금도 있으니 실로 아주대는 프랑스와 뗄래야 뗄 수 없는 인연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연유로 아주대는 수원에 있다. 따라서 정부의 수도권 팽창억제 정책으로 인해 수원근교로 떠내려온 인근의 대학들이나 땅값 싼 곳을 찾아 자리를 잡은 학교들과는 근본부터가 다른 것이다. 이를 망각하고 아주대도 마치 자신들마냥 서울에서 쫓겨온 대학쯤으로 비아냥거리는 것은 그야말로 무지의 반증인 것이다.
<다시 80년대로 돌아와 인문관을.....>
원래 예정에 없던 '아주대가 수원에 있는 이유'를 먼저 쓰게 되었네요. 성대생 이야기를 읽고 하도 손과 입이 근질근질해서........
도서관과 함께 제2의 라면박스인 인문관!!!
원래 인문관의 정식 명칭은 '인문사회관'이었다. 왜냐하면 건물이 세워지던 81년에는 지금처럼 인문대와 사회대가 분리되지 않고 통합이 되어있었기 때문이었다. 인문관으로 명칭이 확정된 것은 본관과 경영관이 완공된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인문관 공사가 시작된 때는 81년 11월의 일로 도서관보다 약 2년 가량 빠르다. 도서관이 초기의도와는 많이 변형된 것과 달리 인문관은 당시와 크게 바뀐 부분은 없고 설계자의 의도도 거의 실현이 된 건물이다. 또한 인문관은 입면은 이후 도서관 입면에 100%인용되었고, 이후의 아주대 건물의 이미지를 결정짓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료적 가치(!)가 있는 건물이다.
<운동장을 개간하다>
80년대 초 아주대의 모습은 우리가 지금 보는 것과는 매우 다르다. 인문관이 있던 자리는 당시에 정구장이었고, 도서관 자리는 운동장이었다. 지금도 게시판 뒤 자유광장 쪽으로 남아있는 계단식 스탠드는 당시 운동장일 때 사용하던 것이다. 노천극장은 당시에 없었다. 다만,정확하지는 않으나 80년대의 도서관 설계도면에 노천극장이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그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인문관과 도서관이 세워지던 와중에 같이 만들어진 듯 하다. 또한, 노천극장 무대뒤의 벽돌벽의 벽돌쌓기 수법으로 볼 때 노천극장도 서울건축에서 설계하였음은 분명하다. 노천극장도 다른 건물과 마찬가지로 매우 단순하고 간결한 절제의 미학을 추구하고 있다.
운동장에 새 건물을 지었던 것은, 대우가 학교를 인수한 이후 서울건축에 의해 기존의 마스터 플랜이 사실상 폐기되었기 때문이다. 인문관이 들어선 이후로 아주대는 주로 동쪽방향(병원쪽)을 향하여 개척이 시작된다. 산을 깎고, 지하를 파고....최근에는 북쪽(기숙사쪽)으로 개발의 방향이 바뀌고 있다.
<서울건축의 고민>
인문관을 유심히 보면, 이공관이나 도서관과는 달리 약간 서쪽을 바라본 채 축(軸,axis)을 달리하여 앉아 있음을 알게 된다. 서울건축작품으로는 기숙사를 제외하고 유일한 경우이다. 아주대는 유신학원 시절 지형에 맞추어서 건물이 지어졌다. 이공관을 중심으로 하여 동관과 서관이 그 뒤에 나란히 선 채 그 위용을 과시하고, 그 오른쪽 뒤편으로 계곡을 따라 학생회관과 기숙사가 들어섰다. 교문의 위치는 지금자리가 아니라 원천로에서 아주대로 들어오기 위해 꺾어지는 곳(베스킨라빈스31이 있는 정도의 위치)이었고, 지금은 여러 커피 늄과 식당 등이 줄을 지어있는 진입로가 캠퍼스의 주축이 되어 각 건물이 양쪽으로 들어서게 되어 있었다. (예전에는 이곳에 딸기밭이 있었는데 이 모두가 학교부지였다)
실제로 지금의 교문이 세워지기 몇년전만 해도 아주공대시절 세웠던 검은색 벽돌로 만든 교문이 서있었다. 지금은 그 자리에 횡단보도가 설치되었지만 튀김을 파는 포장마차 뒤로 벽의 일부가 처참하게 파괴된 채로 남아있어 당시의 형상을 짐작할 수 있다.
이 교문에서 학교를 바라보면, 경사진 진입로를 강력한 축으로 하여 이공관(당시본관)이 멀리 아득하게 우러러보이고(왜냐하면 이공관쪽이 지대가 높다)그 양 옆으로 여러 부속건물이 사열하듯 위용있게 서있는 것이 유신학원 때의 마스터 플랜이었다.
이러한 배치수법은 상당히 권위적인 것인데 비슷한 사례를 연세대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아주공대는 연대보다는 훨씬 큰 규모로 마스터 플랜이 짜여 있었다. 간단한 예로 진입로의 길이만 보더라도 아주공대가 훨씬 길고, 캠퍼스의 핵이라 할 수 있는 본관의 크기는 비교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로 아주공대의 그것이 어마어마하게 크다. 그러하니 만약 이 계획대로 아주공대가 지어졌다면 그 규모는 상상을 초월했을 것이다. 참고로 말하면, 당시의 마스터 플랜에는 학생들이 실습을 할 수 있는 공장까지 계획되어 있었다. 그것도, 여러개의 공장이.
...
한마디로 당시의 건축계획은 지난번 글에서도 언급했듯이 설계의도로 보나 규모로 보나 다분히 과시적이고 권위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77년 대우가 학교를 인수하고, 80년대 들어 새로운 건물을 짓게될 시점이 되자, 이것이 서울건축의 고민이 되었다. 서울건축의 김종성 교수는 미국에서 교육을 받았을 뿐더러, 그는 이러한 박정희 정권의 권위주의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그는 권위나 과시를 통해 건축이 사람을 압박하기 보다는 사람들을 지적이고 냉철한 이성적 세계로 인도하기를 바랬다. 그의 외모 또한 얼마나 지적이고 냉철한가!
박정희가 물려준 이 거대한 유산을 바라보며, 김종성 교수는 아마도, 기가 막혀 할말을 잃었을 것이다. 특히 이공관에 대해서는............
그래서 그는 즉시 이 무지막지하고 비민주적인 건축물들이 더 이상 들어서는 것을 막고 새로운 유토피아를 만드는 임무에 착수하게 된다. (드디어 아주대에도 80년의 봄은 찾아왔다!) 그 최초의 작품이 바로 인문관인 것이다. 그래서 인문관은 기존의 건축개념을 뒤집어 엎는 것으로부터 시작하게 된다. 우선 이공관(본관)을 중심으로한 권위적 배치를 탈피하기 위하여, 계획과는 전혀 다르게 인문관을 그 우측에 배치하였다. 그리고 나중에는 도서관을 그 앞쪽으로 놓았고 이후에는 동쪽으로 계획을 해 나갔다.
그런데 남이 쓰던 컴퓨터를 새 주인이 자기것으로 만들기에는 많은 제약과 고통이 따르듯이 그러한 고통은 인문관 설계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인문관을 계획하려하니 이공관을 중심으로 한 진입로의 축과 계곡을 따라 지어진 기숙사와 학생회관을 잇는 축이 다른 골치아픈
문제가 생긴 것이다. 이 두개의 축은 모두 남북방향이기는 하지만, 서로 약 30도 가량 방향이 틀어져 있다. 과연 어느 축을 따라서 건물을 앉힐 것인가?(건축에서는 설계 초기단계에서 건물의 배치가 가장 우선시 해결되어야 한다.
특히 서울건축과 같이 건물이 단순한 경우에는 조금만 축이 달라져도 건물의 모습이 달라진다) 또한 학교가 산에 위치하다 보니 땅의 높낮이가 제멋대로 다른 것도 무시할 수 없는 문제거리였다.
아주대의 표본이 된 IIT의 경우는 학교부지 자체가 직사각형 평지이다. 건물들 또한 모두 직사각형이며 3층 내외이다. 부지는 일정한 크기의 그리드로 분할된 후 적절한 비례에 따라 각 건물이 배치되어 매우 엄격하면서도 기하학적인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아주공대의 권위주의와는 전혀 다르다. 오히려 각 건물은 민주적이라 할만큼 규모나 디자인이 동등하다)
이런 문제로 서울건축은 몇날을 고민하게 된다. 30도의 어긋남이라는 문제를 가지고.......... 결국 고민끝에 서울건축은 인문관을 기숙사와 학생회관을 잇는 축에 맞추어서 배치하기로 결정하게 된다. 왜 그렇게 했느냐에 대해서는 여러 추측이 있기는 하나 아직까지 신빙성을 가지고 있는 대답은 하나도 없다.(영원히 미지의 문제로 남을까?) 하지만, 인문관 이후 모든 건물은 이공관의 축에 따르게 되니 당시의 결정이 중대한 오판이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 오판은 자유광장이라고 하는 훌륭한 외부공간을 낳는 계기가 된다.
인문관의 아름다움은 무엇보다도 보이지 않게 숨어있는 완벽한 비례체계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언뜻 보기에 인문관은 도서관처럼 첨단 설비를 갖추고 있지도 않고 이렇다할 사람의 눈을 끌만한 디자인 요소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문관은 구석구석에서 쉽게 보이지 않는 독특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겸손함으로 인한 아름다움이라고나 할까.....
<인문관의 전체적인 비례>
건물의 아름다움은 일반적으로 형태에 의해 좌우되나, 이
에 못지 않게 얼마만큼 세심하게 비례를 맞추었느냐도 아름다움을 재는 척도가 된다. 인문관은 형태는 매우 단순하지만 비례에 있어서는 상당한 세심함을 지니고 있다. 정면 9칸, 측면 3칸으로 이루어져 있는 입면은 모두 홀수로 이루어져 있고 가운데 7개칸에 창문을 두고 양쪽 한칸씩을 벽돌벽으로 하였고 양 측면은 모두 창문으로 마감을 하였다. 측면에 비해 정면이 상당히 길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건물이 쫘악~ 잘 빠졌다는 느낌을 준다. 이에 비해 도서관은 인문관을 양측면에서 꽉~눌러 뚱뚱하게 만들어 놓은 듯한 모습이고 계획에 없던 4층이 증축되어 전반적으로 비례가 어색한 형상이다. 동쪽과 서쪽의 창문또한 정가운데에 놓여있지 않고 한 쪽으로 치우쳐 있다.
아주대의 건물들 중 인문관은 비교적 비례에 많은 신경을 쓴 건물이고 전체적으로 깨끗하다는 인상을 준다. 특히 드라마 '종합병원'에 인문관이 나올때 보면 그러한 느낌이 더하다. 흔히들 속된말로 인문관은 사진빨을 잘 받는다고 하는데 여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바로 세심한 비례와 정교함이 곳곳에 스며있기 때문이다.
<완벽을 향한 인문관 창문의 비례체계>
서울건축의 건물에서는 주택이나 일반건물에서 볼 흔히 사용하고 있는 양쪽으로 밀어여는 두짝짜리 '여닫이 창문'을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특히 인문관에서는 그러하다. 왜냐하면 그런 창문들은 비례가 제대로 맞지 않기 때문이다. 여닫이 창은 문을 조금이라도 열면 한 창문이 나머지 창문을 가리게 되어 비례가 산산히 깨져버린다. 깨끗하게 보이도록 항상 닫아놓는다 하더라도 두짝 중에 하나는 나머지 하나의 일부를 가릴 수 밖에 없으므로 창문은 정면에서 바라볼 때 정확히 2등분이 되지 않는 것이다.
이를 도면으로 확인해 보면 다음과 같다. 이 그림은 여닫이 창문의 평면도이다. 창문1과 창문2는 서로 크기가 똑같지만, 실지로는 창문1이 창문2의 일부를 가리고 있어 시선의 방향에서 볼 때 정확히 2등분이 되지 않는다. 즉, 비례가 정확하지 않은 것이다. 창문을 반쯤 열었을 경우에는 '비례'는 철저히 파괴된다.
그래서 이런 문제를 해결한 것이 인문관의 창문이다. 인문관의 창문은(남쪽의 창문중 대부분은 학교측에 의해 여닫이 창문으로 변형되었으므로, 북쪽의 창문을 참조할 것!)모두가 안쪽으로 끌어당겨서 열도록 되어 있다. 끌어당기는 창문은 여닫이 창문의 문제점인 다른 창문을 가리는 문제점이 전혀 없다. 열려 있을 때조차도 그리 나쁜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또한 한 층당 4열씩 놓여있는 창문 중 아래쪽 2열만 열리도록 하여 열리는 창과 안열리는 창의 비례를 맞추었다.
창문의 크기는 기둥과 기둥 사이의 거리인 9m를 6등분한 1.5m의 크기로 되어있어 기둥이 있는 곳에서는 기둥의 중심에 정확하게 수직의 창틀이 놓이도록 하였다. 그리고 방음과 방온을 위하여 유리는 이중유리로 처리되었고, 재료는 알미늄을 써서 무게를 가볍게 하고 색깔은 짙은 색으로 하여 알루미늄이 줄 수 있는 가벼움을 줄였다.
이런 창문은 기성제품이 없으므로 전량을 특별히 주문제작해야 하므로 생각보다 상당히 비싼 편이다. 츨입구의 문 또한 단순하면서도 매우 엄격한 비례체계에 맞추어서 만들어졌다. 인문관의 창문은 도서관의 그것과 똑같으며, 이후에는 쓰이지 않는다.(학교측의 반대가 무엇보다도 큰 이유였다. 이후 글에서 다시 논의할 예정)
<인문관의 모서리 처리수법>
콘크리트조와 벽돌로 만든 건물은 일반적으로 시공의 정밀도가 떨어지는 경향이 있다. 아무래도 공장에서 기계로 잘라와서 조립하는 강철조 건물보다는 현장에서 작업의 대부분을 하니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다. 특히 콘크리트조의 벽돌마감 건물은 모서리 처리를 잘못하게 될 때 건물이 어설프게 보이는 단점이 있다. 창문에서조차도 그토록 정밀하게 비례를 맞춘 건물이 모서리 때문에 품위가 떨어진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서울건축은 다시한번 특유의 처리수법을 동원한다. 깔끔하게 처리되기 힘든 모서리가 확실하고도 선명하게 보이도록 이중처리를 한 것이다. 모서리는 보통 한번에 꺾이지만 인문관은 두번 꺾이도록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흐트러지기 쉬운 건물의 모서리 부분을 강조하여 건물을 꽉 잡아주는 것이다. 특히 도서관의 경우는 세번을 꺾었고, 울퉁불퉁한 모서리 부분의 벽돌벽을 감추기 위하여 철판을 대기도 하였다.
그렇게 불운한 삼각관계 속에 인고의 나날을 지내온 아주대는 91년과 함께, 대변혁의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이름하여, C급 태풍이라는......
< C급 태풍 이야기 >
아주대를 호랑이 새끼로 만들고 있는 그 유명한 대학종합평가!! 근래의 평가에서 몇몇 과는 이미 전국 최고수준에 이른 것으로 발표되고, 한 유력 일간지는 명문대 순위가 바뀌고 있다는 충격적 보도로 온나라 안의 대학가를 뒤흔든 이 평가는 우리가 알고 있듯이 어느날 갑자기 시작된 것이 아니다. 또한 지금의 행복에 겨운 타학교의 비난과 시기 뒤에는 과거 뼈아픈 고통의 기억도 있다.
UR개방 논의가 중대한 관심사였던 90년대 초반부터 이미 정부관계부처에서는 외국 대학의 상륙을 대비해야 한다는 주장이 비중있게 제기되고 있었다. 나라간의 벽을 없애고, 세계적 경제 개방체제를 구축하여 이를 무기로 다시 한번 제국주의의 혼을 불사르겠다는 미국과 그 일당! 그리고 그들의 UR협상이 가져올 초파괴적 위력! 정복하느냐 정복당하느냐의 문제는 현실로 다가왔고 교육 또한 예외는 아니라는 현실인식으로부터 교육대개혁은 첫발을 내디딘다.
강한 대학을 만들어라!
이것이 정부의 지상과제였다. 이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정부는 91년 하반기에 시범적으로 대학평가라는 것을 한다. 이미 미국에서는 보편화된 것이었다. 대상은 수도권 소재의 공대로 하되 기계과로 하였다. 대학평가가 무엇인지도 생소한 그 당시에 사람들의 관심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었으나, 그 결과만큼은 많은 이들을 놀라게 하는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가장 놀란 것은 아주대였다.
비록 81년 종합대 승격으로 아주공대의 위상이 실추되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건재하다고 믿었던 공대가, 그것도 공대의 간판학과라는 기계공학과가, 평가에서 C급판정을 받은 것이다. 어리둥절했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A,B를 받은 대학들에 비해 C급을 받은 학교는 국고보조도 줄어들고 증과나 각종 활동에도 제동이 걸리게 되지만 무엇보다도 큰 문제는 학교위상의 실추였다.
학생들을 더욱 화나게 만든 일은 평가의 주요부문이 기본적인 학습여건의 평가-실험 기자재 확보율,시설면적 확보율, 실험 실습비 등-에 있었다는 점이었다. 학생들이 공부를 게을리한 것도 아니고 교수님이 못나서도 아니고 전국 최고수준의 교수진, 공부하는 학교라는 아주대가 학습여건이 부실하다는 이유로 C급을 받은 것이다.
무엇보다도 점수를 가장 낮게 받은 부문 중 하나는 교사확보율이었다. 한마디로 학교가 좁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기막힌 현실인가? 학교측은 창문이 안열린다고 불평만 했지 정작 그런 건물이라도 지을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학생들이 선택한 대응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대학평가의 불공정성과 정부를 비난하는 일이었고, 둘째는 총장과의 싸움이었다. 그 중 첫번째 싸움은 정세를 잘못 판단한 것이었다. 시범적으로 실시했던 대학평가를 두고 평가방법에 문제가 있다며,그 자체를 아예 부정하려 했던 것도 자위일 뿐이려니와, 대학종합평가가 교육을 더이상 책임지지 못하게 된 정부가 구상해낸 기만적인 정책이라고 주장한 것도 운동권의 시각에 얽매인, 시대의 흐름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못한 편협한 것이었다. 역사는 이미 대학경쟁의 전국시대를 열고 있었다.
오로지 성과를 거둔 것은 학교측과의 싸움이었다. 여러날에 걸친 기계과와 공대 학생들의 시위 속에 마침내 총장과의 간담회 자리가 이루어졌다. 본관 대강당에서였다. 500여 좌석의 대강당은 만원을 이루었고 분노와 열기 속에 간담회는 진행됐다. 한 학생으로부터 욕설 비슷한 소리까지 들어가며 자리에 선 총장님...... 그 때의 총장님 모습은 전씨와 노씨의 모습과 흡사했다. 전,노와 달랐던 점은 미래에 대한 분명한 약속을 했다는 점, 제2이공관을 건립하겠다는...... 그것은 일종의 위로선물이자 미래에 대한 비젼 제시이기도 했다.
<도서관 이후 제2이공관의 탄생 전까지 아주대의 건축사>
C급 사건으로 제2이공관의 탄생이 확실시되기는 했지만, 간담회 이전에 대우학원은 이미 제2이공관의 신축계획을 검토하고 있었다. 학교 행정이 학생들에게는 폐쇄적이었기 때문에 학생들이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할 뿐이었다. 도서관 완공 이후 제2이공관의 탄생까지 아주대의 건축사를 간략하게 살펴보면 이렇다.
도서관에서 대학본부를 운영하던 대우학원은 87년에 인문관 동쪽언덕에 본관건립 계획을 세우고 공사에 착수한다. 완공예정은 88년이었으나, 자금조달이 원할하지 않아 공사가 지연된 끝에 89년에 완공된다. 그해 10월에는 기숙사 신관 착공이 있었는데, 당시의 기숙사는 지금의 구관 기숙사 뿐이었고 수용인원도 500명에 불과해 전교생의 10%도 소화해내지 못하는 심각한 수준이었다. 지방학생이 많은 아주대의 특성상 진작에 서둘렀어야 할 일이었다.
90년 들어서는 의학관을 착공한다. 88년 의대설립 후 조직된 총장직속의 의과대학 및 동부속병원 건립추진위'(88년 9월 신설)의 주도하에서였다. 의학관이 지어질 당시 아주대는 강의실은 물론 교수 연구실마저 부족해 강의실을 막아서 연구실로 써야할 지경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불과 2년전에 설립된 입학정원 30명의 의과대학울 위해 10층 규모의 의학관을 짓겠다는 발표는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학생들은 물론 일부 교수들도 불만이 많았지만, 학교측은 의과대학의 특성을 들어 이를 정당화하려 했다.
시체해부나 바이러스의 처리를 위해서는 외부와 차단된 독립된 건물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표면적인 이유였고, 대우는 이미 의과대학 설립때부터 종합병원 건립을 통한 2000년대 의료사업 진출을 꾀하고 있었다. 몇년 후 한국의 대표적 재벌인 현대와 삼성이 아주대 병원 개원을 전후해 각각 서울중앙병원(중축)과 삼성의료원을 개원한 사실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덕분에 아주대 의대는 불과 설립 5년만에 거대한 종합병원을 가지게 되었고 지금은 전국 최고수준 대열에 올라서게 되었다. 아주의대의 발전사례는 '한국에서 재벌이 못하는 일은 없다'라는 교훈을 다시금 일깨워 주는 또 하나의 사례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90년 3월에 착공한 의학관은 6공화국의 200만호 정책과 맞물려 시멘트를 비롯한 자재 파동으로 예정보다 늦은 91년 10월에야 완공된다. 그 때의 의학관은 4층까지만 부분 완공된 상태였고, 병원의 완공뒤에 다시 6개층이 더 올라가면서 공사가 끝나게 되었다. C급 사건이 일어난 것은 의학관이 완공될 때 쯤이었다. 그러니 학생들의 불만은 더욱 커질 수 밖에 없었다. 더욱이 당시 의학관은 관리상의 이유로 폐쇄되어 있었고, 일부 방문자를 통해 알려진 의학관의 우수한 시설은 모두를 당혹스럽게 하였다.
빈익빈 부익부라고나 할까...... 단적인 예로 우스운 이야기지만 당시 아주대의 모든 화장실에는 지금은 보기 힘든 시커먼 재생 화장지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유독 의학관만이 눈부시게 하얀 화장지를 쓰고 있었다. 식당 또한 의학관은 별도로 있었고, 의과 대학내 소학회를 위한 동아리방과 도서관까지 별도로 갖추고 있었으니, 아무리 의학관이 필요해서 지었다고는 하나 이건 특혜에 가깝다고 인식이 된 것이다. 아주공대의 시절은 가고 아주의대의 전성기가 온 것이다. 아예 학생들은 의대를 다른 학교처럼 취급하기도 했다.
< 제2이공관의 건립계획 >
학교측에서도 더 이상 이대로는 안된다는 인식을 당시에 하고 있었다. 그래서 제2이공관의 건립계획을수립했고 그 계획은 91년 8월에 이사회의 승인을 받았다. 규모는 연 4천평이었고 91년 말까지 설계를 완료하고 92년에 시공하여 93년부터 사용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건축위원회'가 생겼으나 별다른 활동은 없었다. 서두를 이유가 크게 없었던 것이다. 당시 학생회 측의 마스터 플랜 공개 요구에 학교측은 아무런 구체적인 계획이 없으니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임시 방편으로 공간활용을 바란다는 조금은 황당한(?) 답변을 하는 상황이었다. 그 와중에 불어닥친 C급 태풍......
공간문제를 소홀히 하던 학교측은학생들의 연일되는 시위에 당황했고 결국 '교수,학생 토론회'라는 것을 실시하여 학교측의 입장을 밝히고, 제2이공관의 조속한 건립을 확실히 약속한 것이다.
< 제2이공관에 거는 기대 >
서울건축이 아주대 설계를 담당한 이후 아주대 캠퍼스는 많은 학생들로부터 불평을 받아왔는데, 그것은 건물의 획일적인 외관 때문이었다. 지금이야 그나마, 약간은 모양이나 색깔이 다른 건물이 여러 동 있지만, 당시에는 서울건축 작품이라야 도서관, 인문관, 본관밖에 없었고 이들이 판에 박은 듯 똑같은 벽돌건물이었기 때문에 비난은 클 수 밖에 없었다. 또한 아주대 캠퍼스에 담긴 미학을 제대로 이해할 만한 건축지식을 가진 사람도 거의 없었다. 당시의 분위기를 보여주는 몇가지 예를 학보에서 찾아보자.
" .....이러한 원칙을 아주 우습게 만든 발상이 이 아늑한 캠퍼스에서 여실히 감지되고 있다. 근래에 완공된 기숙사, 본관건물, 그리고 도서관과 인문관이 그 문제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데 마치 비웃는 것처럼 똑같고 우리에게 무개성을 강조하는 것처럼 하나같다. 누가 왜, 무엇 때문에 저렇게 몇 십여년을 함께 할 대학건물에 똑같은 제복을 입혀 놨을까? 그는 누구인가? 그리고 그때 이의를 제기한 사람도, 단체도 없었단 말인가하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훗날 똑똑한 후배들이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떻게 저리 됐을까? 봐라! 비라도 오는 날이면 꼭 청송감호소 같지 않은가'라고 말이다......중략......도대체 학교의 주인은 누구인가? 여하튼 주인이 자기 집 짓는데 성의가 없었던 것 같다......중략.....어찌하였든 새로이 짓는 의대와 병원 건물의 신축은 전체적인 조감에 있어서 기존의 불균형을 해소하는 방향이 되어야 할 것이며 학생에게 학사행정의 참여없는 대학의 발전이란..."
(의학관 공사가 진행될 즈음의 학생투고기사, 아주대학보)
비슷한 또 하나의 예를 보자
"제목: 상징성 없는 획일적 모습 극복 필요 얼마전 '제2이공관 신축과정'이란 말을 이공관 벽보를 통해서 학보를 통해서 보게 되었다. ...중략.....강의실 부족 문제가 공대에만 한정된 문제는 아니지만 가장 급하고 가장 심각한 것이 공대라고 생각한다. .....중략...... 기존의 다른 건물들처럼 아무 상징성도 없고 획일적인 모양을 떠나서 아주대학교의 상징을 담고 있는 공대의 상징이 될 수 있는 건물이어야 할 것이다......" (당시 학생투고기사, 아주대학보)
이렇듯 제2이공관에 거는 학생들의 기대는 자뭇 큰 것이었다. 학생들만이 아니라 학교측도 나름대로 큰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특히, 새건물의 설계에는 교수들의 의견도 많이 받아들이려 했던 것 같다.
다시 이야기를 '교수학생 토론회'로 옮겨보면......
당시 교수,학생 토론회에 나온 한 교직원은 이미 건물설계가 진행 중임을 밝혔고, 새로 지어질 건물에 대해서도 간략하게 설명하였다. 제2이공관은 약 4,000평 규모로 짓되 아주대를 상징할 수 있는 건물로 하고 가능하다면 고층으로 하여 멀리에서도 보이게끔 한다는 것이었다. 놀랍게도 그 교직원은 제2이공관의 도면까지 가지고 나왔다. 많은 이들의 관심이 집중된 가운데 도면이 펼쳐졌다. 그 순간, 곳곳에서 한숨소리인지 야유인지 모를 소리들이 나왔다. 교직원의 설명과는 전혀 다른 건물이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 도면은 투시도였다. 언뜻 보기에 인문관 2개가 나란히 서있는 형태였고 두 건물 사이에는 브릿지가 놓여 있었다. 어찌된 일인가, 아주대를 상징한다더니......
< 인문관이 제2이공관이 된 전모 >
물론 학교 측에서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서울건축에 아주대를 상징할 만한 건물 설계를 의뢰했다. 또한 고층으로 해주길 바랬다. 그러나, 서울건축의 의견은 달랐다. 고층을 거부한 것이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우선은 아주대의 대부분 건물들이 저층인데다 수평적인 외관을 가지고 있으므로 고층건물을 세운다면, 그 균형이 파괴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한 고층은 사용에도 불편하고 공사가 어려워 그만큼 경제적이지를 못하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서울건축의 디자인 특성에 있지 않나 싶다. 서울건축은 아주대 설계에 IIT를 많은 부분에서 참조하고 있다. 사실 당시 도면의 건물모습은 IIT의 공학관과 매우 유사한 형태였다. 더욱이 서울건축은 모더니즘의 미학을 따르고 있으므로 건축의 상징성과는 거리가 멀다. 수용 할래야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요구사항이다. 건물에 상징적 의미를 부여한다고 해도 그것은 극히 제한적이다. 이런 연유로 서울건축은 인문관과 유사한 제2이공관을 설계한 것이다. 덧붙여 말하면(나중에 언급하겠지만) 서울건축이 본관이나 도서관, 단과대학을 가지리 않고 모두 비슷한 형태의 건물을 디자인한 데에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그들은 MIES로부터 물려받은 '보편적 공간'(UNIVERSAL SPACE)이라 부르는 독특한 디자인 철학(?)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2이공관을 인문관과 비슷한 형태로 만들어 놓고도 전혀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다. 설계를 못해서가 아니라 일부러 계속 비슷한 건물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대우학원의 거부>
이런 서울건축의 태도가 대우학원으로서는 불만이었다. 더이상 네모난 빨간색 벽돌건물을 세우는 것은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른 학교처럼 번쩍번쩍하고 화려한 높디 높은 건물을 세워 학교의 위세를 드높였으면.......이것이 대우학원의 바램이었다.
그래서 서울건축이 가져온 도면을 되돌려 보냈다. 재설계를 하도록 한 것이다. 그 때 C급 사건이 생겼고 교직원이 토론회 자리에서 공개한 것은 처음에 가져온 도면이었다.
만약 서울건축과 대우학원이 같은 대우소속이 아니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서울건축의 설계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다른 설계사무소에 맡기면 그만이다. 아니면, 설계경기를 이용하는 방법도 있다. 설계경기란 여러 설계사무소가 각각의 아이디어를 가지고 설계안을 제시하면, 심사를 통해 가장 우수한 안을 택해 그 사무소에 설계를 맡기는 방식을 말한다. 예를 들면 건대 상허기념 도서관이 그런 식으로 지어진 건물이고 작년의 국립중앙박물관 설계경기는 국제적인 대규모 행사이다. 그러나, 같은 대우가족으로서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대우학원은 거부를 하기는 했으나, 마음이 편하지가 않고, 서울건축으로서는 자신들의 설계개념이 먹혀들어가지를 않으니 답답한 노릇이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제2이공관은 재설계에 들어갔다.
<제2이공관의 경쟁상대는 의학관>
의학관이 상당한 시설과 매력있는 공간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누구나가 알고 있다. C급 사건 당시 이미 4층까지 1차 완공되어 있던 의학관, 모두의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의학관은 외관도 이전의 건물과 조금 달랐지만, 무엇보다도 신선했던 것은 내부였다.(당시엔 건물이 몇개 없었음을 상기!) 까만 색 유리로 된 1층 현관문을 들어서면, 큰 홀이 나오는데 조금 더 발을 들여놓으면, 작은 탄성이 나온다. 그 홀은 4층까지 뻥 뚫려있는 것이다. 위로는 빛이 쏟아지고, 바닥에는 태양을 형상화한 청동부조가 새겨있고, 벽에는 갖가지 현대회화가......뒤를 돌아 강의실을 들어서면, 난생 처음보는 계단식 강의실, 천장에는 대형 TV가 달려있고 의자는 회전하면서 열리는 하이펙 의자에 책상은 묵직한 원목판이......게다가 스위치를 누르면 전동 스크린에 전동 커텐까지, .영사기가 매달려 있음은 말할 것도 없고, 화장실을 들어서니 은은한 조명에 변기 옆에는 눈부신 백색 화장지까지...... 그야말로 의학관은 아주대 내 최고의 건물이었다. 이제 도서관 쯤은 한물간 동태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 건물이 10층까지 완공된다면, 그 모습은 얼마나 장대할 것인가? 모두는 의학관을 우러러 보았다. 일종의 경외심과 함께, 한편으로는 시기와 질투로...... 우리도 저런 건물을 가졌으면.....
실상 의학관은 서울건축의 작품으로는 꽤 수준작에 속한다. 가운데 실내 중정을 두고 천창을 놓은 수법은 당시 아주대 내에는 처음 선보이는 것이었지만, 서울건축은 그 이전에 육사도서관을 설계하면서, 이런 스타일의 건물을 만들어 냈었다. 특히 육사 도서관은 당시에 건축상을 수여하기도 한 최고 수준급의 건물이다. 의학관은 육사도서관의 공간개념이 적용된 것이다. 게다가 의학관은 단독 건물이 아니라 부속병원과 짝을 이루는 건물이기 때문에 디자인에 남다른 심혈을 기울인 작품이다. 나중에 알게된 사실이지만, 의학관과 부속병원의 공간구성 수법은 같은 맥락이다.
이렇게 경외스러운 의학관이 서있는데, 공대를 상징하는 건물은 인문관 2동을 연결해 만들어 놓았으니, 그 실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으리라. 그래서 대우학원은 제2이공관의 경쟁상대를 의학관으로 삼았다. 서울건축에는 재설계를 맡겼으니, 1차안은 파기된 것이고, 이제 남은 것은 자신과의 경쟁뿐이다. 대우학원과 공대교수들의 굳건한 의지였다.
< 비뚤어진 경쟁의식 >
그러나 이런 기이한 경쟁의식은 결국 기이한 결과를 낳고야 만다. 모든 설계의 시작단계에서는 건물이 들어설 부지가 중요한 검토대상이 된다. 부지의 모양과 특성에 따라 들어설 디자인 개념이 결정되고 그에 맞는 형태가 만들어진다.
의학관은 부지가 비교적 평탄하고 널찍하다. 이에 비해 제2이공관(이하 신이공관)은 부지가 산이다. 그렇게 성격이 판이하게 다른 부지에 똑같은 형상의 건물을 세운다는 발상은 그야말로 무지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최고의 식자층이라는 교수님들과 교직원들의 의식도 건축에 있어서만큼은 후진국 수준을 밑도는 것이었다.
건물을 웅장하게 지어 공대의 위상을 과시하겠다는 것도 지난 시절 독재정권이 자신의 위대함은 일련을 대규모 건축사업으로 표현하려 했던 권위주의적 발상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다. 웅장하고 압도적인 건물은 역사를 통해보면, 대개는 독재국가의 공공건물에서 많이 보이고, 특히 사회주의국가 중에서도 북한이 그 증세가 가히 심각한 수준이다. 평양을 보면 언제나 우리보다 큰 체육관, 큰 광장, 큰 의사당, 큰 전시관을 가지고 있지만, 그들의 생활수준은 우리와는 비교가 불가능한 밑바닥 수준이다. 오히려 문화가 앞선 선진국의 건물들이 더욱 민주적이다. 규모가 큰 건물을 짓는다 하더라도 위압감을 없애고 시민들의 접근이 쉽고 시민들에게 친근하게 디자인하고 있다.
멀쩡한 평지를 포기하고 부지를 산 위로 정한 것도 이해할 수 없는 처사이다. 동관과 서관 뒤쪽으로 공사가 용이한 평지를 제껴 두고 산위로 정한 것이 서울건축의 발상인지, 학교측의 발상인지는 알 수 없으나, 잘못임은 분명하다. 추측건대, 아마도 학교측의 발상일 가능성이 크다. 상식적으로 건축을 하는 사람이라면, 설계도 힘들고, 공사도 힘든 산을 부지로 택할 이유가 없다. 건물을 1m라도 높이고 싶었던 학교측의 생각이 아니었을까...
교직원의 말에 의하면, 신이공관은 수원시내 어디에서도 보이도록 고층으로 지어 학교를 홍보하겠다고 했다.(세상에 수원시내에서 아주대 모르는 사람도 있나?) 그러기 위해서는 건물이 지대가 높은 곳에 위치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이건 억측일까?
어쨌든 신이공관은 산위에 지어지게 된다. 그것도 10층이라는 고층으로.
저번에도 이야기한 것처럼 서울건축과 대우학원은 서로 의사소통이 되지를 않았다. 삐까번쩍하고 멋있는 상징적 건물을 원한 대우학원과 MIES(미스)의 미학을 계속 고수하는 서울건축의 자존심 대결! 겉으로 보기에는 대우학원의 승리였다. 서울건축은 학교측의 요구를 대부분 수용했다. 그러나, 그 수용이란 별로 내키지 않는 것이고, 설계에 대한 애착은 이미 물 건너 간 뒤였다. 그저 빨리빨리 설계해서 도면이나 현장에 넘겨야지.....라는 생각 뿐이었다. 결과는 서울건축이나 대우학원 모두에게 불행만을 안겨주었다. 최악의 건축 탄생이라는 지독한 불행을.........
<실패한 미학 - 신이공관!>
애초에 의학관을 모델로 한 신이공관 설계는 까치가 황새 쫓아가려다 가랭이 찢어진 꼴 밖에 안됐다. 하나씩 그 전모를 살펴보자. 우선 외관을 살펴보면, 마치 도토리묵을 툭툭 잘라놓은 듯 한, 의자를 닮기도 했고, 시멘트 마감에 칠도 안한 것 같은 그 칙칙한 회색은 또 뭔지...... 앞뒷면은 온통 줄창문에 옆면은 창문이 되는대로 뻥~뻥~ 앞은 1층인데, 뒤는 4층...... 언덕에 걸쳐놓은 공포의 나무계단, 외관에서는 어디하나 아름다운 구석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다. 보다 세밀하게 짚어보자.
1. 형태
신이공관과 의학관, 병원은 모두 비슷한 형상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 느낌은 모두 다르다. 의학관은 형태가 비교적 경쾌하고 세련된 느낌을 준다. 병원은 저층부가 커서 안정감있는 형태속에 점잖은 아저씨의 분위기다. 그러나, 신이공관은 둔탁하고 무지막지하다. 그도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의학관은 건물의 1층이 약간 홀쭉하게 들어가 있고, 중간이 부풀었다가, 다시 고층에서는 홀쭉해지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변화가 있다. 저층부의 경우 자세히 보면 사뿐한 느낌마저 준다. 병원의 경우는 저층이 매우 크고 석재마감으로 육중한데다, 고층부가 안정감있게 놓여있어 이 또한 보기 좋은 형상이다.(옆모습이 빈약하기는 하지만.....)
이들에 비해 신이공관은 1층부터 10층까지 전혀 변화가 없다. 그냥 쭈욱 올라가있다. 아주 밋밋하게 마치 두부를 잘라놓은 것처럼...... 이 얼마나 단조로운 형상인가! 똑같은 사각건물이라 할지라도 어떻게 변화를 주느냐에 따라 느낌은 전혀 달라진다. 이들 세 건물이 좋은 사례가 되고 있다. 한마디로 의학관과 병원은 외관을 볼 때 설계다운 설계를 한것이고, 신이공관의 경우는 한마디로 아무 생각없이 설계를 한 것이다. 그저 선이 그려지는 대로 설계를 했다고나 할까?
그 하나의 증거는 설계과정에서 드러난다. 이건 필자가 서울건축 실습 중 직접 보았던 일인데, 서울건축에서는 의학관과 병원을 설계할 때는 모형을 만들어가며 설계를 했다. 하지만, 신이공관은 모형다운 모형없이 설계가 됐다. 의학관과 병원은 전체모형은 물론 부분적인 디테일 모형까지 여러개를 만들어 보며, 이것저것 모양을 다듬으면서 디자인을 한 것이다. 반면, 이공관은 이렇다할 모형 제작없이 도면상으로 모양을 잡아나갔다. 설계단계에서는 도면의 2차원적 한계상 여러차례의 3차원 모형제작이 반드시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러니 완공 후 디자인의 질은 차이를 지닐 수 밖에 없다. 형태적으로 신이공관은 촌스러움과
우악스러움, 무지막지함을 벗어나지 못한다.
2.창문의 형태
서울건축에서 가장 많은 신경을 쓰는 부분 중 하나가 창문이다. 완벽한 비례와 균형에 도전하기 위해서는 창문을 아주 잘 만들어서 배치하여야 한다.(인문관과 도서관의 창문 사례를 상기)
그런데, 도대체 신이공관의 창문이란 집장사의 창문과 다를 것이 무언지...... 전면과 배면의 창문이야 평범한 서울건축 스타일이니 그런대로 봐줄 수 있겠다. 문제는 옆면에 나있는 창문들이다. 보라! 측면(동쪽과 서쪽)에는 그야말로 창문이 놓여진게 아니라 뻥!뻥! 뚫려있다. 창문이 뚫린 위치도 입면에서 전혀 균형이 맞추어지지 않았고 비례상 적절한 위치도 아니다.(입면 자체도 비례와는 거리가 멀지만) 그저 기능상 필요한 곳에다 뚫어놓았다. 하나는 복도에 채광을 위해서, 또 하나는 계단실의 채광을 위해서....뭐 이런 식으로 창문을 놓았다. 더욱 놀라운 것은 서울건축이 그토록 경멸해 마지않는 두짝짜리 여닫이 창을...... 이정도면 서울건축이 신이공관의 외관 디자인을 할 때 어느 정도의 열정을 가지고 있었는지...가히 짐작할 만하다.
3.색채
신이공관의 색채는 이상하다. 페인트 같지도 않은 것이 돌 같지도 않은 것이 회색빛을...... 자세히 살펴보니 돌 같다. 그러나, 더 자세히 살펴보면 돌이 아니다. 돌을 위장한 가짜 돌이다.
원래 신이공관의 색채는 붉은 색이었다. 붉은 벽돌모양이 나는 붉은 색 타일을 붙이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시공중에 그 계획은 바뀐다. 병원을 따라하기로 한것이다. 당시에는 병원도 마찬가지로 공사중이었고, 병원은 저층부는 진짜 돌을 붙이고 고층부에는 가짜 석재 마감을 하기로 했었다. 의대가 경쟁상대이니만큼 의대보다 더 좋은 병원을 경쟁상대로 또한 삼았으리라.(아니면, 경제적인 이유일 수도 있다) 어쨌든 신이공관에는 1층부터 10층까지 온통 돌가루를 뿌려댔다. 그런데 문제는 건물에 붙은 돌가루가 돌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점!!! 완공 후 보니 돌은 커녕 시공 후에 페인트도 칠하지 않은 시멘트 색깔이 났다. 완벽한 시멘트 색깔이. 아무리 벽돌이 싫었다지만, 시멘트 색깔이라니.....
4. 위치(배치)상의 문제
무엇보다도 신이공관이 가장 실패한 부분은 그 위치에 있다. 도대체 왜? 무엇때문에? 그 거대하고 무지막지한 흉물을 산위에다 올려 놓았단 말인가? 도대체 왜?
신이공관은 멀리서 보면 영락없이 산위에 놓여진 거대한 의자모습이다.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와도 같은 이 엘리스의 괴물은 아주대의 경관을 모조리 파괴해 버렸다. 아주 엉망으로. 건물은 혼자서만 잘나서는 안되며 항상 주변 환경과 어울릴 줄 알아야 한다. 요란하게 떠들기보다는 내가 있음으로 해서 이 거리와 이 전경이 더욱 아름답고 더욱 거룩해질 수 있도록 해야하는 겸손을 가져야 한다. 그 속에서만이 건축은 더욱 아름답고 영원토록 가치를 지닐 수 있다. 그러나, 보라! 신이공관은 거만하게도 산위에서 버티고 서있다. 온 아주대 캠퍼스를 호령하듯 내려다보며 그 무지막지한 모습으로......
신이공관의 등장과 함께 의학관과 병원을 제외한 아주대의 모든 건물은 초라하고 왜소하게 되버렸다. 특히,겸손이 아름다웠던 인문관은 우악스러운 신이공관의 위세에 짓눌려 애처로운 모습으로 전락해버렸고, 이공관 또한 아주 우스운 꼴이 되버렸다. 아주대의 모든 건물은 의학관 쪽을 빼고는 납작하고 긴 수평적인 건물들이다. 멀리서 보면 야트막한 산등성이와 어우러져 이리저리 숨었다 나왔다를 반복하고 있다. 그런 조용한 마을의 산등성이에 아름다운 소나무를 모조리 갉아먹으며 엉뚱한 괴물이 끼어든 것이다. 10층의 괴물이. 이것이 그토록 바라마지 않던 상징성인가. 약한 이를 짓누르는 위대한 공대의 상징성?
신이공관은 외관을 볼 때 미학적으로 실패작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신이공관이 모든 부문에서 다 실패한 것은 아니다. 우리가 지금까지는 알지 못했던 새로운 놀라움이 숨어있는 것이다.
<포스코 센타에서 생긴 일>
지난 95년 가을에 아주대 건축학과에서는 포스코 센타를 견학한 적이 있었다. 포스코센타는 역삼동 무역센타 인근에 세워진 포항제철 사옥이다. 95년에 준공된 이 건물은 설계에서부터 시공까지 순수한 국내 기술로 완성됐으며, 특히 건물의 첨단화를 지향한 인텔리젼트 빌딩으로서 소위 '하이테크 건축'의 전형이다. 포스코 센타의 시설이 국내 최고임은 말할 것도 없다.
이렇게 유명한 건물이기에 기성 건축가들은 물론 전국 대학의 모든 건축학도에게 포스코 센타는 한번쯤은 꼭 가봐야 할 성지로 떠오르고 있다. 아주대 건축학과에서는 설계자인 인하대의 '원정수'교수를 직접 초청해 강연회를 개최하기도 했고, 얼마 후 직접 방문길에도 오르게 되었다.
예정된 날짜가 되자 교수님과 함께 포스코 센타를 방문하게 된 아주대생들은 호기심과 설레임으로 속속 약속장소로 모여들었다. 시간이 되자 포스코 센타 관련직원과 세련된 한 여자 안내원이 나타났다. 간단한 인사말과 함께 건물소개가 이어졌다. 안내원은 포스코 센타가 얼마나 위대하고 훌륭한 건물인지를 입에 침이 마르도록 설명했다. 예상대로 소개의 중점은 포스코 센타의 첨단시설에 관한 것이었다. 규모와 공사비의 어마어마함에 우리는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본격적으로 건물안내가 시작되었다. 안내원이 자랑스럽게 우리들에게 보여준 최초의 첨단시설은 스크린이었다. 안내원의 말로는 이 건물은 스크린이 중요한 방마다 설치되어 있어, 자동으로 움직인다는 것이었다. 안내원은 스위치를 눌렀다. 기잉~ 하는 소리와 함께 하얀색 스크린이 내려왔다. 우리는 무덤덤했다. 저건 신이공관에도 있는건데....... 첨단이라더니 진짜 첨단은 언제 나오나? 스크린도 그나마 내려오다 고장으로 멈췄다. 순간 당황한 안내원은 재빨리 다른 무기를 내놓았다. 벽속에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다. 벽을 열자 대형 TV가 나왔다. '우리학교 TV보다 좀 크군..... ' 당시 우리의 반응
이었다.
또 하나의 첨단시설인 커텐에 관해서도 설명했다. 포스코 센타에서는 롤 브라인드라는 방식의 커텐을 쓰는데, 쉽게 말하면 옆으로 여닫는 커텐이 아니라 창문위에 커텐이 둥글게 말려있다가 필요시에 풀리면서 내려와 햇빛을 차단하는 것이다. 창문에 광센서가 부착되어 있어 햇빛의 양에 따라 커텐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한다고 했다. 광센서가 있다는 것을 제외하면 신이공관에 있는 전동커텐과 비슷한 것이었다. 신이공관이 아니라 의학관에도 이런 커텐은 많다. 센서 쯤이야 요새는 싸구려 선풍기에도 붙어있는 것이고, 신이공관에서는 오히려 전동방식이 불편해 그냥 손으로 커텐을 움직이고 있다. 우리는 처음의 방을 빠져나와 각 층으로 향하며 안내를 받았다. 안내원은 견학생들의 무반응을 이상하게 여겼는지, 다시금 열을 올리며 설명을 계속했다. 포스코 센타는 중앙식 냉난방 시스템을 도입하여 각종 냉난방은 물론 습도도 조절되며, 센서에 의해 작동되고, 조명도 제어하며....등등......우리는 계속 무덤덤 했다..... 아주대 병원에서 거의 다 볼 수 있는 것들이었고, 특이한 점이라야 이곳저곳에 센서를 좀 많이 쓴다는 것과 바닥에 워크스테이션을 위한 지원설비를 갖췄다는 것 등이었다. 지하주차장에서 지상으로 올라오는 엘리베이터가 유리로 만들어져 투명한 것도 특이했다. 그러나 듣던 소문과는 달리 그렇게 엄청(!)나지는 않았다.
안내원은 계속해서 반응이 썰렁하자, 히든 카드를 내놓았다. 일반 방문객에는 공개하지 않는 중앙제어실(이름이 확실치 않음)을 보여주겠다는 것이었다. 포스코센타는 첨단 시설로 가득차 있고 모든 것을 컴퓨터로 통제한다고 했다. 기대가 됐다. 우리는 직원들이 일하고 있는 제어실로 들어갔다. 벽에는 엘리베이터가 움직이는 모습이 보이고, 여러 대의 CC-TV가 계속 화면을 바꾸고 있었고, 주차장 상황 등등 모든 정보가 벽면 가득했다. 컴퓨터도 여러대 놓여 있었다. 아주대 병원에 있는 것과 매우 흡사했다. 오히려 포스
코센타가 좀 작은 듯 하기도 했다.
모든 일정이 끝나고 우리는 센타 내의 강당으로 향했다. 가는 도중 안내원이 실망한 표정으로 진담반 농담반으로 말했다.
"아주대생들은 좀 이상해요? 다른 학교 학생들은 안내를 해주면 많이들 놀라는데...... 아까 교수님이 그러시는데 여기 있는게 아주대에도 다 있다면서요? 그래서 재미가 없나?"
<<고층화 시대의 선구자,의학관>>
부제 : 회색주의 고층화 시대의 선구자, 의학관
의과대학은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다. 88년에 첫 신입생을 받기 시작했으니, 올해로서 8년 째가 되는 셈이다. 그러나, 그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아주의대는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해왔고, 지금은 국내 최고의 대열에 서있다고 평가받는다. 심지어는 아주대의 모태가 된 공대보다, 의대가 더 높은 사회적 인지도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여담이지만,96학년도 신입생 설문조사를 통하면, 아주대하면 떠오르는 첫번째 이미지가 '종합병원'이라고 한다. 그 다음이 '대우'이다)
의과대학은 아주대 역사의 여러 페이지를 장식할만큼 놀랄만한 발전을 계속하고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이다. 그런데, 건축의 입장에서 의대를 평가하고자 한다면 어떤 비평이 나올까? 자뭇 궁금해진다.
<본격적인 고층화 시대를 주도한 의학관>
불과 10년전만 해도 아주대는 지금의 모습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건물은 주로 저층이었고,흰색과 붉은색 건물이 주종을 이루었다. 아주대를 방문해 본 사람들의 한결같은 인상은 학교가 아담하고 깨끗하다는 것이었다. 원천로에서는 학교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정도로 저층위주였다. 지금도 학교는 그리 큰 편에 속하지는 않으나, 적어도 아담하다는 이미지는 사라진 듯 하다. 90년대 들어 거대한 고층건물이 많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의학관과 병원, 신이공관이 그렇다. 이들 건물이 아주대에 들어선 이후로 학교의 이미지는 크게 달라졌다. 이 세 고층건물이 학교 이미지에 미치는 영향은 지대하다. 건축사적으로도 고층화 시대를 연 이들 건물의 출현은 나름대로의 평가를 받아야 한다. 그런데 서로 형제처럼 닮아있는 세 건물중 가장 먼저 지어진 건물은 어느 것일까? 이에 따라 세건물의 평가는 차이를 갖게 될 것이다.
역사를
더듬어 보면,아주대 최초의 고층건물은 의학관이다. 그런데, 실상은 먼저 고층화 시대를 연 것은 의학관이 아니라, 신이공관과 병원이다. 계획상(도면상)으로 의학관이 최초란 이야기다. 의학관은 88년 설립 때부터 독립된 건물의 건설을 추진했고, C급 소동을 불과 몇달 앞둔 91년에 첫삽을 떴다. 세 개의 고층건물 중 설계는 물론 착공이 제일 빨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초의 고층건물로서 모습을 보이지 못한 것은 병원 때문이었다. 의학관은 병원과 같이 설계되었기 때문에 설계가 미리 완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병원의 공사일정에 따라 2차에 나누어 공사가 진행되었다. 그래서 한동안 4층까지만 부분완공된 채 사용되다가, 병원 개원에 즈음하여,나머지 6개층의 추가공사가 행해졌다. 그 사이에 이미 신이공관은 완공을 본 것이다.
어쨌든 의학관은 시공일정상 가장 뒤늦게 완공되었지만,그건 그리 중요한게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의학관의 새로운 디자인 개념과 함께 아주대는 소위 '회색주의 시대'라 부를 수 있는 새로운 건축시대로 접어들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 '회색주의 시대'건축의 새로운 공간개념과 표준유형을 의학관이 제시했다는 점이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특히, 신이공관은 의학관을 기본모델로 해서 세워진 건물이다. 병원은 의학관의 공간개념이 극도록 확대된 것이다. 설계도중 계획이 무기한 연기된 자연관 또한 의학관을 기본모델로 한 것이며, 앞으로 지어질 고층건물들도 그런 추세를 따라갈 것이다. (이쯤 되면, 아주대의 미래모습은 상상 가능하다)
<의학관의 건축사적(建築史的) 위치>
의학관은 아주대 건축사에서 어느 정도의 위치에 서 있을까? 이쯤에서 아주대의 건축사를 간략하게 정리해 보는 것이 필요할 듯 하다. 아주대의 건축사를 시대적으로 상징할 수 있는 건물로는 구이공관, 도서관, 의학관을 들 수 있다. 이들 세 건물은 아주대 건축사의 세 시기를 대표하는 건물
들이다. 이들 건물은 추후 나타나게될 일정시기의 건축유형을 선도한 선구자적 작품들이다. 아주대의 시대구분을 통하여 건축사를 정리해보고, 의학관의 건축사적 위치를 알아보도록 하자.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하여 건물의 공통특징에 따라, 시대의 이름을 붙였다.(이 구분은 필자가 임의로 한 것임을 밝힙니다)
1) 백색주의 시대(70년대):
개교이후 유신학원에 의해 주도된 시기이다. 건물들이 모두 백색이라는 공통점을 갖는다. 이 시기의 건물로는 구이공관, 동·서관, 기숙사 구관, 학생회관, 학군단 등이 있다. 대부분이 모더니즘 양식을 따르고 있지만, 이공관의 경우 한국적 보수주의 및 권위주의 이미지가 복합되어 있다. 기숙사 구관과 학생회관의 경우는 모더니즘 건축임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주관이 많이 개입되어 있는 경우이다. 이 시기는 다분히 과시적이고 과장된 이미지를 가지던 때이다.
2) 적색주의 시대(80년대):
아주공대가 종합대로 승격되고, 대우재단이 본격적으로 건축에 개입을 하게되는 시기이다. 처음으로, 김종성 교수의 서울건축이 아주대 설계를 시작한 시기이기도 하다. 70년대가 유신학원의 백색건물 시대라면, 이 시기는 적색 벽돌치장 건물시대이다. 이 시기의 건물로는 인문관, 도서관, 본관 등이 있다. 이들 세 건물은 마치 쌍둥이인양 매우 흡사한 외관을 가지고 있다. 도서관의 경우 설비면에서 하이테크적 기법이 도입되기도 했다. 대체적으로 경쾌한 입면을 보이고, 극도의 단순미학을 추구한다는 특징을 지닌다. 미스(MIES)의 영향이 강하게 나타나는 때이다. 완벽한 서구적 모더니즘이 지배하던 시기이다.
3) 회색주의 시대(90년대 이후):
의학관의 건립과 함께, 본격적인 건
물의 고층화가 시작된 시기이다. 서울건축의 특징이었던 미스(MIES)풍의 벽돌건물이 회색빛의 타일 또는 석재마감건물로 변모하는 시기이다. 이전에 없던 내부중정을 이용한 고층건물이 아주대의 전형적인 공간형태로 떠올랐다. 나름대로 미스와는 차별성을 가지는 대형 건물들이 나타났다. 이 시기의 건물로는 의학관, 아주대 병원, 신이공관이 있다. 모두 회색이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4) 최근의 경향(90년대 중반이후):
회색주의 시대 이후로 에너지 연구소와 경영관이 준공되었다. 또한 기숙사 신관이 증축중이고, 체육관이 계획중에 있다. 이전과는 달리 통일된 스타일을 보이지 않고 다양한 스타일이 나타나고 있다.
에너지 연구소의 경우 처음으로 철골을 이용한 하이테크 건축이며, 같은 서울건축설계의 서울대 정밀기계연구소의 뒤를 잇는 건물이다.
경영관은 다시 적색주의 시대로 회귀한 듯하나 내부시설을 살펴볼 때 병원의 설계수법이 많이 차용됐음을 알 수 있다. 공간 구성수법 또한 이전의 건물과는 여러면에서 다르다. 최근 서울건축에서 많이 사용하는 공간구성법이다.
기숙사의 경우 과거를 다시한번 들추어내어 베껴먹는 파렴치하고 몰상식한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다. 기존의 기숙사 신관을 약간의 설계변경만을 거친 채 증축하고 있다. 학교측의 요구에 의한 것이라 하니 그 무지함과 몰상식함에는 두손을 번쩍 들 지경이다.
체육관의 경우, 아직은 구체적 형태가 나오지 않았으니 뭐라 말할 수는 없으나, 두가지의 경우로 예측가능하다. 첫째는, 서울건축이 80년대에 설계한 올림픽 역도 경기장과 같은 입방체형 체육관을 가정해 볼 수 있다. 현재, 서울건축에서 단국대 체육관을 새로 설계하고 있는데, 역도 경기장이 모델로 되고 있다한다. 둘째로는, 최근의 경향으로 서울건축의 변화된 모습을 기대해볼 수 있다. 특히, 아
주대처럼 체육관을 복합건물로 지을 경우는 그 가능성이 크다. 서울 양재동의 스포츠 센타는 서울건축 설계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부분에서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현상설계에서 낙선한 건국대 민중병원 설계안도 변화된 설계 스타일을 보여준다.
지금까지 아주대의 건축사를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대충 의학관이 건축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도 가늠이 되었을 것이다. 고층의 회색주의 시대를 연 선구자적 작품이라는 평가외에 의학관의 평가는 다양하게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러면 이제부터는 의학관의 건축적 특징에 관해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자.
의학관은 분명 이전의 적색주의 시대 건물과는 달랐다. 의학관은 아주대에 새로운 공간개념을 제시했다.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된 의학관을 들어가본 극히 일부의 학생들의 입을 통해 전해지기 시작한 의대의 모습은 가히 환상적이었다(지금은 좋은 건물이 많아져 그저 그렇지만.....) 시설도 시설이려니와 의학관에서의 새로운 공간체험은 방문객의 마음을 한순간에 사로잡은 것이다.
<의학관은 어떤 공간을 가지고 있는가>
의학관은 개성있는 내부공간을 가지고 있다. 저층부 가운데 있는 중정(몇개층을 관통해 뚫려있는 공간)이 그것이다. 중정이야 도서관에도 있지만 의학관의 중정은 이와는 좀 다른 차원이다. 의학관 이후 병원과 신이공관에도 쓰인 이 중정을 건축적으로 짚어보면 이렇다.(* 의학관을 안가보신 분은 신이공관을 연상하세요.)
이 중정은 밖에서는 전혀 예측이 불가능하다. 이 중정은 우리가 건물 입구에 이르러도 아무런 단서를 주지 않는다. 그러다가 현관문을 열고 몇걸음 들어서는 순간 우리는 하늘로부터 쏟아지는 찬란한 태양빛과 함께 자신도 모르게 위쪽을 쳐다보게 된다. 위는 아주 높이 개방되어있다. 4개층을 꿰뚫고 있는 중정의 최상부에는 강철형강이 지나가고 그 사이의 유리너머로 눈부신 태양이 보인다. 우리는 예상치 못한 공간이 나타남으로 인해 신선한 충격을 받게 되고 일종의 경외감마저 느끼게 된다. 이것이 중정이 노리는 공간효과다.
중정이 바로 나타나지 않고 현관을 들어선 후 잠시 좁고 어두운 공간이 지속되다가 갑자기 나타나는 것도 계획된 수법이다. 어둡고 좁은 곳에 있다가 밝고 넓은 공간을 만나게 되면 사람들은 그 공간을 실제보다 더욱 환하고 큰 공간으로 느끼게 된다. 중정은 이런 심리적 효과이외에 실용적 목적도 지니고 있다. 건물이 커지게 되면 중심부에는 필연적으로 창이 없고 환기가 불리한 사방이 막힌 공간이 생길 수 밖에 없는데 이를 중정이 해결하는 것이다. 채광과 환기의 목적을........
따라서 도서관이나 의학관, 신이공관을 중정을 두고 쓸모없는 공간이라느니 운운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만약 중정이 없었다면 각 건물들은 아주 형편없게 되었을 것이다.
*지나가는 말 : 중정의 천창(TOP LIGHT)에서 비가 새는 이유
사실 아주대 건물치고 비새지 않는 건물은 없다. 사람들은 대개 이를 간단하게 부실시공 때문이라고 단정짓지만 실상은 그렇지만은 않다. 필자는 건축설계전공이라 시공쪽은 자세히 아는 바가 없지만 적어도 건축하는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 비새는 문제를 시공자에게만 떠넘기는 것은 무리가 있다. 그리고 아주대 건물의 시공품질은 적어도 평균수준은 넘고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서울건축과 같이 MIES의 철학을 따르고 있는 극도의 단순미학을 추구하는 건물들은 정밀한 시공품질이 뒷받침되지 않는 이상 제대로 된 아름다움을 기대할 수는 없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아주대의 시공품질은 나쁘지 않은 것이다. (단, 신관 기숙사는 문제가 있다. 추후 기숙사 편에서 다룰 예정)
그렇다면 비가 새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특히, 비가 제일 많이 샌다는 천창은 무엇 때문인가? 이 또한 단정짓기 어려운 문제이나, 추측컨대 설계상에 문제가 있지않나 싶다.
흔히들 빗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고 알고 있다. 따라서 천창의 설계도 이런 상식하에서 설계가 되었다. 그러나, 비오는 날을 유심히 보면 비와 함께 바람도 부는 날이 있다. 비가 새는 날은 대개 이런날이다. 바람이 불자 비스듬한 천창 유리를 타고 내려가던 빗물이 위로 올라가는 것이다. 이런 연유로 빗물이 취약할 수 밖에 없는 틈새부분을 뚫고 들어가는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는 분명히 설계상의 문제다
설계상의 문제 또 하나! 방수방식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 방수에는 크게 3가지 방수방법이 있는데, 서울건축에서 택한 방수는 이론적으로는 가장 완벽한 아스팔트 방수법이다. 쉽게 말하면 지붕 전체에 우비를 입히듯 얇은 고무막을 씌우는 방식이다. 그러나 이 방식은 이론적으론 완벽하지만 실제로는 하자가 생길 수 밖에 없는 방법이기도 하다. 설계자가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나 싶은 문제이다.
< 의학관의 형태 >
의학관의 10층이라는 고층건물이다. 대학건물을 10층으로 세운다는 발상이 나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층의 건물이 섰다는 이야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는 말이다. 아마도 포화상태에 이른 학교부지 탓일른지도 모른다.
의학관은 어쨌든지간에 고층건물로 세워졌다.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것이지만, 그 형태를 생각해보자. 저층은 넓은데 고층은 좁은 이유는?
일단은 의학관이 모더니즘 계통의 건물이라는데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공간 배치를 하다보면 당연히 저층은 강의실이나 실험실이 들어서야 한다. 상식적으로 강의실이 고층에 있다는 것은 접근도 불리하고 무언가 석연치 않은 느낌은 준다. 따라서 저층은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강의실과 실험실을 주로 배치하였다. 그리고 채광과 환기, 동선(Access)을 위하여 중정을 두었다.
남은 것은 교수실(의사실)이다. 교수실이야 고층에 있어도 하등 문제될 것은 없다. 따라서 저층은 넓게 되고 고층은 아파트처럼 좁고 높게 올라가게 되었다. 공간의 용도에 바탕을 둔 명쾌하고 단순한 해결방법이다.
기능에 따라 공간을 배분하고 외형을 결정한 이런 공간구성수법은 이미 20세기 중반에 미국의 모더니즘 작가들(MIES의 후예)에 의해 탄생되었다. 저층이 넓고 고층이 좁고 넓은 이런 건물에서 저층부는 포티움(podium)이라 하고 고층부는 (tower)라 부른다. 한국에서는 60년대 초반 서울 조흥은행 본점이 최초였다. 당시 이 건물이 완공되자 한국의 건축가들은 흥분과 전율을 금치 못했다. 당시를 세계를 지배하던 모더니즘의 이상을 가장 잘 실현해낸 건물이 한국에도 섰다는 사실이 많은 건축가들을 흥분하게 했던 것이다.(당시 한국은 후진국이었음은 상기!)
오랜 뿌리를 두고 있는 고전적인 모더니즘 디자인 원리는 다시금 20세기 후반 아주대에서 나타났다. 의학관은 그 첫발이었을 뿐이고, 위대한 모더니
즘의 부활은 아주대 병원에서 찬란하게 꽃피우게 된다.
<<잘못된 만남>>
대우학원,서울건축,대우건설 - 그 불운의 삼자동맹
서울건축이 우리학교의 설계자라는 사실은 이제 누구나가 알게 되었다. 그러나 궁금한 점...왜 서울건축이 계속 하는가? 좋은 건물은 한둘이면 됐지 언제까지 아주대를 말아먹으려는가? 그리고 보는 눈에 따라서는 서울건축 건물이 그리 아름다운 것도 아니고 오히려 싫어하는 사람이 더 많지 않은가? 이제 붕어빵은 그만 만들었으면....
이것이 많은 아주인들의 생각일 것이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학교측도 학생들과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세상에..... 그렇다면...... 왜...... 무엇 때문에...... 대우학원은 계속해서 서울건축에 설계를 맡기는가? 도대체 왜......
<대우가족의 현실>
아주대를 유심히 살펴보면, 대우가 못만드는 제품은 빼고 모든 물건이 대우가 생산한 것이다. 대우 컴퓨터, 대우TV, 대우VTR, 대우 세탁기 등등... 몇년 전부터는 대우가 자판기를 생산하기 시작하자 학교의 자판기가 어느덧 하나둘 대우로 바뀌기 시작했다. 이상하게도 교수님들의 차들도 대우차가 많다. 건설현장은 어김없이 대우건설이다. 인터넷을 이용한 이번 입시때의 온라인 원서접수도 대우통신의 작품이다. 이러한 상황이니 아주대 설계도 대우가 할 것임은 자명하다. 그 대우의 설계사무소가 바로 '서울건축'인 것이다.
대우는 자신의 돈이 밖으로 나가기를 원하지 않는다. 만약 대우학원이 설계는 XX건축에 맡기고, 시공은 삼성건설에 맡긴다면, 이건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이다. 그렇지 않아도 삼성, 현대의 공룡싸움에 이리저리 힘든 상황인데 돈이 안으로 돌고 돌아 서로서로 돕고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이런 연유로 대우학원은 대우건설과 동맹을 체결하고 서울건축과도 의형제를 맺게 된 것이다. 즉, 아주대 캠퍼스를 놓고 삼자동맹(?)을 체결한 것이다.
<불운의 삼자동맹>
그러나 애초부터 대우학원은 서울건축이 어떤 사무소인지도 잘 몰랐고, 그저 같은 대우니까 일을 맡겼다. 대우건설도 그저 명함에 쓰인 글자가 비슷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공사를 시작했다.
처음엔 좋았다. 별 문제가 없는 것 같았다. 일은 80년을 넘어서 도서관이 완공된 이후로 생기기 시작한다. 도서관은 지을 때부터 모양이 좀 이상하다 싶더니 완공된 후 살펴보니 생전 처음보는 이상한 라면박스를 세워놓았다. 사용해보니 삐까번쩍하고 마음에 들기는 한데 성능좋은 기계덕에 유지비가 엄청났다. 그렇다고 기계를 멈추자니 산소부족으로 쓰러질 지경이다. 창문도 제대로 안열린다. 더욱이 인문관은 도서관처럼 인공환기건물이 아닌데도 똑같은 창문을 달아놓아 불편하기 그지 없다. 모조리 미국기준으로 만들어 놓았다. 두 건물이 똑같이 생긴 것도 그리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다. 또한 모양은 밋밋한데 설계비는 얼마이며(서울건축은 다른 사무소에 비해 설계비가 꽤 비싸다) 공사비는 왜그리 많이 드는가? 이 돈이면 건물 몇개는 더 지을 수 있을텐데...... 그래서 학교측은 기분이 떨떠름해진다. 서울건축의 설계 스타일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러나 어찌하랴~ 모두가 대우가족인 것을...... 몇년 후 본관을 새로 지으면서 대우학원은 강력한 요구를 한다.
좀 경제적으로 설계 해봐라! 창문 좀 바꿔라! 모양 좀 멋있게 해라! 등등....
(나중에 대우학원은 인문관과 도서관의 창문을 모조리 떼어내고 두짝자리 여닫이 창으로 바꾸는 만행(?)을 저지른다. 비례를 맞추기 위해 그토록 심혈을 기울였던 서울건축으로서는 자존심 상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끝내는 도서관마저도 내부를 바꾸어 버린다)
그러나...... 본디 서울건축도 자신들이 원해서 아주대 설계를 시작한 것은 아니다. 그저 한솥밥 먹는 사람들이니 시작했다. 하지만, 자신들의 명예를 걸고 최선을 다했다. 그런데 왜 이리 말이 많은가? 첨단으로 하라고 해서 최신설비 설치했더니 몇번 사용하지도 않고 보관만 하고 있고,창문은 난도질을 하고, 설계할 때마다 경제성만 요구한다. 마스터 플랜도 졸속행정으로 제대로 실현되지 않는다. 제2이공관의 초기설계는 완전히 무시되었다. 최근 들어서는 자연대와 체육관 설계를 하던 도중 총장이 바뀌자마자 취소가 되었다. 대신 기숙사 설계가 맡겨졌다. 경제적으로 지으라는 요구에 건축재료도 마음대로 쓸 수 없고 시간도 촉박해, 정교한 비례와 형태가 나오지를 않는다. (서울건축은 형태가 단순한 대신, 좋은 재료를 아낌없이 투자하고, 오랜 시간 치밀한 설계를 해서 정교함과 비례가 극에 달한 완벽에 가까운 절대미학을 추구한다. 그래서 설계비와 시공비가 모두 비싸다) 대우학원이 요구하는 건 도대체 수용하기가 어렵다. 도대체 설계자의 의도를 헤아려주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서울건축이 시키는대로 고분고분하는 자신들의 철학을 굽히는 그런 사람들은 아니며 그럴 필요도 없다. 어차피 설계는 우리가 하게 되어 있는데...... 오히려 대우학원이 비난의 표적이 된다. 건축의 '건'자도 모르는 사람들이 건축을 다 망치고 있다고...... 여전히 건물은 사각형으로 계속하여 올라간다. 미비한 재료와 부족한 설계에도 불구하고.....
한편 현장에서는 하자문제를 두고 이런저런 이야기가 들린다. 천장에서 물이 새자 저마다 말이 다른 것이다. 서울건축은 시공잘못이라 하고 대우건설은 설계잘못이라 하고..... 서로들 잘못이란다. 그래도 부담이 없다. 어차피 대우가족인데....... 덕분에 대우학원은 매년 지붕방수 공사를 꼬박꼬박 하고 있다.
이런 상황이니 건축이 제대로 풀릴리가 없다. 다행히도 설계사무소가 워낙에 기본 수준은 가지고 있어 그나마 건물 하나하나는 모양새를 갖추고 있고 의외로 수준작들도 있다. 그러나 불운의 삼자동맹은 결국 최악의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으니 그 대표적 예가 제2이공관이다.
<<민주광장과 자유광장의 차이>>
<인문관을 정리하며>
인문관에 대해서는 이것저것 말할 것이 좀 더 있지만, 그 이야기들은 나중에 나오는 건물들에서도 중복되는 것이므로 생략을 할까 한다. 단, 인문관 소극장에 대해서는 잠깐 언급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인문관 소극장은 외관이 볼만하다. 학생회쪽에서 본관으로 가는 길 중 소극장옆에 난 계단에서 바라보면, 예전에 언급한 기하학에 의존한 아름다움이란 것이 어떤 것인지를 잘 볼 수 있다. 부채꼴과 사각형이 만난 형상인 이 소극장은 밑에서부터 꼭대기까지 온통 벽돌벽으로 밋밋하게 쌓여있는데 이것이 소극장의 볼륨감을 잘 느끼게 해준다. 사실 화려하고 요란한, 삐까번쩍한 것에만 눈이 휘둥그레지는 요즈음 사람들에게는 잘 느껴지기 힘든 부분들이다. 아뭏튼 다시한번 감상을 해보시기를.....
<자유광장과 민주광장의 비교>
아주대에는 현재 공식적으로는 2개의 광장이 있다. 우리는 인문관 앞의 광장을 자유광장이라 부르고 이공관 앞의 광장은 민주광장이라 부른다. 이름의 기원이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 두 개의 광장은 아주대 캠퍼스를 형성하는 주요한 공간들이다.
원래 광장이라는 것은 서양건축에서 온 것인데 오밀조밀하게 도시를 중심으로 살아왔던 그들의 생활방식에서 나온 것이고 전통 한국 건축에서는 그 예를 찾아보기 힘들다. 서양에는 동네마다 조그마한 광장들이 있다. 그들은 집에서는 아주 사적인 일들, 가령 밥을 먹거나 잠자는 일 등만을 하고 하루의 대부분은 이웃 사람들과 함께 마을의 조그마한 광장에서 보내는데 이태리가 대표적이다. '시네마 천국'을 보면 동네사람들은 많은 시간을 동네의 광장에서 보내고 있고 주요한 사건들도 이 광장을 중심으로 일어난다.
아주대의 광장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광장이라고 보기에는 힘들다. 여하튼 이론적인 이야기들은 모두 접어두고 우선 민주광장을 살펴보면, 이 광장은 이름과는 달리 전혀 민주적이지를 않다. 잔디밭에 앉아본 사람들은 누구나가 느끼겠지만, 무언지 모르게 좀 어색하고 마음이 편하지가 않다. 이에 비해 자유광장은 그런 느낌이 거의 없다.
이 차이는 주변환경 때문이다. 자유광장은 일단 지대가 주변에 비해서 낮고 인문관과 도서관, 본관으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그곳에 서있는 사람은 주변으로부터 보호를 받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다. 주택에 비유한다면, 주변의 건물들은 각 방들에 해당하고 자유광장은 이들로 둘러싸인 거실 쯤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즉,자유광장은 외부이면서도 동시에 외부가 아닌 것이다.
그러나, 비슷한 상황이기는 하나 민주광장은 그런 느낌이 들지 않는다. 이공관이 정말 너무한다 싶을 정도로 엄청나게 커서 광장을 압박하고 있고 광장의 형상 또한 삼각형으로 되어 있어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삼각형은 각 모서리가 예각이기 때문에 그 안에 서있으면 공간이 흩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에너지 연구소도 광장을 에워싸기에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고, 본관 쪽으로는 건물없이 대신 게시판만이 서있을 뿐이다. 이 게시판만으로는 공간이 한정되기 힘들고 공간은 빠져나가게 되어 이쪽이 허~해진다. 도서관 또한 너무 멀다.
얼마전에 민주광장에는 선구자상이 세워졌는데 이것이 흩어지고 있는 공간을 구심적으로 잡아주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 효과는 극히 미약할 뿐더러 선구자상 자체가 워낙 우스운 형상이라 민주광장을 구제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선구자상을 자세히 살펴보면 만든 수법이 의학관 옆에 있는 '주먹을 쥐고 두 눈을 앞으로 째려보고 있는 반신상과 매우 비슷한데 작가가 동일한 사람이 아닌가 싶다. 의대 옆 조각상은 크기나 형상이 의학관과 비교적 잘 어울리고 있는데 선구자상은 규모가 너무 왜소하다. 가까이에서 보면 그리 작은 것은 아니나 이공관과 광장의 크기와 비교해 보면 있으나마나할 정도의 크기이다. 기단의 무미건조함은 말할 것도 없고 맥없이 아이스크림(횃불)을 들고가는 아저씨의 표정도 별 긴장감이 없다. 10년 가까이 끌고 온 상징물 논의의 결말이 겨우 이거라니...........
결국 사람들이 더 이용을 많이 하는 쪽은 자유광장이다. 민주광장은 그저 이공관을 돋보이게 할 수단일 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게시판을 따라 각자의 갈길로 부지런히 걷는 것 밖에는 할 수 없다.
<변형된 자유광장>
그런데 최근 자유광장은 일부가 변형되었다. 학교에서 광장 잔디밭 군데군데에 소나무를 비롯한 큰 나무들을 심은 것이다. 광장에 나무를 심다니........ 이 행위는 광장이 더 이상 광장이기를 포기하도록 한 것에 다름아니다. 광장은 사람들이 모일 수 있어야 한다. 한편에서는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다른 쪽에서는 연인들이 노래를 부르고, 강의가 끝난 학생들은 커피와 함께 햇빛을 쬐고, 어떤 이는 졸고 있고, 어떤 이는 책을 보고 있고...... 이런 다양한 행위들이 아무런 스스럼없이 일어나는 장소가 바로 광장이다. 사람과사람들이 부딪기는 삶의 다양한 행위들이 일어나는 곳...... 이 때문에 광장에는 사람들이 점점 더 모여들게 되고 이곳은 정말 사람사는 곳답게 되는 것이다. 94년인가? 93년만 해도 정말 봄이 되면, 많은 사람들이 따뜻한 햇빛을 찾아 자유광장 잔디밭에 동그랗게 이곳저곳 무리지어 앉아, 담소를 나누거나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느닷없이 나무를 곳곳에 무지막지하게 심어 놓았다. 앉을 자리는 나무들에게 모두 빼앗겨 버렸다. 이제 더이상 이곳은 광장이 아니며, 그렇다고 정원도아닌 그 무엇이 되어버린 것이다. 학교 측의 무지에 그저 감탄할 뿐이다.
<아주대를 개조하는 시설과>
아주대는 설계는 서울건축에서 하지만, 일단 완공이 된 후 유지관리는 학교에서 하는데 이를 담당하는 부서가 시설과이다. 시설과는 옥상방수공사나 도색작업, 조명시설 수선, 보도블럭 교체 등 건축과 관련된 모든 일들을 하고 있다. 우리학교는 건물은 많이 짓지 않지만 일단 지어놓은 건물은 비교적 유지관리를 잘하고 있는 편이다. (예전에 서울의 D대학을 가본적이 있는데 그곳은 거의 최악의 상태였다) 우리는 시설과 직원들의 노고에 충분히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런데 시설과는 근래들어 본의 아니게 학교를 조금씩 파괴하는 행위를 하고있다. 자유광장에 황당하게 나무를 심는다거나 흰색건물(이공관)을 우중충한 회색으로 만드는 등의........
<<아주대학교의 시설수준>>
실제로 아주대의 시설은 어디 내놓아도 자랑할만한 것들이 많다. 포스코센타에서의 일화도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좋은 시설을 많이 보고 그속에서 생활하다 보니 정말 우리가 생활하고 있는 공간이 어느정도인지를 가늠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타학교나 타시설물을 보게 되면 그것이 척도가 되어 우리자신을 새삼스레 알게된다.
신이공관은 외관은 비록 우습기 짝이 없지만 그 안에 담겨있는 시설만큼은 훌륭한 것이다. 우선 각 강의실마다 전동으로 움직이는 스크린이 포스코 센타처럼 내장되어 있다.(스크린을 자세히 살펴보면 국산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컴퓨터나 시청각 교재 이용을 위해 전원설비도 불편없이 설치되어 있고, 유리창도 방열효과가 좋은 이중유리이고 방음도 괜찮은 편이다. 바닥재나 천장재도 고급에 속한다. 일부 바닥재를 제외하고는 병원이
나 신이공관이나 대부분 같은 재료를 쓰고 있다. 각 강의실이나 실험실에 사용된 문들도 서울건축에서만 사용하는 육중한 철문들이다. 계단식 강의실도 훌륭하다.(사실 의학관이나 경영관에는 좀 떨어지지만)
특히, 신이공관 4층에 위치한 건축학과 설계실은 국내 최고 수준을 자랑한다. 포스코센타를 설계한 원정수 교수도 방문시 감탄했을 정도이니...... 4층에 위치한 3개의 설계실에는 각 방마다 시청각 교육시설이 완비되어 있다. 대형 TV가 있는 것은 물론이고, CD플레이어, 비디오, 오디오 등이 풀세트로 갖추어져 있고 마이크는 무선이다. 꼬리도 달리지 않은 완벽한 이 마이크는 손에 드는 방식과 옷에 꽂는 핀마이크식의 2종류가 있다. 한 제도실에서 특별강연이 있다면, 나머지 2개의 강의실에서도 TV를 통해 강연을 들을 수 있다. 오디오 스피커도 천장에 내장되어 있고, 소리 또한 훌륭하다.
설계에 필요한 제도판은 타학교의 경우 낡은 것들이 많고 제도판이 넉넉하지 않아 학년별로 돌아가며 사용하는데, 아주대의 경우
는 1인당 하나씩 돌아가고도 남는 숫자이고, 심지어는 부서진 제도판의 평행자로 칼싸움을 하거나 제도판을 칼판으로 사용할 정도이다. 이런 양상이 건축학과에만 국한된 것은 아닐 것이다. 신이공관의 모든 학과에서도 공통으로 경험하는 일이리라 추측되는데, 이렇게 풍요하고 쾌적한 학습환경이 마련되는 것은 일차적으로 훌륭하게 계획된 건축물이 존재하기에 가능한 것이다.
신이공관은 외관에 비해서는 내부공간이 괜찮은 편이다. 건물중앙에는 거대한 홀을 만들고 4층까지 개방했다. 천장에는 투명한 유리지붕을 씌어 자연광도 도입했다. 거대한 면적을 가진 건물에 중정을 두는 공간구성 수법은 유럽건축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지만, 실지로 MIES(미스)는 그리 선호하지 않은 수법이다. 그런데 아주대에는 이런 중정이 많이 보이는데, 이는 서울건축이 미스의 전통을 따르고 있으면서도 자신만의 공간개념을 가지고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만약 이런 공간이 없었다면 신이공관의 내부는 매우 답답하고 어두웠을 것이다.
<정리하며>
신이공관이 지어질 당시에는 병원도 함께 공사중이었고, 사실 신이공관의 건축계획에는 병원일에 간여하고 계시던 건축학과 J교수님의 숨은 노력이 곳곳에 베어있다. 자칫 잘못하면 소홀하기 쉬운 세세한 부분까지 검토작업이 이루어지고, 꼼꼼하게 시설이 갖추어진 것은 모두 이 교수님의 덕택이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학교측과 설계자와의 어려운 의사소통으로 미학적으로 실패한 신이공관은 결국 한 교수님의 노력으로 시설면에서는 성공적인 결과를 거둘 수 있었다. 물론 어려운 설계에 임했던 서울건축의 노력도 평가를 해야 할 것이다.
어쨌든 지루했던 신이공관에 대한 이야기도 이제는 마쳐야 할 것 같다. 마지막으로 덧붙인다면, 우리는 건축에 대한 인식의 차이와 건축에 대한 무지 또는 열정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신이공관을 통해 볼 수 있었다. 건축은 어느 특정 개인의 것이 아니며 우리 모두가 관심을 가져줄 때만이 성공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우리모두의 관심과 노력이 필요한 때이다.
아주대학교에는 알려지지 않은 몇가지 비밀들이 있다. 이제부터 그 비밀들을 하나 씩 파헤쳐 본다.
1. 왜 새로 지은 건물들은 가운데가 비어있는 사각형인가?
이에 대한 가장 일반적은 견해는 건물을 설계한 사람이 동일인인데 이 사람이 프랑스의 어느 유명 건축가의 양식을 너무 좋아해 그대로 본딴 것이라는 얘기다. 그러나 이는 허황된 얘기 사실 거기에는 정부가 연류된 비밀 프로젝트가 관련되어 있다. (계속 읽으면 알겠지만 우리 학교는 정부 특히 군부와 긴밀한 협조 체제를 구축하고 있다.) 전시에 우리 학교 건물은 두 가지 용도로 사용 된다. 우선 하나는 반듯 반듯한 구조에 임시 벽을 허물어 무기 공장으로 전환을 한다는 것이다. 천정이 높고 반듯하게 각이 진 학교 건물들은 공장으로 전용하기에 좋다. 그리고 둘째는 가운데 공간에 관한 것인데 거기에는 전시에 지대지 또는 지대공 미사일이 설치 되게 된다. 이렇게 하면 외부에서 보았을때 완전히 은폐가 되기 때문에 적에게 미사일의 위치를 노출 시키지 않고 공격을 감행할 수 있게 된다. (실지로 건물안에 은폐된 미사일은 인공 위성으로도 잡아내지 못한다. 때문에 대부분의 미사일 기지들은 지하에 설치되나 기지 자체가 추적 목표가 되지만 우리 학교 경우에는 일반 학교 건물이므로 의심을 덜 맏게 된다.)
2. 왜 학교는 갑자기 대형 전광판을 팔달관 위에 설치 하였는가?
듣기로는 전광판 설치에 1억이 넘는 돈이 들었다고 한다 학교는 무슨 이유로 그런 쓸데없는 일을 하는걸까 의심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대한 가장 유력한 견해는 바로 일종의 통신 장치라는 것이다. 비상시 그 옛날 봉화를 올리듯 전광판을 통해 멀리에 있는 작전팀 또는 부대에게 모오스 부호로 처리된 명령을 전달할 수 있는 시스템이라는 것이다. 알다시피 네온등은 빠르고 정확한 점멸이 가능하다 또한 멀리서도 식별이 가능하다 다시말해 위의 목적에 가장 적합하다는 것이다.
3. 매체를 통한 흥보 하지만 건물은 노출이 되지 않는다.
아시다시피 우리 학교는 드라마 촬영장으로 많이 사용 된다. 그 유명한 "종합 병원"에서부터 최근의 "세상끝까지"나 "보고 또 보고"까지... 그런데 이들 드라마를 잘 살펴보면 학교 건물들은 제대로 비추는 적이 거의 없음을 알 수 있다. 병원 건물을 제외하고는 전경이나 정지된 컷 등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었인가? 바로 학교 측과 방송국 모두 건물이 외부에 노출되는 것을 꺼리고 있다는 얘기다 왜 그러는 걸까 이유는 위에서 설명한 바 있다. 전시에 특수 목적으로 전용될 가능성을 외부에 알리지 않기 위해서인 것이다(병원은 예외 병원은 그 자체로도 특수 목적 건물이니까 숨길 이유가 없다)
4. 수시로 점멸하는 학교 가로등 그 정체는?
밤에 원천관 앞을 걷다 보면 가로등들이 수시로 점멸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학생들은 그 밑을 지나다가 갑자기 불이 꺼져 흠칫 놀라고는 한다. 도대체 왜 그런 것일까? 아마 대부분 고장이거나 절전을 위해서 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이름을 밝히지 않은 소식통에 의하면 이 또한 일종의 신호 체계라고 한다 하늘(고도 300피트 이상.)에서 우리 학교를 보게 되면 이 가로등들이 점멸을 하며 수시로 여러
가지의 도형들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이는 일종의 암호로서 최근에는 휴전선 근처의 날씨라거나 북한으로 들어가는 항공기 내역 등을 알려주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런 신호를 받는 사람들은? 물론 군과 정보 기관이다. 12시 넘어서 학교에 남아 있게 된다면 맑은 날을 골라 망원경으로 하늘을 관찰해 보자 그러면 경보등을 켜지 않고 마치 유령처럼 날아가는 항공기를 볼 수 있을 것이다.
5. 수시로 끊기는 LAN선 그 이유는?
우리 학교의 메인 컴퓨터는 물론 평소에는 일반 다른 대학들과 같은 목적으로 쓰인다. 그러나 가끔씩 다른 목적으로 사용 되기도 한다 그 목적은 바로 일종의 해킹, 하지만 이는 여러분이 생각하는 일반적 해킹이 아니다. 우리학교 원천관 지하에(적어도 80년대 후반 까지는 거기에 있었다고 전해진다.)있는 슈퍼 컴퓨터에 대해 들어 보셨는지 근처의 수원 남문(팔달문)을 통해 수신되는(남문은 전체가 하나의 안테
나 구실을 할 수 있게 설계되어 있다. 이는 하늘의 흐름에 관심이 많던 정약용이 천체 관측을 위해 그렇게 만든 것인데 최근에는 미국측의 인공위성이 본국으로 보내는 신호를 읽어내는데 쓰이고 있다고 한다. 아~ 이 얼마나 놀라운 선조들의 지혜인가!) 미국 정보 위성(첩보 위성)에서 나온 신호를 이 컴퓨터가 읽어 판독한다 이를 위해서는 일단 한번 암호화 되어서 다시 불규칙적인 2진수로 변환된 자료를 역으로 분석해야 하는데 이를 위한 시스템이 바로 우리 학교의 슈퍼 컴퓨터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메인 컴퓨터와 전화선들도 이와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남문으로부터 정보를 읽어 드릴 때에는 일시적으로 통신이 되지 않는 것이다.
6. 기숙사 식당에 나타나는 의문의 남자 그 정체는?
여러분들은 기숙사 식당에 가끔 나타난다는 의문의 남자에 대해 들어 보셨는지? 그는 주로 학기중에 나타나는데 언제나 검은 옷을 입고 나타난단다. 그리고 식당으로 들어와 밥을 먹는데 여기서 이상한 것은 그가 사용하는 식권이 사생용 1300원 짜리 식권이라는 것 그가 이 식권을 버젓이 내밀면 식당 아주머니들은 아무 말 없이 받아 든단다. 도대체 그가 누구길래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늦게서야 학교에 들어와 만학의 꿈을 키우는 아저씨 사생? 아니다 그는 이미 8여년 전부터 수시로 나타났단다 그렇게 오랫동안 학교를 다닐 사람은 없다. 그렇다면 그의 정체는? 여기서 그의 정체를 밝히기 전에 한가지 집고 넘어갈 일이 있다. 그가 나타나면 식당 아주머니들의 수다가 늘어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소리도 커진다. 이 모든 현상을 종합해 보면 결론은 쉽게 나온다 바로 그의 정체는 정부의 첩보 요원이라는 것 그는 가끔식 기숙사 식당으로 들어와 정보를 수집해 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정보는 바로 아줌마들의 수다 속에 숨어 있다. 아줌마들은 그가 오는 날 아침에 아무런 영문도 모르고 어떤 내용의 이야기를 그가 오면 하라고 지시 받는다.(누구에게? 그건 물론 식당의 짱 아줌마 그녀의 정체는 아직도 베일에 쌓여 있다.) 그러면 그 남자는 아줌마들의 수다를 녹음해 본부(?)로 돌아가 해석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정보부는 왜 이토록 귀찮은 일을 하는 것일까 그냥 자기들이 정보 수집 하면 안되나? 여기서 또 하나의 가설을 세울 수 있다.(이는 어디 까지나 가설이다) 바로 우리 학교가 첩보원 양성소라는 것! 여기에 대해선 나중에 더 자세히 얘기 할 것이다.
7. 교도소 근처에 위치한 대학교?
다 아시다시피 우리 학교는 수원 교도소와는 엎어지면 코 닿을 정도로 가까이에 있다. 하필이면 왜 대학교 근처에 그런 혐오 시설을 만든 것일까? 또 한가지 수상한 점은 외관에서도 느낄 수 있듯이 수원 교도소의 시설이 굉장히 좋다는 것이다. 겉만 보면 마치 어느 기업체 연구소 같다. 그렇다면 정말 연구소가 아닐까라는 의심을 한번 쯤 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공대로 이름을 떨친 우리 학교는 그 명성에 비해 협소한 건물과 시설로 충분한 만큼의 실험 설비나 공간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학교 교수들은 놀라운 성과들을 거두고 있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었던 것이다. 바로 교도소 아래의 비밀 실험실 거기에서 교수들과 그외 신분을 노출 시킬 수 없는 과학자들이 정부를 위한 또는 자신들을 위한 더 나아가 조국과 민족 전 인류를 위한 연구에 정진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긍정적이고 진취적인 의견에 반하는 다른 의견도 있다. 앞에서 잠시 논했듯이 우리 학교가 첩보원을 양성하는 곳이고 그 훈련을 위한 장소로 교도소가 쓰이고 있다는... 여러분들도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 나타난 행동이 이상한 학우들을 보게 되면 한번쯤 이런 생각을 해보는 것도 어떨까 싶다.
8. 국제 대학원
국제 대학원 신설은 위에서 언급한 첩보원 양성설에 대한 또 하나의 증거로 제시 되곤 한다 그 수업을 들어본 사람들은 느끼겠지만 커리큘럼이나 내용 면에서 너무나 엉성하고 급조한 냄새가 짙게 풍긴다. 이에 국제 대학원이 사실은 첩보원 양성소의 정체를 미국측에 들키지 않으려는 하나의 책략이라는 주장이 일부에서 일고 있다. 외국어 학습에 소질을 지닌 학생에 대한 전폭적 지지와 강도 높은 수업들 그리고 실용적이고 전문적 내용이 주를 이룬 심화 수업등은 오래 전부터 CIA의 의심을 사오고 있었고 학생들 사이에서도 많은 소문이 나돌았다. 그렇다면 진짜로 우리 학교가 첩보원 양성소이고 이 모든것이 그를 위한 것이라고 가정했을때 국제 대학원은 미국측이 이를 눈치채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하나의 연막 작전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9. 박정희 그리고 대우...
최초의 우리 학교 설립에는 박정희의 영향력이 컸다고 한다. 그래서 그 시절에고 그 흔한 미국 대학과 자매 결연이 아닌 프랑스 대학과 결연을 맺었다는 주장이 일고 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 학교는 대우재단에 속해 있고 총장은 우중의 형제인 덕중이다. 아시다시피 대우는 대우 중공과 철강등이 우리나라 삼군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얼마전 해군이 인수한 구축함도 대우에서 만들었다. 이렇듯 군쪽과 연줄
이 많은 대우 측이 돈을 대주는 학교라면 어딘가 수상하다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이 느낌은 위에서 제시한 여러 의혹들과 긴밀하게 연결된다.
10. 네트워크 귀신
지난 1997년 겨울 신관 B동 기숙사에 있던 한 학생은 밤 늦게 네트워크를 돌아다니다 처음 보는 컴퓨터를 발견하게 된다. 네임은 그림자 그리고 그 안에는 그림자라는 단 하나의 컴 만이 있었단다. 아무 생각없이 접속을 시도한 학생은 거기서 믿기지 않는 정보들을 보게 된다 그가 친구에게 예기한 말을 빌면 거기에는 우리나라 군사 배치와 전력, 신무기와 차세대 전투기 도임과 관련된 비밀등이 상세하게 나와 있었단다. 그러나 그가 한창 자료들을 보던 도중 갑자기 그의 컴퓨터가 이상해 지더니 하드의 모든 자료가 소실되고 CPU마저도 손상을 입었다고 한다. 그리고 일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그로부터 이틀 뒤 그 학생은 퇴사 조치 되고 소리소문 없이 사라졌다고 한다. 만약 이 이야기에 흥미가 느껴지시는 분이라면 지금 당장 네트워크를 뒤져 보시길 혹시 그 그림자라는 컴퓨터를 다시 발견할 수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앞으로도 정보가 입수 되는 대로 글을 올리 것이다. 만일 어느 날 나의 글이 더 이상 올라오지 않게 된다면 내가 그만큼 진실에 가까이 다가갔다고 생각해 주시길 바란다. 언제나 그렇지만 진실은 거짓 속에 숨어있다.
<<질문과 답>>
01 현재 우리학교는 체육관 설립 계획은 없고 일단 유보된 상태입니다. 제가 저번 답변에서 '대예측!'이라고 쓴 말은 그런 의미에서 입니다. '모습이 보인다!'라는 표현도 서울건축의 설계수법을 볼 때 그 형상이 거의 분명한 것이기에 쓴 것입니다. 체육관 이야기는 한참 후에나 할 얘기지만 이왕 나온김에 말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93년말 94년초에, 그러니까 지금의 이전 총장인 김효규 총장시절 학교측은 자연관과 경영관, 체육관을 짓겠다는 발표를 하였습니다. 공간이 부족하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앞으로 있을 대학종합평가가 더 큰 이유였을 것입니다. 당시 시설상태로는 도저히 이 부분에서 점수를 따내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서울건축은 한꺼번에 이들 건물의 계획설계를 시작하게 됩니다. 이 중 가장 설계가 급속히 진행된 것이 경영관이고 자연관은 이보다는 조금 더디게 설계가 되고 있었습니다. 자연관의 경우는 우리학교 건축학과 교수님과 대학원생이 설계의 많은 부분을 담당하기도 했습니다. 체육관은 강당을 겸하도록 하였는데 어느정도 진행이 되었는지는 정확한 정보가 없어 알 길이 없지만, 많이 된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예산상의 이유인지 무슨 이유인지, 이들 계획이 돌연 취소되고 경영관만이 공사가 계속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때를 즈음하여 지금의 김덕중 총장이 왔고, 경영관을 제외한 모든 계획이 유보됩니다. 이 때는 이미 자연관 기본설계가 모두 끝난 때였지요. 대신 김덕중 총장은 학생중심의 대학을 만들겠다는 방침을 밝힌 후 기숙사 건설을 지시합니다. 빠른 속도로 뒷산은 파헤쳐지고 공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지금 진행중이죠.
따라서,김덕중 총장의 운영방침을 고려해 볼 때 체육관 건설은 한참 후의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모습은 능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서울건축에서 이미 체육관 설계를 했던 전력이 있고 그 스타일 또한 일정한 틀(네모)을 벗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올리도록 하지요.
연못에 대해서는 아쉽겠지만 소망을 버리시는 것이...... 서울건축은 죽었다 깨어나도 그런거 안만듭니다. 그 큰 아주대 병원에도 연못은 커녕 분수 비슷한 것도 없습니다. 물하고는 거리가 먼 사무소이지요. 김종성 교수의 스승인 MIES가 유일하게 한번 건축물에 물을 일부 도입한 경우가 있기는 있는데 이 경우도 매우 절제된 사용이고 사각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혹시 물을 도입하게 된다면, 이를 참조하면 되겠지요.
MIES에 관련된 서적은 우리학교 도서관에 3권인가가 있습니다. MIES의 작품집을 보면 아주대와의 관련성을 곳곳에서 느낄 수 있습니다. 단, 건축 비전공자가 보기에는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도서관 3층에 가면 건축책을 모아놓은 곳이 있는데 그곳에서 찾면 됩니다.
1. MIES VAN DER ROHE(원서): 이책은 미스의 일대기이자 그의 작품집입니다. 제가 관계하는 건축학과 소학회에서 전문을 우리말로 옮겨놓은 것이 있으니, 읽어보시길 원하시면 누구든지 저에게 메일을 주세요
2. 미스 반 데어 로헤(번역판):미스의 작품 중 초기작만 다루고 있습니다. 지금 제가 빌려가서 도서관에는 없을지도 모릅니다. 만약 여러 권이면 있을지도 모르구요.
3. MIES어쩌구 저쩌구(원서): 책명은 정확히 생각나지 않는데 1번책과 비슷한 책입니다.
4. 기타
* 재미있게 볼 수 있는 건축책으로는 잡지 코너에 가면 '건축과 환경'이라는 월간잡지와 '공간'이 있습니다. 외국잡지 코너에도 건축책이 있지요.사진이 많아서 심심하지는 않을겁니다.
여담이지만 아까 제가 서술한 것처럼 우리학교의 건축은 건축전문가(설계자)에 의해서라기 보다는 학교측에 의해 크게 좌우됩니다. 멀쩡하게 설계하던 건물도 느닷없이 계획이 중지되고 다른 건물을 착공하고...... 원래 의학관도 80년대 마스터 플랜을 보면 없던 것인데 의대가 설립되자 연구소 자리에 세우고 나중에는 병원도 세웠습니다. 이런 식으로 마스터플랜은 사장됩니다. 물론 대충의 계획은 나름대로 있겠지요. 그러나 이런 식으로는 캠퍼스가 조화를 잃게 됩니다. 안그래도 특이한 형태, 똑같은 모습의 건물
들을 가지고 있는 학교가 조화마저 잃어버린다면 이는 상상도 하기 싫은 일입니다.
우리학교 건물들은 우리들의 일반적인 느낌과는 달리 상당히 개성이 있습니다. 날마다 보니까 못 느끼는 것이지요. 제가 지금까지 글을 써왔듯이 그 미학도 독특한 것입니다. 어디 다른데 가서 우리학교 비슷한 학교라도 봤습니까? 전국에 하나밖에 없습니다. 우리학교는 대우에 의해 운영되고 설계 또한 계속해서 서울건축이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싫어하는 스타일이라 하더라도 설계자가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그 이후에 건물에 대해서 다양한 논의를 해도 늦지 않습니다. 서울건축 건물중에는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우수한 작품이 꽤 많습니다. 단, 모더니즘의 틀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이 비난의 이유가 되기는 하지요. 그런 우수한 작품들이 아주대에서는 잘 나오지를 않습니다. 예산상의 이유도 있겠지만, 학교측의 행정적인 잘못과 일반 학우들의 잘못된 인식도 한 이유가 됩니다. 공간이 모자르는 것은 설계자의 잘못이 아니라 학교측의 잘못임에도 그 화살은 설계자에게도 은영중에 날아갑니다)
사실 3학년 시절 겨울방학동안 서울건축에 실습을 나간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저는 아주대 병원 설계팀에 있었는데 서울건축에서 우리학교를 그리 반갑지 않은 고객으로 여기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좋아할 리가 없죠. 그러면 설계하는 자세도 달라지게 됩니다. 그저 그렇게 큰 고민없이 설계를 합니다. 또하나의 평범작이 나오는 거죠.
그리고 서울건축도 독단은 버려야겠지요.이 문제는 근래의 건축사조 변화라든가 김종성 교수의 건축관과도 관련되는 일이니 이후의 글에서 차차 이야기를 해나갈까 합니다.
마지막으로 요즈음 진행되는 기숙사 공사를 보며 걱정이 됩니다. 그렇게 급하게 서둘러 일을 해서 무슨 건물이 나올런지...... 설계가 하루아침에 되는 겁니까?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시간을 두며 고민을 해나가야지......
02 서울건축이 우리학교를 설계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같은 '대우가족'이기 때문이죠! 대우학원이 김우중 아저씨꺼라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고 서울건축도 실상은 대우꺼나 다름없습니다. 정확히는 김우중 아저씨꺼죠. 한국 재벌하면 유명하지 않습니까? 같은 그룹이면 자기들끼리 먹고 살기로....
그렇다고 해서 대우학원과 서울건축이 무슨 의형제 관계는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죠. 공사비가 많이 드는건 나름대로 이유가 있습니다. 그리구 공사비와 좁은 학사와의 관계는 답변이라기보다는 제 의견을 이야기하는 정도일 것 같고, 오히려 이런 문제는 우리들의 토론거리가 아닌가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