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8일 [주님 공현 대축일 후 수요일]
마르코 6,45-52
믿음은 환경을 다스리는 연습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5천 명을 먹이신 후 물 위를 걸어 제자들의 배에 타서 폭풍우를 가라앉히신 내용입니다.
주님 ‘공현’대축일 다음이 나오는 이러한 복음들은 우리가 이렇게 공적으로 당신을 현시한 주님을 보게 되는지를 말해줍니다.
그런데 처음에 폭풍우와 물 위를 걷는 존재를
보고는 제자들이 겁에 질려 비명을 질렀었습니다. 마르코는 “그들은 빵의 기적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마음이 완고해졌던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사람이 환경에 지배받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무리 많은 사람도 배고플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배부르게 만드실 수 있는 분이셨습니다.
그렇기에 그분과 함께라면 환경에 영향을 받지
않아야 한다는 말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이 믿음으로 능력의 주님을 뵈올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일제 강점기 시절, 충남 예산의 한 17세 처녀가 19세에 과부가 되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그녀를 안타까워하며 위로했지만, 19세의 과부에게는 큰 시련이었습니다.
그녀는 어느 날 거울 앞에서 자신의 긴 머리카락을 자르며, 이제 더 이상 동정의 말을 듣기 싫다고 결심했습니다.
자신만의 길을 찾기로 결심하고, 서울행 완행열차에 올랐습니다.
서울에서 처음엔 힘든 생활을 했고, 닥치는 대로 일하며 힘겹게 살았습니다.
그러던 중, 그녀는 부유한 가정의 가정부로 들어갔고, 성실히 일하면서 주인에게 신뢰와 인정을 받았습니다.
주인 어르신은 그녀에게 “무엇을 하고 싶냐?”라고 물었고, 그녀는 공부하고 싶다는 소박한 소망을
전했습니다.
주인은 그녀의 소원을 흔쾌히 들어주었고, 그녀는 숙명여학교 야간부에 입학했습니다.
그녀는 밤낮으로 열심히 공부하며 최우수 학생이 되었고, 졸업 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도쿄여자사범대학에서 학문을 닦았습니다. 26세에 유학을 마친 후, 귀국하여 숙명여고 교사로 일했습니다.
그리고 1945년 해방 후, 숙명여자전문대학의 초대 학장으로 취임한 그녀는, 나중에 숙명여자대학교를 창설하여 초대 총장이 되었습니다.
임숙재 총장은 제자들에게 항상 “성공하기를 원하십니까? 환경을 다스리세요.”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녀의 삶은 고난을 극복하고, 환경을 변화시켜 성공을 이룬 강한 의지의 예입니다.
임숙재 총장이 하고 싶었던 것은 공부와 교회에 다니는 일이었습니다.
자신의 환경을 바꿀 수 있는 분이 함께 계심을 계속 믿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환경 탓하며 핑계 대는 사람은 자신과 함께 계신 그리스도를 만나뵙지 못하게 됩니다. 능력을 볼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1996년, 목포의 작은 사업가 조호연은 회사 회식 중 나이트클럽에서 부당하게 청구된 요금을
항의하다 지역 조직폭력배 목포 오거리파에게 폭행을 당했습니다.
직원들 앞에서 심하게 폭행당하고 굴욕을 겪었지만, 조호연은 오직 진심 어린 사과를
요구했습니다.
그는 처음으로 나이트클럽 사장을 직접 찾아가 사과를 요청했으나 또다시 폭행과 협박을 받았습니다.
굴하지 않고 경찰에 신고했지만, 조직폭력배들은 그의 동생까지 공격하며 보복했습니다.
마지막 방법으로, 조호연은 전 재산을 들여 신문에 광고를 내고 김영삼 대통령에게 직접 호소했습니다.
광고는 폭력배의 만행과 공권력의 무능함을 폭로하며 국민적 공분을 일으켰습니다.
이에 김영삼 대통령은 강력한 조직폭력배 척결 명령을 내렸고, 목포 경찰은 대규모 수사를 통해 관련 조직원들을 체포하고 조직을 해체했습니다.
이 작전은 전국적으로 확산되며 조직폭력배의 몰락을 이끌었습니다.
조호연의 끈질긴 용기와 결단력은 불의를 향한 저항의 상징으로 남았으며, 한 개인의 노력이 사회적 변화를 이끌 수 있음을 보여준 사건이었습니다.
조호연 씨는 대통령이 자기 편이라고 믿으니 조폭들이라는 환경에 굴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겐 그리스도께서 계십니다.
조호연 씨가 그렇게 약자인 자신을 보호해주는
대통령을 새롭게 만났듯이, 우리도 그분의 능력으로 불가능한 환경도 바꿔보려 해야 무한한 능력이신 그분을 만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월8일 [주님 공현 대축일 후 수요일]
복음: 마르 6,45-52
정답은 하나뿐입니다. 하느님의 품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오래전 젊은 시절, 마음 맞는 형제들과 의기투합해서 어설프기 짝이 없는 뗏목 하나를 만들어 바다로 나간 적이 있습니다.
낚싯대도 드리우고, 드러누워 하늘도 올려다보고, 참 좋았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좋은 시절은 늘 찰나의 순간이었습니다.
물살이 멈추는 정조 상태에서는 아무 문제가 없었는데, 갑자기 썰물이 시작되면서 저희가 탄 뗏목이 떠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육지는 점점 까마득해지고 저희는 점점 큰 바다로 흘러가 몇 시간 동안이나 표류를 계속했습니다.
이러다 죽는가보다는 생각과 함께 점점 공황상태에 빠져드는 순간 작은 어선 한 척이 저희를 발견했습니다.
구릿빛 젊은 선장은 우선 저희를 안심시키더군요.
“이젠 됐슈. 아무 걱정들 마유.” 그러면서 어선의 꼬리에 저희가 탄 뗏목을 묶어 안전하게 항구에 내려줬습니다.
그 젊은 선장의 모습이 얼마나 고맙고 멋있던지 마치 예수님을 뵙는 듯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제자들 역시 비슷한 체험을 했습니다.
갈릴래아 호수를 건너가던 중에 강한 맞바람을 만납니다.
하필 날까지 저물어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죽을 고생을 했습니다.
젖 먹던 힘까지 다해 새벽녘까지 노를 저었지만 배는 언제나 그 자리였습니다.
전문직 어부 출신인 제자들이었지만 탈진한 상태에서 생명의 위협까지 느꼈습니다.
그 순간 물위를 걸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에 제자들은 혼비백산해서 비명까지 질러댔습니다.
아수라장이 된 제자들의 배 위로 예수님께서 올라가십니다.
제자들을 향해 건네시는 한 말씀은 얼마나 따뜻했는지 모릅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르 6,50)
참으로 위엄이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 얼마나 큰 위로를 주는 말씀인지 모릅니다.
빵과 물고기의 기적으로 당신의 메시아성을 백성들 앞에 확연히 드러내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물위를 걸으심으로써 당신의 초인간적 위대성, 당신의 신적 본질의 신비를 드러내는 현현(顯現)을 통하여 제자들에게 직접적으로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오늘 이 순간 인생의 고해(苦海)을 건너가고 있는
우리 각자에게도 동일하게 전달되고 있습니다.
갖은 우여곡절과 역풍 속을 헤쳐가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 옛날 제자들을 안심시켰듯이 우리의 마음도 안심시킵니다.
인간, 근본적으로 유약한 존재입니다. 쉼 없이 흔들리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 성인께서는 이렇게 고백하셨습니다.
“주님, 저희의 마음은 당신을 향하도록 창조되었기에 당신 안에 쉬기까지 편할 날이 없습니다.”
결국 더이상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 더이상 근심하지 않기 위해서 정답은 하나뿐입니다.
하느님의 품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하느님 울타리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선장인 교회란 배에 승선하는 일입니다.
어두운 밤 갈릴래아 호수 위에서 있었던 예수님의 현현은 큰 의미를 지닙니다.
유다 문학 안에서 깊은 물은 악의 세력으로 여겨집니다.
예수님은 악과 어둠과 죽음의 정복자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동시에 생명의 부여자로 자리매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다의 물결을 당신 발 아래 두십니다.
그분의 옥좌는 광란하는 파도보다 높이 세워져 있습니다.
그분은 거센 역풍을 다스리실 능력의 소유자이십니다.
“그들이 탄 배에 오르시니 바람이 멎었습니다.”(마르 6,51)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현존을 통해 제자들의 근심과 두려움을 사라지게 하고 보호와 축복을 약속하십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주님 공현 대축일 후 수요일 강론>
(2025. 1. 8. 수)(마르 6,45-52)
<믿음의 ‘방향’이 잘못되면 사이비 종교가 되어버립니다.>
“예수님께서는 곧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배를 타고 건너편 벳사이다로 먼저 가게 하시고, 그동안에 당신께서는 군중을 돌려보내셨다.
그들과 작별하신 뒤에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에 가셨다.
저녁이 되었을 때, 배는 호수 한가운데에 있었고 예수님께서는 혼자 뭍에 계셨다.
마침 맞바람이 불어 노를 젓느라고 애를 쓰는 제자들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새벽녘에 호수 위를 걸으시어 그들 쪽으로 가셨다.
그분께서는 그들 곁을 지나가려고 하셨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고, 유령인 줄로 생각하여 비명을 질렀다.
모두 그분을 보고 겁에 질렸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곧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그러고 나서 그들이 탄 배에 오르시니 바람이 멎었다.
그들은 너무 놀라 넋을 잃었다.
그들은 빵의 기적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마음이 완고해졌던 것이다(마르 6,45-52).”
1)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신 일에 초점을 맞추면, 이 이야기는 “예수님은 만물의 주님이신 분”(예수님은 하느님과 같은 권능을 가지고 계시는 분)이라는 증언입니다.
맞바람 때문에 고생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가신 일에 초점을 맞추면, 이 이야기는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주님이신 분”이라는 증언입니다.
어떻든 제자들은 자연 법칙을 초월하는 예수님의 권능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그 권능은 하느님만 가지고 계시는 권능이기 때문에, 제자들의 증언은 “예수님은 하느님이신 분”이라는 증언이기도 합니다.
욥기 9장 8절에 “당신 혼자 하늘을 펼치시고, 바다의 등을 밟으시는 분”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바다의 등을 밟다.’ 라는 말은 ‘물 위를 걷다.’로 해석됩니다.
자연 법칙을 초월하는 일은, 그 법칙을 만드신
조물주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신 일은, 당신이 하느님과 같으신 분이라는 것을 드러내신 표징인데, 그 표징을 제자들만 목격하고 체험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다른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 제자들만을 위해서 당신의 신원을 드러내 보여 주신 것은, 아직 믿음이 부족한 상태인 제자들을 더욱 특별히 교육하기 위한 일로 생각됩니다.
2)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먼저 가게 하시고, 그동안에 당신께서는 군중을 돌려보내셨다.” 라는 말은, ‘빵의 기적’ 후에 곧바로 제자들과 군중을 분리시키셨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빵의 기적’을 체험한 군중의 분위기에
제자들이 휩쓸리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기적의 빵을 먹은 군중이 예수님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요한 6,15).
아마도 제자들은 그런 분위기에 이미 휩쓸렸거나,
휩쓸릴 위험이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속의 임금이 되려고 오신 분이 아니라, 인류 전체를 구원하려고 오신 분입니다.
그러니 군중의 흥분을 가라앉히고 해산시킬 필요가 있었고, 또 제자들과 군중을 분리할 필요도 있었습니다.
그때 제자들은 여러 가지로 혼란스러웠을 것입니다.
제자들 가운데에는, 임금이 되어 달라는 군중의 요구를 예수님께서 거절하신 것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 많았을 것입니다.
48절에 언급된 ‘맞바람’은, 제자들의 그런 혼란스러운 심정을 상징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산에 혼자 계시고, 제자들은 예수님 없이 호수 한가운데에 있는 상황은, 그런 들뜬 분위기 때문에 제자들의 믿음이 흔들렸음을 상징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3) 예수님께서 제자들만 먼저 가게 하신 것은
그들을 버리신 것이 아니라, 그들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약간의 시련을 주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제자들은 바람과 파도 때문에 고생하다가 정신을 차렸을 것이고, 예수님을 간절하게 기다렸을 것입니다.
48절의 ‘제자들을 보시고’ 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여러 가지로 복잡한’ 심리 상태를 꿰뚫어 보셨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가장 무기력한 상태가 될 때까지 기다리셨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메시아는 세속의 임금이 아닌, 모든 것에서부터 사람을 구원하는 구세주라는 것을 더욱 확실하게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들 쪽으로 가셨다.” 라는 말과 “그들 곁을 지나가려고 하셨다.” 라는 말은, 뜻으로는 ‘같은 말’입니다.
<‘지나가다.’는, 구약성경에서 ‘하느님의 나타나심’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탈출 33,22; 1열왕 19,11).>
유령이 다가오는 것으로 생각해서 제자들이 겁에 질렸다는 말은, 이해하기 어려운 초자연적인 현상을 두려워했음을 뜻하는데, 그 상황에서는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나다.” 라는 말씀은, 탈출기 3장 14절의 “나는 있는 나다.” 라는 계시와 같고, 당신의 신성을 드러내신 말씀입니다.
“용기를 내어라. 두려워하지 마라.”는 “나는 유령이 아니라 너희의 스승이다.
그러니 무서워하지 마라.” 라는 뜻입니다.
52절의 “그들은 빵의 기적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마음이 완고해졌던 것이다.” 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해서 당신의 신성을 드러내신 이유를 설명하는 말입니다.
제자들은 ‘빵의 기적’을 체험한 뒤에 예수님을
더 잘 믿게 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 대해서 세속적인 기대를 품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믿음의 방향’이 잘못된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바로잡아 주셨습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