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쇠 (외 3편)
김광림
1
도마 위에서
번득이는 비늘을 털고
몇 토막의 단죄가 있은 다음
숯불에 누워
향을 사르는 물고기
고기는 젓가락 끝에서
맛 나는 분신이지만
지도 위에선
자욱한 초연(哨煙) 속
총칼에 찝히는 영토가 된다.
2
날마다 태양은
투망을 한다.
은어 떼는
쾌청(快晴)이고
비린내는
담천(曇天)과 같아.
음악
건반 위를 달리는 손가락.
울리는 상아(象牙)해안의 해소(海嘯).
때로는 꽃밭에 든 향내 나는 말굽이다가
알프스 정상에 이는 눈사태.
*
안개 낀 발코니에서
유리컵을 부딪는
포말(泡沫)이다가
진폭(桭幅)의 소용돌이를 빠져나오는
나긋한 피날레
그 화음(和音)을.
0
예금을 모두 꺼내고 나서
사람들은 말한다
빈 통장이라고
무심코 저버린다
그래도 남아 있는
0이라는 수치
긍정하는 듯
부정하는 듯
그 어느 것도 아닌
남아 있는 비어 있는 세계
살아 있는 것도 아니요
죽어 있는 것도 아닌
그것들마저 홀가분히 벗어버린
이 조용한 허탈
그래도 0을 꺼내려고
은행 창구를 찾아들지만
추심(推尋)할 곳이 없는 현세
끝내 무결할 수 없는
이 통장
분명 모두 꺼냈는데도
아직 남아 있는 수치가 있다
버려도 버려지지 않는
세계가 있다
풍경 A
기중기(起重機)는
망가진 캐시어스 클레이의 철권(鐵拳) 수만 개를
들어 올린다
흔들린다
헛기침도 않고
건달 같은 자세로
시장한 벽에
부딪친다
압도해 오는 타이거 중전차(重戰車)에
거뜬히 육탄(肉彈)한다
나를 매달아 놓았던 내장(內臟)의 사슬이 끊어진다
기중기를 벗어난 철추(鐵椎)는
현실 밖으로 뛰쳐나간다
한 마리의 새가
포물(抛物)로 날아간다
—《金光林 詩全集》2010, 바움커뮤니케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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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림 / 1929년 함경남도 원산 출생. 본명은 忠男. 1948년 〈연합신문〉에 시 「문풍지」를 발표하며 시작 활동. 고려대 문리대 국문과 졸업. 한국시인협회 회장 역임. 시집 『상심하는 접목』등 18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