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유/최영미
투명한 것은 날 취하게 한다.
시가 그렇고
술이 그렇고
아가의 뒤뚱한 걸음마가
어제 만난 그의 지친 얼굴이
안부 없는 사랑이 그렇고
지하철을 접수한 여중생들의 깔깔 웃음이
생각나면 구길 수 있는 흰 종이가
창 밖의 비가 그렇고
빗소리를 죽이는 강아지의 컹컹거림이
매일 되풀이되는 어머니의 넋두리가 그렇다.
누군가와 싸울 때마다 난 투명 해진다.
치열하게
비어 가며
투명 해진다.
아직 건재하다는 증명
아직 진통할 수 있다는 증명
아직 살아 있다는 무엇.
*
사는 법/홍관희
살다가
사는 법이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길을 멈춰 선 채
달리 사는 법이 있을까 하여
다른 길 위에 마음을 디뎌 보노라면
그 길을 가는 사람들도 더러는
길을 멈춰 선 채
주름 깊은 세월을 어루만지며
내가 지나온 길 위에
마음을 디뎌 보기도 하더라
마음은 그리 하더라
-덧붙임
시 중에
“주름 깊은 세월을 어루만지며…...”
이 말이 너무나 좋아서 계속
주문 외우듯이 크게 소리질러 보았다
*
사는 법/나태주
그리운 날은 그림을 그리고
쓸쓸한 날은 음악을 들었다
그리고도 남는 날은
너를 생각해야만 했다
*
사는 법/홍윤숙
기다려야 해
가던 길 멈추고 한숨 돌리고
잊었던 하늘 한 번 다시 보고
흘러내린 행낭 고쳐매야 해
먼 산마루엔 분홍빛 구름 한 점
돌아가는 모퉁이엔 수묵빛 어둠
남은 여정 자욱이 찬비 뿌리는
한시대 도상에 함께 젖은 우리들
보아요 누구도 이 비를 피해가지 못하는
운명의 겨울
추운 몸 서로서로 비비고
남은 불 조금씩 나누어 지펴요
어둠 속에 뿌리를
서로 엉켜요
*
사는 일 / 나태주
오늘도 하루 잘 살았다.
굽은 길은 굽게 가고
곧은 길은 곧게 가고
막판에는 나를 싣고
가기로 되어있는 차가
제시간보다 일찍 떠나는 바람에
걷지 않아도 좋은 길을 두어 시간
땀 흘리며 걷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도 나쁘지 아니했다
걷지 않아도 좋은 길을 걸었으므로
만나지 못했을 뻔했던 싱그러운
바람도 만나고 수풀 사이
빨갛게 익은 멍석딸기도 만나고
해 저문 개울가 고기 비늘 찍으러 온 물총새
물총새, 쪽빛 날갯짓도 보았으므로
이제 날 저물려 한다
길바닥을 떠돌던 바람은 잠잠해지고
새들도 머리를 숲으로 돌렸다
오늘도 하루 나는 이렇게
잘 살았다
*
사는 일이란
/나태주
아, 오늘도 하루를
무사히 잘 보냈구나
저녁 어스름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며 다시
너를 생각한다.
오늘도 잘 지냈겠지.
생각만으로도 내 가슴은
꽃밭이 되고
너는 제일로 곱고도 예쁜
꽃으로 피어난다.
저녁 노을이
자전거 바퀴 살에 휘어 감기며
지친 바람이 어깨를 스쳐도
나는 여전히 살아서
숨쉬고 있다는 생각
그 생각만으로도 나는
다시금 꿈을 꾸고 내일을
발돋움하는 사람이 된다.
그래 내일도 부디
잘 지내기를
아무일 없기를
어두워 오는 하늘에도
길가의 나무와 풀에게도
빌어본다.
사는 일이란 이렇게
언제나 애달프고
가엾은 것이란다.
*
사는 맛/정일근
당신은 복어를 먹는다고 말하지만
그건 복어가 아니다, 독이 빠진
복어는 무장 해제된 생선일 뿐이다
일본에서는 독이 든 복어를 파는
요릿집이 있다고 한다, 조금씩
조금씩 독의 맛을 들이다 고수가 되면
치사량의 독을 맛으로 먹는다고 한다
그 고수가 먹는 것이 진짜 복어다
맛이란 전부를 먹는 일이다
사는 맛도 독 든 복어를 먹는 일이다
기다림, 슬픔, 절망, 고통, 고독의 맛
그 하나라도 독처럼 먹어보지 않았다면
당신의 사는 맛도
독이 빠진 복어를 먹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