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구치 지로 칼럼] '소수여당' 상황인 일본, 진정한 정책 논의 기회 / 1/6(월) / 한겨레 신문
◇ 민주주의의 정착
윤석열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비상계엄령 포고와 그에 대한 야당 정치인과 시민의 싸움은 일본에도 큰 충격을 주었다. 계엄령이 TV로 알려지자마자 수많은 시민이 야당 의원들과 함께 국회의사당에 모여 군이 의사당에 침입하는 것을 막는 장면을 보면서 한국 시민사회의 저력을 보여준 것 같았다.
한국에서 히트한 영화 「서울의 봄」을 나도 11월에 본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이 영화의 가장 큰 교훈은 불법적이고 주도면밀한 준비를 하지 못한 실력행사로 인한 체제 전복 움직임도 초동단계에서 진압하지 못하면 폭력이 기정사실화되고 상명하복의 군대조직은 불법 반군의 편에 설 수 있다는 점이다.
민주주의는 권력을 둘러싼 싸움을 말에 의한 것으로 한정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최근에는 얼굴을 맞대고 하는 논의보다 인터넷 상에서 말을 주고받는 것이 정치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됐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파괴하려는 기도에 대해서는 시민의 물리적 존재가 중요한 국면도 있다. 국회 건물은 민주주의의 물리적 거점이다. 국회의원들이 모여 계엄령 철회를 결의하는 것도 이 건물 안에서 결의를 올리지 않으면 효력이 없다. 그래서 윤 대통령은 군대를 국회의사당에 파견했고, 야당 의원들도 이에 앞서 국회에 들어가려 했다. 일련의 사태에서 결정의 중심을 차지하기 위해 몸을 던지는 것의 중요성을 배웠다.
내가 대학생이던 시절, 한국에서는 박정희 대통령 암살, 전두환 쿠데타, 광주 사건 등 굵직한 정치적 사건들이 이어졌다.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민주화운동을 추진하는 젊은이들에게는 이웃나라지만 큰 경의를 갖고 있었다. 1980년대 말의 민주화는 동아시아에서 최초로 일어난 시민 자신에 의한 민주주의 획득이었다. 그러한 경험은 한국 사람들에게 이어져 민주주의 정신이 신체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제도로서의 민주주의를 강권적인 정치인들이 부수려는 것에 대해 싸우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단순하다. 우리가 하루하루 마주해야 할 문제는 민주주의라는 제도를 이용해 이해가 상충하는 정책과제에 대한 해법을 만들고 합의를 구축하는 것이다. 일본이나 한국이나 정부 지도자를 지지하는 여당이 국회(일본의 경우는 중의원)에서 소수파여서 정부는 정책 실현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한국의 경우 다음 대통령이 정해지지 않으면 정부나 의회는 통치능력을 회복할 수 없다. 일본에서는 올해(2025년) 7월 참의원 선거가 치러질 예정이어서 이시바 시게루 정권의 지지가 낮으면 이 선거에서도 여당이 패배할 가능성이 있다.
선거를 통해 의회 구성에 민의를 반영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기본이고, 안정적인 다수파가 형성되지 않더라도 여당의 열위를 국민의 선택으로 인정하고 통치방법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일본의 경우, 소수 여당의 상황은 의회에서의 토론을 통한 정치의 회복을 가져온다는, 좋은 효과도 가져오고 있다. 2012년 말 자민당과 공명당의 연립정권이 부활한 이래, 여당은 국회에서 항상 안정적 다수를 차지해 왔다. 일본에서는 다수결과 민주주의가 동일시되는 경향이 있다. 여당 내부에서 정책에 대한 합의가 이뤄지면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다. 국회에서 야당이 질문해도 정부는 제대로 답변하기를 꺼려 일정한 심의시간이 지나면 표결을 거쳐 법안과 예산이 통과되는 일이 반복됐다. 국회 심의에서부터 진지한 말이 사라졌다고 평할 수도 있다. 또, 그 사이, 수상에 의한 권력의 사유화나 그에 관련되는 공문서의 조작 등, 중대한 불상사가 잇따랐다. 국회는 이런 권력범죄에 대해 조사권을 갖고 있다. 당연히 야당은 추구하지만 다수를 차지하는 여당이 조사권 행사에 반대하면 의혹은 은폐된 채로 남게 된다.
소수여당 상태가 되면 자민당은 그동안의 교만을 버릴 수밖에 없다. 올 연말 임시국회에서는 소수 정당의 의견을 듣고 정책 조율이 이뤄졌다. 어떻게 보면 국회가 정책 논의의 무대가 됐다. 1월부터는 예산과 중요 법안을 심의하는 정기국회가 시작된다. 여당뿐 아니라 야당을 포함한 의원들의 정책 능력과 책임감이 따르게 된다. 이는 국민에게도 정치적 학습의 기회가 될 것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