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가톨릭대학교 한국의 정치사상 113분반(금 5~6교시)
사회복지학과 4학년(야) 20010675 박소영
Ⅰ. 들어가며
철학적 사조에서 볼 때 ‘몸’의 철학은 이미 20세기 중반부터 그 관심이 고조되었다고 한다. 하지만‘몸’의 철학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생각을 해 본적이 없었으므로 이 과제를 준비하면서 조금은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자료를 찾으면서 ‘몸’에 대한 신학적. 철학적 다양한 관점에서의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새롭게 발견할 수 있었다.
여기에서는 인간의 ‘몸’에 대한 종교적 입장에서인 ‘몸(육체)의 신학’에 관한 예수회 Robert Brungs신부님의 강의자료와 문화선교연구회 책임연구원인 성석환 목사님의 기독교문화 포럼 자료에서 발췌한 내용들을 제시한 후 이 과제에서 던지고 있는 (1) 몸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몸인가? 마음인가? 이 둘 다 인가? 둘 다가 아닌가? (2) 몸은 악의 근원인가? 그렇다면 악이란 무엇이며, 선이란 무엇인가? (3) 왜 우리는 몸에 대한 이중적 잣대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한 것인가? 라는 질문들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Ⅱ. 몸(육체)의 신학
인간과 그리고 인간이 처한 상황에 대한 궁극적인 차별화란 사회적 혹은 경제적인 차이나 교육, 계급 간의 차이들을 일컫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육체 그 자체를 일컫는 것이라 하겠다. 인간의 독특함을 포현해 주는 것은 바로 공간과 시간의 개념을 포함하고 있는 우리의 육체이다. 우리들 각각은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지적으로 그리고 그 영혼에 있어서 언제나 남들과는 다른 하나의 독특한 개체인 것이다.
인간의 독특함이란 기본적으로 인간 자신의 내면적인 유일성에 기인하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한 독특함이 인간의 영혼적 본성에만 기인한다거나 또는 육체적인 본질로부터만 나온다고 할 수는 없다. 오히려 그 영혼적 그리고 육체적 측면의 양자를 결합함으로써 지금의 우리가 있게 되는 것이라 하겠다. 우리는 Joseph Flether가 말한 바와 같이 완전히 정신적인 어떤 존재는 아니다. 반대로 Carl Sagan의 논리에 있어서와 같이 분자구조에 의한 어떤 유기체로서의 육체적 측면만을 가진 존재도 아니다. 인간은 양자 모두를 포괄하는 존재이며 따라서 물질적인 세상 역시 인간에게 가치 있는 것이라 하겠다.
인간 각각은 육체와 영혼의 독특한 하나의 결합체이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문제 중의 하나로 사회적 삶으로부터의 개인 및 개인적인 활동의 효과적인 소외라는 현상을 들 수 있다. 현재의 문화는 우리가 아무한테도 영향을 미치지 않고 스스로 어떤 행위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자신들이 독립되어 있다는 착각을 하게 한다. 그러나 오직 물질적인 고립, 즉 육체를 가진 존재로서 우리 모두가 서로서로 효과적으로 고립됨으로써만이 우리는 “자신의 육체에 대한 권리”라든가 “희생자 없는 죄악”, “성의 인간적 영역으로의 승화” 등의 구호를 외칠 수 있는 것이다.
유대교의 연장선상에 있는 기독교는 어떤 질적인 차이를 완전히 그리고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창세기를 보면 일련의 모든 창조물들(빛, 바다와 땅, 새들 그리고 물짐승 등)을 “좋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사실 질적인 차이란 기독교와 유대교 양자에 있어서는 “좋다” 이상의 것으로서, 이 땅과 그 안의 모든 살아있는 창조물들, 그리고 특히 당신 자신의 모상을 본떠서 만들었다고 하느님께서 즐거워하시던 인간들을 위한 하느님의 계약의 근간을 이루는 것이다. 확실히 유대인들은 스스로를 매우 특별한 사람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또 하느님 계약 안에서 표현되어 있는 남자와 여자 사이의 질적인 차이에 대한 확언은 Adam 과 Eve의 창조에 관한 이야기에서 가장 심오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라 할 것이다. 창세기를 통하여 우리는 이렇게 질적인 차이라는 것이 불공평한 것과는 거리가 먼 것이며, 하느님의 창조 작업에 수반되었던 아름다움과 영과, 새로움 그리고 선함을 위해 꼭 필요했던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보면 모든 창조의 아름다움, 영광, 선함 그리고 심지어는 그 의미조차 바로 질적인 다양함 속에서만 가능한 것이라 하겠다. 거꾸로 이야기하면 질적인 다양함을 개인 혹은 사회의 어떤 이기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나 도구로서 잘못 사용한다면 매우 큰 위험을 부담해야만 할 것이라는 말도 될 것이다. 일례로 남성은 어떤 현실적 차이를 이유로 남녀 간의 질적인 차이를 주장함으로서 여성에 대한 남성의 우월적 지위를 정당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 이야기 한 위험이란 이렇게 실질적이고 현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이러한 위험보다는 만물을 서로 비슷하게 평준화시키려는 시도가 더욱 위험한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창조의 신비라고 표현하신 바와 같이 하느님의 인류에 대한 근원적인 계약은 바로 당신 자신의 “육화”이다.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스스로의 개성을 갖게 하고 또 그를 표현할 수 있게 하는 것은 바로 인간의 “육체”이다. 특히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하느님과 더불어 살게 하고 그분을 경배할 수 있게 해 주는 것 역시 “육체”이다.
(‘몸(육체)의 신학’에 관한 예수회 Robert Brungs신부님의 강의자료 중 발췌)
하느님은 인간을 하느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셨다. 히브리 사상에 있어서 하느님이 창조하신 인간은 다만 몸이거나 마음만이 아니다. 아니 그러한 구분이 불가하다. 하느님은 인간을 창조하셨고 당신을 닮도록 하셨다. 그러므로 인간의 정체성은 하느님의 형상이며 의식과 몸의 열등과 우월에 관계없이 소중하다.
예수 그리스도가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것은 인간의 몸과 마음의 이분법적 사고를 근본적으로 허용하지 않는다. 물론 일부 신학에서는 그리스도의 신성이 하느님의 정신으로부터 오고, 그리스도의 인성을 인간의 육체성으로부터 오는 것으로 주장하는 입장도 있으나 정통 신학은 삼위일체의 교리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통합적으로 동일한 존재성으로 파악한다. 그러므로 당시 예수는 육신의 결핍(장애)이 죄의 결과라 보는 견해에 대해서 비판하신다. 그것은 율법적 유대인들의 이분법적 형식주의에서 나온 주장이었다.
신학은 인간과 세계를 분리해서 보지 않는다. 세계는 곧 인간의 세계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타락이 세계의 타락이고 인간의 본성은 타락했다. 그리스도의 구원의 능력은 인간의 타락한 본성을 몸과 마음의 전차원에서 구원한다. 구원론적 교리에서는 인간을 몸과 마음으로 분리해서 보지 않는다. 유추하면 결국 몸은 인간이다. 영과 육을 구분하여 표기할 수는 있으나 이 둘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인간 정체성을 구성한다.
최근 이러한 신학적 견해를 지지하는 철학적 접근도 활발한데, 특히 프랑스 철학자 레비나스(Levinas)는 인간의 몸과 얼굴을 통해서 드러나는 인간의 정체성에 대해서 깊이 있는 논의를 전개한다. 레비나스가 몸의 중요성을 발견하는 방식은 기존의 철학적 방식과 다르다. 그는 제일 철학으로서 형이상학이 아니라 윤리학이 정립되어야 함을 주장하면서 근대 철학이 갖는 자기동일성의 논리를 극복하기 위해 타자의 얼굴과 몸을 통해 자신을 발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에게 ‘몸’은 나를 있게 하는 ‘가까움’이요 ‘어머니의 여성성’이다. 몸은 아름다운 것이다. 몸은 하느님의 형상으로 주어진 인간이다. 그러하기에 인간의 몸을 아름답게 여기고 그 몸을 통해 인간의 온전한 정체성을 파악하여 하느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상을 회복하는 것이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의 과제라 할 것이다.
(문화선교연구회 책임연구원인 성석환 목사님의 기독교문화 포럼 자료에서 발췌)
Ⅲ. 몸의 철학
몸의 철학은 크게 보자면 근대 주의의 이원론적 철학을 극복하는 방식으로 전개 되었다. 몸의 의식, 나와 타자, 남성과 여성, 세계와 나 등 인식의 대립을 통해서 동일성으로 환원시키고야마는 근대 의식의 방법론의 문제점을 몸에 대한 새로운 의미부여를 통하여 극복하고자 하는 것이다.
좀 더 살핀다면, 데카르트로부터 시작된 근대 이성의 사유방식은 인간의 의식만이 확실한 것으로 세계와 인간의 몸을 자연적, 우연적, 발생적인 것으로 병치시킨다. 그래서 인간의 정체성을 다만 의식과 정신으로 환원시킨다. 몸을 다룬다 하더라도 그것은 의식이 아닌 부족과 결핍의 가시적 현상으로서 ‘몸’을 다룸으로써 플라톤이 사유한 그리스 고대철학의 이원론적ㅇ 근원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의식은 사유하나 몸은 수동적으로 의식에 의해 구성된다.
더구나 근대의 과학주의는 인간의 몸을 기계론적으로 탐구의 대상으로 만들었고, 몸은 어찌할 수 없는 불안한 덩어리에 불과한 것으로 파악하였다. 유물론조차도 인간의 몸에 대한 관심을 정신에 비해 부각시키기는 했으나 몸 자체의 특수성과 인간의 통전성을 파악한 것이 아니라 정신의 대림항으로 설정한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몸은 지금까지 비역사적이고, 자연적이고, 유기체적이고, 수동적이고 무기력한 용어들로만 표현되어졌다. 몸은 정신의 작동에 개임하고 방해하는 그래서 초월이 필요한 정복의 대상일 뿐이었던 것이다.
이제 오늘날 몸의 철학은 인식론적인 매우 의미 있는 도전이다. 의식에 의해서 구성되는 몸이 아니라 또는 의식에 대립되는 몸이 아니라 오히려 몸의 고유한 특성으로서의 의식에 대해서 말하고, 인간 본성을 주체의 내면성에 내재한 속성으로 보려는 경향이 강하게 저항하는 것이다. 몸의 철학은 근대 철학이 수행한 분열적이고 환원적인 방식을 거부하고 주체의 통합된 인식을 획득하려는 새로운 인간 정체성의 작업인 것이다.
몸은 규정되거나 대상으로만 존재하지 않고, 동시에 지속적으로 문화적 대화를 통하여 변화하는 비존재적 특성을 가진다. 따라서 몸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세계와 역사를 주체적으로 수용하고 그 변화에 반응한다는 의미이다. 몸과 마음을 분리해서 보지 않음으로써 보다 통전적인 인간의 정체성을 발견할 수 있다는 주장인 것이다. 이원론의 극복은 인간의 정체성과 마찬가지로 인간이 세계를 어떻게 사유할 것인가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마음과 몸이 분열되지 않는다는 것은 인간이 자연과 세계와 분리될 수 없다는 도전이 된다.
(문화선교연구회 책임연구원인 성석환 목사님의 기독교문화 포럼 자료 중 발췌)
Ⅳ. 질문에 대하여
(1) 몸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몸인가? 마음인가? 이 둘 다 인가? 둘 다가 아닌가?
앞서 몸의 신학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인간을 몸과 마음으로 분리해서 볼 수는 없다. 몸은 결국 인간을 의미한다. 영과 육을 구분하여 표기할 수는 있지만 이 둘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인간 정체성을 구성한다.
인간은 몸을 통하여 바라보고 느낀다. 그리고 몸을 통하여 자신이 추구하는 미를 표현할 수 있다. 몸은 정신의 변화하는 모습에 적응하기도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변화되는 몸(육체)는 인간의 영혼을 변화시키기도 한다.
(2) 몸은 악의 근원인가? 그렇다면 악이란 무엇이며, 선이란 무엇인가?
역사 속에서 몸에 대에 죄악시 했던 흔적들을 찾아볼 수 있다. 교회사 안에서 수도자들은 자신의 몸에 편태를 가하면서 오로지 영적인 것만을 추구하면서 완덕에 이른 많은 성신들의 모범을 성인전을 통하여서도 볼 수 있다. 하지만 현대의 수도자들은 굳이 자신의 몸에 편태를 가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몸과 영혼을 굳이 분리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몸과 정신(영혼)은 분리될 수 없는 결합체이다. 그것은 현대 과학에서 잘 증명되고 있다. 몸과 정신은 상호작용을 통하여 건강을 유지하며 아름다움을 키워간다.
악이란 정신적인 순결은 강조하면서도 육적인 것을 천시하거나, 육체를 함부로 다루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악이란 몸을 돌보지 않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자신의 몸이든 타인의 몸이든 생명이 있는 것에 대한 경시가 악이라 하겠다.
반대로 선이란 몸에 대한 존중과 아름다움을 성숙시켜나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몸과 영혼은 분리될 수 없는 결합체라 보기에 이러한 몸(육체)에 대한 돌봄은 바로 영혼에 대한 돌봄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본다.
(3) 왜 우리는 몸에 대한 이중적 잣대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한 것인가? 오늘날의 구체적인 몸 담론들과 관련하여 말해보자.
얼마 전 어느 학교의 미술교사가 자신의 부부의 나체사진을 자신의 홈페이지에 담아서 기사화 되었던 것이 기억이 난다. 이해하는 입장과 이해하지 못하는 입장들이 나뉘어져서 각자의 입장에서 의견을 표현했던 것이 기억난다. 또한 최근 누드열풍을 두고 예술의 경지로 승화되었다느니 욕망의 자연스러운 표출이 아니냐는 담론이 지배적인 상황으로 변해가고 있다.
얼짱 몸짱, 누드 열풍과 관련한 일련의 현상들을 두고 인간의 몸을 상품화하는 상업주의문화의 영향으로 보는 신자유주의적 견해나 몸을 열등하고 수동적인 평가, 해부의 대상으로 보는 근대의 이원론적 인간관에 대한 반작용으로 보는 포스트모던적 견해는 남성주의에 반대해서 영성의 권리를 주장하는 페미니즘의 몸의 쳘학 역시 근대적 인식론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 안에서 요즘 청소년들은 자신의 외모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심지어 외모에 대한 고민 때문에 자살하기도 한다. 미국의 여성프로그램에서 세계의 여성들을 소개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한국을 소개하면서 “한국은 성형수술의 천국”이란 표현을 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그만큼 한국 여성들이 서구적인 미를 가지고 싶어 한다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인간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존재이다. 또한 인간의 몸을 예술적으로 또는 미학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예술의 역사 속에서 매우 오래된 일이며, 또 인간의 몸이 아름답다는 것은 많은 시인들이 고백한 바 있다. 그래서 얼굴과 몸을 예술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어색한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우리 사회에서 자극적으로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이른바 “얼짱, 몸짱, 누드” 등의 현상이 미학적인 수준에서 인간의 몸을 다루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공감을 얻지 못한다. 얼굴이 잘 생기고 이쁘다는 것이 하나의 자본으로 평가되고, 어른이나 젊은이나 균형잡힌 몸매를 유지하는 것이 미덕이며, 자신의 몸을 카메라 앞에 당당히 노출시키는 것이 예술이라고 우기는 지금의 현상에 대해서 당사자나 관계자들의 주장을 그대로 수용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분명한 것은 외모 또는 몸에 대한 우리들의 인식이 달라졌다는 것은 사실이다.
지금 불고 있는 외모지상주의의 현상들은 TV로 대표되는 매스컴과 그 속도의 파급력을 따라 잡을 수 없는 인터넷이라는 상호의사소통 체계의 신미디어에 의해서 보급되고 있기 때문에 그 부작용은 더욱 크다고 볼 수 있다.
Ⅴ. 나오며
몸의 신학에서 다룬 바처럼 몸은 인간이다. 그리고 몸은 아름다운 것이다. 몸은 인간으로 하여금 선한 것을 추구하는 도구이다. 보여지는 외모만을 강조하기 보다는 내면의 가치 역시 강조하면서 외적인 개성과 내적인 성숙함의 미를 동시에 추구해야 할 것이다.
첫댓글 [4] 이해도 잘 되고 주제도 명확하고ㅡ 하나의 논문을 본 것 같네요ㅡ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ㅡ
[4]굉장이 많이 조사하셨고 노력하셨네요, 너무 좋은 글이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4] 글의 표현도 명확하고 많은 자료를 조사하셨네요^^ 잘 읽었습니다~~
[4] 적당한 분량으로 이해되기 쉽게 잘 쓴 글이었습니다..수고하셨습니다^^
[4] 분명한 것 한 가지는 위의 몸에 대한 신학적 고찰들은 모두 1960년대 2차바티칸 공의회 이후에 이루어진 것이며, 아직까지 기독교의 도그마와는 상충되는 면이 있다는 겁니다. 따라서.... 이와 같은 점을 주의깊게 전제한 상태에서 논의를 진행해야 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