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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헤밍웨이가 1925년에 스페인 여행에서 겪었던 체험을 바탕으로 쓴 것으로 1926년 10월 미국에서 처음 발간되었으며, 영국에선 1927년에 <피에스타>(Fiest, 축제)란 제목으로 발간된다(스페인, 이탈리아, 독일, 러시아, 체코 등에서도 Fiesta로 출간되었다). 1983년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이 소설은 단 한 번도 절판되었던 적이 없으며, 세계에서 가장 많이 번역된 타이틀 중 하나라고 하며, <타임>지 선정 100대 영문 소설, <뉴스위크> 선정 세계 100대 명저, 모던 라이브러리 선정 20세기 100대 영어 소설로 꼽힌, 고전 중의 고전이다.
저자 어네스트 헤밍웨이
일생 동안 헤밍웨이가 몰두했던 주제는 전쟁이나 야생의 세계에서 나타나는 극단적인 상황에서의 삶과 죽음의 문제, 인간의 선천적인 존재 조건의 비극과, 그 운명에 맞닥뜨린 개인의 승리와 패배 등이었으며, 본인의 삶 또한 그러한 상황에 역동적으로 참여하는 드라마틱한 일생이었다. 헤밍웨이는 제1차 세계대전 종군 경험에서 취재한 소설 <해는 또다시 뜬다>, <무기여 잘 있거라>로 문명을 획득한다. 1936년 스페인 내란에서 얻은 인상을 그린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는 미국 사실주의의 대표적 걸작으로 냉철한 시각, 박력 있는 표현으로 헤밍웨이 문학의 절정을 이룬다. 그의 사상과 예술 추구의 작가 정신이 그대로 반영된 작품 <노인과 바다>는 1952년 출판되었는데, 이 작품은 그에게 퓰리처상과 노벨 문학상의 영예를 안겨 주었으며 <킬리만자로의 눈>, <있는 이 없는 이>, <노인과 바다> 등 그의 여러 작품들이 영화화되기도 하였다. 이 외에 <여명의 진실>, <아프리카의 푸른 언덕> 등의 작품이 있다. 헤밍웨이는 1961년 7월 62세의 나이로 의문의 엽총 자살로써 생을 마감했다.
‘로스트 제너레이션’을 대표하는
스물일곱 청년 헤밍웨이의 첫 장편소설
『노인과 바다』의 헤밍웨이가 아닌, 청년 헤밍웨이 읽기!
헤밍웨이는 별다른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유명하다. 전세계적으로는 물론이고 한국에서도 대중적인 이미지가 강하고 작품에 대한 인지도는 높다. 하지만 헤밍웨이의 작품을 제대로 읽어본 사람은 참 적다. 왜 그럴까? 지금까지 정식으로 한국어 출판권이 계약되어 소개된 적이 없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겠지만, 대중적인 이미지가 너무 도드라져서(파파 헤밍웨이), 허연 수염 덥수룩한 산타클로스 같은 노인 이미지로 인식되어온 분위기도 한몫했을 것이다. 더구나 한국의 독서계에서 이제까지 볼 수 있던 소설은 『노인과 바다』가 거의 유일했는데, 아동물로 취급되거나 아예 아동물화되버렸고, 그나마도 해적판으로만 보급되어온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었다. 그러다 그의 사후 50년이 되어 저작권 보호기간이 2011년을 끝으로 만료됨에 따라, 2012년 새해를 맞아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이자 최고작으로도 꼽히는 『태양은 다시 뜬다』를 내놓게 되었다. 헤밍웨이는 그의 말년보다는 청년기의 작품과 삶을 먼저 조명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강했다. 그는 상투적인 삶을 거부하는 모험가였고, “세상의 본질이 무엇인지” 궁리하기보다는 그 속에 몸을 던지는 스타일의 인간이었다. 뻔한 경로에 안주하지 않고, 항상 다른 길을 택했다. 대학 진학 대신 기자 생활을 했고, 1차대전에 참전했으며, 뉴욕이 아닌 파리에서 본격적으로 문단 수업을 했다. 소설가로 이름을 날리게 된 후에도 종군 기자로 스페인내전에 뛰어들었으며, 쿠바에 오랫동안 드나들었다.
로스트 제너레이션을 대표하는 고전 중의 고전
이번에 출간하는 『태양은 다시 뜬다』는 여러 면에서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스물일곱 살의 헤밍웨이는 이 작품을 통해 평단의 극찬과 대중의 호응을 함께 받으며 일약 문단의 총아로 떠올랐다. 1차대전 이후 방황하던 세대를 지칭하던 ‘로스트 제너레이션’이란 말이 유명하게 된 것도 이 소설 때문이었고, ‘빙산 이론’ 혹은 ‘생략 이론’이라고도 불리는 헤밍웨이의 힘 있는 단문체로 완성한 첫 소설이기도 하다. 이 소설 덕분에 스페인 투우 축제 산페르민 축제와 팜플로나라는 도시가 세계적으로 유명해졌고, 여주인공 브렛의 패션은 전후 미국 신여성들의 패션을 주도하기까지 했다.
이 소설은 헤밍웨이가 1925년에 스페인 여행에서 겪었던 체험을 바탕으로 쓴 것으로 1926년 10월 미국에서 처음 발간되었으며, 영국에선 1927년에 <피에스타>(Fiest, 축제)란 제목으로 발간된다(스페인, 이탈리아, 독일, 러시아, 체코 등에서도 Fiesta로 출간되었다). 1983년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이 소설은 단 한 번도 절판되었던 적이 없으며, 세계에서 가장 많이 번역된 타이틀 중 하나라고 하며, <타임>지 선정 100대 영문 소설, <뉴스위크> 선정 세계 100대 명저, 모던 라이브러리 선정 20세기 100대 영어 소설로 꼽힌, 고전 중의 고전이다.
* 참조 : 로스트 제너레이션 혹은 잃어버린 세대
이 말은 1차대전 중에도 쓰던 말이었으나, 헤밍웨이가 『태양은 다시 뜬다』에서 대조를 이루는 두 제사의 하나로 쓰면서 유명해졌다. 흔히 ‘잃어버린 세대’, ‘길 잃은 세대’ 등으로 번역되는데, 이로 인해 헤밍웨이는 1차대전 이후의 방황하는 세대를 대변하는 대표 작가가 되었다.
이 말은 당시 그의 멘토였던 거트루드 스타인이 그에게 했던 말을 인용한 것이었다. 나중에 헤밍웨이가 나이가 많이 들어서 쓴 『이동축제일』의 한 부분을 보면, 우리가 ‘로스트 제너레이션’이라는 말을 들을 때 떠올리게 되는 것과는 꽤 차이가 있다. 원래 이 말은 스타인의 승용차 수리점 사장이 차를 제대로 못 고치는 직원에게 “너희는 다 generation perdue야”라고 하는 소리를 듣고, 스타인이 헤밍웨이에게 해준 말이었다. “그대들이 다 그래. 전쟁에 나갔던 젊은 그대들 모두. 그대들은 로스트 제너레이션이야… 뭘 존경할 줄도 모르고. 죽도록 술이나 마시고.” (참고로 거트루드 스타인의 나이는 헤밍웨이의 어머니뻘이다.)
불어의 perdue도 영어의 lost도 ‘잃어버린’, ‘길 잃은’, ‘상실된’ 등의 뜻이 있는데, ‘망쳐버린’, ‘소용없는’, ‘쓸모없는’이란 뜻이 애초 스타인 여사의 말에 가깝다고 할 수도 있다. 헤밍웨이는 이어서 이런 술회도 한다. “나는 미스 스타인과 셔우드 앤더슨과 자기중심주의와 정신적 나태함 대(versus) 수련(discipline)에 대해서 생각해보았고, 누가 누구를 로스트 제너레이션이라고 부르는 것인지 생각해보았다.”
또한 이 책의 9쪽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거트루드 스타인의 말 바로 다음에, 전도서에서 인용한 “한 세대가 가고 또 한 세대가 오건만, 땅은 영원히 그대로다. 태양은 다시 뜨고 다시 지며, 뜬 곳으로 서둘러 돌아간다”라는 말로, 자신의 세대를 옹호하면서, 자신의 첫 장편소설의 제목까지 따온다.
아무튼 이 세대는 전쟁에 나가 세상의, 문명의, 인간 정신의 끝을 목격하고 환멸을 느낀 젊고 예민한 문화예술인들을 말한다. 헤밍웨이, 피츠제럴드, T. S. 엘리엇, 라마르크 등의 작가가 대표적이다.
절제된 냉소, 그것을 조심스럽게 드러내는 감수성의 혁명
소설의 축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세 인물은 1차대전 중 파편에 맞아 성불구자가 된 파리 주재 미국 신문사 특파원 제이크, 프린스턴 대학 출신의 유대인 소설가 콘, 첫사랑의 상처를 가슴에 안은 채 여러 남자들에게 감정을 흘리는 매력적인 영국 귀족 부인 브렛이다. 소설의 배경이 파리임을 상기하면, 세 주인공을 비롯해 소설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물들은 고국을 떠나온 ‘고국이탈자(엑스팻)’이다.
소설의 수면 위를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관계는 제이크와 브렛 애슐리와의 사랑이다. 하지만 제이크는 성불구이기 때문에 육체적 관계를 원하는 브렛의 입장에서 이 사랑은 원초적으로 한계가 있는 비극적인 것이다. 해마다 여름이면 스페인으로 휴가를 떠나는 제이크는 미국인 작가 친구인 빌 고튼과 로버트 콘, 그리고 브렛과 그녀의 약혼녀인 스코틀랜드인 마이클 캠벨과 함께 떠나는 여행을 준비한다. 이 다섯 명의 고국이탈자들이 떠난 여행 중에, 브렛이 콘과 밀월 여행을 다녀왔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갈등이 생겨난다. 한편 브렛이 제이크의 소개로 만난 투우사 페드로 로메로와 사랑에 빠지게 되고, 이를 질투한 콘이 권투선수 출신의 주먹으로 제이크와 빌과 로메로를 쓰러뜨림으로써 여행은 난장판이 되어버린다.
수면 위의 스토리는 그러하지만 이 작품에서 유심히 살펴볼 것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주인공들이 주고받는 냉소적 대화들과 그 짧은 문장 아래 감춰져 있는 절제와 긴장감이라 할 수 있다. 헤밍웨이는 고등학교 졸업 직후 기자로 일했던 <캔자스시티 스타> 생활을 통해, 도시 정치의 부패상, 병원 응급실, 경찰서를 취재하면서, 사람들이 냉소의 가면을 쓰고 살아갈 수밖에 없음을 알게 되었는데, 그 냉소는 “상처받기 쉬운 부분들을 가리는 갑옷” 같은 가면이었다. 헤밍웨이가 상처투성이 고국이탈자들의 내면을 그려내는 방식이 바로 ‘빙산 이론’이라 불리는 그의 하드보일드 문체이다. 헤밍웨이는 그의 책 『하오의 죽음』에서 이렇게 말한다. “작가는 자신이 잘 아는 부분에 대해 생략을 할 수 있는데, 그것을 제대로 할 경우, 독자는 작가가 표현을 한 것 이상으로 강하게 느낄 수 있다. 빙산의 움직임에서 위엄을 느낄 수 있는 까닭은 수면 위에 드러난 부분이 전체의 1/8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다 보여주면 위엄이 없다. 진실의 적은 일부만 효과적으로 드러내면, 글이 더 힘이 있다.” 이 소설은 그의 이러한 빙산 이론 문체가 처음으로 장편소설의 형식 안에서 구현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잃어버린 세대들이 삶의 의미와 질서를 희구하는 치유의 순례기
또한 이 작품은 한 편의 여행기(travelogue)로 볼 수 있다. 크게는 파리에서 생활하는 주인공이 여름휴가 때 축제와 투우와 낚시를 즐기러 팜플로나로 가는 형식을 띠고 있다. 주인공 제이크의 여정은 산티아고로 가는 순례길을 따르고 있는데, 이 작품을 ‘순례 모티프’로 비추어보면 많은 것들이 순례자의 간절한 마음과 겹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작품 배경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파리의 경우, 길이나 지명, 명소, 카페 등에 대한 언급이 아주 구체적인 경우가 많다. 팜플로나에 가서도 마찬가지다. 그 외에도 투르, 보르도, 바욘, 앙데, 산세바스티안, 론세스바예스, 마드리드 등을 거치며, 그 각각에 대한 소개가 많다. 브렛을 둘러싸고 점점 고조되어 가던 인물 간의 갈등은 팜플로나에서 터지고, 결말은 마드리드에서 이루어진다. 그런데 이 모든 지명들이 지금 우리에게도 너무나 유명한 산티아고 순례길로 가는 경유지이자 순례지다.
‘순례’라는 코드는 작품 곳곳에서 워낙 두드러져 보이는데, 이에 대해서는 역자가 책의 해설과 부록을 통해 좀 더 구체적인 분석을 해놓았다. 실제로 헤밍웨이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여러 차례 가보기도 했고, 가톨릭 전통에 상당히 심취했던 작가였다. 단순한 듯하면서 쉽게 한 손에 잡히지 않는, 미로와도 같은 작품이 이 소설이고, 그게 헤밍웨이의 스타일이다. 독자는 작품 곳곳에 작가가 숨겨둔 수수께끼를 풀어나가는 재미를 맛볼 수 있을 텐데, ‘순례 모티프’를 가이드 삼는다면 좀더 흥미롭게 작품을 읽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번 번역본에는 역자가 한국 독자들을 위해 애써 마련한 부록 자료가 있다. ‘순례의 여정’길을 분석한 부록과 더불어, 230여 개의 각주, 헤밍웨이 연보, 그리고 20여 컷의 자료사진 등을 세세히 준비했다. 큰 갈등을 기둥 삼아 전개되는 극적 전개나 스펙터클이 없는 이 고전을 조목조목 읽어내는 데 작은 도움을 주는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다.
<책속으로 추가>
나는 값을 다 치렀다고 생각했다. 값을 치르고 또 치르는 그녀와는 다른 줄 알았다. 응보나 징벌 같은 게 있다는 생각은 못 했다. 가치의 교환만 있는 줄 알았다. 무언가를 포기하면 다른 무언가를 얻는다고 생각했다. 노력만 하면 무언가를 얻을 수 있다고. 조금이라도 유익한 모든 것은 어떤 식으로든 값을 치르고서 얻을 수 있다고. 나는 내가 좋아하는 충분히 많은 것들에 대해 값을 치렀고, 그만큼 즐기기도 했다고. 그런 것들에 대해 배운다거나, 경험을 한다거나, 위험을 무릅쓴다거나, 돈을 들임으로써 값을 치렀다고 생각했다. 본전 찾는 법을 배운다는 것, 그리고 본전 찾은 줄을 안다는 것이라고. 본전을 찾을 수 있다고. 세상은 잔뜩 사들이기 좋은 곳이라고. 나는 그렇게 생각했고, 그게 그럴듯한 철학처럼 여겨졌다. 5년 뒤면, 나의 다른 그럴듯한 철학들이 다 그랬듯 어리석어 보일 테지만 말이다.
내 생각과 달랐는지도 모른다. 겪어가면서 정말 무언가를 배운 건지도 모른다. 그것의 본질이 무엇인지는 내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내가 알고 싶었던 건, 그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느냐는 것뿐이었다. 그 속에서 살아가는 법을 발견했다면, 그것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 203~204쪽
로메로에겐 뒤틀림이 전혀 없었다. 그의 몸놀림이 그리는 선은 언제나 곧고 깨끗하며 자연스러웠다. 다른 투우사들은 코르크를 뽑는 나사처럼 몸을 비틀었고, 팔꿈치를 들었으며, 소가 지나가면 소의 옆구리에 기댐으로써 위험해 보이는 시늉을 했다. 그런 속임수는 결국 가짜로 드러나기 마련이며, 불쾌한 느낌을 주었다. 로메로의 투우는 순전한 감동을 주었다. 왜냐하면 그는 동작의 선을 언제나 깨끗하게 유지했고, 매번 소의 뿔이 그를 아슬아슬하게 비껴가게 하면서도 차분하고 평온한 인상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아주 근접해서 소를 상대한다는 느낌을 주려고 동작을 과장할 필요가 없었다. -- 229쪽
“브렛 어딨어?” 콘이 물었다.
“몰라.”
“너랑 같이 있었잖아.”
“자러 갔겠지.”
“아냐.”
“어디 있는지 난 몰라.”
조명 아래에서 콘의 얼굴은 흙빛이었다. 그는 계속 서 있었다.
“어디 있는지 말해.”
“앉아.” 내가 말했다. “나는 모른다니까.”
“모르긴 뭘 몰라!”
“잠자코 계시지그래.”
“브렛이 어디 있는지 말해.”
“그딴 소리 하고 싶지 않아.”
“넌 알고 있어.”
“알아도 말 안 해.”
“어이, 지옥에나 가버려, 콘.” 마이크가 테이블 맞은편에서 말했다. “브렛은 투우사 친구랑 어디 갔어. 둘은 허니문 중이야.”
“닥쳐.”
“허, 지옥에나 가!” 마이크가 나른하게 말했다.
“맞는 말이야?” 콘이 나를 보며 말했다.
“지옥에나 가!”
“너랑 같이 있었잖아. 딴 데 간 게 맞아?”
“지옥에나 가!”
“말하게 만들어주지.” 콘이 다가오며 말했다. “이 더러운 포주야!”
나는 한 방 휘둘렀고, 그는 홱 피했다. 조명 아래, 그의 얼굴이 옆으로 쓱 비켜나는 게 보였다. 그는 나를 쳤고, 나는 인도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일어서려고 하자, 그는 나를 다시 쳤다. 나는 뒤로 나자빠지며 테이블 밑에 처박혔다. 일어서려고 했지만, 다리가 없어져버린 느낌이었다. -- 259~261쪽
그 정도면 될 것 같았다. 그런 것인가. 한 여자를 딴 남자와 떠나보내고. 그녀를 또 다른 남자와 떠나보내고. 이제 그녀를 데리러 가다니. 그리고 사랑한다며 전보를 보내다니. 아무튼 그렇게 되고 말았다. 나는 점심을 먹으러 갔다. -- 326쪽
“아, 제이크.” 브렛이 말했다. “우리 함께 정말 잘 지낼 수도 있었을 텐데.”
앞에서는 카키색 제복 차림의 기마경찰이 교통정리를 하고 있었다. 그는 경찰봉을 들어 올렸다. 차가 갑자기 속도를 늦추자 브렛이 내게 밀착됐다.
“그래.” 내가 말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게 좋겠지?” -- 336~337쪽
“그대들은 모두 잃어버린 세대이니.”
- 거트루드 스타인(저자와의 대화 중에서)
“한 세대가 가고 또 한 세대가 오건만, 땅은 영원히 그대로다.
태양은 다시 뜨고 다시 지며, 뜬 곳으로 서둘러 돌아간다.
바람은 남으로 갔다가 북으로 돌이키며, 빙빙 돌고 돌아 그 가던 길로 돌아온다.
모든 강은 바다로 흐르지만 바다는 넘치지 않으며, 강물이 비롯된 곳으로 돌아간다.”
- 전도서(1:4~1:7)
-- 9쪽
로버트 콘은 한때 프린스턴 대학의 미들급 복싱 챔피언이었다. 내가 권투 타이틀에 대단한 인상을 받았다고 생각진 마시기 바란다. 하지만 콘에겐 그게 퍽 중요했다. 그는 권투를 좋아한 게 아니었다. 싫어한다고 할 정도였다. 그런 그가 권투를 괴로워하면서도 철저히 배운 건, 프린스턴에서 유대인 취급을 당하면서 느낀 열등감과 수치심을 극복하기 위해서였다. 자신을 업신여기는 자는 누구든 때려눕힐 수 있다고 확신하는 게 어느 정도 위안이 되었던 것이다. -- 13쪽
그녀(브렛)는 잔을 들고 서 있었고, 나는 그녀를 바라보는 로버트 콘을 보았다. 그는 그의 동포가 약속의 땅을 봤을 때 지었음 직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물론 콘은 훨씬 젊었다. 하지만 기대감 충만하고 자격이 있다는 듯한 표정은 꼭 그대로였다.
브렛은 더없이 맵시가 좋았다. 저지 스웨터에 트위드 스커트, 그리고 소년처럼 짧은 머리를 뒤로 빗어 넘긴 차림이었다. 전부 그녀가 시작한 것이었다. 그녀는 경주용 요트의 동체 같은 곡선들을 갖추고 있었고, 딱 붙는 저지 스웨터라 그런 선이 고스란히 다 드러났다. -- 36~37쪽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해묵은 유감이었다. 이탈리아 같은 시시한 전방에서 큰 부상을 당했다는 것부터가 한심한 노릇이었다. 나는 온몸이 붕대투성이였다. 대령은 나에 대한 얘기를 듣고 와서 대단한 발언을 했다. “외국인이, 영국인이.” (외국인은 무조건 영국인이었다.) “목숨보다 더한 걸 내놓았구려.” 경이로운 말씀! 금문자로 장식을 해서 사무실 벽에 걸어뒀으면 좋겠다. 그는 웃지도 않았다. 내 입장이 되어본 모양이었다. “케 말라 포르투나(참 안됐어)! 케 말라 포르투나!”
그땐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 같다. 나는 사람들에게 문젯거리가 되지는 않으려고 맞춰가며 지냈다. 영국으로 후송되어 브렛을 만나게 되지 않았더라면, 아무 문제도 못 느꼈을지 모른다. 그녀는 가질 수 없는 것만을 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뭐, 사람들이 대개 그렇긴 하다. 사람들하곤. 가톨릭교회는 그런 문제를 참 잘도 다룰 줄 알았다. 훌륭한 조언이긴 했다. 마음 쓸 것 없다니. 정말 대단한 조언 아닌가. 언젠가 받아들여 보라니. 받아들여 보라. -- 48~49쪽
“그대는 고국이탈자야. 땅과의 접촉을 상실했어. 너무 고급이 돼버렸고. 가짜 유럽 표준 때문에 망쳐버렸어. 죽도록 술 마시고, 섹스에 사로잡히지. 일은 안 하고 말만 하면서 시간을 다 보내. 그런 고국이탈자 맞지? 이 카페 저 카페 전전하고 말이야.” -- 158쪽
첫댓글 어네스트 헤밍웨이 지음 / 역자 이한중 옮김 / 역자평점 7.6 / 출판사 한겨레출판사 | 2012.0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