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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요9:1-35절
제목 : 주님을 만난 사람은
1. 역동적인 신앙생활
여러분! 지금이 어떤 계절입니까? 봄입니다. 봄은 계절의 여왕으로서 그 생동감과 역동성으로 우리에게 새로운 소망을 주는 계절입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가장 그 생명의 역동적인 모습을 드러내는 계절이 바로 봄입니다.
그런데 목회자로서 저는 요사이 큰 고민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저나 우리 지체들의 신앙생활에 역동적인 모습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 감격이 있고 은혜가 있는 사람의 특징은 그 삶에 생기가 있고 역동적인 에너지로 충만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늘 입술에 찬양이 있고 감사가 있습니다. 뭘 해도 에너지가 넘쳐납니다. 그러나 역동성을 잃은 사람은 늘 뭔가 아쉬움이 남습니다. 왜 그런지 힘이 없고 입술에 찬양과 감사가 약해집니다. 왜 이렇게 되는 것입니까? 신앙생활의 매너리즘이라는 반갑지 않은 손님은 왜 그렇게 우리를 자주 찾아오는 것입니까? 그리고 어떻게 하면 이 반갑지 않은 매너리즘으로부터 다시 역동적인 신앙생활의 기쁨을 회복할 수 있습니까? 오늘 우리는 주님을 만난 소경에게서 그 답변을 듣게 됩니다.
오늘 본문 요9:1-2절에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부분적인 소경이라는 사실을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들이 소경입니까? 한 사람의 세계관은 그가 몸담고 있는 사회, 문화와 긴밀한 관계를 갖게 됩니다. 따라서 사회와 문화를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면 내가가진 세계관을 객관화 시킬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문화와 전주라는 지역사회를 올바르게 이해해야 우리가 견지하고 있는 세계관을 객관화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 역시 그 사회에서 세계관을 형성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소경이 된 것은 부모의 죄나, 자신의 죄 때문이라는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세계관은 욥의 세 친구들이 견지했던 인과 응보적 세계관이었습니다. 물론 성경은 죄가 세상에 고통을 유발시키는 원인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원리가 개인에게 적용될 때는 달라집니다. 우리 주변에는 엄청난 죄를 짓고 살아가고 있음에도 아무런 고난 없이 행복하게 살고 있는 사람이 많고, 또한 엄청나게 선한 사람이 지속적인 고난 가운데 신음하는 경우를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제자들처럼 지나치게 단순화하게 될 경우 모든 삶의 문제는 업보의 문제로 환원됩니다. 이렇게 되면 가계의 흐르는 저주를 끊기 위해서 축사를 해야 하고 인격적인 하나님이 징계하신다는 개념은 설 곳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의 세계관을 바로잡아 주십니다. 이 사람이 소경이 된 것은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시고자 하심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표적의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이적은 대단히 많습니다. 마가복음에만 기록되어 있는 이적 사건을 조사해도 약 40가지 정도나 됩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는 일곱 가지만 선별해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표적이라고 sign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이 표적이라는 말 대신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시고자 소경이 되게 했다고 설명하십니다.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는 곳에 죄의 증상들이 물러가고 회복과 기쁨, 감사와 찬양이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소경은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냥 육체적인 질병인 눈만 뜬 것이 아니라 영적인 눈을 뜨고 주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했습니다. 그가 주님을 만났을 때 그 삶은 달라졌습니다. 삶의 정황은 어쩌면 더 어려워졌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삶에는 역동성으로 가득했습니다. 기쁨과 감사로 가득했습니다. 새로운 소망으로 가득했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 소경의 모습 속에서 오늘 우리 삶에 사라져버린 신앙생활의 역동성을 되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2. 소경에게 비춰진 빛
주님은 때가 아직 낯이기 때문에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일이 무엇입니까? 어두움의 세상에 빛을 비추는 일입니다. 내가 세상에 있을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그 빛을 소경에게 비춰주시기 위해서 이 표적을 행하시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설명하신 것입니다. 소경에게 비춰진 빛은 물리적인 빛만이 아닙니다. 소경은 단지 육체적인 소경에서 치유를 받은 것이 아니라 영적인 어두움으로부터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두움의 세상으로부터 출교를 각오하고 빛이신 주님에게로 나온 것입니다. 이 사건은 바로 이 소경이 참된 눈을 뜨게 되었다는 의미에서 표적이라는 것입니다.
자 그럼 이제 소경에게로 주목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본문의 소경은 주님께 낫게 해달라고 간청을 했다든지 아니면 어떤 믿음에 찬 행동을 먼저 보여준 것이 없습니다. 다만 제자들이 괜히 가만히 있는 소경을 편견에 찬 눈으로 바라보면서 소경은 듣지도 못하는 것처럼 부모의 죄냐 자신의 죄냐고 물은 것에서 사건이 시작된 것입니다. 여러분! 보지 못한다고 듣지 못하는 것은 아님에도 제자들은 사려 깊지 못하게 행동하고 있습니다. 아마 이것은 당시 사회적인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소경에 대해서 그렇게 홀대했던 사회이기 때문입니다.
그 소경에게 주님이 하신 일은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 못가에 가서 씻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왜 주님은 말로 그냥 치유하실 수도 있었음에도 침을 뱉아 자신이 직접 개셔서 바르고 가서 씻으라는 여러 행동을 하게 하셨을까요? 우선 소경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육적인 눈이 떠지는 경험을 하도록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곳에서 실로암까지는 약 2km가 되는 길이었습니다. 소경이 반드시 눈을 뜨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갔을까요? 아마 그렇지는 않았을 듯이 보입니다. 날 때부터 소경이었고 그런 소경이 눈을 떴다는 것은 어디에도 없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소경에게 문제는 2km를 가서 씻느냐의 문제였습니다. 아마 그가 아예 가지 않았다면 그의 삶에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소경이 육체적인 눈을 뜨고 영적인 눈을 뜨게 된 것은 그가 주님 말씀에 순종하고 가서 씻었기 때문입니다.
평생 처음으로 밝은 빛을 보게 된 소경이 한 달음에 달려 다시 주님께로 옵니다. 사람들이 수군거립니다. 특히 전에 구걸하던 그를 알았던 사람들이 반신반의하면서 그 사람이라 아니라 갑론을박합니다. 그러자 소경이 내가 그 사람이라고 답변합니다. 그때 소경이 뭐라고 대답합니까? 여기서 호칭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소경의 인식의 변화가 호칭에 잘 나타나 있기 때문입니다. 11절입니다.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평생 소경으로 있던 사람이 눈 뜬것에 기뻐하지 못하고 그를 바리새인에게 데리고 갔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에게 간증하면서 호칭이 어떻게 바뀝니까? 17절입니다.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고 묻자 “선지잡니다.”그럽니다. 예수라는 그 사람에서 선지자로 변한 것입니다. 첫 번째 간증과는 조금 다른 모습입니다.
24절에 바리새인들은 다시 소경을 불러 다그칩니다. “너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는 저 사람이 죄인인줄 아노라” 이 말이 무슨 의미입니까? 앞에 부모들의 문제가 무엇이었습니까? 부모들은 올바른 답변을 알고 있었지만 무엇이 두려워서 올바른 답변을 하지 못했습니까? 출교가 무서워서입니다. 22절을 보십시오.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부모가 알고 있는 예수는 그리스도, 즉 메시아입니다. 그렇게 알고 있지만 출교가 무서워서 자식에게 물어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자 소경이 뭐라고 답변합니까? 세 번째 간증에서는 또 다시 영적인 눈을 떠가고 있습니다.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지만 내가 분명히 아는 것은 내가 소경으로 있다가 지금은 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30절에 말하기를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이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도다.”그럽니다. 이 말은 소경은 자신의 눈을 뜨게 하신 분이 어디서 왔는지 안다는 말이 아닙니까? 그 답변이 31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죄인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그럽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죄인의 기도를 들으시고 죄인을 통해서 나처럼 나면서부터 소경된 사람을 눈뜨게 하는 일을 나타내시겠습니까? 하나님은 경건한 사람의 기도를 들으시는 줄 알고 있습니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죄인이지만 나의 병을 고쳐 준 그 분은 경건한 사람입니다. 경건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어주신 것으로 압니다.”라는 뜻입니다. 여기에 기묘한 역설이 있습니다. 소경이었던 이 사람은 점점 육체적인 눈을 떳을 뿐만 아니라 영적인 눈을 떠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눈을 뜨고 있는 사람들은 그 분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처음부터 부인하고 지금도 명백한 사실 앞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협박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소경은 이 사건을 통해서 무엇을 봅니까? 진실을 봅니다. 진리를 봅니다. 아! 이 사람들의 경건이 무늬만 있는 부정직한 것이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왜 자꾸 묻느냐? 당신들도 그의 제자가 되려고 합니까?”라는 조롱 섞인 질문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소경이 어떻게 변해갑니까? 창세 이후로 소경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주님이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고백입니다. 그 고백을 하고 그는 출교 당했습니다. 34절에 쫓아 보냈다는 말은 부모들이 그렇게 두려워했던 출교를 당하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3. 네가 나를 믿느냐?
그런데요? 이 사람이 출교를 당해서 어려운 처지에 놓였을 때 누가 그를 만나줍니까? 주님이 그에게 찾아오셔서 만나주십니다. 출교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가장 무서운 것입니다. 회당 명부에서 제명되며 때려 죽여도 할 말이 없는 사람이 바로 출교된 사람입니다. 그래서 소경의 부모는 출교가 무서워서 진실을 말하지 못했습니다. 이 말은 누구도 그를 도울 사람이 없는 상황이라는 말입니다. 차라리 소경이었을 때는 많은 사람으로부터 동정을 받았는데, 눈을 뜨고 나니 핍박이 있고 여러 가지 문제가 많았습니다. 이 어려운 때 예수님께서 저를 만나 주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저는 이것이 은혜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주님 앞에 거짓 없는 경건으로 살아가려는 사람, 그 이름을 위해서 기꺼운 마음으로 핍박을 받는 사람, 믿음으로 살기 위해서 손해를 감수하는 사람을 주님이 만나주십니다. 오늘 주님이 만나주시는 사람 역시 우리시대를 말씀으로 살기 위해서 손해를 감수하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사람들에게 주님의 위로가 풍성할 것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세미한 음성이 그들을 만나주시고 위로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35절에 주님이 이제는 소경이 아닌 그 사람을 향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네가 인자를 믿느냐?” 그러자 그 사람이 뭐라고 대답합니까? 주여 그가 누구입니까? 내가 믿고자 합니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아직 이 사람은 복음을 올바르게 알지 못합니다. 표적이 먼저입니다. 그 표적이 이 사람으로 믿음에 이르게 했습니다. 그런 후에 그를 말씀으로 인도해 갑니다. 그래서 올바른 신앙고백에 이르도록 주님이 가르치십니다.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이미 소경은 31-33절에서 하나님께로 난 사람이 아니라면 이런 일을 할 수 없다고 사실상 신앙고백을 하였습니다. 이제 주님이 그를 만나 그 믿음의 방향을 올바르게 그리스도에게로 고정시키도록 가르치십니다. 그럴 때 소경이 어떻게 행동합니까?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면서 절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절했다는 말은 단순히 생각하는 인사가 아닙니다. 최상의 경배입니다. 찬양입니다. 감사입니다. 신앙고백입니다.
소경은 외롭고 소외당하고 캄캄한 어둠의 삶에서 구원받았습니다. 영적인 눈을 떴습니다. 출교당해 두려울 때 만나주시는 주님을 경험했습니다. 이제 그의 삶은 달라졌습니다. 지금 그는 생명의 위협이 있고 어쩌면 과거보다 더 어려운 삶이 이어질지 모르는 상황가운데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경배합니다. 높여드립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는 값진 진주를 발견하고 모든 소유를 팔아 샀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의 삶에 이런 감격이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 눈먼 소경과 눈뜬 소경
이제 믿음을 고백하는 그 사람에게 주님이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39입니다.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일단 심판하러 오셨다는 말씀을 주의해서 보실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심판이 무엇입니까? 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는 것이 심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지 못하는 소경은 보게 되었습니다. 무엇을 보게 되었습니까? 그가 눈을 떠서 세상을 보게 된 것보다 본문이 더 중요하게 말씀하고 싶어 하는 것은 눈뜬 사람들, 표적과 기사를 다 목도한 사람들도 보지 못한 그리스도를 보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섯 번째로 기록된 표적의 의미입니다. 반면 스스로 본다고 굳게 믿고 있는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여전히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뭐라고 합니까? “우리도 소경인가?”그럽니다. 우리는 소경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헬라 사람들에게 있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깜깜한 밤에 장님이 등불을 들고 길을 갑니다. 자기는 장님이라 등불이 필요 없지만, 가다가 다른 사람하고 부딪치면 괴로우니 등불을 켜고 길을 가는 것입니다. 이 불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고 여기 불이 알아서 피해 가라고 준비한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를 가다가 그만 부딪치고 말았습니다. 이 때 장님은 자신 있게 한 마디 합니다. "이 사람아, 눈이 없나? 이 등불이 보이지도 않소?" 그러자 이쪽 사람이 말하기를, "당신이 등을 가지고 있는 줄은 몰라도 불은 꺼진지 오래 됐소"라고 말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꺼진 등불을 들고 있으면서 등불이 꺼진 것조차도 모르는 사람이 바로 소경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도 소경인가라고 묻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어떤 상황입니까? 꺼진 등불을 들고 다른 사람을 핀잔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등불이 보이지 않느냐고 말입니다. 안식일을 왜 지키지 않느냐고 말입니다. 이들은 나는 옳게 믿고 있다, 나는 경건한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속이면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사람들입니다. 주님보다 돈을 더 사랑하고 경건의 모양을 경건이라고 생각하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이름을 내고 드러내는 일에 모든 관심을 쏟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이들에게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차라리 소경이 되었다고 한다면 죄가 없을 테지만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본다고 하는 것! 나는 본다고 굳게 믿고 있는 것이 이들이 소경됨을 더욱 굳게 만들더라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어떤 사람은 본다고 하기 때문에 정말 보아야 할 것은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에 빠져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보지 못한다고 겸손한 자세를 가지므로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안다고 하기 때문에 사실은 부지중에 자기 무식을 폭로합니다. 그러나 모른다고 하는 사람, 겸손한 사람,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많은 것을 보게 되고 알게 됩니다. 모르고도 아는 척하거나, 모른다고 하는 사실조차도 모르는 사람들이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장님도 어렵지만 장님이라는 것까지 모르면 어찌 되겠습니까? 이것은 치유할 방법이 없습니다. 이것이 훨씬 심각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5. 주님을 만난 사람은
오늘 소경은 예기치 않은 시간에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세 번의 반복되는 간증을 통해서 소경은 스스로 점점 확신을 향해 나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가 확신에 섰을 때 그는 출교라는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요8:12절을 기억하십니까?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름은 치러야할 값에 초점이 맞추어진 말입니다. 따르기 위해서는 값을 지불해야 합니다. 따르기 위해서는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는 단호한 순종이 필요합니다. 이것을 8:39절에서는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역시 아브라함의 행사에 있어서 첫 번째 자리는 단호한 따름이었습니다. 순종이었습니다. 값을 지불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눈을 뜨는 은혜를 입은 사람은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출교라는 값을 지불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무엇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습니까? 그가 주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만나면 사람이 변합니다. 주님을 만나면 다른 기쁨으로 삶이 충만해 집니다. 주님을 만나면 기꺼운 마음으로 값을 지불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값진 진주라는 사실을 알면 아깝지 않게 값을 지불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과거나 지금이나 주님을 따르는 삶에는 고난과 박해가 있습니다. 손해를 보아야 합니다. 거룩을 추구하는 삶에는 고난이 있습니다.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세상과 단절하는 일은 고통을 동반합니다. 그러나 성도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때 주님이 그를 만나주십니다. 그리고 위로해 주십니다. 더 큰 확신으로 그를 인도해 가십니다. 출교를 당한 아픔 가운데 있는 그 사람을 주님이 만나주셔서 그를 더 깊은 신앙의 세계로 인도해 주십니다. 이것이 성도에게 주시는 은혜입니다. 날마다 말씀하시는 은혜를 경험한 성도만이 지속적으로 성도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기쁘게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절하는 소경의 감격을 맛보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을 만난 사람의 감격이 절하는 소경의 모습 속에 나타나고 있는 것처럼 나를 만나주신 주님 때문에 감격하시기 바랍니다. 내게 말씀하시는 주님! 내가 가장 힘들고 어려울 때 나를 찾아와 손을 내미시는 주님 때문에 행복하다고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날마다 내게 말씀하시고 나를 만져 주시는 주님 때문에 나는 찬양할 수밖에 없다고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 신앙생활이 힘이 없고 감사와 감격이 없는 이유는 날마다 주님을 만나는 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나를 만져주시는 그 기쁨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날마다 주님을 만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외롭고 어두운 내 삶에 찾아오셔서 기꺼운 마음으로 우리의 짐을 대신 져주시는 주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대신 감당해 주시는 주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그 주님을 만나시는 유일한 길은 말씀 앞에 서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내 삶을 바꾸는 경험을 할 때 우리는 주님의 만져주심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만난 사람은 이 새봄처럼 그 삶에 기쁨과 감사, 역동적인 에너지로 가득할 것입니다. 오늘 주님을 만나셔서 그 기쁨으로 삶을 채우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출처] 주님을 만난 사람은(요9:1-41절)|작성자 꾸준함의 능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