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룡(1920년 ~ 1956년)
김창룡(金昌龍)은 일제 강점기 때 일본군이며 대한민국의 군인으로 호는 옥도(玉島) 함경남도 영흥군 요덕면 임상리에서 1920년 11월 23일 농부의 아들로 출생했다.
김창룡은 덕성보통학교 4학년을 졸업하고 함경남도 영흥공립농잠실습학교 2년 과정을 마친 후 일본인이 운영하는 실크공장인 가다쿠라제사에 취직을 하고
2년을 다니다가 만주로 건너가 남만주철도 주식회사 창춘역에서 근무를 하다가 1940년 일본인의 소개로 중국 지린성 창춘시에 있는 관동군 헌병교습소에 입소했다.
1941년 4월 관동군 헌병교습소 교육을 마친 김창룡은 헌병 이등병으로 헌병 보조원 근무를 하다가 그해 10월 일본군 아마카스 사단 헌병대에 배속되고 만주 최북단 소련과의 국경지대인 소만에 배속되고 중국공산당과 소련공산당의 첩보를 수집했다. 1943년 상해로 파견되어 싱안성(興安省 : 흥안성)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중국공산당 간부 왕진례(王近禮)를 체포하고 왕진례가 이끌던 비밀 조직을 일망타진하는 성과를 올리고 그 공으로 싱안성 지역의 헌병 대장으로 특진되고 상해일원에서 활동하던 항일조직을 적발하고 독립투사들을 체포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이되자 고향인 함경남도 영흥으로 귀국하자 그를 알아본 사람의 밀고로 소련군에게 전범으로 체포되어 구금되고 일본군 헌병 오장(伍長) 출신이라고 사형을 선고 받았으나 감옥에서 탈출했다.1946년 몰래 월남하고 마땅한 일을 찾지못하던 김창룡은 전라북도 이리에서 국군 제3연대 신병으로 입대하여 군사교육을 마친 그는 제3연대 정보요원으로 배속되었다.
1947년 조선경비사관학교 제3기로 입교하여 그해 졸업하고 육군 소위로 임관하였다.
일제 시대에 일본군 헌병 첩보 부대에서 근무한 경력을 인정받고 한국군 육군 제1연대 첩보부대 소대장으로 배속되었다. 첩보부대 소대장으로 배속받은 김창룡은 군부 내 좌익인사들을 감시하여 남로당 군사총책인 이재복과 이중업을 체포하고 남조선노동당 서울지도부 책임자 김삼룡과 남조선노동당 중앙위원 이주하 등을 체포하였다.
그외 이승만과 대립하던 광복군 출신이며 조선경비대 초대 총사령관과 육군 총사령관을 지낸 송호성 장군을 용공 세력으로 몰아서 체포했다.
1948년 육군 대위로 승진하여 육군본부 정보국 정보장교를 지내고 1949년 1월 방첩대(현 기무사령부) 대장을 지내면서 좌익세력을 색출하고 그해 10월 여,순사건이 일어나자 토벌사령부 작전장교를 지내면서 좌익 군인을 색출하고 숙청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과정에서 남로당 출신인 박정희 소령을 체포하고 심문을 하고 조서를 꾸미자 정보국장 백선엽 대령이 박정희 소령을 풀어주라고 압력을 가하자 김창룡은 박정희 소령을 풀어주었다.
그해 12월 국방부 장관 이범석의 군사정보
행정특보보좌관을 지내고 다음해인 1949년 1월 방첩대장으로 진급하고 그해 6월 26일 방첩대 소속 안두희 중위가 한국독립당 당수 김구 선생을 암살하는데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를 받고 배후에서 조종하고 지원하였다.
※(사회운동가 권중희씨는 1987년 부터 늙어서 생활 능력이 없는 안두희를 물심양면으로 보살피면서 여러차례 김구선생을 저격하는데 배후세력을 이야기하라고 회유하자 1992년 4월 안두희는 자신은 하수인에 불과하며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를 받은 육군 소장 김창룡이 시켜서 한 일이라고 털어놓았다.)
1950년 6월 25일 한국동란이 일어나자
김창룡은 부산 육군특무대(CIC : 방첩대) 대장으로 임명되고 그해 7월 29일 북한군에 동조했다는 이유로 경상남도 진주시 명석면 우수리 갓골과 밀밭골, 솔밭골 등에서 100여 명의 농민을 학살하는 것을 시작으로 진주시 전역에서 빨갱이를 색출한다는 명분으로 수천명의 양민을 학살하였다.
1950년 9월 18일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이 수복되자 김창룡은 빨갱이들에게 부역을 한 부역자를 가려내고 처벌하는 군검경 합동수사본부 본부장을 맡았다.
연합군이 평양을 함락하자 김창룡은 군,검,경 합동수사본부 본부장 겸 평양지구 특무대장을 지내다가 1951년 1월 4일 연합군이 부산으로 후퇴를 하자 부산으로 따라내려간 김창룡은 군,검,경 합동수사 본부 본부장을 지내면서 이승만 대통령의 신임을 받고 직접 보고할 수 있는 직통 보고 라인을 가추면서 막강한 권력을 지니게 되었다.
1953년 5월 김창룡은 육군 준장으로 진급하고 그해 7월 27일 북미휴전협정이 체결되자 이승만의 신임을 받던 김창룡은 각종 공안 사건을 처리하면서 이승만의 반대파를 축출하는 계기로 삼기 시작하였다.그러자 이승만은 그런 김창용에게 군과
검찰, 경찰의 합동수사본부장을 맏기자
김창룡은 자신의 실적을 올리기 위해서 각종 간첩 사건을 대부분 허위로 처리하던 중에 평소에 자신과 사이가 좋지않던 육군 정보국장 김종평 대령이 병력을 동원해서 국가 중요 요원을 감금하고 국회부의장 조봉암을 대통령으로 추대한다고 뒤집어 씌워서 군법회의에 회부시키고 징역 3년형을 선고받게 하였다.
1955년 김창룡은 이승만 암살 음모 사건을 조작했는데 일제치하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나재하, 김병호, 민영수, 김재호, 이범륜, 유성연, 김동훈 등에게 김창룡이 매수한 이종태를 접근시켰다.
독립투사들에게 접근한 이종태는 그들과 친하게 지내는 사이가 되자 이승만을 비판하면서 "나라 꼴이 이래서는 안된다면서 도탄에 빠진 국민들을 구하기 위해서는 이승만을 제거해야 한다.라고 하면서 1955년 10월 3일 개천절 행사 때 수류탄을 투척해서 이승만을 죽이자고 하고는 수류탄을 건네주고는 개천절 행사장에서 기다리고 있던 특무대 요원들은 독립투사들은 체포하였다.
그 외에도 여러 간첩사건을 조작하고 많은 사람들이 형장에서 사형을 당하게 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김창룡의 음모로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자 육군참모총장 정일권과 육군 제2군사령관 강문봉은 더는 두고만 볼수가 없어서 이승만 대통령을 찾아가서 김창룡으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죽는다고 김창룡을 다른 직책으로 배속을 시키던지 아니면 미국으로 유학을 보내달라고 건의하자 이승만은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정일권과 강문봉이 자신을 좌천 시킬려고 한다는 소식을 들은 김창룡은 그 무렵 원면(原綿 : 가공하지 않은 목화솜) 비리 사건을 정일권과 강문봉에게 뒤집어 씌우기도 하였다.
※[원면사건(原綿事件) 한국동란 이후 미국은 한국군 방한복을 만드는 데 쓰라고 1등급 목화솜을 무상으로 공급했는데 군 고위층 내부에서 방직회사 사장과 짜고 방직회사에서 천으로 만들기 위해서 수입한 인도산 3등급 목화솜과 미국에서 공급한 1등급 목화솜을 바꿔치기하고 그 차액을 착복하면서 일부를 정치자금으로 이기붕 국회의장에게 건네고 김창룡에게도 뇌물로 건넨 사건]
김창룡은 군장교들을 승진시키면서 수천만환의 뇌물을 받고 백금으로 만든 계급장과 벨트를 받고 금으로 만든 군복의 단추를 뇌물로 받는등 많은 돈을 챙겨서 1955년 당시 그의 재산은 1억환 정도였다고 한다.
김창룡은 일본 경찰 출신인 육군 제2군 소속 육군범죄수사단 대장을 지내던 노덕술 중령이 이승만 대통령의 신임을 받자 잠재적 경쟁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이를 시기해서 노덕술이 군수물자를 빼돌린 정황을 포착하고 1955년 11월 뇌물수뢰 혐의로 체포하고 육군중앙고등군법회의에 회부하여 징역 6개월을 언도받고 파면시켰다.
그무렵 육군 제2군 사령관 강문봉 중장과
육군본부 정병감 이진용 대령, 육군 사령부 참모장 허태영 대령은 1955년 10윌 김창룡은 자신의 영달을 위해서 군대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면서 월권을 행사하고 아무런 관련도 없는 군인들을 사건에 연류시키고 죽이면서 군내부에 불안을 조장했다는 이유로 김창룡을 사살하기로 하였다.
허태영 대령은 자신의 운전병 이유회 일등중사와 육군본부 제12범죄수사대 대장 안정수 소령, 허태영 대령의 동생 헌병 중위 허병익, 국회의원 도진희, 민간 정보원 신초식과 송용고 등을 포섭하고는 허태영은 송용고와 신초식에게 각각 권총 1정씩을 넘겨 주었다.
1956년 1월 30일 오전 7시 30분 용산구 원효로 1가 육군 특무대장 김창룡이 출근을 하는데 송용고와 신초식은 지프차의 앞을 가로 막고는 송용고가 권총 2발을 신초식이 권총 3발을 각각 발사해서 김창룡을 사살하였다.
김창룡이 사살 당했다는 보고를 받은 이승만 대통령은 김창룡의 시신이 있는 적십자병원을 찾아가서 시체를 살펴보고는 그자리에서 애도하는 담화문을 발표하고 김창룡을 육군 중장으로 추서하고 빠른 시일 내에 범인을 체포하라고 명령을 내리고는 3번이나 조문을 하였다.
이승만의 명령을 받은 특무대는 전군에 휴가와 외출 금지령을 내리고 전군에 비상경계망을 내리고 김창룡을 죽인 범인을 색출하기 시작해서 한달 후에 관련자 전원을 체포했다.1957년 9월 24일 허태영과 이유회는 대구 육군정보학교 야외훈련장에서 총살형으로 생을 마감하셨다.
1956년 2월 3일 김창룡의 장례식은 이승만의 지시로 대한민국 최초로 국군장으로 치뤄지고 모든 군부대는 조기를 게양하였다.
이승만은 장례식에 사람을 보내서 조문을 하고는 "김창룡 중장은 나라를 위해서 순국한 것이며 충령의 공을 세운 것이다"라는 조사를 직접써서 보냈다.
묘지는 1956년 경기도 안양시 석수동에 안장했다가 1998년 대전 현충원 장군 묘역으로 이장하였다.
(이승만이 묘명(墓銘)을 쓰고 친일 역사학자 이병도가 묘비문(墓碑文)을 쓴 안양시 석수동에 있던 김창룡의 묘비석)
[그 사람됨이 총명하고 부지런하며 또 불타는 조국애와 책임감은 공사를 엄별하여 직무에 진수하더니 급기야 그 직무로 죽고 말았다. 아! 그는 죽었으니 그 흘린 피는 전투에 흘린 그 이상의 고귀한 피였고 그 혼은 기리 호국의 신이 될 것이다. 한국동란 중에는 군검경합동수사 본부장으로 활동을 하며 간첩과 북한군에 동조한 부역자 등을 검거하고 처단한것이 근 2만5천 명이나 되었다.]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은 김창룡을 친일파 708인 명단에 올렸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는 김창룡을 친일 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올렸다.
(대전 현충원 장군 묘역에 있는 김창룡 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