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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10일 [주님 공현 대축일 후 금요일]
루카 5,12-16
은총을 얻기 위해 조건을 거는 일은 괜찮을까?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나병환자를 치유해주시는 내용입니다.
나병환자는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신앙고백을 합니다.
예수님은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병만 고쳐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나병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사람에게 ‘율법의 준수’를 강조하십니다.
마치 율법을 준수하지 못했기에 나병에 걸린 것이라는 느낌까지 듭니다.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령한 대로 네가 깨끗해진 것에 대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
치유는 회복입니다.
그런데 치유해주실 수 있는 분은 만드신 분일 수밖에 없습니다.
고장난 자동차를 원숭이가 고칠 수는 없습니다. 만든 인간만이 고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고치는 인간은 앞으로 그 자동차가 망가지지 않게 만들어진 법칙대로 사용되기를
원하십니다.
만약 병원에 가서 피부병약을 짓고 의사가 술은 절대 마시면 안 된다고 하는데 계속 마시겠다고 하면 약을 지어줄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더 해로워질 수 있습니다.
치유와 순종은 이 세상에서도 하나로 엮여있습니다.
순종하기 싫어하는 이유는 치유도 일어날 수 없습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만약 치유와 같은 은총을 청하면서 주님의 뜻에 더 순종하겠다고
약속을 하면 치유가 더 빨리 일어나지 않을까?’ 그러면서도 ‘주님께서 은총을 주시는데 그러한 조건을 다는 게 굳이 필요할까?’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주님은 치유를 통해 순종을 배우게 하심으로 순종을 배울 자세가 되었다면 더 빠른 치유를 주실 것은 같습니다.
이냐시오 로욜라는 스페인의 귀족이자 군인이었으며, 1521년 전투 중 대포알에 의해 다리가 산산조각 나는 중상을 입으면서 그의 인생이 크게 바뀌게 되었습니다.
다리가 비정상적으로 붙자, 이냐시오는 다리를 다시 부러뜨리고 교정하는 극도로 고통스러운
절차를 감내해야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자신의 육체적 자유를 포기하고
의사에게 순종해야 하는 엄청난 고통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긴 회복 기간에, 이냐시오는 오락거리를 찾았으나 집안에는 종교 서적만 남아있었습니다.
특히 성인의 삶과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 그는 점차 깊은 영적 감동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이 강제된 고요함과 신체적 회복의 시간은 그에게 영적 각성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의 육체가 의료 권위에 대한 순종을 통해 치유되었듯이, 그의 영혼도 신적인 영감에 순종함으로써 치유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세속적 야망을 버리고 하느님의 뜻을 따를 필요성을 점차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육체적·영적 치유의 이중 과정은 이냐시오에게 겸손과 권위에 대한 순종의 중요성을 가르쳤습니다.
그의 이러한 변혁은 그를 예수회 창설과 영신 수련 집필로 이끄는 깊은 영적 여정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냐시오의 경험은 고통 속에서도 순종이 어떻게 깊은 치유와 새로워진 삶의 목적을 가져올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마찬가지로 성 프란치스코는 1202년, 프란치스코는 콜레스트라다 전투에 참전했으나 포로로 잡혀 약 1년 동안 감옥에 갇혔습니다. 풀려난 후, 그는 아시시로 돌아왔지만 심각한 쇠약과 병에 시달렸습니다.
이 회복 과정에서 프란치스코는 육체적 고통뿐만 아니라 영적 갈등도 겪었고, 자신의 과거 세속적 삶의 공허함을 깊이 성찰하기 시작했습니다.
초기 전기 작가인 토마스 첼라노의 『성 프란치스코의 첫 번째 전기』에 따르면, 프란치스코는 이 시기에 하느님께 열렬히 기도하며, 자신을 치유해 주시고 삶의 목적을 명확히 해 주신다면 자신의 삶을 전적으로 하느님께 바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의 기도에는 자신의 자유, 야망, 안락함을 포기하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었습니다.
그는 고난이나 조롱을 받아야 한다 해도 이를 기꺼이 감내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치유와 율법의 준수는 하나입니다.
요한 9,1-7을 생각해봅시다.
예수님은 태생 소경을 치유해주시는데, 그가 실로암 연못에 가서 씻어야만 치유가 완성되게 해
주셨습니다.
치유보다 더 큰 목적은 순종을 가르치시는 일입니다.
2열왕 5,1-14에서 나아만도 마찬가지입니다. 엘리사는 순종을 강요합니다.
요르단강에서 일곱 번 씻게 시키는 것입니다. 처음엔 거부하지만, 그 말에 순종하게 될 때
치유가 일어났습니다.
히즈키야의 치유(2열왕기 20:1-11)도 의미가 있습니다.
하느님은 죽어야 할 운명인 히즈키야가 눈물로 청원하자 그의 생을 15년 연장해주셨습니다.
치유의 과정은 곧 순종의 과정입니다.
만약 치유의 은총이 있고 난 뒤에도 순종보다는 더 큰 욕심을 내게 된다면 치유가 은총이 된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니 치유를 원하기 전에 내가 무엇에 순종해야 할지를 먼저 생각해봐야 합니다.
그리고 그 약속을 먼저 드립시다.
그러면 분명 더 빠르게 치유해 주시고 더 큰 은총을 주실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월10일 [주님 공현 대축일 후 금요일]
복음: 루카 5,12-16
우리 인간이 살길은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과의 지속적인 접촉입니다!
“온몸에 나병이 걸린”이라는 표현을 읽을 때마다, 왠지 마음이 불편해집니다.
오랜 세월 익숙하게 사용되어온 병의 명칭들이 환자들에 대한 부정적 편견이나 차별적 뉘앙스를
내포하고 있기에, 최근 대대적인 변경 작업이 이루어졌습니다.
과거에 몽고증이라고 했었는데, 특정 인종을 비하한다는 지적에 WHO는 병의 발견자 이름을 따 다운증후군으로 바꾸었습니다.
간질이라는 질환은 어감부터가 좋지 않고, 사회적 낙인을 찍는 표현이기에 뇌전증으로 변경했습니다.
정신분열증은 마음의 조화가 깨어져 온다는 의미로 조현병으로 바꾸었습니다.
치매 역시 다분히 부정적 이미지가 크므로 인지저하증으로 바꾸기 위해 논의 중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나병 역시 발병의 원인이 되는 균을 찾아낸 사람의 이름을 따 한센병이
공식 용어가 된 지 오래입니다.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성경 말씀 안에 차별적 언어, 낙인을 찍는 언어가 남아있지는 않은지 눈에 불을 켜고 살펴볼 일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환자의 증세는 꽤 심각했습니다.
균이 온몸으로 퍼졌습니다.
마땅한 치료제도 없던 시절,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깊어져 가는 상처를 속수무책으로 바라보는 일, 조금씩 사라져가고 떨어져 나가는 자신의 신체를 슬픈 표정으로 바라보는 일 뿐이었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그가 즉시 하는 일은, 혹시나 밤사이에 기적이 일어나서 내 몸이 나은 것은 아닐까? 하는 기대감에 자신의 피부를 만져 보았습니다.
즉시 역시나 하며 좌절하며 들짐승처럼 울부짖었습니다.
은혜롭게도 더 이상 내려갈 곳 없는 인생의 가장 밑바닥에서 그는 치유자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처럼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그분이 계신 고을로 찾아갔습니다.
율법 규정상 그는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설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찾아온 마지막 기회를 놓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뵙자마자 그는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큰 목소리로 청했습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놀랍게도 예수님께서는 율법 규정을 어기십니다. 그와 접촉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환자의 절박한 처지, 경탄할만한 적극성, 예수님을 향한 굳센 믿음, 그 결과는 즉각적인 치유와 구원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참으로 감동적인 순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온 몸이 종기로 뒤덮인 한 가련한 인간과 측은지심으로 가득 찬 하느님이 만나는 순간입니다.
그 순간 환자가 지니고 있었던 수많은 죄와 상처, 종기, 고름은 뜨거운 하느님 사랑의 불꽃에 모두 소멸되어 버렸습니다.
그 대신 태초의 보송보송한 애기 피부로 아름답게 재생되었습니다.
결국 죄인인 우리, 결핍과 상처투성이뿐인 우리 인간이 살길은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과의 지속적인 접촉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주님 공현 대축일 후 금요일 강론>
(2025. 1. 10. 금)(루카 5,12-16)
<예수님은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느 한 고을에 계실 때, 온몸에 나병이 걸린 사람이 다가왔다.
그는 예수님을 보자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이렇게 청하였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곧 나병이 가셨다.
예수님께서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그에게 분부하시고,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령한 대로 네가 깨끗해진 것에 대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 하셨다.
그래도 예수님의 소문은 점점 더 퍼져, 많은 군중이 말씀도 듣고 병도 고치려고 모여 왔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외딴곳으로 물러가 기도하셨다(루카 5,12-16).”
1) ‘깨끗하게 하다.’ 라는 말은, 다음 말씀들에 연결됩니다.
“아드님은 하느님 영광의 광채이시며 하느님 본질의 모상으로서, 만물을 당신의 강력한 말씀으로 지탱하십니다.
그분께서 죄를 깨끗이 없애신 다음, 하늘 높은 곳에 계신 존엄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히브 1,3).”
“염소와 황소의 피, 그리고 더러워진 사람들에게 뿌리는 암송아지의 재가 그들을 거룩하게 하여 그 몸을 깨끗하게 한다면, 하물며 영원한 영을 통하여 흠 없는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신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의 양심을 죽음의 행실에서 얼마나 더 깨끗하게 하여 살아 계신 하느님을
섬기게 할 수 있겠습니까?(히브 9,13-14)”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내어주시어,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해방하시고 또 깨끗하게 하시며, 선행에 열성을 기울이는 당신 소유의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티토 2,14).”
메시아 예수님은 인간들을 ‘깨끗하게’ 하려고 오신 분입니다.
인간이 처음부터 깨끗하지 않은 존재였던 것은 아닙니다.
원래는 깨끗했는데,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죽음이 세상을 지배하면서(로마 5,12), 더럽혀진 존재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인간들을 깨끗하게 하려고
오신 분”이라는 말은, “예수님은 인간들을 원래의 상태로 원상복구하려고 오신 분”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2) 예수님 덕분에 깨끗해진 사람들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보라, 내가 곧 간다.
나의 상도 가져가서 각 사람에게 자기 행실대로 갚아 주겠다.
나는 알파이며 오메가이고 처음이며 마지막이고 시작이며 마침이다.
자기들의 긴 겉옷을 깨끗이 빠는 이들은 행복하다.
그들은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는 권한을 받고,
성문을 지나 그 도성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묵시 22,12-14).”
그러나 깨끗해지지 않은 사람들은 그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고 멸망을 당하게 됩니다.
“비겁한 자들과 불충한 자들, 역겨운 것으로 자신을 더럽히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불륜을 저지르는 자들, 마술쟁이들과 우상 숭배자들, 그리고 모든 거짓말쟁이들이 차지할 몫은 불과 유황이 타오르는 못뿐이다.
이것이 두 번째 죽음이다(묵시 21,8).”
3)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인간을 원래의 상태로 원상복구하는 권한과 권능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믿는다는 신앙고백이기도 하고, 깨끗하게 해 달라는(병을 고쳐 달라는) 간청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고자 하시면’이라는 말은, 그 병자가 아직 예수님의 자비를 모르고 있고, 예수님의 자비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안 믿는 것이 아니라,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신앙은, 예수님의 권능과 권한에 대한 믿음과 자비에 대한 믿음을 모두 합한 것입니다.
만일에 예수님의 권능과 권한은 믿지만 자비를 안 믿는다면, 예수님을 두려워하기만 할 것입니다.
반대로 예수님의 자비는 믿지만 권능과 권한을 안 믿는다면, 예수님을 사랑하고 존경하더라도, 그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라는 말은 예수님의 자비를 나타내고, “깨끗하게 되어라.” 라는 말씀은 권능과 권한을 나타낸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4)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라는 말씀은, 이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입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를 원문대로 직역하면 ‘나는 원한다.’인데, 이 말씀은, 예수님은 우리가 깨끗해지기를 원하고 청하기도 전에 당신이 먼저 그것을 원하시고, 그 은총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구원받기를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간절하게 원하는 사람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예수님께서 나보다 먼저, 또 나보다 더 간절하게 ‘나의 구원’을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시는 분”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 세상에 오신 일 자체가 당신이 원해서 하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때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도 제가 있는 곳에 저와 함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세상 창조 이전부터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시어 저에게 주신 영광을 그들도 보게 되기를 바랍니다(요한 17,24).”
<이 말씀에서 두 번이나 사용된 ‘바랍니다.’ 라는 말은, ‘나는 원한다.’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나는 깨끗했던 원래 상태로 원상복구 되기를 원하고 있는가? 나는 정말로 나 자신의 구원을 원하고 있는가?”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