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은 모든 것을 정화시켜주었다. 머리를 복잡하게 하던 생각들을 말끔히 씻어주고 맑은 기운을 불어넣어주었다. 신록은 희망이었다. 용기도 주었다. 연둣빛 나뭇잎과 어우러진 봄꽃들은 청순함의 상징이자 아름다움의 정수였다. 인제 방태산(芳台山·1,443.7m)의 거목 숲은 이 모든 것을 보여주었다. 4월답지 않은 저온현상으로 뒤늦게 봄옷으로 갈아입는 거목들은 만물의 정기였다.
▲ 1 나무는 곧게 자라야 멋이 아닌가 보다. 몸통과 나뭇가지를 뒤틀며 자란 거목들이 무성한 숲은 한층 깊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매봉 능선. 2 산림휴양관 앞의 저폭포와 더불어 방태산 적가리골을 대표하는 풍광인 이폭포. 3 연둣빛 신록에 화사한 풍광을 자랑하는 방태산자연휴양림 탐승로. 4 일망무제의 조망을 만끽할 수 있는 주억봉 정상. 5 주억봉 오르는 길 곳곳에 아름드리 거목들이 우거져 있다.
원시적 분위기 그대로 간직한 적가리골
“와~, 저기 두릅 봐. 당귀도 올라오잖아? 온 산이 먹을거리로 꽉 찬 것 같은데요.”
방태산자연휴양림에 들어서는 사이 김수영(여·어센트산악회)씨는 얼굴이 환해졌다. 물가의 귀룽나무 하얀 꽃은 옥빛 계류와 아름답게 어우러져 화사하기 그지없고, 길가에 두릅이니 당귀니 봄 향기 물씬 풍기는 식물들이 곳곳에 눈에 띄었다. 골짜기 끄트머리로 슬쩍 모습을 드러낸 방태산~구룡덕봉 능선은 잿빛 그대로지만 신록빛에 젖어드는 숲은 파란 하늘에 떠다니는 뭉게구름과 어우러져 멋진 그림을 그려놓고 있었다.
“지난주만 해도 눈이 내렸어요. 참 묘하죠? 안 올 것 같더니 결국 봄이 오고 말았네요.” 휴양림 방문자 안내소 앞에서 만난 숲해설사 장은경씨는 “뒤늦게나마 봄이 찾아와 정말 다행”이라면서 “그래도 산꼭대기에는 눈이 남아 있을지 모른다”고 말했다.
적가리골 탐승로를 따르는 사이 모처럼 맑고 따뜻한 봄날을 맞아 탐방객이 많이 눈에 띄었다. 안내소에서 1.5km 떨어진 산림문화휴양관 앞마당에서 어린 아들과 야구공을 주고받는 아빠가 있는가 하면 방태산을 대표하는 저폭포에서는 어린 아들 앞에서 견지 낚시를 드리운 아빠도 보였다. 5월은 역시 신록의 계절이자 가정의 달이다.
골짜기 안으로 들어설수록 숲은 한결 무성해지고 나무도 굵어진다. 제1야영장을 지나 숲속 쉼터에 들어서자 아름드리 나무 사이로 시원스레 옥빛 물줄기를 떨어뜨리는 이폭포가 눈에 들어온다. 적가리골에서 이폭포는 보석 같은 존재다. 숲에서 흘러나와 잔잔히 흘러내리던 옥빛 계류는 10여m 수직절벽 아래로 낙하하는 순간 포말을 일으킨 다음 다시 잔잔해지는 듯하다 그 아래 2~3m 높이의 절벽 밑으로 떨어지며 햇살에 보석처럼 반짝였다.
저폭포가 그랬듯이 이폭포가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주변의 숲 덕분이다 싶다. 숲도 그냥 숲이 아니다. 신록에 물들기 시작한 갈참나무, 두릅나무들은 아름드리 소나무와 어우러져 멋지고도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탐승로 주변의 피나무는 아름드리 소나무만큼 웅장하지는 못하더라도 예쁘게 쭉쭉 뻗어 정겹다. 길가의 괭이풀은 노란 꽃을 앙증맞게 피워놓고, 호랑고비·밭고비는 곧추세운 상체 위의 머리를 푹 숙인 채 도약할 순간을 기다리고 있다.
제2야영장을 지나자 적가리골의 아늑한 풍광에 빠져드는 듯하다. 적가리골은 강원도의 여러 골짜기 중 손꼽힐 만큼 미적이지는 못하다. 그러나 일단 빠져들면 벗어나기 힘들 만큼 매력이 넘친다. 편안한 분위기는 최고다. 울창한 숲속에 순하게 이어지는 골짜기는 어느 한 곳 튀지 않고 널찍하고 널찍한 암반을 타고 흘러내리는 계류는 맑은 숲의 정기를 담은 듯 깨끗하다. 거기에 원시적 분위기를 간직한 숲이 더해지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물가 곳곳에 있는 너럭바위에 앉아 있는 이들마다 표정이 맑고 편안하게 느껴지는 것이.
“그 숲이 그 숲일 텐데 꼭 그렇게 돌아야 해? 물까지 짊어지고 오르려면 꽤 시간이 걸릴 텐데.”
제2야영장 위쪽 주차장에서 산길로 들어선 이후 첫 번째 갈림목(매봉령 2.7km·주억봉 4.2km)에 닿자 숲해설가 장은경씨가 권해준 대로 매봉 안부 쪽으로 방향을 틀자 노영수(어센트산악회)씨가 툴툴거린다. 오늘은 지당골과 지능선을 거쳐 방태산 정상 주억봉(主億峰·일명 주걱봉)에 올라선 다음 다시 능선을 타고 구룡덕봉(九龍德峰·1,388.4m)까지 가서 하룻밤 야영을 하고 내일 매봉(1,249.2m)을 거쳐 가리왕생이골을 타고 조경동으로 내려서는 게 우리의 산행 코스였다. 한데 곧장 오르는 지당골 산길을 놔두고 적가리골을 따르다 산허리를 가로지르는 숲탐방코스를 가자니 툴툴대는 것도 당연했다.
적가리골 본류로 들어서는 순간 일행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지당골 물줄기를 가로질러 수문장처럼 당당하게 서 있는 아름드리 박달나무를 지나자 적가리골이 속살을 그대로 드러낸다. 골짜기는 원시적 분위기를 그대로 간직하고 숲은 하늘을 가릴 듯 울창했다. 낙엽송이든, 박달나무든, 금강송이든 다 좋다. 낙엽송은 하늘을 차고 오르는 기상을 심어주고, 박달나무는 끈질긴 인내심을 보여주었다. 게다가 금강송은 당당하게 사는 법을 가르쳐주는 듯했고, 나무와 바윗덩이를 덧씌운 푸른 이끼는 자연의 깊은 아름다움을 깨우쳐준다.
20~30m 높이 낙엽송의 경쾌한 음악 속에 빠져드는 듯하고, 거제수나무 숲은 하얗게 반짝이는 별천지 같은 세상에 들어선 듯한 착각이 일게 한다. 이제 아름드리 벚나무에는 흰 꽃이 만발해 있고, 막 터뜨릴 기세로 꽃망울이 맺힌 함박나무 아래 두터운 갈비 위로 연둣빛 고비나물이 깔려 융단 위를 걷는 느낌에 빠져든다.
안내판에 ‘주억봉 3.6km, 구룡덕봉 4.6km’라 표기돼 있는 갈림목에서 주등산로를 벗어나 산허리 길로 접어들자 피나물이 노란 꽃을 피워놓고 반겨준다. 능선을 가로지른 뒤 지당골 산길로 접어들어 주억봉으로 향한다. 숲의 정취에 빠지고 물소리에 넋을 잃고 골짜기를 거슬러 오르노라니 오후 2시를 넘어서는데도 누구 한 명 점심밥 먹자는 소리를 꺼내지 않는다. 숲은 배도 부르게 하는가 보다.
▲ 1. 매봉 가는 능선 길은 짙푸른 속새가 숲을 한층 풍요로운 분위기로 꾸며주고 있다. 2. 주억봉 능선 야영. 3.구룡덕봉 가는 길에 반겨준 주목. 4 주억봉 정상부에서 내려다본 적가리골. 삼라만상이 모두 들어앉아 있을 듯한 오묘함을 느끼게 한다. 5 매봉 일원의 한계령풀 꽃밭. 환경부에서 희귀종으로 지정, 관리하는 식물이지만 예서는 지천이다.
기괴한 분위기의 숲은 산새소리로 하루 마감하고 새날 시작
“이건 ‘사랑 빵’이에요. 그래서 조금만 먹어도 배부를 겁니다.”
엊저녁 아내가 만들어준 빵을 내놓은 허재성 기자는 요즘 취재산행 때면 당당하다. 노총각 시절에는 김치 한 조각 싸오지 못하고 또 산행을 해도 금세 지치곤 하더니 1년 전 결혼한 이후로는 새 사람이 되었다. 허재성씨 아내의 정 듬뿍 담긴 빵 맛도 일품이지만 골짜기 따라 흘러내리는 계곡물맛은 혈관에 신선한 피를 집어넣는 듯 짜릿하다. 이제 흔치 않은 계곡 물을 마음대로 마실 수 있는 자유가 있는 산이 방태산인 것이다.
점심 식사 후 수더분해지고 부드러워지는 한편 원시적 분위기가 더해가는 골짜기를 따르다 물줄기를 벗어나는 지점에서 2리터들이 패트병에 물을 두어 통씩 챙겨 넣으니 배낭이 천근만근이다. 이러다 허리 나간다느니, 무릎 다 망가진다느니 별별 투정 다 부리면서도 “이렇게 고생하느니 제2야영장에서 자고 내일 일찍 서둘러 산행을 시작하는 게 어떻겠냐”는 의견에는 딱 잘라 반대다. 계곡이 아무리 좋다 한들 산정과 산릉의 정취를 어찌 따라가겠냐는 것이다.
“이건 희운각에서 소청 올라가는 거나 다름없어. 수영아! 그래도 좋지. 이렇게 물 좋고 숲 좋은 산은 언제 다녀봤겠어. 바위만 타느라고.”
물줄기가 점점 멀어지면서 지능선은 점점 가팔라진다. 장수대 출신 노영수씨는 푸념을 늘어놓다가도 호흡 한 번 하곤 같은 산악회 후배인 김수영씨에게 “암벽등반도 재미있지만 산맛을 제대로 알려면 도보산행을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어라, 저기 봐. 아직도 겨울살이가 있네. 저기 보이는 자작나무 하루살이가 동백나무와 더불어 약효가 최고래.”
3분의 1쯤 오르자 바람 소리와 온도가 달라진다. 바람 소리는 한겨울 북풍한설이 몰아치는 듯 섬뜩케 한다. 산록의 나무들 역시 희망의 신록빛 대신 잿빛 나목이다. 해발 1,000m를 넘어서자 아름드리 굵기의 전나무, 참나무, 거제수나무 거목들이 하늘 높이 자라고 있다. 거목들은 북풍한설이 불든 따가운 햇살이 내리쬐든 관계없이 고고하게 산릉을 장식하고 있다. 그래도 얼레지는 보랏빛 꽃을 피우며 자라난 것을 보면 작은 식물도 나름대로 기운이 있나 보다.
노영수씨가 을씨년스런 숲길은 혹 멧돼지라도 튀어나오지 않을까 걱정하자 김수영씨는 “저녁 반찬 하자” 한다. 거목 숲이 불어 넣어준 기 덕분에 배짱이 생겼나 보다. 잿빛 숲 바닥에 보랏빛 꽃이 활짝 핀 얼레지가 지천이다.
주억봉·구룡덕봉 갈림목(주억봉 0.4km, 구룡덕봉 1.4km)에 올라서자 숲은 또 다른 분위기를 연출한다. 갈참나무를 비롯한 다양한 수종의 나무들은 바람과 추위에 시달리면서 몸과 팔다리가 비틀린 모습이 그로테스크하다. 그 기괴한 숲은 바닥에 얼레지 꽃이 융단처럼 깔려 오히려 신비감을 자아낸다.
얼레지 꽃을 밟을세라 조심조심 발을 떼며 삐죽 솟구친 주억봉 정상에 올라서자 그야말로 일망무제의 조망이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남쪽 오대산과 어깨를 맞댄 동대산에서 북쪽 설악산을 향해 내리닫으며 하늘금 그은 백두대간을 비롯해 수많은 산봉들과 산줄기가 꿈틀거리는 듯하다. 깊은 골을 따라 이어지는 내린천은 눈앞에 보이는 수많은 골짜기에서 흘러내린 물을 끌어 담은 거대한 물줄기였다.
압권은 뭐니뭐니해도 적가리골이다. 움푹 꺼진 분지형태를 이룬 적가리골은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지릉과 많은 골짜기로 이루어져 있다. 신록이 스멀스멀 일어나는 분지형태의 적가리골은 딴 세상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예로부터 풍수가들이 적가리골을 세상에 그 어떤 화가 돌아도 피할 수 있는 십승지(十勝地) 중 한 곳으로 꼽았는지도 모른다.
“수영아! 짐 가지고 내려와! 여기가 훨씬 좋아~.”
군부대 시설물을 철거한 뒤 썰렁한 분위기에 늘 바람이 몰아치는 구룡덕봉보다 주억봉 산정이 하룻밤 지내기에 낫겠다 싶었으나 배낭을 가지러 주억봉·구룡덕봉 갈림목으로 내려서는 사이 그로테스크한 숲이 더욱 마음에 든다. 산릉에 집이 한 채 올라앉고 노영수씨가 가져온 찬 밥을 꺼내 곰취와 지장가리 산나물에 된장 한 숟가락과 같이 얹어 입에 쑥 집어넣을 때마다 저마다 “바로 이 맛”이라며 즐거워한다.
그 사이 둥근 해는 기괴한 나무 숲 사이로 내려앉고 산새들은 집에 들어가기 앞서 뭐가 그리 좋은지 즐거이 재재거린다. 밤이 깊어지자 산은 또다시 변신한다. 보랏빛 얼레지 꽃이 어둠에 묻히고 크리스마스 트리의 불빛처럼 수많은 별들이 새카만 밤하늘을 수놓는다. 숲은 이렇게 밤을 맞고 방태산의 하루는 이렇게 넘어갔다.
방태산은 산새소리로 하루를 마감하고 새 날 역시 산새 소리로 시작한다. 밤새 숲의 기운을 받으며 잔 덕분인지 모두 표정이 밝고 기운이 넘친다. 히말라야 설산의 웅장함이 가슴 두근거리게 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숲 우거진 우리 산처럼 정기를 불어넣어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이게 도끼자루로 딱 맞는 물푸레나무야. 겨울에 조난당했을 때 화목으로 쓰면 최고지. 명이나물은 냄새 맡아보면 마늘향이 진하게 나. 반면에 저기 보이는 박새풀은 겉은 예쁘지만 먹으면 큰일 나. 작년에 오대산 스님들이 명이나물로 착각하고 학생들에게 권했다가 병원에 실려가기도 했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