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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박종태목사
믿음에 굳게 섭시다! (고전 16:13)
(고전 16:13)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라
예수님은 날 때부터 소경 되었던 자의 눈을 고치셔서 밝히 보게 하셨습니다. 날 때부터 소경 된 자에 대하여 제자들은 누구 죄 때문에 날 때부터 소경 되었느냐고 예수님께 질문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소경과 같은 무서운 병은 반드시 죄 때문에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결과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날 때부터 소경 된 자는 아직 죄를 지을 기회도 없이 소경이 되었으므로 누구의 죄 때문에 소경이 되었는지 궁금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혹시 그 부모의 죄 때문에 그 사람이 모태에서부터 소경 된 것이 아닌가 라고 추측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의 부모의 죄 때문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려 하심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뜻에 의해 그 사람이 소경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소경의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명하셨습니다. 그 소경 된 자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실로암 못에 가서 눈에 붙은 진흙을 씻을 때 그의 눈은 뜨여지고 밝은 세상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소경이 눈을 뜨자 이웃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잘 몰라보았습니다. 사람들이 그에게 자초지종을 물었을 때 고침받은 자는 예수님께서 자기 눈을 고쳐 주셨음을 증거하였습니다. 예수님께 병 고침을 받은 자는 자연스럽게 예수님의 능력을 증거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소경의 눈을 고치신 날이 안식일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소경의 눈을 고치셨음을 전해 듣고는 예수님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하나님께로서 온 자가 아니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중에 한 사람은 죄인으로서 어떻게 그러한 이적을 행할 수 있느냐며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소경 되었던 자에게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자신 있게 선지자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직접 예수님의 역사를 체험하였기에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소경 되었다가 고침받았다는 사실을 온전히 믿지 못하여 그의 부모를 불러 확인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아들이 어떻게 보게 되었느냐고 물었을 때 그 부모는 모른다고 말하며 답변을 거부했습니다. 이는 예수님을 믿으면 유대교에서 출교 당하므로 바리새인들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요 9:20-21) 그 부모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가 우리 아들인 것과 소경으로 난 것을 아나이다 그러나 지금 어떻게 되어 보는지 또는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이다 저에게 물어 보시오 저가 장성하였으니 자기 일을 말하리이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심으로써 자신이 인류를 모든 부족함과 죄의 고통에서부터 구할 수 있는 메시야라는 것을 나타내 보이신 예수님께서는 그 후에 홀로 기도하시기 위해 제자들만 먼저 바다 건너편으로 가게 하셨습니다. 기도를 마치신 뒤 예수님께서는 배로 떠난 제자들에게 가기 위해 바다 위를 걸으셨습니다. 바다 위로 걸어오는 예수님을 보고 베드로도 믿음으로 물위를 걸었습니다.
베드로는 믿음으로 바다 위를 걸었습니다. 그러나 바람이 거세게 불어 풍랑이 일자 베드로는 곧 두려움에 빠져 물에 빠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베드로는 처음에 믿음으로 걸었으나 보이는 것으로 말미암아 두려움에 빠져 믿음을 상실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믿음이 연약해져 바다에 빠졌으나 죽지 아니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능하신 주님께서 그를 건져 주셨기 때문입니다..
(마 14:31)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의심은 정신적으로 흔들린다는 뜻으로 주저 동요 혼동의 뜻이 있는 말입니다. 신앙은 의심이라는 분위기 속에서는 성장 할 수 없습니다. 믿는다고 하면서 의심하는 것은 믿음이 없는 연고입니다. 의심은 마귀의 궤계입니다. 에덴 동산의 마귀의 궤계입니다. 예수님을 시험한 마귀의 궤계입니다.
사람들은 실질적으로 의심이 많습니다.
(마 12:24) 바리새인들은 듣고 가로되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 하거늘 이라는 말씀에서 이적을 의심하는 인간의 모습을 봅니다
(요 20: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부활을 의심하는 도마에게 말씀하십니다
(눅 7:19) 요한이 그 제자 중 둘을 불러 주께 보내어 가로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라 하매 라는 말씀에도 의심하는 인간의 모습이 있습니다.
(벧후 3:3)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기롱하여(벧후 3:4)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라는 말씀에 주님의 재림을 의심하는 모습을 봅니다
믿음은 여러 형태로 나타나나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이 믿음은 추상적이나 관념적이 아닙니다. 지, 정, 의가 결합된 믿음이 참 믿음인 것입니다. 이 믿음은 하나님께서 선을 원하시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롬 8:29)을 신뢰하기 때문에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하며 전적으로 그를 의지합니다.
그런데 우리 가운데는 연약한 믿음의 소유자가 많습니다. 교회에서는 성도로 행세하다가도 교회 밖을 나서는 순간 불신앙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고 합니다.
교회에 처음 들어와서 신앙을 갖기로 한 초신자는 신앙 세계에 대해 생소합니다. 그러므로 전도는 불신자를 교회에 데려다 놓는 일만이 아닙니다. 데려온 그 초신자에 대해 끊임없이 관심을 갖고 기도하고 교회 생활에 적응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전도 영역에 포함됩니다.
초신자 중 교회를 떠나는 대표적인 이유 가운데 하나는 기존 성도들의 무관심과 냉정함이라는 지적을 합니다. 초신자에 대해 관심과 기도가 없음으로 그들은 당황하고 흥미를 잃게 되어 교회를 떠난다는 것입니다.
초신자는 또한 예수를 믿기는 믿지만 여전히 옛 습관에 매여 방황하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죄의 유혹으로부터 탈피하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들이 신령한 습관에 길들이도록 권면하고 경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을 통해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롬14:1)고 하십니다.
우리의 믿음은 어떠합니까
환난과 핍박이 많은 환경 속에서 믿음을 지키기 위하여서는 담대함이 필요한 고린도 교회에 바울은 편지를 통하여 성도들이 믿음에 굳게 서서 흔들리지 않고 온전히 승리하기를 기원하며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라고 합니다.
깨어는 일반적인 경계나 도덕적인 주의를 나타내는 말이 아니라 곧 일어날 종말론적인 사건들에 대비한다는 의미로 주요 사용 되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마지막 사건들이 곧 일어날 것으로 나타냅니다
(고전 7:29)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그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 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고전 15:52)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는 말씀은 종말론적인 지평 속에서 자신들의 삶의 자리를 조명해 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같은 교훈을 주셨습니다
[마 24:42-43]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둑이 어느 시각에 올 줄을 알았더라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마 25:13)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어느 해운 회사에서 무선사를 모집하는 중에 필답 고사 합격자들이 면접하기 위하여 시간 전부터 20여명이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흘렀는데도 접견실에서는 아무도 부르질 않고 스피커로 감미로운 음악 소리만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대기하던 청년 중 한 명이 아무 소리 없이 일어나더니 접견실로 무턱대고 들어갔습니다. 초조하게 기다리던 20여명 다른 대기자들이 의아해 하며 귀추를 주목하고 있을 때, 좀 전에 들어갔던 청년이 신나는 모습으로 나오고 있었습니다. 이구동성으로 그 연유를 물은즉 “나도 여러분들처럼 초조해 기다리며 책을 읽고 있노라니까 음악 소리와 함께 무선 신호(모리스부호)로 '이 소리를 듣는 사람은 즉시 접견실로 들어오라’는 신호를 듣고 뛰어 들어가 합격하고 나온다”고 하였습니다. 무수한 세상의 소리가 있으되 언제나 하나님과 주파수를 맞추고 깨어 있는 자가 하늘 위로와 복과 영광의 자리를 참여하게 됩니다.
'남자답게'(안드리제스데)는 '성인 남자'(아네르) 혹은 '남편'을 가리키는 말에서 온 말로 때로는 힘의 상징으로서의 남성을 가리키기도 했으며 '남자다워라'는 의미로 신앙을 지키는 것을 '남성다움' 또한 '강건함'과 연관짓고 있기도하 독립적인 교훈의 말씀이기도 하며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는 남성다움이 있어야 함을 교훈 합니다.
바람의 나라에 마루라는 무휼왕의 친구의 마지막 화형 장면에서 남자다웁다는 말을 실감하게 하였습니다.
다윗이 골리앗 앞에서는 믿음입니다
'강건하여라'(크라타이우스데)는 항상 강하게 되어라는 뜻인데 수동태로 쓰여서 그리스도인이 갖는 신앙의 힘이 타고난 육체적인 힘과는 달리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영적인 것임을 나타냅니다.
가뭄이 아주 오랫동안 이어졌습니다. 미국 중서부 지방의 이 작은 마을은 큰 위기에 처했습니다. 달리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비는 농작물 재배에도 중요했지만, 마을 사람들의 생활에도 필수적이었습니다. 갈수록 문제가 심각해지자 마을의 교회는 비를 매려 달라는 대대적인 기도회를 열기로 결정했습니다. 인디언 원주민들이 행하던 기우제를 연상하면서 사람들이 하나둘 교회 앞마당에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곧이어 목사님이 도착하고, 신도들은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과 인사를 주고받았습니다. 마침내 단상에 올라선 목사님은 이제 군중을 조용히 시키고 집회를 시작할 때라고 판단했습니다. 모두를 향해 조용히 해줄 것을 요청하려는 순간 목사님은 맨 앞줄에 앉은 열 살 가량의 소녀가 눈에 띄었습니다. 소녀는 흥분과 기대에 찬 얼굴로 천사처럼 앉아있었습니다. 그리고 한 손으로는 빨간 우산 하나를 꼭 움켜쥐고 있었습니다. 그 순수한 믿음에 목사님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전부 잃어버렸지만, 이 어린 소녀만은 아직도 순수한 믿음을 간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단지 비를 매려달라는 기도를 하기 위해 모였으나, 이 소녀는 신이 틀림없이 응답해 주실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굳게 서서(스테케테)는 '흔들림 없는', '확실한', '의심없는' 등의 의미로 믿음의 상태가 견고함을 가리키는 말씀으로 죽은 자의 부활을 다룬 후의 권면인 흔들리지 말고 라는 말씀을 생각하게 합니다
(고전 15: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믿음'(피스테이)은 하나님께 대한 흔들림 없는 신뢰와 의심 없는 복종을 뜻합니다
더욱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역사적인 객관적 사실로 인정한다는 것(fides quae creditur)과 역사적 사실에 의거하여 주관적 진리로 확신하는 것(fides que creditur)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는 부활의 가르침을 진리로 확신 하는데 갈팡질팡 하였음을 고전 15:58의 흔들리지 말고 라는 말씀에서 생각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고린도 교인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깊이 이해하고 그 위에 든든히 서라는 교훈을 주며 믿음위에 굳게 서라고 합니다
1858년 뉴욕의 어느 가정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는데, 그 아이는 어려서 소아마비를 앓아 다리를 절었고 시력도 극도로 나빴습니다. 게다가 천식까지 앓아서 앞에 있는 촛불을 끌 힘도 없는 호흡 곤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가까스로 생명을 연장하여 드디어 열 한 살이 되던 날 아버지는 이 아이에게 이런 말을 해 주었습니다. “아들아, 네가 가진 장애는 장애가 아니란다. 네가 만약 전능하신 하나님을 참으로 신뢰하고 믿는다면, 그리고 하나님의 도우심이 너와 함께 한다면, 오히려 너의 장애 때문에 모든 사람이 너를 주목할 것이고 너는 진실로 역사에 신화 같은 기적을 남기는 놀라운 삶을 살 수 있단다.” 그 후 그는 23세가 되던 해에 뉴욕 주를 대표하는 의회의 의원이 되었고, 28세에는 뉴욕 시장 선거에 출마했습니다. 얼마 후에는 뉴욕 주지사가 되고, 부통령을 거쳐 미국 역사의 가장 어두웠던 시절에 미국의 신화를 재건하는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1906년에 노벨 평화상까지 수상하였던 이 사람은 바로 데오도르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입니다.
신앙적 시련을 겪은 초대 교회와 같이 현대의 성도들도 환경 속에서 많은 고난을 당합니다. 이때 우리가 의지해야 할 것은 바로 믿음입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오직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이 있었기에 핍박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오늘의 성도도 세상의 권세나 명예, 학문, 재산에 자신을 의지할 것이 아니라 오직 영원한 구주이신 그리스도를 믿은 믿음의 반석 위에 굳건히 서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창수가 나도 무너지지 않는 반석 위의 집에 있는 것과 같이 안전할 것입니다
(마 7:2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나폴레옹이 타던 말이 도망을 쳤을 때였습니다. 어느 날쌘 병사가 도망간 말을 붙잡아 왔습니다. 나폴레옹은 애지중지하던 말을 찾게 되자 너무 감격해 엉겁결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맙다. 대위!” 그 말을 들은 병사는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얼른 경례를 붙이면서 “감사합니다. 장군님!”하고는 즉시 사병 막사로 가서 짐을 챙겨 장교 숙소로 옮겼습니다. 그리고 낡은 군복을 벗어 버리고 대위 군복으로 갈아입고 다시 나폴레옹 앞에 나타났습니다. “장군님 명령대로 즉시 실행했습니다.” 나폴레옹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지만 자신이 한 말에 책임을 지기 위해 “대위 정말 멋있다. 앞으로 더 잘하기 바란다.”며 대위 계급을 인정했습니다. 한번 한 말은 주워 담을 수 없어 책임을 진 이야기입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한 약속이야 오죽하겠습니까? 분명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구하는 것은 틀림없이 받을 수 있습니다. 천국을 소유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교육하고 선교하고 봉사하며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하여 믿음 위에 굳게 서는 우리가 되어 사명감당하며 영광돌립시다.
강성찬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