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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년 독일 잠수함 U-20 영국
여객선 루시타니아호 격침, 1198명 사망
1915년 5월 7일 독일 잠수함의 공격을
받아 격침된 영국 여객선 루시타니아호.
1915년 5월 7일, 약 2,000명의 승객과
승무원을 태우고 뉴욕을 출항하여 리버
풀로 향하던 영국 국적의 3만 1,500t급
여객선인 루시타니아호가 침몰하자 미국
은 전쟁에 뛰어들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워싱턴 D.C.의 독일 대사관에게 있어 해
전 법규는 아주 명확했다. 대영제국 또는
그 동맹국의 국기를 달고 있는 선박이 전
쟁 해역-영국제도 인근 해역 포함-에 진입
할 경우 이유를 막론하고 공격 대상이라는
것이었다.
독일 잠수함 활동이 증가하고 있다는 보고
가 들어오자 영국 해군 본부는 즉시 루시
타니아에 전문을 보내 지그재그로 항해
하거나 그밖에 공격을 피할 수 있는 항법
으로 항해할 것을 명했다. 루시타니아 승무
원들은 이 경고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
으며, 발터 슈비거 대위는 U-20 잠수함레
서 어뢰 발사를 명했다. 이 어뢰는 루시타
니아호의 우현 한복판에서 폭발했으며,
엔진실 보일러에서 더 큰 폭발이 일어났다.
루시타니아호는 불과 20분만에 가라앉
았으며, 배와 함께 목숨을 잃은 1,198명
중에는 미국인도 128명이나 포함돼
있었다.
루시타니아호는 북대서양을 횡단하는
정기여객선 중에서 가장 빠른 선박이었다.
특히 이 배에 타고있던 희생자 중에는 2세
이하의 유아가 100여명이나 되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미국인들의 독일에 대한
여론을 악화시켰다.
영국은 루시타니아호가 여객선이었다고
주장하며 독일을 맹비난하였으며, 대부
분의 사람들 역시 독일이 비무장상선에
대해 무차별적인 공격을 퍼부었다고
믿었다.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
1856~1924) 미국 대통령은 배의 격침에
분노한 미국인들의 열화와 같은 전쟁 요구
를 묵살하고, 외교 각서를 통해 배상금 및
여객선 공격 중지를 요구하는 협상을 독일
과 벌였다. 독일은 루시타니아호에 무기가
실려 있었다고 주장하면서도 배상금 지급
에 합의했다.
루시타니아호가 침몰과 함께 그 안에 있던
모든 비밀 역시 바닷속으로 사라지리라
믿었던 사람들은 거대한 선체에 비해 단
한 발의 어뢰 명중으로 인해 완전 침몰까지
18분 밖에 걸리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해
의구심을 갖기 시작했다. 또 700여 명이
넘는 생존자들 역시 독일 잠수정에 의해
어뢰 공격을 받은 후 2차 폭발이 일어났다
는 증언을 했다. 루시타니아호 안에 선박
을 20분도 채 안돼 침몰시킬만한 파괴적
인 폭발물이 실려있을 가능성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1차대전과 2차대전이 벌어지
고, 또 탐사장비의 미비로 인해 한동안 해
결되지 못했다. 그러나 최근 미국의 백만
장자인 ‘Gregg Bemis’가 발달한 탐사장
비를 이용, 90m 이하 깊이에 잠들어 있던
루시타니아호의 일부를 탐사하는데 성공
했다.
밝혀진 바에 따르면, 루시타니아호엔 탄약
4천2백 상자와 유산탄 1천250 상자가
실려있었고, 수뢰 공격을 받을 때 그것이
폭발하여 배의 침몰을 가속화시켰다.
물론 이 수치가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단순히 일부 개인에 의한 은닉이 아니라
조직적이고 계획적으로 전쟁군수물자를
수송하고 있었다는 것은 부인 할 수 없게
되었다.
▶2015년 일주학원 설립·태광그룹
공동창업 이선애 여사 별세
▶2012년 신민당 부총재 지낸
이택돈씨 별세
▶2009년 KKR(콜버그 크래비스 로버츠),
OB(오비) 맥주 인수
2009년 5월 7일, 벨기에의 AB인베브는 오비맥주를 미국계 사모펀드인 KKR(콜버그 크래비스 로버츠)에 매각하기로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매각금액은 18억달러(한화 약 2조3000억원)로 3분기에 매각작업을 완료키로 했다.
이로써 국내 맥주 시장은 진로하이트그룹과 KKR·오비맥주 간의 경쟁구도로 정리됐다. 2008년 '처음처럼'의 두산주류를 인수해 주류시장에 뛰어든 롯데그룹은 오비맥주 인수전에는 고배를 마셨다. 그동안 오비맥주의 인수전에는 롯데그룹을 비롯한 국내외 10여개 주류회사와 사모펀드가 참여해 왔다.
사모펀드의 성격상 적정한 수익률을 유지한 후 되팔고 나가는 데 치중할 것이란 우려에 대해서 KKR의 조셉 배(Joseph Bae) 아시아 대표는 "오비맥주 인수는 KKR의 첫 한국투자로 장기적이고 건설적인 파트너로서 경제 성장에 기여할 것"이라고 말했다.
◆KKR(콜버그 크래비스 로버츠)
1976년 헨리 크래비스와 조지 로버츠가 설립한 사모펀드로 뉴욕·런던·파리·홍콩·도쿄 등 전 세계 주요 도시에 사무소를 두고 있다. 33년 동안 4230억달러에 해당하는 165건의 투자를 25개 산업 및 14개 투자펀드에 걸쳐 완료 및 발표한 바 있다. 현재 에너지퓨처홀딩스 등 48개 기업에 투자하고 있으며 이들 기업의 고용인원은 85만명 이상이다. 설립 이후 연평균 투자수익률은 26%에 달한다.
▶2005년 내신등급제에 반대하는 고교생 촛불시위
고교생들의 광화문 촛불시위는 불상사 없이 끝났다. 7일 저녁 서울 광화문 교보빌딩 앞에서 ‘21세기 청소년공동체 희망’ 주관으로 열린 ‘입시교육에 희생된 자살학생 추모제’는 400여명의 학생이 참여한 가운데 3시간여 만에 끝났다. 경찰(6000여명)과 교사(700여명)들이 에워싸고 있어 현장에 왔다가 발길을 돌리거나 멀찍이서 구경하는 학생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내신등급제에 대한 학생들의 불만과 불신은 여전했다. 고교 1학년 심모군은 “교육부는 우리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내신반영비율이 얼마 안 된다고 했지만, 이는 거짓말”이라고 했다. 상일고 1학년 정모군은 “작년보다 중간고사 시험문제가 많이 어려워져서 당황했다”고 했으며, 부천여고 1학년 배모양은 “야간자습시간마다 공부하던 친구들이 힘들다고 우는 모습을 보고 ‘이건 아니다’ 싶었다”고 했다. 일부 학생들은 촛불을 쥔 채 ‘학교공부가 너무 힘들어요’라는 구호를 외쳤다.
인터넷 다음의 ‘내신등급제반대추진 카페’에는 ‘9일 저녁 국회의사당 앞에서 모이자’ ‘14일이 진짜’라는 학생들의 글이 올라오기도 했다.
이날 행사를 주최했던 ‘21세기 청소년공동체 희망’의 한 관계자는 “믿은만큼 아이들이 성숙한 모습을 보여줘서 고맙다. 청소년도 사회문제를 피하지만 말고 스스로 나서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어른들도 아이들을 믿어달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어려운 점이 있었다면 ‘애들이 과격한 행동을 할 것이다’, ‘우리가 애들을 선동하는 것이 아니냐’는 사람들의 우려 였다”면서 “그러나 학생들이 잘해줬다”고 말했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주최측의 한 관계자는 “입시 교육을 반대하러 이 시위를 주최했고, 이 시위를 열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학생들의 분노를 우리가 그저 모른 척 할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평화롭게 질서를 잘 지켜서 스스로가 만족스럽다. 학생들이 잘 따라줘서 무사히 끝나서 좋다”고 말했다.
▶2004년 미국 워싱턴 한인회장
최제창 박사 별세
▶2002년 중국 여객기 랴오닝성 다롄시
인근 바다에 추락, 112명 사망
중국 북방항공공사 소속 국내선 여객기 한 대가 7일 밤 중국 동북부 랴오닝(遼寧)성 다롄(大連)시 인근 바다에 추락, 한국인 승객을 포함한 탑승자 112명 대부분이 사망했다.
승객 103명과 승무원 9명을 태우고 베이징(北京)을 출발, 다롄에 착륙할 예정이던 사고 여객기(MD-82)는 이날 밤 9시32분(한국시각 밤 10시32분)쯤 다롄 공항 관제탑과 교신이 두절됐으며, 목격자들은 사고기가 다롄시 동쪽 20㎞ 해상에 추락했다고 말했다. 사고기 기장(機長)은 관제탑과의 마지막 교신에서 “기내에 화재가 발생했다” 고 말했다.
북방항공공사 대변인은 사고기에 한국과 일본 국적의 외국인 8명이 타고 있었다면서, 탑승자 중 생존자가 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밝혔다.
▶2002년 네팔 내전 격화
▶ 2000년 블라디미르 푸틴 차기 러시아
대통령 당선자가 7일 3대 대통령으로 취임
▶2000년 인도네시아 여객선 침몰
수십명 사망.
▶1999년 나토군, 유고연방 베오그라드
주재 중국대사관 폭격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측의 실수로 베오그라드 주재 중국대사관이 폭격당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유고 사태가 복잡한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그동안 중국은 나토의 유고 공습을 반대해왔다. 판 잔리엔 유고 주재 중국대사는 부서진 대사관 건물 앞에 서서 “중화인민공화국이 공격당했다”고 목청을 돋우었다.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는 “패권주의의 적나라한 작태”라는 비난성명을 발표했다.
베이징에서는 8일 시민-대학생 1만여명이 미국대사관 앞에서 밤늦도록 격렬한 항의시위를 벌였다. 이날 시위대는 베이징대학 등 시내 10여개 대학 학생들이 중심이 돼 오후 12시쯤 미 대사관 앞에 모여들기 시작했고, 오후 2시쯤엔 시민들이 가담하면서 수천명으로 늘어났다. 시위대는 이날 저녁 7시쯤 일단 물러가는 것으로 보였으나 밤이 되면서 더 많은 시민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숫자가 더욱 늘어나고 시위 양상도 훨씬 격렬해졌다.
시위대들은 “하늘이 클린턴을 저주할 것” “미국은 살인자”라고소리치며 돌을 던져 대사관 승용차와 유리창, 정문 전등을 깨기도 했다. 시위대 일부는 성조기를 불태우며 차량을 앞세워 대사관 정문을 돌파하려다 경찰에 의해 간신히 저지되기도 했다. 또 남부 청두와 광저우, 상하이 등 중국 곳곳에서 반미시위가 벌어졌고, 특히 청두에선 미국 영사관이 시위대 방화로 2층 대부분이 불탔다.
친화쑨 유엔 주재 중국대사는 이날 자신들의 요구로 긴급 소집된 유엔 안보리 회의에서 “나토는 무고한 인명 살상 방지를 위해 유고에 대한 군사공격을 즉각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클린턴 미 대통령은 유고에 대한 공습 완화를 시사하고 미국 독일 등은 오폭 사건 수습을 위한 외교적 중재 노력을 강화했다. 그러나 나토군은 8일과 9일 세르비아 남부 니시와 코소보 중심부를 폭격하는 등 공습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클린턴 대통령은 “중국 대사관 오폭은 비극적인 실수”라며 유감을 표시했으나, “나토의 공습은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슈뢰더 독일총리는 체르노미르딘 러시아 유고 특사, 빌트 유엔 사무총장 특사와 회담한 뒤 “정치적 해결”을 지속키로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옐친 러시아 대통령은 “코소보 평화는 외교를 통해서만 달성될 수있다”며 공습 중단을 촉구했다. 나토는 중국 대사관 오폭 사고가 건물의 성격에 대한 잘못된 정보에 기인한 것이라고 공식 사과했다.
▶1998년 독일 다임러-벤츠와 미국
크라이슬러 합병을 선언
독일의 자동차회사 다임러-벤츠와 미국의 크라이슬러가 1998년 5월 7일 상호합병하기로 발표했다. 덩치가 작은 대신에 착실한 경영으로 현금이 많은 벤츠가 덩치가 큰 크라이슬러를 합병한 것이다. 세계자동차 역사상 최대의 기업합병이었다.
1998년 5월 7일 범세계적 기업인
다임러크라이슬러가 탄생했다.
뉴욕타임스는 이 합병을 `지역적으로나 생산라인 측면에서 가장 균형을 이룬 진정한 범세계적 기업의 탄생`이라고 평가했다. 다임러벤츠는 고급 브랜드 시장에서 독보적인 지위를 구축하고 있으며 크라이슬러는 미니밴, 지프, 경트럭 등 대중적인 제품에서 강세를 나타내고 있어 생산라인이 거의 겹치지 않아 상호 보완적인 성격이 강하기 때문이다.
새 합병회사의 이름은 다임러크라이슬러 주식회사로 결정됐다. 지분은 다임러 주주들이 57%, 크라이슬러 주주들이 43%를 각각 맡기로 했다. 본사는 독일 슈투트가르트와 미국 오번 힐스 2곳에 두기로 했다.
▶1996년 이홍구 전 국무총리,
신한국당 대표로 임명
▶1995년 프랑스 대통령에 시라크 당선
1995년 5월 7일 치러진 프랑스 제5공화국 다섯번째 대통령을 뽑는 선거에서 자크 시라크 파리시장이 당선됐다. 이로써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이 지난 1981년 지스카르 데스텡 대통령을 누르고 엘리제궁에 입성한 이래 14년 동안 지속한 사회당 정권의 대통령 집권이 끝났으며 우파의 엘리제궁 시대가 열리게 됐다.
자크 시라크 파리시장은 1981, 1988년 대통령 선거에 이어 세번째 도전한 끝에 마침내 엘리제궁 입성에 성공했다. 시라크는 1932년 11월 파리에서 태어난 토박이다. 최종학력은 국립행정학교 에나(ENA)에서 학위를 받았고, 앞서 파리정치대학을 다녔다.
시라크는 1959년 회계감사원 감사관으로 사회에 첫발을 디뎠으나 본격적으로 중앙무대의 행정과 정치를 익힌 것은 조르쥬 퐁피두 밑에서다. 시라크는 퐁피두가 총리로 있던 1960년대 총리비서실에서 행정관으로 일했다. 이를 발판으로 시라크는 1967년 고향마을 코레즈에서 드골파 후보로 출마, 하원의원에 당선됐다. 시라크는 오늘날 프랑스 원내 1당인 우파 공화국을 위한 연합당 (RPR)을 1976년에 창당, 1994년말까지 총재로 군림했었다. 1978년에는 파리시장에도 당선, 이해까지 18년 동안이나 파리를 통치했다. 그는 또 1979, 1980년에 유럽의회 의원이었다.
▶1992년 한경직 영락교회 원로목사,
템플턴상 수상
▶1991년 한국 오로라탐험대,
세계11번째 국가로 북극점탐험 성공
북극점 정복에 성공한 한국탐험대의
고정남 최종렬 허영호 신정섭(왼쪽부터).
1991년 5월 7일 새벽1시. 한국 오로라탐험대 최종렬 신정섭 대원이 갖고 있는 아르고스(위성 교신으로 현재 위치를 가르쳐주는 계기)는 북위 89도59분58초를 가리키고 있었다. 정 90도와 2초차. 꿈에 그리던 북극점(오차를 1분으로 감안해 89∼91도 지점이면 극점으로 간주함)에 한국인의 발길이 처음 닿았다는 표시였다.
1909년 미국의 피어리가 처음 탐험에 성공한 이후 국가로서는 11번째, 팀으로는 18번째 개가였다. 이들은 즉시 베이스캠프에 소식을 알렸다. 북위 88도까지 전진했다가 불의의 사고로 화상을 입어 베이스캠프(캐나다 레저루트)로 후퇴했던 허영호 대장과 고정남 단장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탐험은 3월 8일 캐나다 워드헌트섬(북위 83도2분)을 떠난 후 눈보라와 혹한을 뚫고 얼음 언덕을 넘어야 하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리드(빙원이 갈라진 틈으로 드러난 해수면)를 건너다 얼음바다에 빠져 죽을 뻔하기도 했다. 하지만 탐험대는 하루 16∼18시간, 마지막 50km를 남기고는 하루에 22시간씩 강행군을 한 끝에 1200km의 빙판을 61일 만에 주파하는 쾌거를 올렸다. 1990년 노르웨이 팀이 수립한 최단기록(57일)보다 나흘 늦은 호기록이었다.
▶1987년 포항제철 광양제철소 1기 준공
1980년대 들어 경제 규모가 커지면서 철강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 제2 제철소 필요성이 대두되자 정부는 포스코(당시 포항제철)로 하여금 1985년 3월 광양제철소 1기(연간 조강 능력 1천180만t) 설비를 착공케 해 87년 5월 7일 준공했다. 포스코는 계속 늘어나는 국내 철강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88년 7월에 광양 2기(1천450만t), 90년 12월에 광양 3기(1천750만t), 92년 10월 광양 4기 설비를 준공함으로써 연산 2천80만t 체제를 갖췄다. 이후 96년 미니밀과 99년 3월 5고로가 준공됨으로써 연산 2천800만t 체제를 구축해 포스코는 단위 제철소로는 세계 최대 규모의 제철소가 됐다. 2000년에는 포항제철이 민영화 된 데 이어 2002년 회사 명칭을 포스코로 변경하면서 명실상부한 글로벌 철강기업으로 성장했다.
포스코는 전 세계적으로 자동차산업이 꾸준히 성장하면서 자동차강판의 수요가 크게 증가하자 지난 2002년 광양제철소를 고급 자동차강판 전문공장으로 탈바꿈시키고 대대적인 설비투자와 연구개발을 진행했다. 특히 광양제철소는 최근 핫 프레스 포밍(Hot Press Forming : 열간성형) 공장을 준공해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력과 첨단 설비를 갖춘 자동차강판 전문 제철소로 거듭났다. 핫 프레스 포밍 공장은 강재를 원하는 온도로 가열시키는 대형가열로 1기, 가열 후 고온에서 성형을 할 수 있는 프레스 1기, 그리고 성형 후 조립에 필요한 천공기와 불필요한 부분을 정밀하게 절단하는 레이저 커팅 머신(Laser Cutting Machine) 1기가 설치되어 있어 연간 100만 개의 부품을 생산할 수 있는 규모다.
광양제철소는 오는 2008년까지 조강 1천900만t 생산체제를 구축하기로 하는 등 자동차용 고급제품 양산체제 도입과 원가절감 프로세스 계획, 그리고 6시그마 활동을 통해 일하는 방법과 기업문화 혁신, 사회공헌활동 강화 등을 통해 세계 철강업을 이끌어가는 선도 기업으로서의 위상을 견지하고 있다.
또 전 세계 철강업계에서 개발한 첨단 기술의 정수만을 집대성하여 높은 생산성과 국제 경쟁력을 확보함으로써 선진 철강국들로부터도 '21세기 최첨단 제철소'라는 찬사를 듣고 있다.
광양제철소는 광양만의 섬과 바다 500여 만 평을 메우고 14조5천억 원을 투자한 지 불과 10년 만에 세계에서 가장 큰 제철소로 발돋움한 대역사의 현장으로, 한마디로 바다 위의 제철소이며, 설비계획에서부터 공장배치에 이르기까지 순수한 자체 기술로 지어졌다.
▶1983년 중국 공식대표단 민항기
불시착 문제로 첫 내한
▶1983년 북한군 대위 신중철 귀순
▶1982년 한국여자등반대 여성 처음으로
히말라야 람중히말봉 정복
▶1981년 평화통일정책위원회 발족
▶1977년 제3회 주요선진국 정상회담 개막
▶1964년 울산정유공장 준공
1980년대 들어 경제 규모가 커지면서 철강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 제2 제철소 필요성이 대두되자 정부는 포스코(당시 포항제철)로 하여금 1985년 3월 광양제철소 1기(연간 조강 능력 1천180만t) 설비를 착공케 해 87년 5월 7일 준공했다. 포스코는 계속 늘어나는 국내 철강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88년 7월에 광양 2기(1천450만t), 90년 12월에 광양 3기(1천750만t), 92년 10월 광양 4기 설비를 준공함으로써 연산 2천80만t 체제를 갖췄다. 이후 96년 미니밀과 99년 3월 5고로가 준공됨으로써 연산 2천800만t 체제를 구축해 포스코는 단위 제철소로는 세계 최대 규모의 제철소가 됐다. 2000년에는 포항제철이 민영화 된 데 이어 2002년 회사 명칭을 포스코로 변경하면서 명실상부한 글로벌 철강기업으로 성장했다.
포스코는 전 세계적으로 자동차산업이 꾸준히 성장하면서 자동차강판의 수요가 크게 증가하자 지난 2002년 광양제철소를 고급 자동차강판 전문공장으로 탈바꿈시키고 대대적인 설비투자와 연구개발을 진행했다. 특히 광양제철소는 최근 핫 프레스 포밍(Hot Press Forming : 열간성형) 공장을 준공해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력과 첨단 설비를 갖춘 자동차강판 전문 제철소로 거듭났다. 핫 프레스 포밍 공장은 강재를 원하는 온도로 가열시키는 대형가열로 1기, 가열 후 고온에서 성형을 할 수 있는 프레스 1기, 그리고 성형 후 조립에 필요한 천공기와 불필요한 부분을 정밀하게 절단하는 레이저 커팅 머신(Laser Cutting Machine) 1기가 설치되어 있어 연간 100만 개의 부품을 생산할 수 있는 규모다.
광양제철소는 오는 2008년까지 조강 1천900만t 생산체제를 구축하기로 하는 등 자동차용 고급제품 양산체제 도입과 원가절감 프로세스 계획, 그리고 6시그마 활동을 통해 일하는 방법과 기업문화 혁신, 사회공헌활동 강화 등을 통해 세계 철강업을 이끌어가는 선도 기업으로서의 위상을 견지하고 있다.
또 전 세계 철강업계에서 개발한 첨단 기술의 정수만을 집대성하여 높은 생산성과 국제 경쟁력을 확보함으로써 선진 철강국들로부터도 '21세기 최첨단 제철소'라는 찬사를 듣고 있다.
광양제철소는 광양만의 섬과 바다 500여 만 평을 메우고 14조5천억 원을 투자한 지 불과 10년 만에 세계에서 가장 큰 제철소로 발돋움한 대역사의 현장으로, 한마디로 바다 위의 제철소이며, 설비계획에서부터 공장배치에 이르기까지 순수한 자체 기술로 지어졌다.
▶1963년 텔스타2호 발사
▶1956년 해공 신인희 유해호송,
군중과 경찰 간에 충돌사건 발생
▶1955년 신서유럽연합(WER) 정식 발족
▶1955년 민병대 해체
▶1955년 소련, 영국-프랑스
동맹 조약 폐기
▶1955년 서구동맹(WEU) 정식 발족
▶1954년 프랑스군 거점 디엔비엔푸 베트민군에 함락
프랑스는 2차 세계대전 때 연합군 덕분에 승전국이 됐지만 여전히 식민지 침공을 포기하지 못했다. 1946년 11월, 프랑스는 옛 식민지 베트남을 재차 침공했다. 주로 용병들고 구성된 프랑스군을 맞이한 것은 호치민의 월맹(베트민)군이었다.
1949년 6월, 프랑스는 해외에 망명 중인 응우옌 왕조의 바오다이 황제를 주석으로 한 친프랑스 정부를 세웠다. 전쟁이 장기화됐고 전황은 점차 프랑스군에 불리해졌다. 1953년 11월, 프랑스군 총사령관 앙리 나바르는 라오스로 연결된 월맹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기 위해 1만 6,000명의 외인부대를 동원해 라오스 국경의 디엔비엔푸를 점령하고 요새를 건설했다. 디엔비엔푸는 주변에 험준한 산이 포진해 있었기 때문에 월맹군이 중화기를 가지고 진입해 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방책이었다.
하지만 월맹군이 이끄는 보구엔지압(武元甲)은 4만 명의 병력으로 터널을 뚫고 요새 벽까지 접근했으며 대포를 분해해서 등에 진 채 인해전술로 산을 넘었다. 1954년 3월 13일, 월맹군이 디엔비엔푸에 공격을 개시했다. 월맹군의 계속된 공격으로 곧 프랑스군의 활주로는 파괴됐으며 프랑스군은 보급을 공중투하에 의존해야만 했다.
결국 1954년 5월 7일 인도차이나전쟁의 종결을 토의하는 제네바회담 도중 인도차이나에 있는 프랑스군의 거점, 디엔비엔푸가 세계가 주목하는 가운데 함락됐다. 56일간에 걸친 전투가 끝난 것이다. '싸우면 반드시 이긴다'라고 쓰여진 월맹군의 군기가 포연 가득한 디엔비엔푸 계곡에 펄럭였다. 디엔비엔푸에 포격을 개시한 이후 프랑스군 지역을 차츰 점령해 나가던 월맹군은 전술을 바꿔 참호를 파나가면서 서서히 프랑스군 거점에 접근했고 함락 전날인 6일, 네번째 공격에서 백병전을 통해 최후의 거점 이자벨을 점거해 승기를 붙잡았은 것이다.
이 전투로 프랑스군은 6,000명의 사상자가 생기고 1만 명이 포로가 됐으며, 월맹군도 8,000명이 전사하고 부상자가 1만여 명에 이르렀다. 이 전투를 끝으로 프랑스의 100년간에 걸친 인도차이나 지배도 종지부를 찍었다.
▶1952년 거제도 포로수용소장 도드 피랍
1951년 7월부터 시작된 휴전회담이 2년이나 지속된 것은 포로 때문이었다. 유엔군측이 발표한 북한군 포로는 13만2400여명(중공군 포로 2만700명을 포함)이었고 북한측이 발표한 유엔군 포로는 1개월 전 평양방송을 통해 주장한 6만5000여명에 훨씬 못미치는 1만1500여명(유엔군 4400여명 포함)이었다.
문제가 된 것은 포로송환이었다. 유엔군측이 인도주의적인 점을 강조한 자유송환 즉 원하는 포로만 북한으로 보낸다는 입장이었던 반면 북한측은 1949년 제네바협정이 규정한대로 자동송환 즉 모든 포로를 북한으로 송환하라는 주장을 폈다. 북으로 송환되기를 원하는 포로가 7만여명 뿐이라고 유엔군측이 북한에 통보하면서 회담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거제도에 수용돼 있던 포로들도 친공ㆍ반공포로로 갈려 유혈사태를 빚고 있었다. 더구나 북한측은 공작원들을 포로로 잠입시켜 수용소 내 친공포로들을 배후 조종하며 반공포로들을 대상으로 협박과 테러를 일삼았다.
이로인해 크고작은 폭동이 빈발하던 1952년 5월7일, 거제도 제76포로수용소장 도드 준장이 친공포로들에게 납치ㆍ감금되는 포로사상 전무후무한 일이 발생했다. 수용소 철조망 밖에서 포로들과 면담을 하던 중 치밀한 친공포로들의 계략에 의해 수용소 안으로 끌려간 것이다. 후임소장 콜슨이 포로들의 요구를 상당부분 수용하고 도드 역시 미군의 잔학행위를 시인함으로써 도드는 나흘 만에 석방됐지만 이로인해 도드는 대령으로 강등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1946년 조선정판사 위조지폐사건,
미군정 수사대에 의해 발각
▶1945년 독일 연합군에 항복
독일군 장성이던 알프레드 요들이
무조건항복 문서에 서명하고 있다.
1945년 5월 7일 독일이 연합국이 제시한 무조건항복 문서에 서명함으로써 5년 8개월에 걸친 광기의 2차 세계대전이 그 종결을 알렸다. 항복 조인식은 프랑스 상파뉴 지방의 중심도시 랑스에서 이뤄졌다. 독일의 패배는 4월 30일 나치의 ‘신’이라 할 만한 히틀러의 자살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종전을 환영한 뉴욕과 런던 등의 시민들은 자동차 경적을 울려대며 환호했다.
연합국 총사령관 아이젠하워는 "적이 전장으로부터 영원히 쫓겨났다"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일본군이 항복할 때 우리들의 전투는 비로소 끝이 난다"고 방송했다. 스탈린은 `위대한 조국방위전쟁의 종결`이라는 특별포고를 발표했고, 처칠은 대일선전을 강화하면서도 `전체주의 국가와 경찰국가가 히틀러를 대신한다"며 소련군에 대한 경계를 나타냈다.
8월 6일에 이어 9일에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자 동맹국 독일의 항복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버티던 일본도 마침내 연합국에 백기를 들었고, 이로써 2차대전이 그 막을 내렸다.
이날 독일 항복문서에 독일 대표로 서명한 독일군 장성 알프레드 요들은 전후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소에서 전범판결을 받고 처형됐다.
▶1942년 일본군 고레히돌 섬 점령
▶1934년 진단학회 창립
▶1921년 황신덕등 동경에서
조선여자기독청년회(YWCA) 조직
▶1921년 상해에서 중국공산당 창당대회
▶1914년 윌슨대통령, 5월 두번째 일요일
을 어머니날로 제정한다는 연방의회 결의
를 승인
▶1909년 사진의 현상과 인화 과정을
단일화한 미국의 발명가,
물리학자 랜드 출생
▶1902년 황성신문 사장 남궁억 피검
▶1875년 일본-러시아 사할린 치시마 교환 조약 조인
▶ 1873년 베네수엘라의 초대 대통령 파에스 사망
▶ 1840년 19세기 초 독일의 낭만주의를 개척한 화가 프리드리히 사망
▶ 1840년 차이코프스키 출생
관현악의 대가, 차이코프스키
차이콥스키의 음악에는 가슴을 파고드는 그 무언가가 있습니다. 특별히 음악에 귀를 기울이려고 애쓰지 않아도 그의 음악은 저절로 우리 마음을 움직입니다. 가슴 저미는 선율과 풍부한 오케스트라 사운드, 긴박감 넘치는 종결부의 벅찬 환희! 차이콥스키의 음악은 항상 가슴이 확 트이는 카타르시스를 전해주곤 합니다. 어떤 이들은 차이콥스키가 자신의 정신적인 문제를 음악으로 승화시켜 자신의 정신병을 치료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예민한 성격에다 동성애 성향이 있었던 차이콥스키는 늘 다른 이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남들보다 몇 배의 감정적 부담을 안고 살아야 했습니다. 그에게 음악은 없어서는 안 될 일종의 탈출구였습니다. 그래서 차이콥스키의 작품은 그 어떤 작곡가들보다도 그의 삶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차이콥스키가 본격적으로 그의 대표작을 내놓기 시작한 시점도 그의 삶에 결정적인 변화가 찾아온 시기와 일치합니다. 1877년, 37세의 차이콥스키는 불행과 행운을 함께 경험하며 격변기를 맞이했습니다. 그해 후원자인 폰 메크 부인으로부터 후원금을 받기 시작한 차이콥스키는 경제적 안정을 찾을 수 있었으나 사랑하지도 않는 여성과 성급한 결혼을 감행한 후 말할 수 없는 정신적 고통을 겪었습니다. 아마도 차이콥스키는 결혼을 하면 동성애에 대한 소문을 잠재울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혹은 당시 작곡 중이던 오페라 [예브게니 오네긴]의 주인공 오네긴과 자기 자신을 동일시했는지도 모릅니다. 차이콥스키는 오페라에서 여주인공 타치아나의 연애편지를 매정하게 거절한 오네긴의 오류를 범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일까요? 그는 1877년 7월에 그에게 열렬한 연애편지를 보낸 음악원의 제자 안토니나 밀류코바라는 여인과 급히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그러나 오페라와 현실은 너무나 달랐습니다. 차이콥스키의 불행한 결혼생활은 얼마 지나지 않아 파경에 이르렀고 차이콥스키는 심한 신경 쇠약에 시달리다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습니다.
우수의 작곡가 차이콥스키. <출처: Wikipedia>
가혹한 운명을 상징하는 ‘운명의 동기’
개인적인 전환과 위기를 맞이한 이 시기에 차이콥스키는 독자적인 음악양식을 보여준 대작들을 내놓았습니다. 그 중 [교향곡 4번]은 매우 특별합니다. 차이콥스키 관현악 양식의 결정적인 변화를 보여주는 이 비범한 교향곡은 차이콥스키에게 국제적인 명성을 가져다 준 작품이기도 합니다. [교향곡 4번] 도입부를 장식하는 금관악기의 팡파르는 차이콥스키를 뒤따르는 가혹한 운명을 나타내듯 처절하고도 비극적으로 제시됩니다. 이 팡파르는 4악장 마지막에 다시 등장해 끊임없이 그를 추적해오는 운명의 집요함을 강조합니다. 이것은 마치 바그너의 음악극에 사용되는 라이트모티브(leitmotiv, 특정 인물이나 감정 등을 일정한 음악적 동기로 표현하는 기법으로, 주도동기 혹은 유도동기라 부르기도 함)와 비슷합니다. 이 팡파르에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운명의 동기’라 말할 수 있을 겁니다.
금관악기가 연주하는 운명의 팡파르가 단조로 제시된다는 점은 특히 중요합니다. 차이콥스키 당대에는 밸브가 달린 개량 금관악기들이 보편화되어 금관악기로 단조 선율을 연주하는 데 제약이 없었으나, 밸브가 발명되기 이전에는 금관악기로 단조 팡파르를 연주하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또한 금관악기가 장송행진 풍의 비극적인 음악을 연주할 때는 약음기를 낀 채 작은 소리로 연주하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그러나 차이콥스키는 전통적인 관례를 깨고 [교향곡 4번] 도입부를 단조의 포르티시모(ff, 매우 크게 연주하라는 강약 기호)로 충격적인 팡파르를 제시해 듣는 이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줍니다. 아마도 이 팡파르는 당대 청중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을 겁니다. 오늘날에도 이 팡파르는 말러의 [교향곡 5번] 1악장을 여는 트럼펫의 팡파르와 함께 훌륭한 ‘단조 팡파르’라 할 만합니다.
차이콥스키의 ‘운명의 동기’는 비단 [교향곡 4번]에만 등장하는 건 아닙니다. 그의 [교향곡 5번](1888년)은 ‘차이콥스키의 운명 교향곡’이라 해도 좋을 만큼 1악장 도입부의 ‘운명의 동기’가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클라리넷의 어두운 음색으로 단조로 연주되는 운명의 동기는 [교향곡 4번]의 운명처럼 가혹하다기보다는 차라리 체념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이 우울한 운명은 4악장에 이르러 승리로 바뀝니다.
[교향곡 5번]에서 운명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보여주었던 차이콥스키는 그의 마지막 교향곡인 [교향곡 6번 ‘비창’]에서 교향곡 역사상 매우 독특한 결말로 완전한 체념의 정서를 전해줍니다. 차이콥스키는 1893년 9월에 [‘비창’ 교향곡]을 완성하고 그해 10월에 초연한 후 9일 만에 세상을 등지고 맙니다. [‘비창’ 교향곡]을 작곡할 당시 차이콥스키는 자신의 죽음을 예견했는지도 모릅니다. 끝없이 하강하는 선율과 꺼져가듯 길게 사라지는 4악장의 종결부는 삶의 종말을 나타내는 듯합니다.
[‘비창’ 교향곡] 4악장의 종결부에서 활약하는 악기는 비올라와 첼로, 더블베이스의 저음현과 목관악기 중 가장 어두운 음색을 지닌 바순입니다. 교향곡이 끝이 가까워오면 비올라와 바순이 연주를 멈추고 오로지 첼로와 더블베이스만 남아 피아니시시시모(pppp)의 극히 여린 음으로 사라져갑니다. 이때 더블베이스는 두 파트로 나뉘어, 상성부는 점차 느려지는 심장박동을 독특한 리듬으로 표현하고 하성부는 현을 퉁기는 피치카토 주법으로 다가오는 종말의 마지막 발걸음을 암시합니다. 교향곡의 마지막 악장을 화려한 알레그로 악장 대신 어둡고 느린 악장으로 대체한 점은 가히 혁명적인 일이라 할 만합니다. 운명을 극복하고 승리로 끝맺는 [교향곡 5번]과 비교해볼 때 [교향곡 6번]은 상당히 염세주의적인 느낌을 주지만, 운명에 굴복하는 ‘비창’의 우울한 정서는 오히려 우리의 정신을 맑게 정화시켜 한없는 미(美)의 세계로 이끌어줍니다.
감정적 고양을 표현하는 ‘동형진행’ 기법
교향곡 4·5번의 ‘운명의 동기’와 [교향곡 6번]의 특별한 종결부 외에도 차이콥스키 관현악에서 거론할만한 특징은 너무나 많지만, 그 중 차이콥스키 음악의 매력을 가장 잘 드러내는 기법 하나는 꼭 소개해드리고 싶군요. 차이콥스키는 감정적인 고양을 표현하고자 할 때 ‘동형진행’, 즉 ‘시퀀스’(sequence)라는 기법을 종종 사용했습니다. 동형진행이란 쉽게 말해 일정한 선율 패턴을 계속 반복하는 기법입니다. 그런데 단순히 반복만 하는 게 아니라 음높이를 점진적으로 다르게 반복하기 때문에 분위기를 고조시키거나 혹은 침체시키기도 합니다. 차이콥스키가 그의 음악에 자주 사용하던 동형진행 방식은 하나의 선율 패턴을 점점 더 높은 음으로 반복해서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것입니다. [로미오와 줄리엣] 중 감동적인 ‘사랑의 테마’는 차이콥스키 특유의 동형진행이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된 예라 할 만합니다.
사랑의 테마 중간 부분을 잘 들어보면 작은 소리로부터 점차 큰 소리로 연주되면서 분위기가 고조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 지점에서 차이콥스키는 동형진행의 기본 단위가 되는 짧은 선율을 먼저 제시합니다. 이 시퀀스 단위가 ‘난 널 사랑해’라는 문장이라고 가정한다면, 차이콥스키는 점차 어조를 높여 ‘난 널 사랑해’를 반복하다가 몇 차례 반복된 후에는 마치 ‘나는 널 사랑해’ ‘널 사랑해’, ‘사랑해’ 라는 식으로 음표는 줄이고 음은 높여서 극적인 클라이맥스를 구축합니다.감정의 고양상태를 이보다 더 잘 표현한 음악이 있을까요! 동형진행 기법을 사용한 작곡가들은 많지만 차이콥스키처럼 효과적으로 사용한 작곡가는 드물 겁니다.
차이콥스키는 생전에 국제적인 작곡가로서 명성을 획득할 수 있었던 소수의 러시아 작곡가들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이처럼 즉각적으로 대중의 가슴 속을 파고드는 음악을 만들었으니 그가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은 것도 당연한 일이겠지요. 오늘날에도 차이콥스키의 인기는 식을 줄을 모릅니다. 클래식 입문자에게나 클래식 마니아에게나 늘 한결같은 감동을 안겨주는 차이콥스키의 음악은 앞으로도 오래도록 살아남을 ‘클래식 중의 클래식’이라 할 만합니다.
▶ 1833년 독일 작곡가 브람스 탄생
흔히 브람스의 음악은 늦가을에 어울린다고들 합니다. 어딘지 모를 우수와 쓸쓸함이 담긴 브람스의 음악이 낙엽 지는 늦가을의 황량함과 비슷하기 때문일 겁니다. 특히 4곡의 교향곡을 비롯한 브람스의 관현악곡의 색채는 우울한 회색조로 가득합니다. 그런 브람스를 ‘관현악 대가’의 반열에 올리는 것에 반대하는 분들도 있을 것 같군요. 물론 브람스의 관현악은 바그너의 웅장함과 리스트의 화려함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멘델스존의 경쾌함과 베를리오즈의 참신함과도 거리가 멉니다. 그러나 브람스의 관현악엔 그 특유의 중후함과 신비함이 배어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브람스 관현악의 특별한 점이지요.
음악학자 아담 카스는 브람스의 중후한 관현악 사운드를 가리켜 “두텁고 진흙투성이다”(thick and muddy)라고 표현했습니다. 아마도 많은 분들이 이 말에 어느 정도 동의하실 것 같군요. 중저음에 무게가 실린 둔탁한 음향은 브람스 음악에 입문하기 어렵게 하는 요소 중 하나입니다. 브람스의 음악을 처음 들을 때는 그 두터운 음향 덩어리 속에서 의미 있는 멜로디들을 찾아내기 위해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오케스트라 연주자들도 브람스를 연주할 때면 진흙처럼 엉켜있는 복잡한 성부 구조를 좀 더 잘 드러내기 위해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해야합니다.
중저음에 무게가 실린 어두운 음향
브람스는 결코 대규모 악기편성이나 화려한 음향효과를 노리는 작곡가가 아니었습니다. 사실 브람스 관현악의 악기편성은 시대착오적입니다. 그의 교향곡 악기편성은 그보다 70여 년 전에 작곡된 베토벤의 교향곡의 악기편성과 별로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는 플루트와 오보에, 클라리넷, 바순으로 구성된 오케스트라의 목관악기군에 각각 2대씩의 악기를 넣은 2관 편성을 고수했고 금관악기는 호른 4대와 트럼펫 2대, 트롬본 3대 정도에 머물렀으며 타악기도 대부분 팀파니 한 대에 정도에 그칩니다.
간혹 피콜로와 콘트라바순이 추가되기도 하지만 이런 정도는 베토벤의 교향곡에도 등장합니다. 베를리오즈가 브람스가 첫 교향곡을 작곡하기 46년 전에 작곡한 [환상 교향곡]에서 바순을 무려 4대나 편성하고 하프를 2대 사용했으며 팀파니 주자를 무려 4명이나 투입한 것에 비하면 브람스의 악기편성은 지나치게 보수적입니다. 브람스 당대에 함께 활동했던 바그너가 관현악곡에 자주 넣었던 튜바도 거의 쓰지 않았으니, 만일 오케스트라에서 브람스의 교향곡만 연주한다면 튜바가 편성된 교향곡 2번만 빼고 튜바 주자가 내내 쉬어야할 판입니다.
우수와 고독의 작곡가로 잘 알려져 있는 브람스.
하지만 브람스의 관현악곡은 바그너 못지않은 꽉 찬 음향을 들려줍니다. 자극적이고 압도적인 금관악기가 별로 돋보이지 않는데도 말이죠. 아마도 그 비결은 밀도 높은 ‘화성’에 있는 듯합니다. 브람스는 누구보다도 화성을 잘 다루었던 작곡가입니다. 그는 여러 성부를 중복하고 악기 소리를 조합했으며 그 복잡한 화성이 논리적으로 전개되도록 빈틈없이 작품을 구성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오케스트라의 각 악기군은 하나의 독립된 개체로서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고 농밀하게 응축된 형태로 드러납니다. 그러나 그 음향은 항상 용의주도한 화성 전략에 따라 구성되기에 그 특유의 권위와 기품이 있으며 풍부한 울림으로 듣는 이를 압도합니다. 소리 자체는 크지는 않으나 그 밀도가 매우 높기 때문에 거대한 에너지를 발산합니다.
밀도 높은 음향과 고뇌에 찬 화성
브람스가 젊은 시절에 작곡하기 시작한 [피아노 협주곡 1번]에도 브람스 특유의 화성과 어두운 음향이 나타납니다. 브람스는 21세 생일을 2달 앞둔 1854년 3월에 그의 피아노 협주곡 1악장의 바탕이 된 [2대의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d단조]를 완성했습니다. 그는 곧 이 곡의 1악장을 관현악으로 편곡한 후 다시 피아노 협주곡으로 고쳐 1악장을 완성했습니다. 당시 브람스가 존경하던 음악가 로베르트 슈만이 라인 강에 투신한 사건으로 충격을 받은 탓인지 [피아노 협주곡] 1악장의 도입부는 격한 감정과 어두운 분위기로 가득합니다.
팀파니의 낮은 D음이 울리는 가운데 강렬한 주제가 연주되지만 그 음향은 어둡고 황량합니다. 끝없이 떠도는 화성적 긴장으로 인해 결의에 찬 주제는 결코 갈등을 해결하지 못한 채 무겁게 침잠할 뿐입니다. 25마디에 이르도록 d단조가 확립되지 않고 계속 표류해 나가는 화성은 어떤 면에서는 바그너의 반음계 화성보다도 더욱 격한 갈등을 만들어내며 브람스 특유의 어둡고 중후한 오케스트라 사운드를 만들어냅니다.
그로부터 거의 30년 후에 작곡된 브람스의 [교향곡 3번]의 도입부 역시 밀도 높은 음향과 고뇌에 찬 화성으로 깊은 인상을 전해줍니다. 1악장의 시작을 알리는 F장조의 장 3화음은 한 마디가 지나자마자 감7화음의 고뇌로 뒤바뀌고 다시 장3화음으로 되돌아오며 긍정과 부정을 거듭합니다. 이때 장, 단조의 교대를 주도하는 주요 모티브는 F-Ab-F로 브람스가 청년 시절부터 부르짖던 ‘자유롭게 그러나 즐겁게’(Frei aber Froh)라는 좌우명의 머리글자를 딴 것입니다. 이 모티브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현악기의 주제는 강한 포르테로 등장하기는 하지만, 곡의 시작을 알린다기보다는 곡의 마지막을 향해 가듯 끝없이 추락하고 또 추락해가며 브람스 특유의 어둡고 두터운 음향을 들려줍니다.
찬란한 솔로와 섬세한 실내악적 울림
브람스의 관현악은 이처럼 두텁고 어두운 음향으로 채색되어 있지만 때로는 전혀 다른 소리도 들려줍니다. 브람스 관현악의 진정한 매력은 그 두터운 음향을 뚫고 나오는 솔로 악기의 특별한 용법이 아닐까 싶습니다. 브람스의 음악을 끈기 있게 듣다보면 그 답답한 음향 덩어리 속에서 마치 태양이 떠오르듯 숭고하면서도 고귀한 선율이 솟아오르는 순간을 맞이하게 됩니다. [교향곡 1번] 4악장 초반, 오케스트라는 깊은 심연 속으로 침잠하듯 미궁 속에 빠져들지만 갑자기 호른의 시원한 선율이 모든 갈등을 일시에 해결하며 마음의 응어리를 풀어줍니다. 그것은 베토벤 교향곡의 찬란한 광명은 아니지만 마치 동쪽 하늘에서 천천히 해가 떠오르듯 서서히 찾아오는 여명과도 같습니다. 그 마법과 같은 순간에는 누구라도 브람스의 관현악의 숭고한 아름다움에 새삼 감탄하게 될 겁니다.
브람스는 한 악기를 돋보이게 하는 솔로 용법을 자주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한 번 나왔다 하면 다른 어떤 관현악곡에서보다 더욱 빛을 발합니다. [교향곡 2번]에서 2악장의 심오함을 목가적인 풍경으로 바꾸어놓은 3악장의 오보에 솔로와 바이올린협주곡 2악장 도입부에서 독주 바이올린의 등장에 앞서 무려 2분간 계속되는 오보에 솔로, [피아노 협주곡 제2번] 3악장을 여는 첼로 솔로를 듣다 보면 브람스가 악기의 개성에 대해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브람스는 악기가 돋보이게 하는 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는데, 이는 연주생활을 통해 익힌 실내악적 감각 덕분인 듯합니다.
브람스는 상당히 늦은 나이에 관현악곡을 쓰기 시작한 브람스는 본래 피아니스트로 출발했습니다. 브람스는 젊은 시절 종종 연주회를 열곤 했지만 그에게 피아노는 기교를 과시하기 위한 악기는 아니었습니다. 그에게 피아노는 그 자신의 내밀한 음악언어를 담아내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따라서 그의 연주활동은 화려한 독주보다는 다른 악기와 함께 하는 실내악 분야에서 더욱 빛났습니다. 브람스 교향곡의 3악장에서 종종 들을 수 있는 실내악적이고 서정적인 음악은 바로 브람스의 실내악적 감각에서 비롯된 음악이라 하겠습니다. 거대하고 밀도 높은 1, 4악장에 비해 짧은 간주곡처럼 사랑스런 분위기가 가득한 브람스 교향곡 3악장의 음향은 브람스가 만들어낸 또 하나의 실내악적인 관현악 사운드라 할 만합니다.
말년의 브람스는 [교향곡 제4번]에서 또 한 번의 관현악 실험을 감행하며 여태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소리를 창조해냈습니다. 호른의 연주로 시작되는 2악장에서 ‘프리지안’이라는 옛 음계를 사용하는 한편 호른 솔로와 현악기 피치카토 반주가 붙은 클라리넷의 솔로를 통한 색다른 악기 용법으로 거룩한 종교 선언문과 같은 신성한 소리를 만들어냈습니다. 또한 3악장에서 피콜로와 트라이앵글이 강조된 색채적인 오케스트레이션은 브람스로서는 매우 이례적입니다. 브람스는 슈만의 [교향곡 1번 ‘봄’]의 화사한 음향을 닮은 3악장으로 슈만을 기억하고자 했던 것일까요? 어떤 지휘자는 “브람스의 음악에선 태양이 빛나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했지만 브람스 [교향곡 4번]의 3악장만큼은 예외로 해두고 싶군요.
두텁고 밀도 높은 음향으로부터 찬란한 솔로와 섬세한 실내악적 울림에 이르기까지 브람스가 오케스트라로 구현해낸 소리는 결코 단조롭지 않습니다. 그에게 관현악 음향이란 음악을 위한 도구일 뿐 음향효과가 음악에 앞서지 않았습니다. 브람스가 바그너나 베를리오즈 같은 다양하고 화려한 악기편성을 시도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를 관현악법에 서투르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브람스는 그가 표현하고자 하는 바가 있다면 최소한의 악기편성만으로도 그 음향을 구현해낼 수 있었던 진정한 관현악의 대가라 할 만합니다.
▶ 1812년 영국의 시인 로버트 브라우닝 출생
▶1592년 임진왜란 최초의 대승 거둔
옥포해전(음력일)
* 옥포해전도 - 5월 7일 전 함대가 동시에 출항해 옥포 근해에 이르자 척후장(斥候將)인 사도첨사(蛇渡僉使) 김완(金浣)이 적을 발견했다는 신호를 보냈다. 이 때 도도(藤堂高虎)가 지휘하던 왜선 30여 척은 홍백기를 달고 해안에 흩어져 있고, 왜적들은 포구로 들어가 재물을 노략질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아군의 기습공격을 받았다. 이에 왜적은 당황하여 6척을 앞세워 해안을 따라 도주하기 시작하였다. 아군은 이를 포위하고 맹렬하게 포격을 가해 왜선 26척을 격파하였다. 그리고 왜적에게 포로로 잡힌 3명을 구출해 임진왜란 중 해전에서 첫 승리를 거두었다. 이날 전투에서 탈출에 성공한 왜선은 몇 척에 불과하였다. 미처 배를 타지 못한 왜적은 육지로 달아났다. 아군은 달아나는 왜적을 추격해 영등포(永登浦 : 거제시 장목면)를 거쳐 합포(合浦 : 마산시 합포구)에서 5척, 다음 날 적진포(赤珍浦 : 통영시 광도면)에서 11척을 각각 불태워 무찌르고 9일 본영으로 돌아왔다. 이순신은 이 전공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의 관계를 받았다.
출처 네이버지식백과, 반가운의hi스토리, 편집 뜨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