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방 벽에 귀기울이면 강물 흐르는 소리가 난다
벽과 벽지 사이로 찰랑찰랑 스며드는 물소리
꽃무늬 벽지의 마르지 않는 습기 사이로
슬리퍼 한짝 떠내려가고
짙은 안개가 조금씩 범람하는 방을 지나간다
(중략)
벽지 속 강물을 건너시는 아버지
끝내 벽은 사라지지도 않고
꽃무늬 벽지의 꽃들이 피어나고 시들어간다
어느날 벽지 속 강물 어디로 숨어버렸는지
들리지 않는 물소리,
벽은 이제 바삭거리는 쎌로판지 구겨지는 소리를 낸다
꽃무늬 벽지의 꽃들이 폐허 속에서
더욱 환한 꽃을 피운다 (부분)
-『경북매일/이성혁의 열린 시세상』2022.11.10. -
위의 시에서 ‘벽’은 기억의 끝에서 마주치게 되는 현실로서 나타난다. “끝내 벽은 사라지지도 않”는 것이다. 어린 시절 기억 속 아버지는 메마른 벽지 같은 지금 현실엔 존재하지 않는다.(시인은 이 현실을 ‘폐허’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 벽지의 꽃무늬가 시인의 몽상을 유도하며, 기억과 현실 사이의 막인 ‘꽃무늬 벽지’는 그나마 시인이 현재의 삶을 견디며 몽상의 ‘환한 꽃’을 피울 수 있는 장소가 돼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