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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을 자랑하는 자
잠 27:1-4
1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
2 타인이 너를 칭찬하게 하고 네 입으로는 하지 말며 외인이 너를 칭찬하게 하고 네 입술로는 하지 말지니라
3 돌은 무겁고 모래도 가볍지 아니하거니와 미련한 자의 분노는 이 둘보다 무거우니라
4 분은 잔인하고 노는 창수 같거니와 투기 앞에야 누가 서리요
잠 27:1-4 / [벗을 저버리지 말아라] 내일이 있다고 자신만만하지 말아라. 오늘 하루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어찌 알 수 있으랴! 2) 네 입으로 네가 잘났다고 뽐내지 말아라. 네 입술로 `이만하면 되지 않았소!' 하고 떠벌리지 말아라. 다른 이가 너를 칭찬하고 치켜 세워 주어야 보기에 좋을 것이 아니냐? 3) 돌도 무겁고 모래도 무겁지만 어리석은 자가 화를 내는 것보다는 견디기 쉽다. 4) 누구든 화를 내면 잔인해지고 흥분을 하면 콸콸 흘러 넘치는 큰물과 같이 걷잡을 수 없게 된다. 그러나 그보다 견디기 더 어려운 것은 시샘이 아니냐?
내일 일을 자랑하는 것과 자신을 칭찬하는 것 그리고 분노의 감정이 우리 삶에 얼마나 큰 해를 끼치는지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1-2) 어떤 일이 잘 되면 자랑하고 싶어집니다. 결과물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보통의 경우 어떤 일이 잘 될 것이라는 가정과 추측을 가지고 자랑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아직 결과물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일 일’을 가지고 자랑한다는 것은 서두르는 측면이 있습니다.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네가 알 수 없느니라’는 말이 정확하게 맞습니다. 내일 일을 모릅니다. 그래서 겸손해야 합니다. 2절의 ‘칭찬’이라는 단어 역시 1절의 ‘자랑’이라는 단어와 같은 ‘할랄’을 씁니다. 1절과 2절이 서로 관련되어 있습니다. 자기가 자기 자신을 칭찬하는 것도 심리학적 측면에서 보면 일면 타당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존감을 높여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보통의 경우에는 이런 것이 모순되어 보입니다. 자화자찬보다는 다른 사람들이 인정해 주고 칭찬해 주는 것이 옳습니다. 사람은 자신에게는 필요이상으로 관대하기 쉽기 때문에 칭찬의 형평성에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분은 잔인하고(3-4) ‘분노조절장애’라는 말이 있습니다. ‘간헐성 폭발장애’라고도 합니다. 이는 한 마디로 말하면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폭력적인 행동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 자신이 아닌 타인에게 악영향을 줍니다. 본문에서 다루고 있는 분노의 감정은 상당히 부정적입니다. 돌과 모래는 무겁습니다. 물에 넣으면 가라앉습니다. 그런데 미련한 자의 분노는 돌과 모래보다 더 무겁습니다. 특히 ‘미련한 자의 분노’가 더욱 힘든 이유는 ‘당장’ 나타내기 때문입니다(잠 12:16). 참을성이 결여된 분노이기 때문에 정말 위험합니다. ‘분노’는 사람을 죽이게 합니다(4). 잔인합니다. 창수와 같아서 모든 것을 휩쓸어 버립니다. 한 순간에 파괴적인 결과를 낳습니다. 이런 분노의 감정을 자극하는 것이 ‘투기’입니다. 투기는 ‘시기와 질투’라는 감정과 같습니다. 창세기 4장을 보면 가인은 투기의 감정으로 인해 동생 아벨을 죽였습니다. 분노의 감정을 잘 다스리는 것이 지혜입니다.
적용: 분노의 감정으로 인해 당신은 물론 주변 사람들도 힘들고 어려웠던 경험이 있나요? 어떻게 하면 분노의 감정을 잘 다스릴 수 있을까요?
스펄전 목사는 소유에 관하여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믿는 자여, 그대는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고, 자랑할 만한 이유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교만을 물리치라. 그대가 많은 것을 소유하였으면 오히려 그만큼 하나님께 빚을 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가 빚쟁이란 것은 자랑할게 없다. 그대가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생각해 보라. 하나님의 은혜가 없었다면 그대가 어떤 사람이 되었을까를 생각해 보라.“
< 설 교 >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잠언 27장 1절 / 박조준 목사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
오늘 저녁 잠언 27장 1절 말씀을 중심해서 생각하고 기도하십시다.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 영도자 모세의 기도로 알려진 시편 90편을 읽어보면 거기 모세의 눈 에 비친 일생의 일면을 엿 볼 수 있습니다.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 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주의 목전에는 천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경 점같을 뿐임이니이다 주께서 저희를 홍수처럼 쓸어 가시나이다 저희는 잠깐 자는 것 같으며 아 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벤 바 되어 마르나이다 ( 시 90:3-6).
무슨 말입니까? 사람이 사는 것은 한 순간입니다. 시편 39편 5절 이하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주께서 나의 날을 손 넓이 만큼 되게 하시며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그 든든히 선 때에도 진실로 허사 뿐이니이다 진실 로 각 사람은 그림자같이 다니고 헛된 일에 분요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를 알지 못 하나이다 옛날 시인들은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의 어떠함을 알게 하사 나 로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시 39:4),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 (시 90:12)하였습니다. 시편 8편에 보면 주의 손가락으로 만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주신 달과 별을 내가 보니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나이까?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대우주를 보고 우리 인생이란 것을 생각할 때 얼마나 작고 보잘 것 없는 존재 인 것을 옛 시인도 느꼈습니다. 하물며 이 우주 시대를 당해서 천문학이 발전되어 이 우주가 얼마나 광대무변하다고 하는 사 실을 아는 우리 20세기에 사는 사람으로서는 이런 느낌이 커가는 것도 사실입니다. 옛 글의 말 과 같이 인생은 창해일속(滄海一粟)이라고, 푸른 바다의 조알 하나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 다. 뿐만 아니라 우리 사람이 얼마나 연약한지 역대상 29장 15절에는 사람을 그림자 같다고 하 였습니다. 그림자는 실체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야고보 4장 13절 이하에 보면 우리에게 퍽 교훈적인 말씀을 하였습니다. 오늘이나 내일 그 어느 도시로 가서 일년 동안 거기서 지내며 장사하며 이를 남기겠다고 말 하는 사람들이여, 들으시오.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대체 무엇입 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안개에 지나지 않습니다.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안개 이 얼마나 허무합니까? 얼마나 연약한 존재입니까? 그 런데 이 연약하고 허무한 존재인 인간들이 사는 이 세상에는 여러 가지 천재지변이 있습니다. 태풍이 있고, 해일이 있고, 지진이 있고, 홍수가 있고, 무서운 병마가 가득차 있습니다. 그 뿐 입니까? 내 일 일을 모르고 삽니다. 아니 내일까지 갈 것 없고 다음 시간에 어떻게 무슨 일이 생길는지 우리 가운데 누구도 모릅니다. 사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내일 일을 우리가 알고 산다면 두려워서 못살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씀하는 어리석은 부자처럼 그 해의 곡식이 잘되었으니 곡간에 가 득히 채우고 그것으로도 모자라니 다른 새 창고를 더 짓고 거기에도 가득하게 곡식을 채우고 그것으로도 모자라니 다른 새 창고를 더 짓고 거기에도 가득하게 곡식을 채우고 자기 영혼더러 하는 말이 이제는 여러 해 먹을 양식이 넉넉하니 내 영혼아 먹고 마시고 즐기자 한다고 하였습 니다.그러나 그날 저녁에 그 영혼을 불러 가신다면 그 쌓아 둔 모든 것이 뉘 것이 되겠습니까? 내일 일을 알지 못하는 우리 인간이 어떻게 사는 것이 바로 사는 것일까요? 여기에 몇 가지 의견들이 있습니다. 첫째로 세속주의적인 향락적 태도가 있습니다. 옛날 헬라의 문화가 극성할 때 그 시대를 지배하던 사상의 학파가 몇이 있는데 그 가운데 소 위 에피큐리안 학파가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인간의 최상의 목표는 쾌락에 있다고 생각했습니 다. 그래서 사람들의 표어 가운데 하나는 성경에서도 지적하는 그대로 먹고 마시자, 내일 죽으 리라 고 하였습니다. 이런 사상은 그 때 헬라의 에피큐리안만이 가진 생각이 아니고 어떤 사회 에도 있는데 우리 한국 사회에도 이런 사상이 많이 있습니다. 내일이 없는 불쌍한 사람들의 처 세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지요. 모기와 하루살이가 밤에 만나 서로 재미있게 이야기하다가 밤이 늦어 서 모기가 하루살이에게 그럼 오늘은 밤도 깊었으니 내일 또 만나 이야기 합시다. 그러니까 하 루살이가 하는 말이 내일이 무엇이요? 하더랍니다. 하루살이는 하루만 살고 죽기 때문에 내일 을 모릅니다. 세상에서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사는 것 이외에 내세에 대해서 는 모릅니다. 그러므로 내세가 무엇이요? 이 세상 이것이 전부지요 하면서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하루살이처럼 육신의 향락을 위해서 즐기려 합니다. 옛날 중국의 양주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사람이 오래 산대야 100년에 불과해. 그런데 사실 100년을 사는 사람은 1,000명에 하나도 어려워. 설사 어떤 사람이 100년을 산다고 하자. 그러나 가만히 보면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사는 유년기, 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노년기 가 그 반을 차지하니 결국 50년, 또 환난과 질고와 고통을 당하는 기간이 많으니 이것도 모아 놓으면 그 절반은 될 것이니 25년, 그 중에도 잠자는 시간이 거의 반은 될 것이니 사람이 100 년을 산다고 해도 결국은 10여년 밖에는 더 못돼. 그러니 마음껏 향락을 누리고 죽음이란 것은 생각지도 말고 아예 잊어버려라. 그저 네 귀로, 네 눈으로, 네 코로, 네 입으로, 네 발로, 네 손으로, 네 몸으로 하고 싶은 것 , 즐기고 싶은 것은 마음껏 하라 하였습니다. 세속주의적, 현 세주의적, 향락주의적 견해와 태도요 생활 철학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가르쳐 주십니다. 전도서 7장 2절에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 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와 이것에 유 심하리이다 하였습니다. 잠언에도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이 항상 잔치 집에 있으나 지혜로운 자는 초상집에 있느니라 하였습니다. 둘째로 염세주의적 생활 태도입니다. 이것은 조금 전에 생각한 세속주의, 향락주의적 생활 태도와는 정반대 되는 사람들의 생활 자세입니다. 옛날 헬라 시대에 에피큐리안 학파와는 반대 가 되는 사상을 가진 학파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곧 스토아 학파입니다. 이 스토아 학파의 사 상 중에는 이 염세주의적 사상이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람이란 이처럼 잠깐이고 허무하니 결국 의미가 없어. 결국 인간 생활이란 절망의 식은 재 로 화할 것이야. 그러니 근본적으로 이 세상에서 생을 구하지 말라. 생을 부정하라. 생을 사랑 하지 말라. 그러면 이 세상의 헛된 생에 대해서 속지는 않을 것이다 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런 사상은 우리 동양의 불교의 사상에도 많이 있습니다. 불교의 근본 사상은 염세 사상입 니다. 생을 부정하는 사상입니다. 생 자체가 고통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여러 가지 고통이 있지만 생, 노, 병, 사(生, 老, 病, 死)가 고통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세상에서 무슨 향락을 누리려 하지 말고 생을 도피하라. 생을 부정하라. 가정도 사실 쓸데없어 집에서 나가 산에 들어가 도를 닦으라. 그래서 너 자신이 없어지는 무아(無我)지경에 들어가라. 그러 면 행복할 것이다 고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생이라는 것은 우리가 산에 들어간다고 이 고통이 피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 성경이 가르치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기독교의 견해는 어떤 것입니까? 아까 읽은 성경 말씀에서 지적한 것처럼 성경도 인간의 허 무함, 무상함, 순간성을 인정하고 가르쳐 줍니다. 요한 1서 2장 15-17절에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 랑하지 마시오.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그 속에 아버지의 사랑이 없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살림살이에 대한 자랑은 아버지께로부터 난 것이 아 니라 세상으로부터 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도 가고 세상의 정욕도 다 지나가지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은 영원히 삽니다. 베드로전서 1장 24, 25절에도 비슷한 말씀이 있습니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주의 말씀은 영원하도록 있도다. 여러분에게 전한 복음이 곧 주의 말씀입니다 하였습니다. 성경은 인생이 이처럼 허무한 면이 있지만 인생을 좀더 깊이 통찰 할 수 있도록 권면합니다. 인간의 이런 허무성, 순간성은 보이는 면 뿐입니다. 얼른 생각하면 기독교의 사상도 세속적인 것보다 다른 것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보이는 면만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면을 봅니다. 사람이란 보이는 면 뿐만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 면이 있습니다. 세월이 지 나면 보이는 육신의 사람은 주님을 믿는 사람이나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나 주님을 믿지 않 는 사람이나 늙어집니다. 그런데 이것은 밖의 사람 뿐이고 주안에서 새로워질 사람은 겉 사람 이 늙을수록 속 사람은 새로워집니다. 보이는 육은 잠깐이지만 보이지 아니하는 영은 영원불멸 한 존재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여러분, 이 겉 사람은 아무리 가꿔도 별 수 없이 늙어집니다. 물론 손질을 열심히 잘하면 조 금은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여유 있는 부인은 아침 10시에 미장원에 가면 이것저것 다 하고 나면 저녁 5시가 된다고 합니다. 하루종일 화장하는 모양이지요. 그 다음날은 무엇하는지 모르겠어요. 그러나 여러분! 사도 베드로의 권면을 기억하십니까? 여러분은 머리를 꾸미고 금 으로 장식하고 옷을 차려입고 하는 겉 단장을 하지 말고 온유하고 정숙한 정신으로 썩지 않는 숨은 속 사람을 단장하시오. 이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귀한 것입니다(벧전 3:3-4). 여러분, 이 말씀을 오해하지 마세요. 그러면 예수 믿는 사람은 옷맵시도 보지 말고 화장도 하지 말라는 말인가? 아닙니다. 다 하세요. 그러나 거기에 치중하느라고 겉 사람 꾸미노라고 속 사람 단장하지 못하면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사람의 육신이 이렇게 잠깐이라고 하지만 이 시기는 매우 중요 한 시기인 것을 가르쳐 줍니다. 왜냐하면 이 시기에 다시 말하면 육신을 쓰고 있는 기간에 인 간의 영원한 운명이 작정됩니다. 영생과 멸망이 이 육신 쓰고 있는 동안에 작정됩니다. 그러므 로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가르쳐 주기를 너희는 육신을 쓰고 있는 동안에 죄를 회개하고 영 원한 생명을 주시는 너희 하나님은 찾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를 힘입어 죄 사함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으라 고 우리에게 외칩니다. 뿐만 아닙니다. 인간의 육신 생활이 비록 잠깐이라고 하지만 이 잠깐 사는 세상에 하나님께 서는 우리를 행하여 기대하시는 뜻이 각각 있습니다. 우리 하나 하나를 위한 하나님의 경륜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 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잠깐동안 사는 이 세상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나를 향하신 하 나님의 경륜을 찾고, 내 사명을 알아서 살아 있는 동안에 하나님의 일을 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 합니다. 네 사는 날이 많지 못하니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광음을 아껴서 열심히 네 맡은 사명을 다하 라 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세월이 얼마나 빠릅니까? 1978년도 벌써 한 달이 지나갔습 니다. 여러분! 우리는 내일 일을 모릅니다. 우리 경험대로 보면 오늘 만났던 사람 그 다음날 보이지 않아서 알아보면 이 세상을 떠났다고 하는 경우를 종종 당합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와 함께 예배드린 분이 다음 주일 아침 예배에는 예배당이 아니라 하늘나 라에 가 계실 분이 안 계신다고 누가 장담할 수도 없습니다. 성 어거스틴의 말은 퍽 의미가 있습니다. 나는 오직 한 번만 이 세상을 지나갑니다. 그러므 로 이 지나가는 도중에 친절을 베풀 일이나 누구를 도와줄 일이 있다면 그것을 절대로 연기하 지 않고 등한히 하지도 않고 즉시 행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이 길을 다시 통과할 기회가 없기 때문입니다. 성 엘몬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일 하는 것은 영원히 사는 것처럼 일하고 사는 것은 내일 죽는 것처럼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가장 지혜로운 생활입니다. 서반아 옛날 격언에 차차 한다는 길은 도무지 못한다는 집에 인도하는 길이라 는 말이 있습 니다. 선한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맙시다. 내일 우리가 있을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영국 격언에는 연기는 시간의 도적이다 는 말이 있습니다. 서양 속담에 한 발을 무덤에 들여놓고 사람의 욕심이 제일 많아진다 는 말이 있습니다. 사실 그런 모양입니다. 인도의 유명한 시인 타골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나는 나이가 점점 많아지므로 내가 젓는 노를 의지하지 아니하고 이제는 돛을 달고 바람을 의지하노라. 여러분, 우리 가운데 나이가 점점 많아져가므로 내 육체 쇠약해 진다고 한탄하지 마세요. 이 제는 내 힘 의지하지 마시고 믿음의 돛을 달고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을 의지하세요.
육신의 눈 점점 어두워지면서 신령한 눈이 더욱 밝아져서 하늘의 영원한 세계를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 다.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맙시다.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날는지 알 수 없습니다. 오늘 돈 있다 고, 권세 있다고, 건강하다고 자랑하지 맙시다. 내일 일 어떻게 될는지 알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일 오늘 최선을 다 합시다. 주께서 잘했다 칭찬하게 말입니다.
사람이 죽고 일 분 후에 될 일
잠언 27장 1절 / 민경설 목사
이집트에 있는 피라밋과 그핑크스는 세계를 호령하던 투트모스4세의 무덤으로 죽음 후에 자기를 지켜 줄 것이라는 계시를 받고 지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위대하고 세상을 호령했던 그도 죽은 후를 보장 할 수 없었기에 죽음을 두려워하였던 것입니다. 이같이 인간속에 숨겨진 가장 큰 비밀은 죽음입니다. 죽은 다음은 어떤 세상이며 어떻게 되는가 이것을 아는 것이 인간의 운명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열쇠입니다.
그럼에도 인간은 이 비밀을 알지 못하는 채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도 이러한 영원의 비밀을 모르면 삶이 실패가 되는 것입니다. (잠27:1)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 " (약5:14)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
그러므로 내일을 모르고, 죽음을 모르고 있다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죽음 다음 일분도 안되어 벌어질 엄청난 세계가 있다는 것을 모르고 사는 것이 현대인의 비극인 것입니다. 본문에는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사건으로 천국과 지옥에 대하여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본문을 통하여 인간이 죽은 후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를 알아보겠습니다.
1. 인간은 누구나 반드시 죽는다는 것입니다.
(눅17:22)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때가 이르리니 너희가 인자의 날 하루를 보고자 하되 보지 못하리라 "결국 부하게 산 자도 거지로 산 자도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어리석게도 다른 사람은 다 죽어도 자신만은 죽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톨스토이'는 '인간은 누구에게나 죽음만큼 확실하게 다가오는 것도 없다'고 말합니다. 독일의 '아린 하이데거'도 '인간의 본질이 무엇인가 바로 죽음에 이르는 존재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누구나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 참 지혜입니다.
2. 죽은 후에는 즉시 천국과 지옥으로 갑니다.
(눅16:22-23)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죽음 일분 후에 될 일을 사단은 인간으로 하여금 생각하지 못하도록 속이고 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세상은 어둡고 병들고 타락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이 가르쳐준 교훈은 인간이 죽으면 즉시 천국과 지옥의 세계로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부자이고 잘난 사람도 하나님을 부정하고 자기 뜻대로 세상과 타협하고 산 자는 지옥으로 간다는 것입니다.
3. 이 사건은 이 땅에 사는 삶으로 결정됩니다.
(눅16:28)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눅16:31)"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지금 이 시간에 주님을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힘들고 어려워도 이 땅에서 사는 삶으로 죽음 저편의 생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을 믿고 살았던 사람은 죽은 후의 세상을 준비했기에 참 승리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죽은일분후의 사건을 기억하시겠습니까? 지금 바로 준비하시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 아 멘 --
생활 속에서의 바른 삶의 자세
잠언 27장 1-4절
1.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1절)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는 말씀은 미래에 대한 현명한 계획까지도 세우지 말라고 하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 말씀은 단지 한 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인생의 유한성을 자각하고 겸허하게 하나님께 모든 것을 내어 맡기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오늘 나에게 생명이 있고 하나님께수 주신 일이 있다면 그 일을 감사하며 최선을 다하여 오늘 해야 할 일을 내일로 미루는 어리석음을 범치 말라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내 마음속에 해야 할 일을 주시면 주저 하지 말고 오늘 그 일을 행할 수 있는 것이 뛰어난 영성입니다. 이러한 영성으로 날마다의 삶을 최선을 다해 달려 가는 믿음의 종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묵상하기 / 나는 오늘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
2. 하나님의 칭찬을 구하자.(2절)
요즘 시대는 자신이 자기를 알리는 시대라고 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와 반대로 다른 사람이 칭찬하는 것을 자신의 잘한일로 받아 들이라는 것입니다. 옛날 유대의 랍비들은 한 사람을 평가할 때 그 사람과 제 삼자 관계에 있는 사람의 말을 듣고 그 사람을 평가하였다고 합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나와 이해 관계를 가지고 하는 거짓된 칭찬에 의지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칭찬 받을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 칭찬을 받는 자는 곧 사람에게 칭찬을 얻게 된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의 칭찬을 구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묵상하기 / 나는 하나님께 칭찬받는 삶을 살고 있는가?
3. 피해야 할 것들(3-4절)
미련한 사람의 분노는 다른 사람들은 지치게 하고 영적 육적 불쾌감을 안겨 주게 됩니다. 이러한 정신적인 무게는 돌과 모래덩어리를 만큼이나 무겁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질투는 노함이나 분노보다 더 무서운 것임을 말합니다. 그릇된 질투심은 사르는 불과 같이 파괴적인 폭력성을 띤 격정의 절정상태에 있는 감정과 같은 것입니다. 사울왕이 질투에 사로잡혀서 다윗을 대적하였던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단이 주는 질투심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덕을 훼손시키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묵상하기 / 나는 남을 질투하며 시간을 허비하고 있지 않은가?
내일을 자랑하지 말라
잠언 27:1 / 이송오 목사
『너는 내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라.』이 말씀은 진리입니다. 이 말씀을 부인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일 일을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기 때문입니다. 내일이 아니라 단 몇 시간, 아니 10분, 1분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것이 인생입니다. 혼인식을 잘 마치고 신혼여행을 가려고 공항에 가다가 교통사고로 신랑은 죽고 신부는 크게 다쳐 병원으로 가야 했던 사건도 있었습니다. 이 나라 안에서 하루 동안에 일어난 일들을 몇백 명의 기자들이 무슨 수로 다 취재하여 밝히겠습니까? 본문에서 사람은 하나님의 보살핌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내일 일어날 일을 알지 못하나니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잠깐 보이다가 사라지는 안개니라. 오히려 너희가 “주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겠고, 또 이것이나 저것을 할 수 있으리라.”고 말해야 할 터인데 이제 너희가 너희의 자만을 기뻐하고 있으니 그러한 기쁨은 다 악하니라』(약 4:14-16).
이 두 말씀이 틀렸다고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있다면 변변찮은 철학자들일 것입니다. 이들은 “미래를 알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므로 미래는 찬란할 것이라는 단순한 기대를 갖자.” “아무 걱정하지 말고 살자.”는 것입니다. 또 있습니다. 갑자기 죽는 사람보다 죽지 않는 사람이 더 많다며 마치 자기는 어떠한 재앙이나 사고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다는 막연한 가능성에 기대를 거는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이 복권을 사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몇십만 분의 일, 몇백만 분의 일에 기대를 거는 사람들입니다. 마귀는 사람들을 멸망과 파괴로 이끄는데 우연에 가능성이라는 꼬리표를 붙여 현혹하기도 합니다. 너는 내일을 자랑하지 말라는 말씀이 어떻게 그리스도인에게만 해당되겠습니까? 주님은 그분의 자녀들에게 『그러나 자랑하는 자는 주를 자랑하라.』고 하셨습니다(고후 10:17). 그리스도인이 무슨 일을 계획할 때는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를 확인하고 성령님의 인도함을 받아야 합니다. 결혼이나 크고 작은 거래나 사업에 있어서도, 여행을 할 때도, 심지어 하나님의 사역 중 하나를 할 때도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 분별하고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면” “주님의 뜻이면” “기도해 보고서”라고 말해야 합니다. 이 사람이 주님을 자랑하는 사람이고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일들은 사람이 원한다고 해서 다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너는 내일을 자랑하지 말라
I. 살아 있는 동안에 곧 죽는다는 것을 알고 살아야 합니다(전 9:4-6).
며칠 전에 <포브스, Forbes> 지에 세계 억만장자 일천 명이 소개되었는데 우리나라 재벌들도 몇 명이 포함되었습니다. 다른 나라 재벌들과 우리나라 재벌들의 차이가 소개되었는데, 다른 나라 재벌들은 대부분 자수성가한 사람들인 반면 우리나라 재벌들은 거의 다 부모로부터 상속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중 우리나라의 한 재벌이 향후 4,5년 뒤에는 우리나라 경제에 아주 혼란스러운 상황이 올 것이라고 말했다고 신문에 대서특필을 했었습니다. 내일 일도 알지 못하는 사람이 4,5년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측을 했다고 해서 큰 영향을 받을 수는 없지만 미래를 낙관하는 우리 정부보다는 불투명한 미래를 부정적으로 보는 그 재벌의 안목이 더 가치 있어 보였습니다.
1800년대의 설교자들은 성경의 예언을 믿지 않은 채 설교를 했습니다. 기술이 진보되면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통치하실 것이라고 잠꼬대 같은 소리를 한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새 하늘과 새 땅이 1900년대에 나타날 것이라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 당시에 그런 말들을 영적 양식으로 받아들였던 사람들은 불상을 믿는 사람들보다 못했습니다. 그런 썩은 영적 양식을 먹고 믿음을 지킬 수 있었겠습니까? 그리스도의 재림을 예언한 성경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무신론자나 불교신자보다 못한 것입니다.
1900년대 로켓트 과학자들은 21세기에 우주에 사람들이 살 것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는데 그들은 모두 성경의 예언을 배제한 채 1분 뒤에 그들의 생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고 인류를 책임질 것처럼 말해서 사람들을 속여 왔던 것입니다. 지금도 세계 도처에서 성경을 믿지 않는 무수한 목사들이 거짓말을 토해내면서 사람을 속여 그들로부터 돈을 빼앗고 있습니다.
내일을 알 수 없는 사람들이 무엇을 공언한다는 것은 부도수표를 남발하는 것과 같습니다. 실속 없는 사업계획에 투자한 사람들은 모두 손해를 당하게 됩니다. 내일을 자랑하면 안 되는 사람들이 정치, 경제, 교육, 종교로 사람들을 계속 속여 왔고, 속이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속일 것입니다.
자신으로부터 해방되어야 고통으로부터도 해방될 수 있다고 하는 것이 불교의 주제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 말에 속은 지 너무 오래되어 무감각합니다. 그러나 서양 사람들에게는 이 말이 솔깃하게 들리기에 어리석은 사람들이 머리를 깎고 절간에 들어가기도 하지만 거기에는 허구만 있을 뿐입니다. 교회가 진리를 외면할 때 거기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진리가 없는 교회에서 발길을 돌린 사람들이 취하는 대체물이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진리를 찾아 뭔가 있는 줄 알고 교회에 갔지만 아무것도 없자 발길을 돌려 사람들이 술과 마약을 하는 것입니다. 자기 죄의 아픔과 그 기억들, 양심을 찌르는 소리를 마비시켜야 살 수 있고 잠을 잘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술과 마약의 끝은 죽음입니다. 이런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정확하게 그 문제점을 해결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간에 교제가 있게 되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시느니라』(요일 1:7).
사람들은 자기의 때를 모릅니다. 『사람도 자기의 때를 모르나니, 마치 물고기들이 재앙의 그물에 걸리고 새들이 덫에 잡힘과 같이 사람들의 아들들도 재앙이 갑자기 그들에게 닥치면 재앙의 때에 덫에 걸리는도다』(전 9:12). 전지하신 하나님께서 “너희가 내일 일을 알지 못하나니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고 물으시는데 돈 좀 있다고, 권력이 있다고, 지혜가 좀 있다고 해서 그것을 자랑하면 어찌되겠습니까?
살아 있는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나은 것은 살아 있는 자에게는 참회할 수 있는 기회와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전 9:4,5). 살아 있는 자가 살아 있는 동안 해야 할 일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는 일입니다. 누가복음 16장에는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거지 나사로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고 살았으며 심지어 개들이 그의 헌데를 핥기까지 했지만 그는 영적인 소망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 거지도 죽고 부자도 죽었는데 거지 나사로는 낙원에 들어갔고 부자는 지옥불에서 고통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 부자는 죽은 사자 같은 사람입니다. 그는 내일을 자랑했던 자입니다. 살아 있는 동안에 죽음을 대비하지 못하고 살았다면 그것은 의미 없는 삶입니다.
내일을 자랑하지 말라
II. 인간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분명한 일이 전도서 9:3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해 아래서 행해지는 모든 것들 가운데 이것이 한 가지 악이니, 곧 모든 사람에게 한 가지 일이 있다는 것이며, 또 정녕, 사람들의 아들들의 마음이 악으로 가득 찼으며 그들이 살아 있는 동안에 미친 마음을 품다가 후에는 죽은 자에게로 간다는 것이라.』 모든 사람들에게 한 가지 일이 있다고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마음이 악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과 살아 있는 동안 미친 마음을 품는다는 것입니다. 비정상적이고 진리를 부인하며 순수한 사랑을 짓밟는 행위와 배신하는 일, 감사할 줄 모르는 마음, 뉘우치지 않는 마음, 죄를 더 사랑하는 마음, 하나님을 속이려는 마음입니다. 그 다음에는 죽은 자에게 합해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거절하고 내 말들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는 자는 그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내가 말한 그 말이 그를 마지막 날에 심판하리라.』(요 12:48)고 하셨습니다. 자기의 허물과 죄들을 자백하여 버리지 않고 숨기고 가리는 데만 급급하다면 그는 하나님을 속이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려고 합니다. 세상에다 자기 이름을 알리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거듭나고 나면 그 이상이 헛된 것임을 알고 그 이상을 영생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께로 가져옵니다. 왜냐하면 그분만이 진리이시기에 세상에서 인정받는 것이 하찮게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진리가 아닌 것에 우리 혼의 닻을 내려놓게 되면 무익하고 허무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기네스북에다 자기의 이름을 올리려고 애를 쓰며 자기의 생애를 바치기도 하고, 하나뿐인 목숨을 담보로 어떤 사람은 맨손으로 고층빌딩을 오르고, 그 위험한 자동차 경주를 합니다. 우승하면 돈과 트로피를 받고, 샴페인 세례를 받고, 신문에 나는 그것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가치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정욕대로 살다가 죽습니다. 진리를 모르면 엉뚱한 곳에다 쟁기질을 하게 됩니다. 중들은 산 속에 그 답이 있는 줄 알고 산 속으로 들어가지만 산 속에 멧돼지는 있을지 모르지만 그 답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직 진리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거나 하나뿐인 목숨을 걸고 어리석게 사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살 것인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 전도서를 쓴 사람은 유사 이래 권세와 부귀와 명예와 쾌락을 가장 많이 누렸던 솔로몬왕 이었습니다. 그의 지혜를 흉내조차 낼 사람이 없었습니다.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그분이 해 아래서 네게 주신 헛된 모든 날에 네가 사랑하는 아내와 즐겁게 살지어다. 이는 이 생애에서 네가 수고로 해 아래서 얻은 네 몫이니라. 네 손이 찾은 할 일은 무엇이든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 이는 네가 가는 음부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라』전 9:9,10). 학생들은 공부를 해야 하고 가장들은 열심히 일을 해야 합니다. 어떻게 살 것인지 말씀하시고 하나님께서 지혜와 재능과 기술도 주셨습니다. 인생이 진리를 찾으면 이제 자기를 위해 살던 삶에서 벗어나 남을 위해 살고, 주님을 위해 사는 삶으로 바뀌게 됩니다.
너는 내일을 자랑하지 말라
III. 자랑해서는 안 되는 이유(잠 27:1)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라.』 1912년 영국에서 타이타닉(Titanic, 거대한)이란 호화 여객선을 완공했을 때 신문에는 “하나님도 가라앉힐 수 없는 배”라고 제자를 썼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타이타닉은 세계에서 가장 큰 배였습니다. 46,328톤, 길이 265m로 우리 교회 건물 4개를 연결시킨 것과 같습니다. 승무원 400명, 객실과 호텔 등의 직원 518명, 승객이 2,433명이었습니다. 거대한 체육관과 수영장이 있었고 스쿼시장과 미니골프장, 사우나장이 있었고 24시간 얼마든지 먹을 수 있는 초호화 음식과 식당이 있었고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오케스트라까지 있었습니다. 1912년 4월 14일 영국에서 그 배에 탄 사람들은 부호들과 귀족들, 고위관리들, 군인들, 사업가들, 외교관들, 유명한 연예인들, 가수들, 여행 좋아하는 사람들, 신혼여행 가는 사람들, 효도여행 가는 사람들, 의사들, 목사들 등이었습니다. 그 배에 탄 사람 중 그 누구도 그 배에 무슨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새 배인 데다 거대한 선체에 노련한 선장과 승무원들이 운항을 하니 안전하다고 믿었을 것입니다. 1분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 채 “하나님도 가라앉힐 수 없는 배”에 탄 사람들은 마냥 즐거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배는 뉴펀드랜드 근처에서 빙산을 들이받고 2시간 30분 동안 서서히 가라앉으면서 1,517명이 죽었습니다. 선상의 오케스트라는 전에는 술 취한 사람들과 댄스 하는 사람들을 기쁘게 해주었지만 그 배의 운명이 다 되고 자기들의 운명도 다 된 것을 알고서는 찬송가 “내 주를 가까이 하려 함은”을 연주하고 있었습니다.
그 배에서 죽었던 1,517명의 사람들은 각계각층의 사람들을 대표한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들 각자는 나름대로의 꿈이 있는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 전체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내일을 자랑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루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내일 일어날 일을 알지 못하나니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잠깐 보이다가 사라지는 안개니라』(약 4:14). 하나님께서 답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제 타이타닉 호에서 살아남았던 사람들은 거의 다 죽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배나 비행기 사고에서 살아남은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지금도 살아 있는 사람들도 있을 것인데 그 사람들과 우리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진리를 알고 사는 사람과 진리를 모르고 사는 사람, 죽음을 대비하고 사는 사람과 죽음을 무시하고 사는 사람 그 차이밖에는 없습니다. 이 나라의 정치지도자나 재벌총수, 대학총장, 대통령 후보들, 은행가들, 조선왕, 자동차왕, 종교지도자들, 교육자들은 깨우쳐야 합니다. 성경은 사람이 존귀에 처해 있어도 이 점을 깨닫지 못하면 멸망하는 짐승과 같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시 49:20).
결 론
적으로 우리의 삶은 지금 타이타닉 호에 타고 있지 않았어도 서서히 가라앉는 배 위에 타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아니면 조금 있으면 목적지에 도착할 것이라고 기내 방송하는 비행기 안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해도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고 매번 반복되는 것입니다. 생명을 담보로 하는 위험의 반복입니다. 오늘 아니면 내일입니다.
인생은 부정적입니다. 자랑할 것이 못됩니다. 계획대로 되는 일도 있지만 잘 안 되는 일이 더 많습니다. 인간은 진화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무덤을 향해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들에게 정해진 것이고 그 다음에는 심판이 정해져 있습니다(히 9:27). 죽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현명한 인생의 방식은 살아 있는 동안에 하나님을 만날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준비된 사람에게 죽음은 끝이 아니고 영원히 사는 삶을 시작하는 새로운 삶의 시작입니다. 이것이 거짓말하실 수 없는 하나님께서 벌레만도 못한 인간들에게 하신 약속입니다. 『전체 일의 결론을 들을지니,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키라. 이것이 사람의 모든 의무니, 이는 하나님께서 선이든 악이든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것들을 심판하실 것임이라』(전 12:13,14). 이것이 삶의 결론입니다.
메튜 헨리 주석, 잠언 27장
미래의 추정에 대한 경고(잠언 27:1)
1. 장차 올 시간에 대한 추정을 금하라는 유익한 훈계.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더구나 많은 날과 해와 지난 때를 어찌 알겠는가!
이것은 내일에 대한 대비를 금하는 것이 아니라 내일에 대한 추정을 금하는 말씀이다. 우리는 생명과 안락이 내일까지 계속될 것으로 기대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현재 상태는 불확실성 속에 의존하고 있으며 그렇게 생각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 이런 자세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마음을 가지면서 인생을 논해야 한다.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해서는 안 된다(마 6:34). 내일에 대한 걱정은 하나님께 던져 버려야 한다(약 4:13-15 참조). 꼭 해야 할 한가지 일, 곧 회개라는 중대한 일 만큼 내일로 미루어서는 안 된다. 회개의 확실성을 보증하기라도 하는 듯이 우리는 "오늘," 곧 "오늘이라 불리우는 동안"은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2. 이 경고의 기초가 되는 깊은 생각.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라." 시간이란 어미의 태 속에는 사건이란 자식들로 꽉 차있다. 그리고 그것은 태어날 때까지 비밀에 부쳐져 있는 것이다(전 11:5). 잠깐 동안에는 괄목할 만한 변화가 생길 수 있으며 우리가 거의 생각조차 못할 정도로 상당한 변화가 있을 수 있다. 우리는 현재의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날는지 알지" 못한다. 그것은 저녁이 전해 주지 않으면 안 된다. Nescis quid serus vesper vehat-즉 너는 해질녘에 무슨 일이 일어날 지 알 수 없느니라. 하나님은 지혜로우시게도 우리로 하여금 미래사에 대해서는 깜깜하게 해 놓으셨고 장래 일에 대한 지식은 왕관에 달린 한 송이 꽃처럼 자기에게 유보해 두셨는데, 이는 우리를 하나님께 대한 의존 속에서 훈육하시고 또 우리로 하여금 부단히 매사에 준비하도록 하시기 위함이다(행 1:7).
자화자찬에 대한 경고(잠언 27:2)
1. 우리는 칭찬받을 만한 일을 행해야만 한다. 그러면 우리를 모르는 낯선자들조차 칭찬할 것이다. 우리는 세상 사람에게 우리의 "빛을 비추지" 않으면 안 되며 남에게 본이 될 수 있는 선한 일을 행해야 한다. 물론 우리의 선행을 남에게 과시하기 위해 일부러 행해서는 안 되지만 말이다. 우리는 "성문에서" 조차 칭찬될 만한 일을 행해야 한다(빌 4:8).
2. 창찬받을 만한 일을 행하더라도 스스로 칭찬해서는 안 된다. 자화자찬은 교만과 미련함과 자기 자랑에 대한 증거이며 사람의 명성을 감소시키기 때문이다. 스스로 추켜 올리는 자에게는 모두가 나려들어 깎아내리려고 할 것이다. 자신을 해명해야 마땅한 경우도 있을 수 있지만 자신을 칭찬하는 일은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proprio laus sordet in ore-자화 자찬은 입을 더럽힌다.
분과 투기(잠언 27:3-4)
이 두 성귀는 격노와 시기의 해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심하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1.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격한 분노의 폐해. 흥분하면 나오는 대로 지껄이고 되는 대로 행동하는 어리석은 자의 분노는 큰 돌덩어리나 모래 한 짐보다 더 거추장스럽다. 그것은 성내는 자신을 무겁게 내리누른다. 자기 혈기를 제어하지 못하는 자들은 자기 자신조차도 그 부담을 이기지 못하여 찌그러지게 된다. 또한 미련한 자의 분노는 그가 성내는 대상에게도 무거운 압박을 가한다. 맹렬한 분으로 그가 어떤 악행을 저지를 위험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미련한 자를 화나게 하지 않으며, 만일 그가 성이 나있으면 그를 피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다.
2. 뿌리 깊은 악의의 폐해.
이것은 노가주나무의 목탄이 가시덤불 땔감보다 화력이 강하듯 앞에 나온 분노의 폐해보다 더 나쁘다. "분은 잔인하고"(이것은 사실이다) 많은 야만적인 짓을 저지르며 "노는 창수 같느니라." 그러나 딴 사람에게 대한 적의나 번영에 대한 시기, 그리고 모종의 피해나 모욕에 대한 복수의 염원 따위는 분노보다 훨씬 해가 크다. 다윗이 사울의 창날을 피했듯 갑작스런 열기는 누구나 피할 수 있다. 그러나 사울의 경우처럼 그것이 쌓여서 움직일 수 없는 시기심으로 될 때는 아무도 그 "앞에 설 수가"없다. 투기하는 마음은 추격해올 것이며 따라와 붙잡을 것이다. 딴 사람의 선을 보고 못마땅 해 하는 자는 계속 그에게 가해할 꿈만 꿀 것이며, 자기의 분노를 영구히 품고 있을 것이다.
책망과 아첨(잠언 27:5-6)
1. 우리가 친구들에게 책망을 받고 잘못을 지적당하고 이른 유익하다. 마음속에 있는 참 사랑이 우리의 친구들과 솔직히 대하는 일이나 그들의 잘못된 언행을 책망하는 일로 표면화되기에 충분한 열의와 용기를 지니고 있다면 이것은 은밀한 증오심(레 19:17)보다 참으로 "나을" 뿐만 아니라 숨은 "사랑보다도 나으리라." 우리 이웃에게 대한 숨은 사랑이란 것은 이러한 선한 열매를 나타내 보이지 않고 죄악 중에 있는 이웃을 칭찬하여 그 영혼에 피해를 입히는 사랑을 가리킨다."
"친구의 통책은" 당장에는 "상처와"도 같이 고통스러우나 "충성에서 말미암은 것이니라." 우리 영혼에 대한 사랑으로 그들이 우리의 죄를 용인하려 하지 않으며 우리 혼자 죄 중에 있는 것을 가만두려하지 않는다면 이는 그들이 참으로 충성된 자라는 증좌이다. 의사의 관심사는 환자의 입맛을 충족시키는 게 아니라 그의 병을 치료하는 데 있는 것이다.
2. 원수의 애무와 아첨을 받는다는 것은 위험하다. "원수의 잦은 입맞춤은 거짓에서 난 것이니라." 우리는 그들을 신용할 수 없기 때문에(요압과 가룟 유다의 입맞춤은 기만을 위한 것이었다), 그들에게서 아무런 즐거움도 얻지 못한다. 그러므로 원수에게 미혹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그들을 경계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비난을 받게 되어 있는 것이다.
흑자는 이성귀를 다음과 같이 해독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원수의 입맞춤과 거짓말하는 입술과 궤휼의 혀로부터 우리를 건지시니라."
부자와 빈자(잠언 27:7)
본 잠언에서에 자주 등장하였듯이, 솔로몬은 여기서 가난한 어떤 점으로는 부자가 갖지 못하는 혜택을 지닌다는 사실을 나타내 주고 있다.
1. 가난한 자들은 부자보다 자기 즐거움을 보다 낫게 음미한다. 배고픔은 제일 좋은 반찬이다. 형편없는 음식이라도 식욕만 왕성하면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너무 많이 먹어 그 마음에 식상한 자들은 이런 것을 알지 못한다. 매일 호화판으로 먹어대는 자들은 마치 이스라엘들이 메추라기에 물린 것처럼 별미를 가진 음식에도 메스꺼움을 느끼게 된다. 이에 반해 생명이 유지에 필요할 것도 변변히 못 먹는 자들에게는 "배부른 자"가 "쓰다"고 소리칠 정도의 음식도 "다라". 그들은 형편없는 음식도 즐거이 먹고 소화시키며, 그것으로 힘을 얻는 것이다.
2. 그들은 이 정도의 즐거움도 부자들보다 한층 더 감사해한다. "주린 자"는 떡과 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할 터이나, 배부른 자들은 아무리 고량진미라고 하더라도 감사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다. 동정녀 마리아는 다음 말에서 이 점을 가리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눅 1:53). 하나님의 축복을 평가할 줄 아는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그것을 깔보는 "부자는 공수로 보내시어"마땅하다.
방황하는 자(잠언 27:8)
1. 언제 넉넉하게 될지를 몰라서 현재의 상태를 불안히 여기고 변화만 추구하는 자들이 많다. 하나님께서는 섭리로 그들에게 적합한 장소를 지정해 주시고 그곳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셨으나 그들은 정착하기를 싫어하고 유랑하기를 좋아한다. 해외로 나갈 구실을 기뻐하며 한곳에 오래 머무는 일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은 꼭 그렇게 해야 할 이유가 없는데도 자기 일에서 빠지며 돌볼 것을 돌보지 않고 자기와 관계없는 일에 참견하는 것이다.
2. 이처럼 지정된 자리를 버리고 다니는 자는 "보금자리를 떠나 떠도는 새와 같으니라."
그것은 그들의 어리석음에 대한 예증이다. 그들은 어리석은 새처럼 철이 없다. 그들은 언제나 요동하여, 마치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옮겨 앉으면서 아무 데서도 안주하지 못하는 떠도는 새와 같다. 그와 같은 짓은 불안전하다. 떠도는 새는 위험에 드러나 있는 셈이다. 사람의 처소는 그의 성이다. 그곳을 떠나는 자는 새 사냥군에게 자신을 손쉬운 먹이로 내 주는 자이다. 새가 보금자리를 떠나 떠돌게 되면 둥지 속의 새알과 새끼들을 버려지게 된다. 즉 밖으로 나돌아 다니기를 좋아하는 자는 집안 일을 하지 않은 채 내버려 둔다. 그러므로 각자는 "부름을 받은 소명(즉 천직) 속에서 거하여야" 하며, 거기서 "하나님과 함께" 살아야 할 것이다.
참다운 우정의 유익함(잠언 27:9-10)
1. 우리의 친구들에게 신실하여 변함없이 대하라는 훈령. 우리는 옛 친구들과 친교를 유지하며 우리 힘이 자라는 한 그들에게 기꺼이 온갖 선한 일을 베풀도록 하라는 말씀이다. 친구, 곧 흉금을 털어 놓을 친구가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우리는 그들과 허물없이 자유로울 수 있고 충고를 교환할 수도 있다. 친척들 중에서 이와 같은 친구로 삼을 만한 자가 있다면 극히 행복한 일이긴 하나 이러한 친구가 꼭 친척이나 우리에게 가까운 혈연 관계이여야 할 필요는 없다. 베드로와 안드레는 형제간이었으며 야고보와 요한도 그러했다. 그런데 솔로몬은 흔히 친구와 형제를 구별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까이 살고 있는 이웃 가운데서 친구를 고른다는 것은 권할 만한 일이다. 그러면 우리는 계속해서 왕래할 수 있으므로 친분을 유지할 수 있고 따뜻한 인정을 교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가정에 우호적이었던 자들을 특별히 존중하는 것도 유익하다. "네 친구, 특히 그가 네 아비의 친구였거든 그를 버리지 말라. 기회있을 때마다 꼭 그에게 봉사하고 도움이 되도록 하라. 그는 믿을 만한 친구이며 네 사정을 환히 아는 친구로서 네게 특별한 배려를 하는 자이다. 그러므로 그의 권고를 들으라." 부모가 세상을 떠나면 그들의 친구를 사랑하고 그들과 상의하는 것은 부모에 대한 우리의 도리이다. 솔로몬의 아들은 자기 아비의 친구들이 베푼 권고를 저버림으로써 스스로 화를 입었었다.
2. 왜 우리가 참다운 우정을 중히 여겨야 하며 친구를 신중히 택해야하는 지에 대한 이유.
(1) 교우의 즐거움 때문에.
진정한 친구와 사귀고 의견을 나누는 일에는 아주 많은 "아름다움"이 있다. 그것은 아주 냄새가 좋고 기분을 돋구는 "기름이나 향과" 같다. 우정은 "마음을 즐겁게 하느니라." 무거운 걱정의 짐도 친구에게 가슴을 털어놓고 나면 가벼워진다. 우리 일에 대해 친구의 소견을 듣는다는 것은 매우 큰 만족을 준다. 우정의 "아름다움"은 진심어린 희락과 웃음이 있는 게 아니라 진심어린 충고, 즉 "충성된 권고"에 있는 것이다. 그것은 진심으로 충고하는, 아침이 전혀 섞이지 않은 "영혼의 권고"(말의 의미는 그렇다)이며, 경우에 맞고 마음을 울리는, 영혼에 대한 관심에서 우러나온 권고이다(시 66:16). 우리는 신령한 일에 관한 대화를 통해 영혼의 번영을 촉진시키는 교제야 말로 가장 즐거운 교제라고 생각해야 한다.
(2) 교우의 이득과 유리함 때문에. 우정은 특히 "환란날에" 더 도움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형제의 집"에 들어가지 말라는 권고를 받는다. 친척이란 이유만으로 해서 그에게 구조를 기대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친척의 의무는 흔히 사촌입네 몇촌입네 하고 부르는 데 지나지 않는다. 참다운 인정을 시험하는 때가 오면 친척의 도리란 것도 없어지는 경우가 흔하기 때문이다. 본문은 오히려 가까이 있어서 절박할 때 기꺼이 도와 줄 수 있는 이웃에게 찾아가라고 권하고 있다. 우리가 그들에게 이웃사람답게 은혜를 입히는 일은 지혜로운 일이다. 우리가 곤경에 처하게 될 때 그들 역시 우리를 도와줌으로써 그 혜택을 주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18:24).
자녀에게 지혜를 권고(잠언 27:11)
본문은 자녀들에게 지혜롭고 선한 자가 되라고 권면을 하고 있으며, 그 목적은 다음과 같다.
1. 자녀가 부모의 위로가 되며 악한 날이 이를 때에도 "그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따라서 그들의 수고에 대한 보답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23:15).
2. 부모의 명예가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그리하면 나를 비방하는 자에게 내가 대답할 수 있겠노라. 그들은 내가 자녀의 양육에 너무 엄하고 가혹하였으며, 내 자녀에게는 딴 젊은이들이 누리는 자유를 제한함으로써 나쁜 교육 방법을 취했다고 비난한다. 내 아들아! 지혜를 얻으라. 그러면 결국 내가 자녀를 다루는 데 가장 현명한 길을 택했다는 사실이 판명될 것이다." 경건한 교육의 축복을 누린 자들은 매사에 있어서 자기가 받은 교육이 치욕으로 돌아가지 않도록 처신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젊어서는 성자였던 자가 늙어서는 악마로 둔갑하더라"고 하는 자들에게 할 말이 없게하고 반대로 "젊어서는 성자이더니 늙어서는 천사가 되었다"는 말을 듣도록 행동해야 한다.
재앙에 대한 권고(잠언 27:12)
이 말씀은 앞서도 나온 바가 있다(22:3).
1. 재앙은 예견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유혹이 있는 곳에 뛰어들면 거기에 죄가 있으리라는 것쯤 쉽사리 예상할 수 있고, 죄악을 무릅쓰고 행하면 거기에 형벌이 따를 것이라는 사실도 쉽게 내다 볼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보통 우리 위에 파숫군을 세워두시고 우리에게 부상을 입하시기 전에 경고하시는 것이다(렘 6:17).
2. 행이냐 불행이냐 하는 것은 우리에게 달려 있다. 우리 앞에 있는 재앙에 대해 통찰력을 발휘하느냐 않느냐에 따라 우리의 행, 불행도 결정되는 것이다. "슬기로운 자는 재앙을 보면(예견한다는 뜻으로 따라서 예측과 상통함) 숨어 피하여도 어리석은 자들은" 너무 둔하여서 그 화를 예견하지 못하거나, 너무 고집이 세고 게을러서 재난을 피하는 일에 관심을 갖지 않고 태연히 "나아가다가 해를 입는다." 우리가 나중을 위해 대비한다는 것은 자신에게 유익한 일이다.
보증에 대한 경고(잠언 27:13)
이 말씀 역시 앞에서 나왔었다(20:16)
1. 가난을 재촉하는 자는 어떤 자들인지를 나타내 주고 있다. 너무나 지각이 없어 누구든지 요구하기만 하면 보증을 서 주고 이방 여인에게 정신이 빠져 있는 자들이 바로 빈궁을 향해 달려가는 자들이다. 이와 같은 자들은 자기 신용이 통하는 한 돈을 줏어 챙길 것이다. 그러나 결국 그들은 자기 채권자를 속이게 될 것이다. 아니, 그들은 줄곧 속이고 있는 것이다. 정직한 자가 거지로 될 수도 있으나 이런 사기 보증인이 되는 자는 정직한 자가 아니다.
2. 본문은 일처리를 신중히 하며 분명히 재산을 탕진하고 있는 자에게는 충분한 담보없이 금전을 차용해 주지 말라는 권면을 하고 있다. 어리석은 돈놀음은 자기 가족에게 피해를 입히는 일이다. 잠언 기자는 "딴 사람을 연대 보증시키라"고 하지 아니한다. 왜냐하면 그 자신을 공동 보증인으로 삼는 자는 자기 자신과 같이 파탄한 자들을 자신의 보증으로 삼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의 옷을 취하라."
지나친 칭찬의 폐해(잠언 27:14)
1. 비록 가장 친한 친구나 따뜻이 대해 주는 후원자라 하더라도 그들에게 칭찬을 남발한다는 것은 아주 어리석은 짓이다. 각 사람에게 합당한 칭찬을 해 주고, 지식이나 미덕이나 유용성이 뛰어난 자들에게 갈채를 보내며 우리가 받은 친절에 대해서는 감사함으로 사례하는 것이 우리의 당연한 도리이다. 그러나 이것도 "이른 아침에 큰 소리로" 하는 정도가 되면 지나치다고 할 수 있다. 어느 모임에서든지, 심지어 그 친구의 면전에서까지 시종 같은 투로 되풀이하고 일찍 일어나 행하는 일처럼 열심히 이 짓을 행하며, 그 친구의 장점을 터무니없이 확대하고 과장한다면 그것은 비위에 거슬리고 구역질나는 일이 되며 위선과 흉계인 듯한 냄새마저 풍기게 된다. 사람들이 행한 일에 대해 칭찬한다는 것은 그들에게서 더욱 많은 것을 얻어 내려는 데 불과하다. 누구든지 그 의도가 찬사나 헌사에 대한 보답을 얻으려는 기생충적 바람에 있다고 결론을 내릴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만 돌려야 할 이런 찬양을 우리 친구에게 적용해서는 안된다. 혹자가 생각하듯 축복하기 위해 "이른 아침에" 일어난다는 데에는 하나님께 대한 도리가 암시되어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아침에 찬양받아야 할 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혹자가 이해하듯) "사람을 칭찬하는 일에 너무 성급해서는 안된다." 그들의 능력과 업적에 대해 너무 일찍부터 추켜 세워서는 안 되며 일단 시험을 해 보아야 하는데, 이는 그들로 자만심에 들떠서 게으른 잠을 자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다.
2. 칭찬받는 일을 지나치게 좋아한다는 것은 더욱 어리석은 짓이다. 현명한 자라면 터무니없는 칭찬은 도리어 "저주"와 자신에 대한 비난으로 간주할 것이다. 자기 호주머니를 노릴 저의가 있는 것으로 간주할 것이며 실제로 자기에게 손해를 입힐 수 있는 것으로 여길 것이다. 온당한 칭찬은 (위대한 기자가 관찰하는대로) 그 칭찬에 보탬이 될 것들을 끌어오지만, 무절제하고 무례한 칭찬은 오히려 그 가치를 떨어뜨리기 시우며 지나친 칭찬을 듣는 자라는 비난을 면할 길 없게 만든다. 게다가 한 사람을 과도히 칭찬함으로써 그를 시기의 대상으로 만들게 된다. 누구나 명예에 관한 한 한몫 끼어들려고 나서기 때문에 만일 딴 사람이 그것을 전유물로 삼거나 자기 몫보다 더 많은 칭찬을 받는다든지 하면 자기가 피해를 입은 것으로 여길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큰 위험은 그 칭찬이 교만에 이르게 하기 쉽다는 점이다. 사람은 남이 자기를 정도 이상으로 추켜 주면 자신을 정도 이상으로 과대평가하기가 쉽다. 지나친 평가를 받을까봐 두려워한 사도 바울은 얼마나 주의깊고 복된 분인지를 보라(고후 12:6)
다투는 여인의 폐해(잠언 27:15, 16)
솔로몬은 앞에서와 같이 괴팍하고 성미 급한 아내를 가진 자의 경우에 대해 비탄을 금치 못하고 있다. 이 여인은 끊임없는 잔소리로 자기뿐만 아니라 주위에 있는 모든 자를 불안하게 만든다.
1. 도저히 피할 도리가 없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그것은 "비오는 날에 이어 떨어지는 물방울"과 같은 것이다. 이웃의 다툼은 세찬 소나기와 같아서 그 당장에는 고통을 주나 분쟁이 계속되는 동안에는 피신할 수가 있다. 그러나 "다투는 아내"는 꾸준히 젖어드는 비와 같아서 달리 치료할 길도 없고 참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19:13 참조).
2. 감출 길이 없다는 것도 하나의 괴로움이다. 지혜로운 자라면 자신과 아내의 명예를 위해 아내의 그러한 점을 감출 수만 있다면 감추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바람이 불 때 나는 시끄러운 소리나 강렬한 향 기름 냄새를 어떻게 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일을 감출 수가 없다. 더구나 패역하고 언쟁하기 좋아하는 자들은 친구들이 친절한 마음에게 그 사실을 덮어 주고자 해도 자신의 치욕을 광고할 것이다.
교제의 유익함(잠언 27:17)
본문은 교제의 즐거움과 이익을 말해 주고 있다. 독불장군이란 말이 있다. 한 사람으로는 아무 것도 되지 않는다. 한 쪽 모퉁이에서 책을 아무리 골똘히 파고 앉아 있어 봤자 인간을 책으로 읽고 연구하는 것과 같이 그렇게 성취하지는 못한다. 현명하고 유의한 담화는 인간의 슬기를 갈고 닦아 준다. 아무리 지식을 많이 소유하고 있는 자라도 회의(會議)를 통하여 더 얻을 게 있는 법이다. 그것은 사람의 표정을 빛나게 해 준다. 심령을 즐겁게 해 줌으로써 그 얼굴에 활력과 생기를 더해 주어 그 자신이 즐겁다는 모습을 나타내 주고 그의 주위 사람들에게도 즐거움을 주게 만든다. 이와 같이 착한 사람들의 은혜는 선한 자와의 대화를 통해 빛나게 되는 반면에 악한자들의 정렬과 혈기는 쇠가 쇠로, 특히 줄칼로 날카롭게 되듯 악한자와의 교제로 더욱 날카로와진다. 사람은(거칠고 둔하고 비활동적이었던 자는)교제를 통해 다듬어지고 부드러워지며 총명하게 되고 일할 수 있게 된다. 이 말씀의 의도는 다음과 같다.
1. 우리 자신을 날카롭게 벼리고 빛나게 닦기 위해 이 편리한 방편을 우리에게 권장하고 있다. 또한 우리가 사귈 자를 택하는 데 있어서 조심하라고 하는 경계의 말씀을 겸하고 있다. 그 이유는 우리에게 미치는 교제의 영향력이 너무나 커서 우리를 더욱 선하게 하거나 더욱 악하게 하기 때문이다.
2. 교제에서 우리가 유의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고 있다. 즉 우리는 교제를 통해 남과 자신을 아울러 향상시킬 수 있어야 하며, 시간을 낭비하거나 서로 농담으로 시종하지 말고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여" 서로를 더욱 지혜롭고 선한 자로 만들어야 한다(히 10:24).
근면과 충실함(잠언 27:18)
이 말씀은 보잘 것 없는 고용살이에서도 근면과 충성과 항구성을 유지하도록 하라고 격려하기 위한 것이다. 직업이 비록 힘들고 천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고수하는 자들은 그 직업으로 얻을 게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1. "무화과나무를 지키는" 가난한 동산지기라 하여 풀이 죽지말라. 무화과나무를 키우려면 끊임없는 보살핌과 손질이 필요할 것이며, 또 자라고 나면 잘 가꾸어 놓아야 하고 철이 되면 무화과를 채집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자기 수고에 대해서 대가를 받을 것이다. 그는 "그 과실을 먹으리라"(고전 9:7).
2. 자신이 가난한 하인이라고 해서 성공하고 출세할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지 말라. "자기 주인을 시종하는" 일에 부지런하며 그에게 무척 조심하고 순종한다면, 또한 "자기 주인을 지키면"("시종"의미는 "지킨다"는 것이다), 즉 자기 주인의 생명뿐만 아니라 명성까지도 안전히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여 주인의 재산이 탕진되거나 손해를 보지 않도록 조심하면 그는 "영화를 얻으리라." 그런 자는 칭찬을 받을 뿐만 아니라 중용되고 상도 받을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를 신실히 섬기는 자에게 영광을 입히겠다고 약속하신 "주인"이시다(요 12:26).
자신을 아는 길(잠언 27:19)
이 말씀은 다음 두 가지 길이 있음을 보여 준다.
1. 우리 자신을 알게 되는 길. 물은 반사에 의해 우리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있는 거울이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마음"을 "사람에게," 즉 자신에게 밝혀 주는 거울도 있는 것이다.
자신의 양심과 생각과 애정과 의도를 살피도록 하라. 하나님의 법의 "거울에 자기의 생긴 얼굴"을 비춰 보아라(약 1:23). 그러면 자기가 어떤 종류의 인간이며 자기의 진정한 개성은 어떠한지를 식별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모든 사람이 자기의 바른 모습을 아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2. 우리를 통해 서로를 아는 길. 사람의 얼굴과 물에 비친 영상 사이에는 유사성이 있듯이, 한 사람의 마음과 딴 사람의 마음에는 유사함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을 같게 만드신 것이다. 다수의 경우에 있어서 우리는 자신을 통해서 남을 판단할 수 있는데, 이것은 우리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원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는 규칙의 근거가 된다(출 23:9).
Nihil est unum uni tam simile,tam par,quam omnes inter nosmet ipsos sumus,sui neno ipse tam similis quam omncs sunt omnium-즉 사람과 사람이 비슷한 것만치 서로 간에 더 유사한 것은 없다. 각자가 자기 외의 모든 사람과 닮는 만큼이나 자기 자신과 닮은 사람은 없다(서체로 문집, 1권). 한 사람이 부패한 마음도, 하나의 성별된 마음도 딴 사람의 마음과 같다. 전자는 땅의 동일한 형상을 입고 있고 후자는 하늘나라의 동일한 형상을 입고 있는 것이다.
사망과 죄(잠언 27:20)
여기서는 만족할 줄 모르는 두 가지를 말하고 있는데 그들은 아주 가까운 관계를 지니는 것이다. 그것은 곧 죽음과 죄이다.
1. 사망은 만족을 모른다. 첫째 사망과 둘째 사망이 다 그러하다. 묘지는 날마다 매장되는 무수한 시체로도 다 메꾸어지는 법이라곤 없으며 여전히 "열린 무덤"으로서 "달라, 달라"하고 소리지른다. 지옥 또한 스스로 확장하여 그 감옥에 들어갈 저주받은 영들을 계속 수용할 여지가 있게 된다. "도벳(Tophet)은 깊고 넓었느니라"(사 30:33).
2. 죄는 만족을 모른다. "사람의 눈은 만족함이 없으며" 쾌락을 향한 세상적 마음의 욕심도 그러하다. "눈은 보아도 족한 줄 모르며," "은은 사랑하는" 자가 "은에 만족하지 아니한다. 인간은 싫도록 누릴 것을 위해 수고하지만 그것에 만족을 느끼지 못한다. 아니, 그것은 만족을 주지 못하는 것들이다. 우리의 첫조상들이 에덴 동산의 모든 나무로도 만족을 느끼지 못하여 금단의 나무를 건드릴 수밖에 없었던 이래로 이런 끝없는 불안은 인간이 마땅히 느끼게 될 숙명이 되어 버렸다. 자기 눈을 항상 여호와께로 향하고 있는 자들은 그에게서 만족을 얻게 될 것이며 영원히 만족하게 될 것이다.
칭찬의 시련(잠언 27:21)
이 말씀은 우리가 자신을 시험해 볼 수 있는 시금석을 제공해 준다. 은과 금은 풀무와 도가니에 넣어 봄으로써 시련할 수가 있거나 사람은 칭찬해 줌으로써 시험해 볼 수가 있다. 사람을 극찬하고 좋은 자리에 기용해 보라. 그러면 그는 자기의 모습을 보여 줄 것이다.
1. 사람이 칭찬으로 인해 교만해지고 자만심을 가지며 냉소적인 인간이 되는 경우. 즉 그는 헤롯처럼 하나님께 돌려 드려야 할 영광을 자기가 취하는 자이다. 칭찬을 많이 받으면 받을수록 그는 자기의 말과 행동에 더욱 조심성을 잃게 된다. 자기 이름이 높아졌다고 대낮이 되도록 "침상에 누워있는" 자는 헛되고 어리석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자는 설사 칭찬을 받고 있더라도 진정으로 칭찬할 만한 것은 하나도 없는 자이다.
2. 반대로 사람이 칭찬을 받음으로 해서 하나님께 더욱 감사하고 자기 친구들을 더 존경하며 자기 명예에 오점이 될 만한 것이면 무엇이나 한층 더 경계하게 되는 경우. 그는 자신을 향상시키는 일에 더욱 부지런해지고 자기 친구들의 기대에 보답하기 위하여 님에게 더 열심히 선을 베풀며, 이로써 그는 지혜롭고 선한 사람이란 사실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그는 훌륭한 성정을 소유하여 아간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을 간과할 줄도 알며, 전과 다름없이 지내는 자이다(고후 6:8).
불치의 미련함(잠언 27:22)
솔로몬은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아 내리라."(22:15)고 말했다. 아동기는 마음의 형성기여서 악습이 뿌리를 내리지 않았으므로 그와 같이 말했지만, 여기서는 아동기 때에 행하지 못한 징계를 나중에 하려면 거의 불가능하게 되리라고 말하고 있다. 병이 만성이 되면 난치병으로 될 위험이 있는 것이다. "구스인이 자기 피부를 바꿀 수 있으냐?
1. 어떤 자는 극히 흉악하여 온화한 방법으로는 아무 소용이 없으므로 거칠고 엄한 수단을 써야 한다. 그런 자는 "절구에 넣고 찧어야"된다.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통하여 그들에게 이러한 방법을 취하실 것이다. 위정자들은 엄정한 법에 따라 악인에게 이런 수단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다. 이성과 사랑 및 그들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것으로 다스림을 받지 않으려고 하는 자들에게는 완력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2. 어떤 자들은 구제가 불가능할 정도로 악하여 이런 거칠고 엄한 방법으로도 소기의 목적을 거둘 수가 없다. 그들의 "미련은 벗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이토록 "그 안에는 악을 행하려는 마음"으로 꽉 차있다. 그들은 흔히 채찍을 맞아도 겸손해지지 않고 풀무에 넣어도 정하여지지 않으며, 아하스왕처럼 한층 더 많이 죄를 범한다(대하 28:22). 그렇다면 그들은 내다 버리는 은처럼 배격받는 도리밖에 없지 않겠는가?
부지런함에 대한 권고(잠언 27:23-27)
Ⅰ. 우리 직업에 게을리하지 말도록 하라는 권고.
이 말씀은 농부와 목자가 가축을 돌보는 자들을 가리키고 있으나, 딴 모든 정당한 직업에도 확대하고 적용할 수 있다. 집 안이나 집 밖에서의 일이나, 우리의 생업이 무엇이든지 간에 우리는 거기 전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권고가 암시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1.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할 일을 가져야 하며 게을리 살아서는 안 된다.
2. 우리의 일을 올바로 그리고 완전히 이해해야 하며,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알고 있어야 하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일에는 손대지 말아야 한다.
3. 우리는 직접 그 일에 주목하고 있어야 하며 그 일에 대한 온갖 보살핌을 남에게 미루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자신의 눈으로 "우리 양떼의 형편"을 관찰해야 한다. 양떼를 살찌게 하는 것은 바로 주인의 눈인 것이다.
4. 우리는 일 처리에 신중하고 분별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일의 "형편을 살피며" 거기 "마음을 두어서," 아무런 손실이 없도록 하고 기회를 놓지지 않도록 하며 만사를 제때에 질서정연히 처리하여 최상의 이익을 얻도록 활용해야 한다.
5. 우리는 "부지런해야"하며 수고를 해야 한다. 앉아서 궁리도 해야 하지만 서서 행동하기도 해야 한다. "보살피는 자답게 마음을 네 소떼에 두라. 네 손을 네 사업에 두고 분골쇄신(粉骨碎身)하라."
Ⅱ. 이 권고를 보다 강하게 뒷받침하는 이유.
1. 세상 재물의 불확실성. "대저 재물은 영영히 있지 못하느니라"(24절).
(1) 딴 재물은 이들 가축만큼 지속성이 없다. "네 양ㄸ와 소떼에 마음을 두며 농촌에 있는 재산과 가축에 정성을 들여라. 이들은 농경 사회의 주요한 제화로서 상속을 통해 영구적으로 소유된다." 이에 반해 상업으로 얻는 재산이나 상품은 그렇지 못하다. "면류관" 조차도 양떼나 소떼보다 더 확실성이 없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2) 이런 재물조차 잘 돌보지 않는다면 없어질 것이다. 사람이 소위 큰 "승원"을 소유하면서도 게으르고 사치하면 그 문을 닫게 될 것이다.
왕위와 조세권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손상을 입을 것이며, 잘 관리하지 못하면 "대대로" 계승되지도 못할 것이다. 다윗은 자기 가문에 왕권을 상속한 임금이었지만 "자기 양떼와 소떼를 부지런히 살폈던 것이다"(대상 27:29, 31).
2. 자연, 즉 자연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관대하심과 그 섭리의 후하심. "풀을 벤 후에는 새로 움이 돋느니라"(25절).
(1) "소떼와 양떼를 살피는 데는 큰 수고,즉 쟁기질이나 씨를 뿌릴 필요가 없다. 가축의 사료는 땅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생산된다. 풀이 움돋는 여름에는 그곳으로 가축 떼를 몰고 가기만 하면 되고 겨울철에 대비해서는 산에서 꼴을 거두는 것밖에는 달리 할 일이 없다. 하나님은 자신의 역할을 다 하셨다. 만약 네가 너의 할 일을 행하지 않는다면 너는 그의 은혜를 모르는 자로써 부당하게도 그의 섭리에 보답하기를 거부하는 셈이 된다."
(2) "목축에는 지켜보아 이용해야만 되는 기회가 있다. 그 시기는 움이 돋는 때이다. 만일 이 시기를 놓치게 되면 너의 소떼와 양떼는 제대로 잘 먹지 못하게 될 것이다. 우리 자신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가축을 위해서도 우리는 개미처럼 양식을 장만해 두어야 마땅하다.
3. 가정 경제상의 유익.
"네 양떼를 지켜라. 그리하면 네 양떼가 너를 지키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너는 네 자녀와 종들에게 줄 음식, 곧 넉넉한 염소의 젖을 얻게 되리라(27절). 족하면 잔치나 다름 없느니라. 아울러 너는 의복을 얻게 될 것이다. 어린 양의 털은 네 옷이 되리라. 또한 너는 땅값으로 내 놓을 수 있는 돈을 벌게 될 것이다. 팔기 위해 내놓은 염소는 네 밭을 사는 값이 되리라. 뿐만 아니라 어떤 자가 해석하듯 너는 사는 자가 될 것이며 네 자녀에게 물려 줄 땅을 사게 될 것이다"(26절).
(1) 양식과 의복이 있고 누구에게든 줄 돈이 있으면 우리의 소유는 족한 셈이다. 이런 경우 우리는 만족해야 할 뿐만 아니라 감사해야 한다.
(2) 가장은 자기뿐만 아니라 가족한테도 필요한 물품을 공급해야 하며, 자기 밑에 있는 사용자들도 적당한 생계를 영위할 수 있도록 주선해 주어야 한다.
(3) 간소한 음식과 수수한 의복일 망정 먹고 입는 데 무리가 없기만 하다면 그 이상 바랄 것이 없는 것이다. "네가 네 양 새끼의 털로 집에서 짠 옷을 입고 네 염소의 젖을 먹는다면 다행으로 여겨라. 네 집 사람의 식물이 되며 네 여종의 먹을 것이 되는 그것으로 네 음식을 삼아라. 멀리 가서 비싸게 주고 산 별미를 원하지 말라."
(4) 우리의 일이 가족의 부양에 충분한 것을 제공하리라는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일에 마음을 기울이고 부지런히 종사할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아 준다. 즉 우리는 "우리 손이 수고한 것을 먹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