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는 카프카
1960년대 중반 대학교에 다니며 전공도 전공이려니와 카프카에 매달려 살았습니다. 돌이켜보면 아버지의 연이은 사업 실패에서 비롯한 젊은 시절의 내 삶은 서사라고 할 수도 없는 남루하고 단편적인 에피소드들의 집합이었답니다. '자유의지'와 '현실의 질곡' 사이에서 갈등하던 내게 고독한 실존의 작가 카프카는 위안이 되었을 거예요. 그로 인해 고뇌가 더 깊어졌는지도 모르겠지만요.
자연풍광과 시간의 변화를 배경으로 주인공의 모습과 행적을 포착하는 서술 문법을 답습해온 소설문학사에 충격을 준 카프카(Franz Kafka‧1883~1924)의 중편소설 ‘변신’의 서두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레고르 잠자가 어느 날 ‘불안한 꿈에서(aus einem unruhigen Traum)' 깨어났을 때 흉측한 벌레로 변해 있었다." 잠자가 벌레로 변하기 전 꿈을 꾸었음에 주목합니다. 그것도 불안한 꿈이었습니다. 꿈에서 도대체 어떤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요?
우선 꿈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죠. 꿈은 의식과 잠재의식이 섞여 있는 상태입니다. 꿈의 부표(浮標)는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면에 반쯤 드리운 채 깃발처럼 흔들립니다. 의식과 무의식이 상응하니 바깥에서 벌어지는 현상을 수용하거나 내부의 정서를 투사합니다. 창가에 부딪는 빗방울 소리를 듣는가 하면, 잠꼬대를 통해서 내면의 정서를 외부로 분출합니다. 꿈속에서 또 꿈을 꾸기도 하고, 아침이면 기억해내지 못할 꿈의 한 조각을 움켜쥔 채 애달파하기도 합니다.
꿈에 대한 나름의 가설을 세워보았지만, 꿈은 모호하고 얼토당토않을뿐더러 어떻든 꿈에 지나지 않습니다. 굳이 확대해석하거나 꿈에 의존하여 삶을 영위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고개를 갸웃하게 되는 까닭은 무엇 때문일는지요? 그것은 '꿈의 세계', '영(影)의 세계', '그림의 세계'가 어떤 형태로든 우리의 일상과 맞닿은 탓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러한 정황을 가장 핍진성(逼眞性) 있게 그려낸 사람은 다름 아닌 카프카입니다.
글의 앞 대목에서 언급한 '변신'의 그레고르 잠자를 불러오도록 하죠. 회사원으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던 잠자가 현실에서 정말 끔찍한 벌레로 변하는 것을 바랐던 것일까요? 아마도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잠자의 무의식에서 일어난 결과예요. 프로이트가 내세운 꿈의 또 다른 효능을 상기합니다. 억압된 욕망의 충족! 그런데 왜 잠자는 하필 '불안한 꿈에서’ 깨어난 것일까요? 변환의 터널을 거치며 정체성이 바뀌는 데 따른 불안과 고통이 어찌 없을 수 있겠는가요.
카프카는 중단편소설과 짧은 산문들을 통해 부조리한 세상을 통과해야 하는 인간 존재의 숙명적 불안과 꿈 속에서나 있을 법한 난감한 상황을 되풀이해 증언합니다. 작품 속 주인공들은 어느 날 갑자기 밑도 끝도 없는 이해 불능의 상황과 조우합니다. 영문도 모르고 체포되거나('소송'), 그 자신을 위해 열어놓은 출입문으로 들어가지 못한 채 죽음을 맞거나('법 앞에서'), 밀서를 전하려는 사자가 궁궐을 떠나지 못하는가 하면('황제의 전갈'), 아프지도 않은 환자를 치료하려고 길을 떠난다거나('시골의사'), 약속한 사람들끼리 약속 장소를 왕복하며 서로 엇갈립니다('일상의 당혹').
이제 최근에 내가 꾼 꿈을 소개할 차례이군요.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언론인 단체(혹 자유칼럼?)에서 부부 동반으로 갖는 모임이 있었답니다. 나는 깜박 잊은 채 다른 일로 외출 중이었고요. 아내에게서 약속 장소가 어디냐고 묻는 전화가 왔습니다. 그러고 보니 나 역시 그곳이 어디인지 모르고 있었어요. 명동에 자리한 '뱅커스 클럽'인가 어디라고 했는데... 고등학교 동창인 회원에게 전화해 그곳의 지리를 물었습니다. 그 친구는 어떻게 이제서야 전화를 하느냐고 황당해했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모두 모여 아직 도착하지 않은 우리를 걱정하며 기다리고 있다는군요. 그런데 그곳이 어디인지 자기들도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