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 즙으로 극심한 화상 치유
운룡은 72년 무렵, 조계사 마당과 인접하여 있는 혈액은행 건물에서 3년 가량을 살았다.
우여곡절도 많았고 본격적으로 오핵단 실험을 통하여 그 효과를 다시 한번 확인하기도 한
의미 깊은 곳이었다.
조계종의 포교 1번지인 조계사와 이웃하여 있었던 까닭에 불교계의 고승들이 오다가다 운
룡을 찾아와 쉬어 가기도 하고 전국에서 주역(周易)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찾아와 배우기도
했다. 지리(地理)를 배우려는 사람, 명리(命理)를 공부하려는 사람, 약리(藥理)를 배우려는
사람, 술법(術法)을 배우려는 사람 등 별의별 사람들이 별의별 공부를 하기 위해 모여드는
괴이한 곳이기도 했다.
이 무렵 운룡의 주장을 난해한 것이나마 그대로 게재하였던 월간 화보 잡지가 있었다.
《대한화보》(大韓畵報)였다. 71년 11월부터 72년 7월까지 모두 8회(71년 12월호 쉼)에 걸쳐
"신종철학(神宗哲學) 역비전(易秘傳)을 공개한다"는 제목의 기사를 운룡의 수초(手草) 그대로
게재한 것으로 매회2백자 원고지 20장 내외의 분량이었다.
비록 길지는 않았지만 여기에는 우주의 생성원리와 지구의 팔괘분야도(八卦分野圖), 인류
역사의 기원과 전개과정, 인류에게 닥쳐올 액난(厄難)과 괴질의 위험성, 자연계의 신약(神藥)
을 이용하여 인류를 구제하는 방도 등에 관한 개괄적인 내용이 담겨있다.
두 페이지에 빽빽하게 실린 이 원고는 거의 한문으로 표기되어 있어 일반인이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많았지만 구한말의 대학자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성재(省齋) 유중교(柳重
敎)- 이광암(李廣庵)으로 이어지는 학통의 전수제자를 기다린다는 인터뷰 기사 때문에 많은
학자들이 관심을 모았다.
이 학통의 연원을 조선 중기의 대학자 율곡 선생에게로 거슬러 올라가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栗谷 李珥- 沙溪 金長生- 愼獨齋 金集- 尤庵 宋時烈- 靜觀齋 李端相- 三淵 金昌翁-
檜巢 金信謙- 止庵 金亮行- 睡山 李友信- 華西 李恒老- 성재 柳重敎- 李廣庵- 金雲龍.
운룡의 거처는 병고로 죽어 가는 환자들의 마지막 순례지로서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은 데다 신종철학 역비전의 전수제자를 고대한다는 기사를 보고 찾아오는 사람들로 더욱
붐볐다.
이 무렵 운룡을 찾아와 주역을 공부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사주 보는 사람, 관상 보는
사람, 점치는 사람, 묘 자리 보러 다니는 사람들까지도 운룡에게 자신들의 학문적 바탕을 이
루는 역(易)의 대도(大道)를 가르쳐 달라고 찾아왔다.
주역(周易)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세상 사람들은 지금도 서슴없이 "점이나 사주(四柱) 관상
(觀相)보는 데나 이용되는 책" 쯤으로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짙다. 운룡을 찾는 사람들도 대
부분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지배적인 것은 바로 세상 사람들의 주역에 대한 이해 척도를 보
여주는 한 예가 될 것이다.
역(易)이라는 것은 글자 그대로 바뀐다는 뜻이다. 쉬지 않고 생성(生成) 변화(變化) 소멸
(消滅)하는 자연계의 법칙을 문자화(文字化) 기호화(記號化) 도식화(圖式化)하여 배우고 가
르치는 준표를 삼은 도학(道學)의 최상급 교재이다.
자연계의 원리에 대한 이해가 이 세상 모든 것의 학문적 바탕이 되어야 하므로 이를 공부
하는 것은 좋지만, 그러나 단시일에 어떤 학문적 성과를 얻고 싶어하는 "졸갑증 환자"들은
절대로 주역의 오묘한 세계에 들어갈 수는 없을 것이다. 팔괘 육십사괘를 외고 주역 책의
경문(經文)을 줄줄 왼다고 하여도 주역에 함축되어 있는 우주적 비밀은 터득하기 어려운 것
이다.
운룡은 거두절미(去頭截尾)하고 주역의 핵심에 대해서 곧 바로 설명하는 방식의 강의법을
썼으므로 사람들은 자연히 이해하기 곤란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주역의 책과 기타
관련 서적에 수록되어 있는 역학 전반에 대해서는 별다른 설명없이 곧바로 자연계의 원리
설명을 시작하는 운룡의 이야기는 비록 신비롭기는 하였으되 기초가 없는 사람에게는 "망망
대해를 헤엄치는 듯한" 막연한 느낌 줄 뿐이었다.
시작도 끝도 보이지 않는 무한한 세계의 비밀들은 결코 일반인들이 쉽사리 해독할 수 있
는 대상이 아니다. 그 분야에 평생을 바쳐서 연구하고 또 연구한 끝에 가장 문제의 핵심이
되는 의문점을 가슴속에 지녔던 이들에게는 운룡의 한마디 한마디가 섬광처럼 빛을 던지는
내용으로 받아들여지지만, 보통 사람의 경우 그것은 다소 기이한 느낌만을 줄 뿐 별다른 감
동을 주지 못한다.
아무튼 이 때 마치 "유령의 소굴"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는 수송동 혈액 은행 건물은 난치
병 환자의 마지막 순례지로, 주역을 배우고자 찾는 학자들의 공부처로 많은 사람들의 뇌리
에 인식되어가기 시작하였다.
"신종철학 역비전"을 운룡으로 부터 공부한 이들 가운데 몇몇 인사들은 학문의 전수를 증
명하기 위하여 "화서 이항로 선생론"과 그 문인록 및 전수자 명단을 작성하기도 하였다. 72
년 6월, 전수자 중의 한 사람에 의하여 작성된 이 기록에 따르면 학통의 연원은 앞서 이율
곡 선생으로부터 이화서-유중교-이광암으로 전해지는 바와 같고 화서의 문인으로는 중암
김평묵(重庵 金平默)·면암 최익현(勉庵 崔益鉉)·성재 유중교(省齋 柳重敎)·양헌수(梁憲
洙)·성암 박문일(誠庵 朴文一)·운암 박문오(雲庵 朴文五)·이근원(李根元)·홍대유(洪大猷)
등이 있다.
이 기록은 또 6명의 전수자 명단을 말미에 부기(附記)하였다. 호, 이름, 생년, 본적, 주소
순으로 적어 보면 다음과 같다.
△ 晩中 蘇鎭璿 甲寅生 경기 용인, 서울 영등포구 시흥1동 170.
△ 李康年 甲寅生 경기 양주, 서울 동대문구 휘경동 53-20.
△ 宣太燮 甲寅生 전남 구례,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452.
△ 南鴻祐 丁巳生 강원 양양, 서울 용산구 한남동 산15번지 17통6반.
△ 趙大濟 癸亥生 경남 함안, 서울 영등포구 양평동 1가 120-5.
△ 李種宅 戊寅生 충남 논산,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 46-612.
6인의 전수자 중 이 기록의 작성자는 만중 소진선이다.
이때 신종철학 역비전을 배운 이는, 물론 위 6인의 인사 외에도 부지기수로 많았으나 운
룡이 그 이듬해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고 그 뒤 계속 지방으로, 서울로 1년이 멀다 하고 거
처를 옮겨다니는 바람에 모임이 제대로 이뤄지지는 못했다.
이 무렵 위 6인의 명단에 들지는 못했으나 열심히 주역을 공부하러 다닌 젊은이가 있었
다. 조계사 부근의 범종 제작회사에서 범종의 설계부터 마무리까지의 작업을 맡아 하는 윤
재[庚辰生]이었다. 윤재원은 72년 당시 33세로서 68년 무렵부터 범종 제작일을 해왔던 터였
다.
처음에 원국진 씨가 설립한 성종사는 성북구 성북동 현 태고종본부 부근에 자리잡고 있었
다. 윤씨는 그 곳에서 원 사장과 함께 일을 시작, 뒷날 원국진 씨의 뒤를 계승한 원광식 씨,
범종사를 설립한 김철오 씨 등과 함께 범종 제작 기술자로 일했다.
윤씨는 불국사 에밀레종을 본떠서 제작한 1천관짜리 범종을 비롯 수덕사 범종[1천관], 월
정사 범종 등 굵직한 종제작 불사에 동참하여 작업을 마무리 지은 바 있는 범종 제작의 장
인(匠人)이다. 어떤 종이든 마찬가지이지만 특히 범종의 생명은 그 심원하고 장중하면서도
해맑은 소리에 있는 것이다.
소리 좋고, 모양 좋은 종을 제작하기 위해 윤씨는 유명한 종의 재질과 모양, 심지어 조각
기법까지 면밀히 분석하여 설계 도면을 작성하였다. 월정사의 범종은 상원사 범종을 모본으
로 삼아 제작하였는데 이의 설계를 위해 상원사에서 한동안 숙식하면서 종의 종합적 연구를
했던 적도 있다.
원국진 씨는 일제시대부터 주물 기술자로 일해온 우리나라 종 제작기술자 중 당시 대가로
손꼽혔던 인물이다. 감리교 장로였으나 기독교 교회종과 천주교 성당종, 사찰의 범종 등 무
슨 종이든지 정성을 다하여 만들었던, 그야말로 종 제작의 최고 기술자 중 한 사람이었다.
윤씨는 72년, 결혼한 뒤로 꾸준히 운룡을 찾아다니며 틈틈이 주역 공부를 하였다. 범종의
제작은 단순한 기술만으로 해낼 수 없는 성격의 작업이다. 고도의 정신세계로 들어가 차원
높은 자연계의 법칙을 파악하지 못한다면 단순한 기술자로서의 한계에 부닥칠 것은 뻔한 노
릇이었다.
윤씨가 운룡을 찾아가 "신종철학 역비전"의 세계에 입문코자 문을 두드린 것은 더 높은 세
계를 향하여 끊임없이 도전하는 "장인(匠人) 정신"의 발로라 하겠다.
윤씨가 성종사에서 일하던 73년 7월 중순의 어느 날, 끔찍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새벽 세
시경 범종의 용두(龍頭)모형을 뜨기 위해 파라핀 용해 작업을 하던 윤씨는 뜨거운 기운으로
가득 찬 작업장 밖으로 나와 잠시 땀을 식히고 있었다.
용두는 입체조각이므로 파라핀을 녹여 여기에 밀을 섞어서 용두 모형을 만들고 이를 진흙
으로 발라 감싼 다음 가열하여 밑구멍 부분으로 파라핀을 녹여내면 진흙 속의 공간은 용두
모형으로 된다. 여기에 쇳물을 부어 실제 용두를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윤씨가 잠시 밖에서 바람을 쐬는 사이 갑자기 이상한 냄새가 번지는 것이었다. 윤
씨는 직감적으로 느껴지는 것이 있어 파라핀이 있는 쪽으로 달려갔다. 그곳에서는 이미 파
라핀이 과열되어 불이 붙고 있는 것이 아닌가. 몹시 위험한 순간이었다.
윤씨는 더 이상 생각할 겨를도 없이 불타고 있는 파라핀 용기를 들고 밖을 향하여 정신
없이 달려나가다가 미끄러져 불타고 있는 파라핀 용액위로 드러눕듯이 넘어졌다. 목 뒷부분
부터 발뒤꿈치까지 뒷부분의 전체를 파라핀 끓는 용액에 데었다. 윤씨는 넘어진 직후 정신
을 읽어 자세한 상황을 기억할 수 없다. 다만 정신이 들었을 때는 삼선동 집이었다.
윤씨는 전신이 화끈거리고 입이 타들어 갔으며 가슴속이 답답하여 견들 수가 없었다. 부
인을 시켜 운룡에게 연락하여 속히 어떤 대책을 써달라고 부탁하였다. 운룡은 이 무렵 수송
동 혈액은행 건물을 떠나 창신동으로 옮겨 가 살 때였다. 윤씨 집에 당도하여보니 윤씨는
사경을 헤매는 중이었다. 운룡은 속히 생 오이를 구해 다가 즙을 내어 먹여야만 소생이 가
능하다고 알려주고 서둘러 인근 병원에 입원시키도록 하였다.
먼저 가까운 혜화동 우석 병원에 입원하였다가 미아 삼거리 성가병원으로 옮겨 치료를 받
았다. 그런데 병원에 입원하자 의사 간호원들은 윤씨에게 일체 아무 것도 먹이지 못하게 하
였고 수포가 생긴 곳은 모두 벗겨냈다.
윤씨는 온몸의 45∼50% 부분에 3도 화상을 입었으므로 병원에서는 소생가능이 거의 없다
고 보았다. 3도 화상 30%가 넘으면 생명이 위험하다고 보는 것이 통례다.
치료를 위해 화상 입은 부위를 건드릴 때마다 지독한 고통을 참다 못하여 호소하면 진통
제를 놓았으나 이미 진통제는 아무런 진통작용을 하지 못하였고 호흡은 점점 가빠져서 끝내
산소호흡기에 의존하기에 이르렀다.
윤씨는 부인에게 이야기하여 선생님 처방이니 오이 생즙을 내어 마호병에 담아 가져오라
고 하였다. 윤씨는 의사·간호원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산소 마스크를 떼어 내고 대접에
반쯤 담은 오이 생즙을 쭉 들이 켰다.
윤씨는 오이 즙이 이렇게 시원하고 달고 맛있는 줄 미처 몰랐었다. 들이키자마자 가슴속
이 후련하고 호흡도 편해졌을 뿐 아니라 터지게 아프던 머리도 차츰 개운해져 갔다.
그제사 윤씨는 살아날 것 같다는 희망을 갖게 되었다. 차라리 죽느니만 못한 지독한 괴로
움 속에서 어쩔 수 없이 고통에 신음하던 윤씨는 이렇게 시원하고 살맛나게 하는 오이즙을
몰래 먹어야 하는 현실이 안타까웠지만 아무 소리도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만약 그것을
알고 끝까지 먹지 못하도록 감시하면 그나마 먹을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오이즙을 먹지 않는다는 것은 이제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의사·간호원이 중환자실에서
나가지 않고 있을 때는 무척이나 괴로웠다. 30분 내지 1시간 간격으로 계속 오이즙을 마셨
고 마실 때마다 가슴속의 답답한 증세와 입술이 타는 것과 지독한 갈증·호흡곤란 등이 계
속 좋아졌다.
병원에선 처음에 윤씨가 다시 소생하리라고 보지 않았으므로 치료에 별반 신경을 쓰지 않
았었다. 병원 측은 가족들에게 소생 가능성이 거의 없다며 가능한 한 조속한 시일 내에 퇴
원할 것을 권유하였다. 혹시 외상(外傷)치료는 가능할 수도 있지만 내상(內傷), 즉 화독(火
毒)이 내부로 범한 것은 어쩔 수 없다는 이야기였다.
윤씨는 계속 오이 즙을 마시며 외상치료를 받았다. 일주일에 두 번 외상치료를 받으러 갈
때마다 윤씨는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가 된 기분"으로 괴로움에 치를 떨어야 했다. 윤
씨는 몸은 박물관의 이집트 미아라처럼 머리만 내놓고 전신을 붕대로 감았다.
외상치료를 받을 때마다 윤씨는 데인 살에 말라 붙은 붕대를 떼기 좋도록 따뜻한 소독수
에 들어가 붕대를 불리워야 했다. 말라 붙었던 붕대가 물에 불어나게 되면 의사와 간호원은
가위로 붕대를 잘라내고, 그래도 붙은 것은 핀셋으로 떼어 낸다. 붕대에 살점이 묻어서 떨어
질 때마다. 겉가죽 벗겨진 속살에서는 피가 스며 나왔고 그때마다 윤씨는 몹시 쓰리고 아팠
다.
붕대를 모두 벗기고 떼어낸 다음에는 알콜솜으로 비벼대며 군데군데 노랗게 낀 고름을 닦
아내고 속으로 깊이 뿌리를 박은 고름덩이는 핀셋으로 긁어서 뺀다. 그래도 빠지지 않는 고
름뭉치는 아예 집게로 뽑아내는데 이때의 고통이란 필설로 다 형언키 어려울 정도다.
이러한 작업이 진행되는 1시간 남짓 동안 윤씨는 극심한 고통을 참기 위해 온몸을 비틀면
서 가제를 물린 이를 너무 악물어 이가 몇 개 부러져 나가기까지 하였다. 이렇듯 극심한 고
통은 윤씨를 지쳐 파김치가 되도록 만든다.
고름 제거를 끝내고 화상치료약을 바른 다음 붕대를 감는 사이 윤씨는 지친 끝에 고통을
잊고 잠으로 빠져들게 된다. 극렬한 고통의 파도가 수그러지고 연못에 잔잔한 평화가 깃들
듯이 윤씨는 두세 시간 동안 평온한 잠을 자게 된다.
처음 화상을 입은 지 15일 이 지나면서부터 병원에서는 윤씨를 대하는 것이 달라졌다. 치
료에 한층 더 정성을 쏟고 어쩌면 살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전망하였다. 윤씨는 오이즙과
오리피·오리 달인 물까지 열심히 마셨다.
날이 갈수록 속도 더 편해지고 호흡도 부드러워졌으며 타는 듯한 갈증도 줄어 들어갔다.
외상 치료시의 통증도 줄고 고름도 차츰 적어졌다. 병원 측은 당초 최소한 6개원 정도 입원
치료해야 할 것이라고 전망했으나 윤씨의 상처는 두 달만에 모두 아물었다. 더 이상 외상치
료를 필요로 하지 않게 되자 윤씨는 입원 두 달만에 퇴원하여 집으로 돌아갔다.
계속 엎드려서만 살다가 비로소 두 달만에 바로 누울 수 있게 된 것이다. 집에 돌아온 뒤
한동안은 상처부위의 가려움증이 심해 몹시 고생하였으나 10일이 지나면서부터 차츰 잊혀져
갔다.
잠자리에는 아침마다 하얗게 살 가루가 떨어지곤 했으나 그것도 날이 갈수록 줄어갔다.
상처부위는 여러 차례 허물이 벗겨졌다.
윤씨는 비록 죽음의 위기를 벗어나기는 하였지만 몸이 종전 같지 않았다. 온몸의 힘이 쭉
빠져서 기운을 추스릴 수 없는 데다 조금만 움직여도 피로감이 오고 일에 대한 의욕을 상실
하였으며 음식을 먹고 나서 소화를 시키기조차 힘들었다.
이때부터 윤씨는 건강에 대한 남다른 관심을 갖고 자연운동법·자연요법·지압·단전호흡
등의 수련을 열심히 하기 시작하였다. 의약 공부도 하면서 약을 지어먹기도 하는 등 백방으
로 노력했으나 별반 효과를 보지 못한 채 7년여의 세월을 보내다가 어느 날 불현듯 운룡의
가르침이 머리를 스치는 것이었다.
운룡은 7년 전 윤씨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자네는 오이 생즙을 먹고 천행으로 죽음을 면했지만 화독의 후유증이 앞으로 10년 이내
에 무서운 질병을 유발하게 될 거야. 그것을 예방하려면 반드시 중완(中脘) 단전(丹田)에
5분 이상타는 쑥뜸을 떠야 하네. 명심하게."
80년 가을, 윤씨는 운룡의 이야기대로 중완과 단전에 쑥뜸을 뜨기 시작하였다. 첫날 30
초∼2분 짜리 1시간 가량 뜨고 7일째 되는 날부터 5분 이상 짜리를 떴으며 10일째 되는 날
부터는 7∼8분타는 것으로 하루 평균 세 시간씩 떴다. 15일째부터는 10분타는 것으로 떴는
데, 이후 며칠 뒤 뜨거움의 고통이 일체 사라지고 안온한 느낌만을 느끼게 되는 영구법(靈
灸法)의 신비를 체험하여 밤을 지새며 5∼6시간 가량 더 떴다.
뜨거움의 고통이 모두 사라져 평온한 느낌만 계속되다가 갑자기 몹시 뜨거운 느낌을 받게
되자 운룡의 가르침대로 쑥뜸을 그쳤다.
80년은 윤씨의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 해다. 화상의 후유증은 씻은 듯 물러가고 원기가 회
복되었으며 머리(정수리) 중심 부위에서는 과거에 빠져버렸던 머리칼이 새로 돋아나기 시작
하였다. 여름에 별로 더운 줄 모르고 겨울에 별반 춥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을 뿐 아니라 머
리가 맑아지고 판단력 이해력이 자신도 놀라울 정도로 증진되는 것이었다.
그 뒤 윤씨는 대략 1년에 한 번씩 뜨는데 어쩌다가 한 번 거르면 신체적으로 표시가 나기
때문에 가능한 한 거르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윤씨는 자신도 열심히 뜨고 부인을 비롯, 집안 형제에게까지도 쑥뜸을 권하여 난치 고질
을 호전시킨 예가 적지 않다. 심하게 아파 본 사람이기에 아픈 사람의 고통을 절실하게 이
해하고 그러한 이해와 그것을 걱정하는 따스한 마음을 바탕으로 사람들의 고통를 덜어줄 수
있었던 것이리라.
윤씨는 쑥뜸으로 자신의 건강을 효과적으로 관리하는 한편, 체험을 통해 얻은 경험적 방
법으로 병고(病苦)에 신음하는 이웃을 도우며 모 협회의 간부로 건강하게 살고 있다.
모진 비바람 속에서도 쓰러지지 않고 더욱 튼튼하게 자라는 뿌리깊은 나무처럼.
[※ 실제로 심한 화상(火傷)에는 토종 오이(일반 오이도 괜찮다)의 생즙을 무시로 복용해야
내부에 범한 화독(火毒)을 풀어 생명을 건질 수 있다.]
삼가 일생대요(여백)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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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이야기 (38) 오이 즙으로 극심한 화상 치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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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6.08 0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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