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상가무착보살 아상가 또는 무착 (無着)(Asanga, 300년 ~ 390년?)은 인도 대승불교의 사상가이다. 북서 인도 간다라 지방 부루사부라성의 브라만 집안에서 3형제의 맏이로 태어났다. 그의 동생 바수반두(Vasubandhu, 世親, 세친) 역시 불교 사상가이다. 성장하여 소승불교의 유부(有部)에 출가했으나, 후일 중인도 아유차국으로 가서 대승의 유가행에 힘썼다. 전설에 의하면, 아상가는 수행중 도솔천에 올라 미륵보살의 계시를 받고, 이에 의해 《유가사지론》 · 《대승장엄경론》...
무착은 소승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의 교리에 만족을 느끼지 못한 나머지 도솔천에 올라가 미륵보살을 뵙고 대승의 가르침을 배우려고 무진 애를 쓴다. 그래서 똑똑 떨어지는 물방울에 바위가 패어져 구멍이 날 정도로, 부드러운 새의 깃털이 바위를 스쳐 그 바위가 편편하게 될 정도의 오랜 시간 동안 수행을 쌓고서 미륵보살을 만나고자 하지만 그것도 역부족인지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그의 마음 속에는 아직도 무엇을 소유하려는 욕망이 가득하여 미륵이 모습을 나투시지 않은 것이다.
어느날, 길을 가던 무착은 다 죽어가는 개의 모습을 보게 된다. 섬짓 놀라서 가까히 다가가 보니 수많은 벌레들이 우굴거리며 상처난 개에 달라붙어 있는 끔찍한 현장이 전개되고 있었다. 벌레들은 벌써 개의 사지(四肢) 일부를 먹어 악취가 진동하였고 감히 처다보는 것조차 역겨울 정도였다. 그 순간 무착은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원초적인 목소리, 즉 자비의 목소를 듣게 된다. 우선 죽어가는 개를 살리기 위해 벌레들을 떼어놓으려고 하는 찰라, 아차하며 행동을 멈추었다. 벌레들, 그들이 한갖 미물에 불과할 지언정 하나의 생명체 아닌가. 그들의 생명 역시 소중한 것이다.
그는 개와 벌래 그 두 생명들을 하나도 해치지 않고 살리기를 작정하고 지나가는 행인에게 자신의 옷을 벗어주고 칼을 구한다. 다음, 칼로 자신의 넓적다리를 도려내어 그 살을 먹도록 떼낸 후 개에게 달라붙은 벌레들을 혓바닥으로 핥아 그곳으로 옮겼다. 순간 그 먹고 먹히던 처참한 현장이 사라지고 거기서 찬란한 광명을 발하면서 미륵보살이 현신하였다. '내가 항상 그대 곁에 있었건만 네 마음이 욕심으로 가득차 나를 보지 못하더니 이제야 나를 보는 구나. 내 옷자락을 잡아라.‘ 그렇게 해서 무착은 미륵보살을 따라 도솔천에 올라가 그곳에서 대승을 가르침을 들었으며 그 가르침 대로 사유하고 수행한 결과 깨달음을 얻고 공의 도리를 체득하게 된다. 그 공의 이치에 따라 아무런 것에도 집착함이 없었으므로 무착(無着, Asanga)이라 불리어졌다고 한다.
세계는 우리 마음이 그려낸 표상(表像)일 뿐이다. 외부 대상뿐만 아니라 나 자신을 비롯한 모든 언어나 사상도 여기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 표상으로서의 세계가 우리 마음에 영향을 주고 그 마음은 다시 심층적인 마음의 씨앗인 알라야식(Alaya vijnana)에 저장되어 있다가 다시 외부 대상으로 표상된다. 이렇게 하면서 우리들은 윤회를 거듭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 윤회의 뿌리를 완전히 제거하려면 우리의 근본 식인 알라야식을 공空으로 비울 때만 가능하다. 알라야식이 공으로 전환할 때 우리의 마음이 정청해져 그때 가서는 사실 자체, 사태 자체가 여실하게 보이며 걸림이 없는 대자유인의 행보를 내딛을 수 있다는 것이다.
흔히들 마음을 비우라고 한다. 마음을 비우게 되면 자연히 모든 욕심에서 떠나게 되고 그 결과 마음이 청정해져 사태 자체를 올바로 직시할 수 있으며 거기에 따라 어디 치우침이 없는 행동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찌 말로만 지껄일 수 있는 일이겠는가. 그러한 경지에 이르려면 반그시 수행이 필요하다. 앞서 무착보살이 미륵보살을 만나는 예에서 보았듯이 이들 유식의 구도자들은 피나는 수행을 거쳐 일가를 이룬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유식학파라는 말 외에, 수행을 강조하여 유가사(瑜伽師 Yogacara), 즉 요가 수행자라 불렸던 것이다.
첫댓글 좋은법문으로
이 아침에
상큼하게~~
감동의 물결이 ~~
적셔옵니다_()_합장
나무지장왕보살마하살
감사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