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교구 소속 본당. 충남 서산시 동문동 665-3 소재.
1908년 5월 9일 합덕 본당에서 분리되어 충남 결성군(현 홍성군) 구항면 공리에 설립된 수곡 본당이 전신.
주보는 수호천사.
설립과 변모 서산 지역 신앙 공동체는 충청도 지역 최초의 본당인 합덕 본당 산하 공소로 출발하였다.
1908년 이 지역을 이관 받은 폴리(D. Polly, 沈應榮) 데시데리오 신부가 서산 지구 본당을 홍성군
구항면 공리에 설립 · 운영하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본국 프랑스로 돌아가게 되자,
다시 합덕 본당으로 합병되었다.
1917년 안학만(安學滿) 루카 신부가 서산 본당 주임으로 부임하여 본당을 팔봉면 금학리로 옮겼다가
제1차 세계대전 종전으로 본당에 복귀한 폴리 신부가 다시 주임으로 부임, 1919년 10월경
현재의 상홍리 공소 자리에 강당 및 사제관을 신축하였으나 얼마 후 서산 군 소재지에 가까운 음암면으로 옮겼다.
금학리, 상홍리 등 두 차례에 걸친 본당 이전 후 1932년 6월 13일 바로(P. Barraux, 范, 1903-1946년) 신부는
현 본당 부지를 매입하여 1937년 10월 5일 성당을 신축 · 완공하였다.
1943년 일제(日帝)의 도시 인구 소개(疏開) 방침의 일환으로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서 경영하던
인천 보육원 아동 중 24명이 서산 본당에 수용되자 이들을 돌보기 위해 수녀원 분원이 설치되었다.
1946년 시약소 개설과 1947년 4월 10일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순교 1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인
천사 유치원의 개원은 전교에 큰 기여를 하였다.
그러나 6 · 25 동란이 발발하여 콜랭(J. Colin, 高一郞) 요한 주임 신부가 성당을 지키다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9월 21일 대전으로 압송 도중 폭격을 당해 행방불명되는 비운을 겪어야 했다.
전쟁과 9 · 28 서울 수복, 1 · 4 후퇴 등 혼란기를 거친 서산 본당은 1950년대 들어 미군의 구호물자 등을
균등 분배하며 전교에 힘쓰기 시작하였고, 성당 · 사제관 · 유치원 등을 증축하였으며,
1961년에는 수녀원을 개축하는 등 본당 부대시설 및 주위 환경을 정비하였다.
성장과 변모 기존의 공소 외에 많은 공소를 개설한 서산 본당은 1964년과 1965년에 30평 규모의
금학리 공소와 명천리 공소 강당을 각각 신축하였고, 1966년에는 60평 규모의 운산 공소 강당을
신축하였으며, 1966년에는 60평 규모의 운산 공소 강당을 신축하였으며, 1967년에는 대산 공소를 설립하였다.
이외에도 해미 공소 강당을 개축하고, 양대리 공소 강당을 신축하기도 하였다.
공소의 물질적인 여건 마련 외에 공소 사목의 활성화를 위해 각 공소에 본당 사목위원을 파견하여
공소 예절에 참여시키고, 강론 자료를 배부하는 한편, 교리도 담당하게 하는 등 전교 활동에 역점을 두었다.
이에 힘입어 1964년 태안 본당을 시작으로 1973년 운산 본당, 1984년 해미 본당, 1987년 서산 석림동 본당을
분리시켰으며, 1989년 8월에는 1967년부터 전교 수녀가 파견되어 있던 대산 공소를 대산 본당으로
각각 분리시켰다.
1970년 7월 서산 신용협동조합을 창설하기도 했던 서산 본당은 1982년 9월 9일 사제관(50평)과
교육 회관(65평)을 완공 축성하였으며, 이듬해 5월에는 수녀원 개축 및 유치원 증축 공사를 기공,
그 해 7월 완공하였다.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성령 세미나, 사순절 특강 등 신자 재교육 등을 실시하여 본당 내실화를 꾀하였으며,
신자 배가 운동을 지속적으로 실시하기도 하였다.
1987년 11월에는 본당 설립 70주년을 맞아 각종 기념행사를 개최하였는데, 지역 사회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짐하는 한편, 대전교구 최초로 “서산 동문 본당 70년사”라는 본당사를 발간, 70년 역사와 전통을 지닌
본당의 역량을 과시하였다.
이에 앞서 1987년 8월에는 석림동 본당의 설정으로 본당명을 서산 본당에서 서산동문동 본당으로 개명하고,
10월 28일에는 본당 설립 7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49평의 조립식 교육회관을 증축하였다.
박해를 무릅쓰고 신앙을 증거한 순교자들의 후손이란 자부심을 갖고 있는 서산동문동 본당은
일찍부터 순교 성지 성역화에도 관심을 쏟아 왔다.
1935년 4월 해미면 조산리 해미 하천변(현 해미 순교탑 터)에 생매장되어 있던 병인박해 순교자들의 유해를
증인들의 고증에 따라 발굴하고, 유해 및 묵주 등을 다수 발견 수습하여 상홍리에 있는 순교자 묘지에
안장하였으며, 1955년 4월에는 천묘(遷墓) 20주년을 기념하여 순교탑을 건립하였다.
1956년에는 병인박해 때 형구로 사용된 해미 자리개 돌을 해미 서문 밖에서 본당으로
옮겨 세웠고(1986년 9월 11일 원위치로 귀환), 1975년에는 해미 순교탑 건립 공사를 시작하여
그 해 10월 24일 완공하기도 하였다.
해미 본당 창설 이후 발족된 해미 순교 선열 현양회 등의 노력으로 1935년 상홍리에 임시 안장된
해미 무명 생매장 순교자 유해는 1995년 9월 20일 해미 성지로 귀환되었다.
[편찬실, 한국가톨릭대사전 제3권, 1996년, 내용 일부 수정]
서산동문동 성당은 2007년 4월 30일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321호로 지정되었다.
대전교구에서 최초로 등록문화재에 등재된 서산동문동 성당은 1932년 부임한 바로 신부가
서산 읍내의 현 부지를 매입하여, 1936년 여름 성당과 사제관 건립 공사를 시작하여
1937년 10월 5일 서울대목구장 라리보(A. J. Larribeau, 元亨根, 1883-1974년) 주교의 주례로 축성식을
거행한 건물이다.
서산동문동 성당은 바실리카 평면 구조에 입면은 장식을 지극히 간략화한 고딕 양식의 교회건축물이다.
장미창 하나 없고 그 흔한 벽돌 성당도 아니다. 시멘트 블록으로 쌓아올려 그 흔적을 시멘트 덧칠로 가린
맨살 그대로다.
군더더기 하나 없이 지극히 절제된 성당이다. 하지만 그냥 그대로의 단순 명료하고 꾸밈없는 아름다움이
이 성당을 1930년대 교회건축의 독특한 유산으로 남게 했다.
물론 몇 차례 보수를 거쳤다. 1957년에는 제대ㆍ제의실 쪽 공간을 99.17㎡(30평)이나 증축,
전체 성당의 3분의 1 가량을 새로 짓다시피 했다.
2006년 6-7월에는 성당 내부 열주(列柱, 줄기둥)와 마루, 성가대석 등 성당 안팎을 대대적으로 보수했다.
그래도 성당 내부는 옛 모습을 살려 아무것도 변한 게 없다. 둥근 천장과 신랑(nave)과 측랑(aisle)을 나누는
열주, 제대 등은 옛 정취 그대로다.
성당을 건립한 바로 신부는 1935년 해미 하천변에 생매장돼 있던 병인박해 순교자들의 유해를
증인들의 고증에 따라 3개소에서 발굴 수습해 상홍리 순교자 묘역(1995년 해미 성지로 원상 복구)에 이장해
서산동문동 본당 공동체에 순교신심을 일으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특히 1946년 1월초 바로 신부는 열병으로 사경 중에 있는 신자에게 병자성사를 주고 성체를 영해주던 중
환자가 성체를 뱉어내자 이를 대신 영하고 전염병에 감염되어 선종했다.
이런 바로 신부의 신심과 업적을 기리기 위해 2007년 7월 성당 뒤편에 ‘바로 동산’을 조성하였다.
바로 신부의 이름을 따 조성한 동산에는 십자가의 길 14처가 얕은 언덕배기에 배치되어 있다.
그 한 가운데 바로 신부의 묘비와 6ㆍ25 전쟁 때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압송되던 중 폭격을 당해
행방을 알 수 없는 콜랭 신부의 추모비가 서 있다.
성당 정면에는 1956년 해미 서문 밖에서 옮겨온 ‘자리개 돌’이 있던 자리에 기념비가 세워져 있고,
그 앞에는 순교자들의 피가 배어 있는 듯한 형구돌이 하나 놓여 있다.
2007년 본당 설립 90주년 기념미사를 봉헌했던 서산동문동 성당은 2008년 10월 18일 본당 설립 100주년
감사미사를 봉헌했다.
1년 만에 10년이나 거슬러 올라간 이유는 본당의 설립 시점에 대한 연구 결과가 반영된 것이다.
이날 감사미사를 통해 서산동문동 성당은 기존에 안학만 신부가 금학리에 부임한 1917년을 설립 연도로
지내오다가 1908년 5월 9일 홍성군 구항면 공리에 설립된 수곡 본당이 본당 역사의 시작임을 대내외에
공식적으로 선포하였다.
서산동문동 본당과 대전교구사연구소는 대전교구 초대교구장인 ‘라리보 주교의 전기’와 ‘(라리보 주교의 편지에서 발견된)
1916년 교세통계’를 통해 서산동문동 본당의 역사가 폴리 신부가 1908년 수곡 본당에 부임하면서
시작되었음을 밝혀냈다.
라리보 주교의 전기에는 1914년 합덕 본당에 부임한 당시 라리보 신부가 ‘서산 본당도 함께 맡아야만 했다’는
내용이 있으며, 1916년 교세통계에는 서산 본당 신자수가 1,376명이라고 밝히고 있어 1917년 이전에
이미 본당 공동체가 설립되어 있었음을 증명해준다.
아울러 1908년도 세례대장이 본당에 보관되어 있는 것도 그 한 예이다.
서산동문동 본당은 1908년 공리의 ‘수곡 본당’을 시작으로 1917년 금학리, 1919년 상홍리를 거쳐
1937년 동문동에 현 성당을 준공하고 본당을 이전했으며 그동안 여러 본당을 분가시켰다.
새롭게 정립된 본당 역사에 따라 서산동문동 본당은 합덕 · 공세리 · 공주 중동 · 금사리 본당에 이어
대전교구에서 다섯 번째로 설립된 본당으로 자리매김했다.
2008년 본당 설립 100주년을 맞은 서산동문동 성당은 그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성 김대건 신부의 유해를
성당 소제대에 안치하고, 1937년 현 성당 준공 당시의 옛 제대와 옛 감실을 복원하여 축복했다.
또한 해미 순교자들을 처형하는 데 썼던 자리개 돌 유물이 있던 자리 옆에 ‘새로운 시작!’이라는
100주년 기념비를 세우고 제막식을 가졌다. [출처 : 관련 신문 기사를 중심으로 편집(최종수정 2011년 11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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