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27일(현지시간)은 무려 110만명이 목숨을 잃어 2차 세계대전 중 최악의 민간인 학살이 자행된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해방된 지 80년이 되는 날이다. 그곳에 수용된 이들은 우크라이나 제1 전선 병사들이 다가와 조롱 섞인 문구 "노동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Arbeit Macht Frei)"가 적힌 문을 열어 해방시켰다. 무려 4년 가까이 지속되어온 죽음의 공포에서 풀려나는 순간이었다.
아우슈비츠는 1940년 세워졌다. 나치 독일은 죄수들을 가두기 위해 폴란드 남부 오스비침에 새 수용소를 열었다. 처음에는 폴란드 정치범들을 수용했는데 나중에는 유럽 유대인들을 체계적으로 살해하는 공장으로 바뀌었다. 아우슈비츠란 이름은 학살과 홀로코스트의 동의어가 됐다.
그런데 수용소가 가동된 지 일 년쯤 됐을 즈음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려진 것이 적었던 때 한 남성이 그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아내겠다며 목숨을 내걸었다고 영국 BBC가 25일 전해 눈길을 끈다.
죄수 번호 4859, 잘못된 시기에 잘못된 장소에 있다가 억울하게 끌려온 유대인 토마치 세라핀스키로 간수들과 다른 죄수들에게 알려진 남자였다. 그런데 나치에 저항하는 지하 레지스탕스 집단에게는 비톨트 필레츠키(Witold Pilecki)로 알려진 폴란드 육군 중위이며 첩보 전문가, 남편이며 두 자녀의 아빠인 가톨릭 신자였다.
아우슈비츠-비르커나우 메모리얼 및 박물관의 역사학자 피오트르 셋키비츠는 "비톨드 필레츠키는 비밀 폴란드 군대(Tajna Armia Polska), 약어로 TAP이라 불린 레지스탕스 운동조직 창설자 가운데 한 명이었다"면서 "TAP은 새로운 아우슈비츠 수용소 소식을 듣고 있었다. 해서 누군가를 보내 그곳에서 벌어지는 일을 알아보자는 논의를 했다. 필레츠키가 그 임무를 떠안기로 했다"고 말했다.
셋키비츠는 이어 "TAP 안에서도 아우슈비츠가 무엇인지 몰랐던 시기란 점을 강조해야 한다"면서 "바르샤바로부터 이송돼 왔던 이들이 도착하기 시작했을 때 죽음을 알리는 전보들이 늘어났다"고 말했다.
필레츠키가 들어가려면 계획이 필요했다. 해서 1940년 9월의 어느 날, 그는 바르샤바의 졸리보르츠(Żoliborz) 동네의 처형 아파트에 들어가 있다가 경찰에 붙잡혔다. 확실히 체포되기 위해 이미 세상을 떠난 폴란드 병사의 유대인 신분을 도용했다. 사흘 뒤 필레츠키는 수용소에 들어가 2년 반 머무르며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 중노동과 기아, 죽음의 위험을 세상에 알리는 증거를 밖으로 보냈다.
그는 수용소 여건, 고문과 죽음에 대한 정보를 담은 보고서를 적어 밖으로 유출했다. 동시에 그는 시설을 파괴하고 나치 친위대(SS) 관리들을 암살하는 지하 운동을 고무하는 한편, 음식과 약품을 안으로 들여보내는 일도 했다.
그의 처형 외에 가족은 그의 군사 활동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었다. 필레츠키의 딸 소피아 필레츠카옵툴로비츠는 "아빠가 얼마간 중요한 임무를 하고 있었다고 희미하게만 알고 있었지만, 자녀로서 우리는 어떤 종류의 일인지 알지 못했다. 엄마는 더 많이 알고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난 확실히 알지 못했는데 엄마 역시 아빠의 임무에 대해 상세히 알지 못했던 것 같다"면서 "아빠와 우리 스스로에게 안전한 일은 아는 것이 적을수록 낫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필레츠키는 아우슈비츠의 비참한 현실을 고발하는 한편 연합군이 그 수용소를 공격해야 한다고 보고서에 적었다. 최고 지휘관 몇몇에게 전달되긴 했지만 그들 다수는 폴란드가 막강한 군사력을 가진 나라가 아니란 이유에서 무시했다. 심지어 수용소가 해방된 날에도 소비에트 군대가 지휘하는 우크라이나 군은 근처 크라쿠프를 해방시킨 뒤 우연히 수용소가 있다는 것을 알고 찾아온 것이었다.
필레츠키의 증언이 곧바로 수용소 해방으로 연결된 것은 아니었지만, 그곳 수용소의 여건에 관한 첫 번째 대중적인 음모론을 만들어냈다. 그는 연합군 지휘부가 수용소의 존재를 공식 인증하기 3년 전에 수감자들을 고문하고 죽인다는 사실을 맨처음 세상에 고발했다. 그가 1943년 4월 26일 탈옥한 뒤 2년이 지나서야 아우슈비츠의 다른 수감자들이 풀려날 수 있었다. 그 때까지 수용소에 끌려온 110만명 가까이가 목숨을 잃었으며 7000명가량이 살아남아 자유를 맛봤다.
필레츠키는 "제 발로 아우슈비츠에 들어간 남자"로 알려져 있지만, 몇 년 동안 널리 얘기되지 않았다. 종전 뒤 폴란드가 소비에트 통치 아래 들어가 필레츠키와 그의 지하 조직은 폴란드 독립을 외치며 바르샤바 봉기에 나섰다. 그는 끝내 체포돼 반역죄를 고백하는 자술서에 강제로 서명했고 1948년 5월 25일 감옥에서 비밀 처형됐다. 이에 따라 비톨트 필레츠키에 대한 언급은 금지됐고 그의 행동을 담은 보고서와 문서들은 파기됐다.
필렉카옵툴로비츠와 오빠(또는 남동생) 안드레이는 부친의 재판과 처형 소식을 라디오로 들었는데 아빠가 반역자며 국가의 적이란 소리를 들으며 자라났다. 1990년대에야 그들은 부친이야말로 내내 영웅이었음을 알게 됐다.
필렉카옵툴로비츠는 부친이 가족을 사랑했으며 친절했지만 고집 세고 원칙적인 남자였다는 기억을 갖고 있다고 했다. "난 자연과 어떻게 인생이란 체인이 돌아가는지, 그 체인 안의 모든 생명체가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아빠와 나눴던 많은 대화를 분명히 기억한다"면서 "그는 내게 친절하게 사랑으로 움직이는 세상을 보여주고 다른 상황들에서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말해줬다. 그는 적절함과 진실됨을 우리에게 심어줬는데 이게 특별하게 중요하다. 난 이런 교훈을 내 평생 그대로 옮겼다"고 말했다.
소비에트 공산주의는 1989년 폴란드에서 막을 내렸고 그때서야 비로소 필레츠키의 진짜 이야기가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그에 관한 책들이 출간됐고, 거리에 그의 이름이 붙여졌으며, 폴란드 학교들에서 그의 이야기를 가르쳤다. 필레츠키 연구소가 세워져 20세기 폴란드 정치사를 연구하고 어려운 시기 폴란드인들을 도운 이들을 기리는 일을 벌였다. 필레츠키 이야기를 담은 전시물이 아우슈비츠비르커나우 메모리얼 겸 박물관에도 마련돼 있다.
올해 이 박물관은 아우슈비츠에서 스러진 폴란드 국민들에게 헌정하는 전시 공간을 선보인다. 이곳을 한 번 돌아보면 감정적으로 강렬한 자극이 된다 한다. 서로를 잔인하게 살육할 수 있는 본성의 끝판을 경험하는 것이다. 27년 동안 박물관 가이드 겸 공보관으로 일한 도로터 쿠친스카는 단순한 가이드와 스토리텔링을 넘어서 이곳에서 가족을 잃은 수감자들의 친구와 친척들을 만나 얘기를 듣는 일도 의미있다고 했다.
그녀의 말이다. "이곳은 아주 예외적인 장소이며, 이곳을 방문하며 우리가 내뱉는 일들은 믿기 어려운 일들과 슬픔이다. 과거 역사에 대해 들어본 적도 없고 현재에 대한 토론에 끼어들어 본 적도 없는 젊은이들이 존중과 공감, 진실에 터잡아 세상을 다시 바라보는 것을 지켜보는 일은 우리에게 인류애에 대한 희망을 품게 하고 이 필수적인 작업을 계속하게 할 동기가 된다."
아울러 이 박물관은 해방 80주년 기념식을 해외 방문객들이 특별 텐트 구역에서 지켜 볼 수 있도록 한다며 80.auschwitz.org에서 관련 정보를 얻을 수 있다고 안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