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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이 서러운 우리 꽃들 요즘 산에 가면 철쭉이 거의 졌다. 그러나 간간이 연분홍 꽃잎이 남아 등산객들을 반기고 있다. 철쭉은 신라 향가 '헌화가(獻花歌)'에서 수로부인이 절벽에 핀 것을 보고 꺾어달라고 했던 바로 그 꽃이다. 처음 세계에 알린 사람은 러시아 해군장교 슐리펜바흐(Schlippenbach)였다. 1854년(철종 5년) 4월 러시아 군함 팔라다호(號)는 부산에서 동해를 따라 올라가며 지형을 측량했다. 이 배에 탑승한 슐리펜바흐는 동해안에서 철쭉을 채집해 러시아 식물학자 막시모비츠에게 보냈다. 한국 식물을 채집해 서양에 연구자료로 제공한 최초의 사례였다 ('한국식물분류학사개설'). 두 사람 이름은 철쭉의 학명(學名)에 나란히 자리 잡았다. 철쭉 학명은 '로도덴드론 슐리펜바키 막심'인데, 로도덴드론은 '붉은 나무'를 뜻하는 속명(屬名)이고, 종명(種名)에 해군장교 이름을, 마지막에 명명자 자신의 이름을 넣은 것이다.
우리 학자가 철쭉의 학명을 정했다면 종명에 러시아 장교 대신 수로부인의 이름을 넣었을지도 모른다. 세계 공통으로 쓰이는 학명이 있다. 국제적인 명명규약에 따라 정하는데 라틴어로 속명과 종명을 표기하고, 종명 다음에 생물을 처음 분류한 사람 이름을 넣는 경우가 많다.
유난히 학명에 '나카이(Nakai)'라는 이름이 들어간 것이 많다. 예를 들어 개나리는 한국 특산종인데도 학명이 'Forsythia koreana Nakai'다. 도대체 나카이는 누구일까.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에서 일한 일본의 식물분류학자였다.
그는 동경제대 식물학과를 졸업하고 1909년 스승의 권유로 한반도 식물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당시 우리에게는 체계적으로 식물을 연구해 분류할 학자가 없었다.
나카이는 총독부 촉탁연구원으로 1942년까지 17차례에 걸쳐 한반도 곳곳을 답사해 식물들을 채집했다. 그가 한반도에서 채집한 식물을 집대성해 펴낸 책 '조선삼림식물편'은 한반도 식물 연구의 고전으로 남아 있다. 개나리는 물론 할미꽃·벌개미취·개느삼·각시투구꽃 등 한국 특산종에 대거 나카이 이름이 들어갔다. 세계적으로 1속 1종밖에 없는 희귀종인 미선나무에도, 토종 라일락인 수수꽃다리에도 그의 이름이 들어 있다. 한국의 자생식물 4000여종 가운데 16%의 학명에 그의 이름이 들어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나카이는 한반도 식물을 분류해 학명을 정하면서 학문적 양심을 지킨 학자는 아니었다.
가을에 보랏빛 초롱 모양으로 환상적으로 피는 금강초롱꽃도 한반도 특산종이다. 금강산에서 가장 먼저 발견돼 '금강'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강원도와 경기도의 비교적 높은 산에서 자란다. 금강초롱을 처음 분류한 사람도 나카이였다.
나카이가 한반도 식물을 조사할 때 연구비와 인력을 지원한 사람이 조선에 파견된 초대 일본 공사였던 하나부사 요시타다(花房義質)였다.
나카이는 금강초롱에 하나부사와 자신의 이름을 붙여 '하나부사야 아시아티카 나카이'라는 학명으로 등록했다.
한반도 특산종인데도 종명을 '아시아(asiatica)'로 정해 아시아 전역에서 자라는 것처럼 흐려놓기까지 했다.
나카이는 동경식물학회가 발행한 '식물학잡지' 1911년 4월호에서 "이 신발견의 세계적 진식물(珍植物)을 하나부사 자작에게 바쳐 길이 그 공을 보존해 전하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예전에는 금강초롱을 하나부사의 한자 이름대로 화방초(花房草)라 부르기도 했다. 요즘 서울에서도 막 피기 시작한 섬초롱꽃은 연한 자주색 바탕에 짙은 반점이 있는 아름다운 꽃이다.
섬초롱꽃의 학명은 'Campanula takesimana Nakai'다.
종명을 독도의 일본명인 '다케시마'로 해놓은 것이다. 역시 울릉도 특산인 섬단풍나무도 종명에 다케시마가 들어있다. 국가생물정보시스템 검색만으로 12종에서 다케시마라는 글자를 찾을 수 있었다.
<섬단풍나무>
남아있는 일제의 흔적은 너무 자존심 상하는 일로, 할 수만 있다면 바로잡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학명은 국제적 약속이어서 한번 정해지면 우리가 임의로 바꿀 수 없다. 북한도 우리처럼 화가 났는지 금강초롱꽃 속명을 '하나부사야' 대신 '금강사니아(Keumkangsania)'로 바꾸어 사용하지만 국제적으로 전혀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금강초롱꽃이나 섬초롱꽃은 손기정 선수가 일장기(日章旗)를 달고 마라톤 하듯 마음이 불편할 것 같다.
나라를 빼앗기지 않았다면 우리 특산 식물을 분류하는 일은 다소 늦어졌더라도 우리 학자들이 얼마든지 해낼 수 있는 일이었다.
우리 꽃에 어엿한 우리식 이름을 붙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강하게 남을 수밖에 없다. 섬초롱꽃은 변함없이 피고 있지만 불편한 학명을 사실상 영속적으로 써야 하는 현실이 서글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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