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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뱅의 생애와 사상] 서론 (2)
개인 신앙 현상
16세기의 여명기에,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서유럽이 자기 인식을 갖도록 이바지했다. 그중에 가장 중요한 것 하나를 꼽으라면 개인의식에 눈을 뜨게 한 것이다. 개인의식의 발흥은 기독교가 개인의 필요에 새삼 관심을 쏟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의 기독교는 교회 출석이나 교회의 가르침에 대한 공식적인 수용 같은 외형적이고 제도적인 용어로 정의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제도적이기만 한 기독교는새로운 시대에 어울리지 않았다. 외형적으로 자신을 표현하고 정의하는 데 익숙했던 종교가 내면 의식에 호소하는 법을 재발견하면서, 기독교가 스스로를 어떻게 이해하는지에 대한 아주 미묘하고도중요한 발전이 이루어졌다.** 르네상스 시대의 기독교 저술가들은 개인이 경험하는 세계에 복음이 '**개인적으로나 내적으로 어울릴 수있고 마땅히 어울려야 하는**' 것으로 확고히 뿌리내리게 해야 한다고 느꼈다. 이들 저술가는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 (Francesco Petrarca)의 #소네트 나 르네상스 시대 신학자와 설교자, 성경 주석가의 새로운종교 저술에 관심을 기울였다. 사도 바울과 아우구스티누스가 아주오래전에 했던 호소가 그 시대에 다시 힘을 얻을 수 있었던 것도그들 덕분이다."
그리하여 종교개혁 직전, 한 세대의 사상가들은 난국에 잘 대처해 나갔다. 파리에서는 자크 르페브르 #데타플 이 개인의 신앙에 관한 사도 바울의 해석을 탐구했다. 옥스퍼드에서는 #존콜렛 John Colet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개인적인 만남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저지대(중세 말기와 근대 초기에 스헬데강, 라인강, 뫼즈강의 낮은 삼각주 지대 주변에 자리한 지역 일대를 일컫던 용어로 오늘날의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프랑스 북부 지역 일부와 독일 서부 지역 일부가 포함된다옮긴이)에서는 《그리스도인 군사의 지침서》에 약술된 개혁 프로그램으로 학식을 갖춘 유럽 엘리트들의 사상과 마음에 에라스뮈스가 스며들었다. 이 책에서 에라스뮈스는 개인적으로 이해하고 자기것으로 흡수한 내적 신앙을 강조함으로써, 겉으로 드러나는 문제에 관심을 쏟는 제도 교회와 뚜렷한 차이를 보였다. 이탈리아에서는 '가톨릭 복음주의'로 알려진 운동이 개인의 구원 문제를 강조하면서 교회 안에 확고히 자리를 잡았다. 교회의 위계 조직까지 깊숙이 파고들었으며 이단으로 매도되지도 않았다. 기억할 것은 루터가이런 개혁 운동들을 시작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때까지 루터는 유럽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대학 중 하나에서 소규모 청중을 대상으로 끈기를 가지고 강의하는 무명의 수사였다. 반면에 유명인들과 위대한 인물들은 다시금 신약성경의 맑은 공기를 들이마시고 있었다. 신앙을 개인적으로 이해하고 자기 것으로 흡수하는 것을 강조하는 분위기가 널리 퍼져 나가면서, #바울 과 #아우구스티누스 의 저술에 관한 관심이 생겨났다. 이런 특징이 16세기에 접어들고 처음 20년간 영향력 있는 여러 집단과 개인 사이에서 발견되었다. 이들 집단 및 개인의 사상과 루터의 사상 사이에는 유사점이 있었다. 그러나 이 유사점을 루터가 정통인 증거로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이들 집단이 이단인 증거로 취급하면서 마르틴 루터라는 이름에 반감이 싹텄다. #루터 의 견해가 세상에 알려지자 파리의 르페브르, 모교구의 기욤 #브리소네 (Guillaume Briçonnet), 스페인의 #알룸브라도스 (조명파'라고도 불리는 신비주의 저술가 집단)가 이단 혐의를 받았다. 루터가 종교개혁에 긍정적으로 이바지한 부분은 제대로 평가를 받아야 하지만, 그가 고리타분한 교회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을 수도 있었을, 진정한 가톨릭과 정통적인 관점에 대체로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점만큼은 부인할 수 없다. 루터는 의심하는 풍조를 만들어 냄으로써 자기 시대에 엄청난 폐해를 끼쳤다.
13민중 종교와 지성 종교의 쇄신은 교회 기득권층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다. 교회 기득권층은 평신도 중심의 종교 현상에 이바지하기는커녕 오히려 이런 현상을 이용했다. 예를 들어, 민중 종교는 계절의 순환과 절기가 중요하게 반영된 농사일에 초점을 맞추었다. 건초를 만들고 농작물을 수확하는 등 농업에 필요한 일들이 종교의식에 견고히 자리 잡았다. 프랑스 모 교구에서 동물과 젖먹이들의 질병, 전염병, 눈병을 예방하기 위해 종교의식을 행하거나, 젊은 여성들이 적당한 남편감을 찾기 위해 성인들에게 기원하는 의식을 행한 것도 이 때문이다. 아마도 중세 후기 민중 종교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죽음에 관한 신앙과 관습이었을 것이다. 여기에는 반드시 성직자가 참여해야만 했다. 장례를 치르는 데 상당한 비용이 들었고, 이러한 현실을 반영하여 구성원들에게 적절한 의례를 제공할 목적으로 다수의 신도회가 결성되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에는 반성직자 정서를 피할 수 없었다. 성직자들은 궁핍해진 산 자들이 죽은 친척들에게 느끼는 불안을 이용해 이득을 취하는 자들로 여겨졌다.
독일에서도 #면벌부 판매를 일반 대중이 죽은 자들에게 품는 자연스러운 감정을 이용하는 도덕적으로 극악하고 신학적으로 문제 있는 행위로 보는 이가 있었다. 루터는 1517년 10월 31일에 95개의 논제>를 통해 교회가 공인한 판매인에게 적정 금액을 내면 망자의 영혼이 연옥에서 즉시 벗어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설상가상으로, 독일인이 면벌부 대금으로 낸 돈이 결국은 이탈리아로 흘러들어 가 르네상스 교황들의 사치스러운 생활을
뒷받침하는 데 쓰인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루터는 요한 테첼Johann Tetzel이 면벌부를 홍보하기 위해 동원한 선전 문구를 특히 문제 삼았다.
“헌금함에 동전이 땡그랑 하고 떨어지는 순간, 영혼은 즉시 연옥에서 풀려난다!”
루터의 #이신칭의 교리는 연옥과 면벌부의 필요성을 없애버렸다. 죽은 자들은 교회에 뇌물을 바친 것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믿음 때문에 영원한 안식을 얻는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가 된 것이다." 프랑스에서는 십자군 원정에필요한 자금을 마련할 목적으로 교황 레오 10세와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가 1515년 면벌부 판매를 계획했다. 그런데 1518년, 파리대학교 신학부는 면벌부 판매가 부추긴 몇몇 미신적인 사상에 항의했다. "누구든지 십자군 원정 모금함에 은화 한 닢이나 #연옥 에 있는한 영혼의 값어치에 해당하는 돈을 넣으면, 그 영혼은 즉시 연옥에서 풀려나 틀림없이 천국에 간다"라는 가르침을 "거짓되고 가증스러운 가르침이라고 규탄하고 나선 것이다"
이와 동시에, #복음주의 견해 (에라스뮈스에게서 유래한 것이든, 수도원에서유래한 것이든)가 부상함에 따라 교회 기득권층을 반동적이고, 신학문에 적대적이며, 개인 신앙의 진보와 이를 강조하는 세력에 위협을느끼는 존재로 인식하게 되었다. 1520 년대에는 성직자들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해이하고 낡은 방식을 고수하려 한다고 규탄하는 글이 속속 발표되었다. 성직자들이 선생이자 영적 지도자로서 도덕적 모범이 되고자 부단히 노력할 필요가 없는 기존 체제안에 안주하려 한다는 비판이었다. 수도원의 폐해를 폭로하고 조롱한 이는 비단 풍자작가 프랑수아 #라블레 François Rabelais 만이 아니었다. 에라스뮈스 역시 스콜라철학의 건조함과 성직자들의 무능함을비난했다.
반성직자 정서 확산
글을 읽을 줄 알고 자기 생각을 분명하게 표현할 줄 아는 평신도가 늘어나면서 성직자를 멸시하는 분위기가 생겨났다. 이것은 종교개혁의 배경을 이해하는 데 더없이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다. 반성직자 정서가 광범위하게 퍼져 나갔다. 유럽의 특정 지역에서만두드러지는 현상이 아니었다. 이런 현상이 나타난 부분적인 이유는일반적으로 성직자들의 자질이 형편없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에 대부분의 교구 성직자들은 사실상 교육을 전혀 받지못했다. 아는 게 거의 없었고, 곁눈질하고 보조하고 따라 하면서 주워들은 것이 전부였다. 교구 주교가 정기적으로 방문할 때마다 글을 읽을 줄 모르거나 성무일과서어디에 두었는지조차까를맣게 잊어버린 성직자들이 적발되었다. 교구 성직자들의 자질이 이렇게 형편없었던 이유는 대개 그들의 사회적 지위가 낮았기 때문이다. 16세기 초, 밀라노에서는 본당 주임 신부의 수입이 비숙련 노동자의 수입보다 적었다. 많은 이가 말과 소를 사고팔아 겨우 먹고살았다. 이 시기에 프랑스 시골 지방의 하위 성직자들의 사회적 지위는 부랑자들과 다를 바 없었다. 과세와 민사상 소추, 병역의무를면제받는다는 점에서 보면, 사실상 이 시기의 여타 떠돌이 거지들과 하위 성직자들을 구별하기가 쉽지 않았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일수록 사람들은 성직자들이 누리는 세제상의 특혜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1521년부터 1546년까지 개혁가들의 활동 중심지였던 프랑스 모 교구의 성직자들은 군대 주둔 및군수품 보급과 관련한 과세를 비롯하여 모든 형태의 세금을 면제받았다. 지역 주민들은 이 점에 크게 분노했다. 루앙 교구에서도 혹독한 춘궁기에 곡식을 팔아 교회가 엄청난 이득을 챙기자 대중들이크게 반발했다. 또한 성직자들은 민사상 소추를 받지 않는 면책특권으로 대중에게서 더욱더 고립되었다. 프랑스에서는 1520 년대에들이닥친 생존의 위기가 반성직자 정서를 강화하는 중요한 역할을했다. 역사학자 에마뉘엘 르 루아 라뒤리 Emmanuel Le Roy Ladurie는 프랑스 랑그도크 지방을 연구한 유명한 논문에서, 1520 년대 사람들은 백년전쟁이 끝난 이후 두 세대의 특징이었던 팽창과 회복의 과정이 정반대로 뒤집히는 모습을 목격했다고 지적했다. 그때 이후로 전염병과 기근의 형태로 위기가 발생했고, 시골 빈민들이 식량과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이주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 시기에 루아르강을 기점으로 프랑스 북부 대부분 지역에서 비슷한 패턴이 나타났다." 생존의 위기에 내몰린 사람들은 하층 계급과 귀족과 교회 권력자들 앞에 완전히 다른 운명이 펼쳐져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프랑스에서는 후기 르네상스 주교 중 압도적 다수가 귀족 출신이었다. 교구마다 이런 추세가 뚜렷했다. 모 교구의 교회 권력자들 가운데서도 상위 계층은 하나같이 도시 귀족 출신이었다. 프랑스 북동부에 자리한 브리 지방의 고위 성직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루앙 지역에서도 비슷한 패턴이 고착되었다. 장 칼뱅이 태어난 누아용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누아용에서는 앙제 가문이 성직 임명에 실질적 권리를 행사했을 뿐만 아니라, 사반세기 이상 해당 교구의 주교 대부분을 자기 가문에서 배출함으로써 교회 사무를 독차지했다." 랑그도크 지방의 고위 성직자들은 대개 외지인이었고, 교구 후원자인 왕족이 교구에 귀족을 성직자로 세우라고 강요하는 일도 잦았다. 이런 성직자들은 자기가 담당하는 교구에 거주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그들은 성직자로서 자신에게 잠시 주어진 영적책무를, 다른 곳에서 더 큰 정치적 야심을 이루는 데 유용하게 쓰일불로소득원 정도로밖에 여기지 않았다. 이처럼 귀족 신분인 주교단과 고위 성직자들은 공인이나 농민이 대부분인 교구민과 괴리될 수밖에 없었고, 1520 년대에 주민들이 경제적 생존 위기에 내몰렸을 때도 이들은 아무 영향을 받지 않았다. 1520년대에는 대개 도시에 거주하는 고위 성직자와 시골 주민들 사이에 갈등이 고조되었고, 시골 주민들은 프랑스에서 종교개혁이 일어난 배경이 되었다.
교회 내부 권위의 위기
중세 말 교회 안에서 번지기 시작한 '권위의 위기'에 관하여 이야기한다는 것은 넌더리 날 정도로 닳고 닳은 상투 어구에 의존해야한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고심 끝에 이 표현을 사용하는 이유는 권위의 위기'라는 표현이 중세 말의 일상생활과 신앙생활에서 처음에는 개혁을 촉진하다가 나중에는 개혁을 저지하는 데 효과적으로 활용된 사회의 일면을 깔끔하게 보여 주기 때문이다. 권위의 위기가포착되는 경우는 보통 두 가지다. 첫째로, 교회를 대표한다고 말할권위를 지닌 자가 누구인지가 명확하지 않다. 둘째로, 불행하게도신학적 몰이해, 정치적 혼란, 군사적 무력함이 한데 섞여 시간이 갈수록 교회가 정통 신앙을 강경하게 주장할 수 없는 상태에 놓인다.(물론 이 역시 '정통'이 무엇인지를 놓고 합의점을 도출할 수 있다고 가정했을 때의 일이다. 새로운 신학적 견해가 등장할 때 그것이 교회의 가르침과 일치하는지를 누가 결정할것인가?)
14세기 말과 15세기에는 서유럽 전역에서 대학이 빠르게 팽창했다. 그만큼 신학부의 숫자도 늘어났고, 당연히 발표되는 신학 논문의 숫자도 늘어났다. 당시 신학자들은 존재의 명분을 세우기 위해서라도 무언가 해야만 했다. 그래서 이들은 논문을 통해 새로운 사상을 탐구했다. 그렇다면 그런 사상의 상태는 어떠했을까? 신학적견해와 교회의 가르침, 사적인 의견과 공동의 교리를 뚜렷하게 구별할 수 없었고, 이는 적지 않은 혼란을 불러일으켰다. 마르틴 루터도 어떤 신학적 의견과 공식적인 교회의 가르침을 혼동하고, 이러한 오해를 바탕으로 개혁 프로그램에 착수했을 가능성이 크다. 역사가들은 이런 실수에 대해 마르틴 루터를 비난할지 모르지만, 이색슨족 개혁가는 중세 말 광대하게 펼쳐진 신학적 파노라마에 어리둥절해 하고 혼란스러워 하던 많은 이 중 하나였을 뿐이다. 게다가과연 누가 견해와 교리를 구분한단 말인가? 교황 공의회 신학 교수? 이런 중대한 의문에 명쾌한 설명을 내놓지 못한 점은 중세 말교회 안에서 권위의 위기가 퍼져 나가는 데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뤼시앵 페브르 Lucien Febvre의 말마따나, 유럽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프랑스에서도 '장기간에 걸친 장엄한 종교적 무정부 상태'가시작되었다.
교회의 공식 가르침에 대한 혼란은 독일에서 루터의 개혁 프로그램이 싹트는 데 크게 공헌했다. 루터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떻게개인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즉,루터는 칭의 교리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 이 교리와 관련하여 공인된 교회 기관에서 가장 최근에 공표한 권위 있는 견해를 찾으려면 무려 418년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종교개혁이 일어나기천 년도 더 진의 일이다. 게다가 교회가 천 년도 더 전에 공표한 혼란스럽고 케케묵은 이런 성명들은 루터가 사는 1518 년에 이 문제에 관한 교회의 입장을 명확히 하는 데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루터가 보기에 그의 시대의 교회는 펠라기우스주의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루터는 개인이 어떻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게 되는지에 관한 펠라기우스식 해석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루터는 “교회는 개인의 공로와 신분으로 하나님의 환심을 사고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은혜라는 개념을 송두리째 부정하고 있다"고 보았다. 아마도 이 부분은 루터가 잘못 이해한 것일 테지만, 그가 살던 시대에는 교회 안에 이런 혼란이 존재했다. 당시에는 이 문제와 관련하여 권위 있는 위치에서 루터를 이해시킬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교황이 아비뇽에 제류하던 시기에는 사상의 무정부 상태가 만연했다. 보니파키우스 아머바흐 Bo nifacius Amerbach는 "누구에게나 자신의 견해가 있다”고 했다. 그는 교황의 요새였던 아비뇽 안에서 '탁월한 학자 마르틴'의 사상을 널리 알렸고 이 때문에 1520 년대 내내 혼란이 가중되었다.
그러나 종교개혁과 관련하여 장 칼뱅이 더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한 점은 교회가 갈수록 무능해져 정통성을 강력히 요구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독일에서는 루터의 견해가 주목을 받던 때에 이단을 식별하고 진압할 책임이 있는 교구 및 관구 회의의 복잡한 네트워크가 단호한 조치를 하기는커녕 회의조차 소집하지 못했다.1487년 봄, 발도파를 진압하려는 프랑스 당국의 시도 역시 그다지성공하지 못했다. 이단으로 알려진 이 집단을 뿌리 뽑지 못하고 해산시키는 데 그쳤다.
교회의 권위를 위협하는 가장 큰 적은 인쇄기였다. 전통적인 중세 세계는 인쇄된 글에 속수무책이었다. 정통이 아닌 책들의 유통을 금지하지도 못했고, 이단 서적을 완전히 뿌리 뽑아 없애지도 못했으며, 그런 서적을 읽지 않도록 예방하지도 못했다. 프랑스 당국이 선동적인 인쇄물의 수입을 막기 위해 종합적인 방안을 고안해낼수록, 출판업자들은 자기들이 취급하는 물건의 원산지를 속이는데 점점 더 능숙해졌다. 제네바에서 인쇄된(바로 그 때문에 프랑스에서 유통이 전면 금지된 책들은 인쇄업자의 주소를 거짓으로 기재하거나 프랑스 인쇄업자들이 사용하는 것으로 알려진 활자체를 흉내 내는 방식으로 원산지를 속였다.
1515년 9월,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는 교황과 손을 잡은 스위스군에 맞서 마리냐노 전투에서 극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그 결과, 프랑수아 1세는 이탈리아 문제를 다룰 때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세력으로 우뚝 섰고, 프랑스 교회에 미치는 그의 영향력도 그만큼 강해졌다. 이어 체결된 볼로냐 협약(1516)은 프랑스 교회의 모든 고위성직자를 임명할 수 있는 권한을 프랑수아 1세에게 부여했다. 이로써 프랑스 교회 사무를 관장하는 교황의 권한이 사실상 약해졌다.파비아 전투(1525)에서 패한 프랑수아 1세가 스페인 마드리드 감옥에 유폐되는 바람에 잠시 중단되기는 했지만, 프랑스는 이때부터
프랑수아 1세는 프랑스의 종교개혁을 왕권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 개신교도를 탄압했다.
서서히 절대주의 체제로 나아갔고, 이에 따라 나라의 정무에 관해서든 교회 일에 관해서든 프랑스 문제에 관한 교황의 영향력은 줄어들었다. 그 결과, 프랑스 내부의 개혁 운동은 교황보다는 프랑수아 1세에 관한 문제로 취급되었다. 만일 교황이 프랑스 교회에서 벌어지는 일에 개입하려 했다면, 외교적으로나 법적으로 엄청난 저항에 직면했을 것이다. 교황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프랑수아 1세는 프랑스 왕가의 이해관계와 일치하는 경우가 아니면, 프랑스에서 교황의 이익을 수호하는 데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볼로냐 협약은 종교개혁 직전 독일 교회와 프랑스 교회가 처한상황이 근본적으로 달랐음을 시사한다. 독일에서는 불평 문학을 통해 교회에 대한 불만이 확연히 표출되었다. 교황에 대한 극심한 분노가 느껴졌다. 부분적으로 여기에는 이제 막 시작된 독일 민족주의가 작용했다. 당시 독일 민족주의는 이탈리아와 관련된 것이라면 무엇이든 거부감을 드러냈다. 또한 대중은 면벌부 판매 수익을 포함한) 교회의 수입이 결국은 로마로 흘러들어 르네상스 교황들이 사치스러운 생활을 영위하고 이런저런 프로그램을 만들고 정치적 모험을 하는 데 쓰인다는 사실에 분개했다. 독일의 지배 계층은 교황이 정무와 교회 일에 개입하는 바람에 자기 영토에서 자신의 정치적 권위가 위태로워지는 것에 분노했다. 루터의 개혁 프로그램은여러모로 독일의 민족주의(어찌 보면 독일 민족주의를 노골적으로 이용했다고볼 수도 있다)와 반교황주의에 호소하는 면이 상당했다. 독일에서 종교개혁이 인기를 끈 배경에는 이렇듯 대중의 반교황 정서가 깊숙이깔려 있었다. 그런데 프랑스에서는 볼로냐 협약이 반교황 정서를진정시키는 역할을 했다. 정치적 권위와 종교적 권위가 프랑스 군주에게 집중되면서(이는 프랑수아 1세와 그의 후계자들이 추구했던 절대군주 정책의 근간이었다) 프랑스에서는 교황의 빈자리가 유독 눈에 띄는 권력구조가 탄생했다. 반교황 정서가 독일 종교개혁에 연료를 공급했다면, 프랑스의 경우에는 다른 곳에서 개혁의 동력을 찾아야 했다.
16세기가 시작될 무렵 서유럽의 교회와 사회에서 힘을 발휘하는세력이 몇 개 있었다. 역사가들은 '종교개혁 직전의 유럽'이라는 말로 이 시기의 특징을 요약한다. 물론 이 시대 사람들도 이런 시각을 크게 부인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에 자신이 종교개혁 직전의 시대를 살고 있다고 생각한 사람이 누가 있었을까? 그것은 고사하고 자신을 유럽인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기나 했을까? 실제로 그 시대에 기록된 글에는 앞으로 전개될 사회적·정치적·종교적격변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는 것 같은 징후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앞날을 예측할 만한 암시가 일상적으로 주어졌음에도 말이다.
제라르 #코뱅 Gérard Cauvin 의 둘째 아들은 1509년 7월 10일, 바로 이런 세상에 태어났다. 그는 며칠 뒤 생트-고드베르트 교회에서 제앙Jehan 이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이 세례식에 대한 기록은 전혀 남아 있지 않다. 영어권에서는 그의 라틴어 이름인 요하네스 칼비누스Johannes Calvinus_us 를 영어식으로 바꾼 '존 캘빈 John Calvin'이라는이름으로 제앙 코뱅Jehan Cauvin을 기억한다. 17세기 초, 전기 작가들은 그의 이름이 언급된 자료를 찾고자 누아용 대성당과 지부 기록부를 샅샅이 뒤지고, 뿌연 안개 속에 묻힌 머나먼 옛 기억을 더듬어제라르 코뱅의 아들에 관한 일화를 떠올려 주기를 간절히 바라며누아용 사람들을 인터뷰했다. 그렇게 부지런히 애썼지만, 애석하게도 그의 어린 시절에 관하여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설사 이들의 기억 속에서 진짜 역사적 실체를 끌어냈다 하더라도, 그것은 아마도 “장 코뱅, 참 똑똑한 소년이었지" 하는 식의 진부한 이야기에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도 그랬듯이, 칼뱅이라는 인물의 역사에는 호기심을 자극하는 기이한 정적이 흐른다.우리는 사상의 역사에 그가 주입한 지적 자극에 관해서는 많이 알지만, 그러한 자극을 만들어 낸 역사적 인물에 관해서는 감질날 정도로 아는 것이 별로 없다. 한 인간으로서 칼뱅은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