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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마로니에방송) 원문보기 글쓴이: 익명회원 입니다
기 자 회 견 문(맥아더동상 철거)
1. 우리가 오늘 이 투쟁을 하는 것은 잘못된 조국분단을 청산하고 민족자주 련방제통일을 성취하여 자주권을 회복코자 함이니라.
2. 1945년 9월 8일 점령군 괴수(魁首) 맥아더가 한반도 북위 38이남을 강점함으로 인하여 조국강토는 허리가 잘려 양분되어 이 민족 원한의 세월이 64개성상이 지나도록 질곡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3. 양키군 강점으로 민족은 분열되었고 제주4.3사건 여순반군사건, 보도연맹사건, 등 100만 여명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1950년 6월 25일 민족전쟁 또한 양키군 개입으로 400만 여명 인명피해와 1000만 이산가족이 반세기가 넘도록 통한의 생을 살고 있는 것이다.
4. 맥아더는 사용해서는 안 되는 핵폭탄을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8월 9일 나가사키에 투하하여 무고한 생명이 30만 명이 죽거나 피해를 입었고 그중 조선인이 7만 명중 4만여 명이 사망하였으며 2만 3천여 명이 귀국하였지만 평생을 고통 속에 신음하다 생을 마감하고 현재 2천3백여 명의 그 자손3~4대까지 원폭후유증에 시달리며 비통한 생활을 하고 있다.
고금(古今)의 역사를 들쳐보건대 맥아더의 잔인, 무도한 생명살상 행위는 이지구상 어디에서도 용서 받을 수 없을 것이다. 자기 정치적인 허욕 때문에 사람목숨을 파리목숨처럼 도륙한 죄는 혼백이라도 국제전범재판에 제소하여 단죄해야 두 번 다시 맥아더 같은 전범자가 나오지 않을것이다.
5. 1945년 8월 10일 일본이 포츠담선언 수락을 미국에 통고하자 국무성, 해군성, 전쟁성, 전쟁관련회의에서 전략정책단 정책과장 찰스 본 스틸 대령, 딘 러스크 중령에 의하여 30분만에 조선의 허리에 38선을 그어 8월 14일 소련측에 전달하니 소련이 묵인함으로 양키놈들의 동북아 패권 희생물로 우리민족은 허리 부러진 강토에서 64개성상을 통한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6. 맥아더는 말하기를 일본군의 무장해제와 조선의 해방이 아니라 조선을 미국의 지배하에 두기 위한 것이고 일본을 미래의 동반자로, 조선을 미국의 패권 유라시아에 연장되는 발판, 일본을 지키는 초소로 말하였다.
7. 1945년 9월 7일 맥아더의 포고령발표...
포고령1호 :‘미군이 해방군이 아니라 점령군의 지위로 한반도에 들어가게 될 것이며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한다’.
포고령2호 :‘미국에 반대하는 사람은 용서 없이 사형이나 그 밖의 형벌에 처한다’.
8. 포고령 발표 다음날 9월 8일 08시 30분 일본군이 보내준 안내선을 타고 오후 1시 인천항으로 입항했다.
베이커 포터작전으로 명명된 38선 이남 강점 작전은 미24군단의 7만여 중무장 병력에 의해 강점되었다.
9. 미제국주의 괴수(魁首) 맥아더의 간계를 몰랐던 조선민중은 이들을 열렬이 환영했다. 그런대 믿었던 미군은 일본군을 시켜 환영나온 군중에게 발포하여 10여 명의 사상자를 냈으며 점령군 사령관으로 온 하지 중장은 ‘조선인은 일본인과 똑같은 고양이 종자다’라고 망언을 했다.
10. 맥아더가 1950년 6월 29일 이나라 남쪽 주권인 전시작전권 마저 리승만을 협박하여 탈취해가고 반세기가 넘도록 돌려주지 않고 있으며 남북분단을 빌미로 삼아 전쟁분위기를 조성하여 천문학적인 무기를 남쪽정부에 강매 수탈해가는 것이 지금도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11. 이치욕의 원흉 맥아더 동상을 철거하고 양키군대를 추방하고 자주통일하여 평화로운 조국을 만들자.
12. 련방통추는
2005년 5월 10일부터 7월 17일까지 69일,
2006년 9월 4일부터 9월 9일까지 6일,
2007년 9월 3일부터 9월 8일까지 6일,
그리고 지난해 2008년 9월 8일에도 맥아더동상타도 투쟁을 하였으나 사대주의 종속 신봉자들 때문에 철거하지 못하고 오늘도 이투쟁을 하는 것이다. 우리들 생명이 존재하는 한 기필코 맥아더 동상은 철거할 것이다.
2009년 9월 8일
우리민족련방체통일추진회의(련방통추)
미군추방투쟁공대위 부설: 맥아더동상타도특위
행동정의(行動正義)
동상을 세우는 것은 그 사람 생전 선행공덕(善行功德)을 기리기 위함이고 후자들로 하여금 그분의 행적을 본받고 추앙하려는 의미가 담겨 있음이 동상건립 본질인 것이다.
현재 남쪽에 세워진 동상은 이순신 장군, 세종대왕, 안중근 의사, 윤봉길 의사, 손병희 선생, 김구 주석, 유관순 열사 등, 외에도 많은 애국지사 동상이 세워져 있는데 누구하나 지키는 사람 없어도 회손 된바 없고 그 앞을 지나는 사람들은 그 동상에 정중한 예를 갖추거늘, 이것이 바로 동상세우는 목적 본질인 것이다.
보라, 권력에 의해 세워진 리승만 동상은 4.19민주혁명 때 쇠줄로 목을 걸어 목 부러뜨려 폐기되었고, 박정희는 총 맞아 죽은 후 영남대학교 정문에 있던 그의 흉상은 쇠망치에 맞아 폐기되었으며, 박정희가 쓴 탑골공원 정문 삼일문 현판은 민족지사들에 의해 쇠망치에 맞아 폐기 된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나라 강토 허리(38선)를 잘라 남쪽 점령군으로 들어와 이 민족에 통한의 아픔을 안겨준 괴수(魁首) 맥아더 동상을 인천 앞 바다가 보이는 전망 좋은 신성한 공원에 세워놓고 국민세금으로 운영되는 국가경찰을 시켜 사시사철 주야로 지키는 동상이 과연 이 지구상에 한국 말고 또 어디에 있는가?
과거 친일사대 매국 무지렁이 들은 지금도 점령군 괴수(魁首) 맥아더 동상 앞에 꽃을 갖다놓고 자기신주 위하듯 하는 작태야 말로 과연 그자들의 국적은 어디이며 그 부모조상들 행적 또한 어떠한 자들인지 자신들 사대매국 행위로 선대까지 욕보인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신설동에 흉물 관우사당 동묘를 보라
1599년 선조 32년 착공 1601년 완공 명나라 신종이 이여송를 파견 임진외란을 도와주었다는 빌미로 관우사당 건립비용 일부 부담하여 건립된 것인데, 당시는 그 앞을 지나려면 하마(下馬)하여야 했는데, 이민족의 수치가 아니던가? 지금은 무당들이 관우모형을 만들어 신의로 받드는 웃지 못 할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맥아더 또한 인천에 있는 무당이 신의로 모시고 사람들을 속여 돈벌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모든 잘못된 역사는 청산되어야 한다.
우리세대가 지나면 그릇된 오욕의 역사가 지속될까 두렵다.
우리세대에 과감하게 청산해야 함으로 점령군 괴수(魁首) 맥아더 동상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민족의 성웅 이순신 장군 동상을 세운다면 지키지 않아도 될 것이고 외국인들이 와서 보더라도 국위선양이 될 것이다. 정의(正義)는 행동(行動)해야 한다.
2009. 9. 8
우리민족련방제통일추진회의
의 견 서
역사와 후손에 부끄럼 없는 유익한 참고가 되기를 바랍니다.
아 래
1. 동상 설립의 목적과 맥아더 동상
1) 무릇 동상이란 세상 사람들과 후손들에 하나의 전형적인 사표로서 기릴 가치가 있다고 보편적으로 인정되는 사람에 한정하고 있습니다. 이는 당사자의 생전 업적이나 인품이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뛰어났음이 객관적으로 입증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2) 동상은 짧은 기간에 세워졌다 허물어지는 것이 아니라 수십 년 수백 년 지속되는 특성 때문에 사표로서 기릴 가치가 일시적인 기간에 한정할 것이 아니라 장기간 또는 무궁한 기간에 걸쳐 존경과 숭상의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3) 더구나 외국인의 경우는 이에 대한 더욱 엄격한 잣대가 요구될 뿐 아니라 민족전체의 이익과 민족사 행로의 장기적 구도하는 잣대에 의해 평가되어야 합니다. 이런 기준에서 본다면, 분단시대인 오늘 어느 한쪽의 역사적 견지에서, 또 단기적인 민족사의 구도 아래서만 평가된 외국인의 경우 많은 문제점을 가질 수 있습니다. 통일 이후 우리 후손들이 어떤 기준으로 평가할 것인지가 충분히 고려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우리 후손들에게는 남북화해와 평화통일이라는 분단시대의 민족사적 과제에 지대한 공헌이 있는 외국인은 기릴 수 있겠지만 분단을 촉발하고 공고화한 경우 지탄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더욱 유념해야 할 것입니다.
이후 논의에서 설명되겠지만 과연 맥아더가 외국인으로서 위의 기준에 비춰볼 때 동상의 대상이 될 위치에 있다고 볼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더구나 지금은 탈냉전통일시대라는 민족사적 전환기를 맞아 이에 걸 맞는 평가와 잣대에 의해 맥아더 동상은 재고되어야 할 시점인 것 같습니다. 냉전분단시대라는 과거의 잣대를 기준으로 또 6.25전쟁 직후 극단주의가 횡행하던 일시적 시점에서 성급하게 이뤄진 동상건립은 이제 차분히 미족사의 장기적 구도 하에서 엄밀히 재평가되어야 할 시점이라고 봅니다.
따라서 다음에서 우리 현대사에 끼친 맥아더의 역할에 대해 좀 더 탈냉전 통일시대의 핵심과제인 탈냉전과 평화 통일을 위한 기준에서 재평가해보고자 합니다.
2. 38선 분단과 맥아더
한반도는 936년 고려의 통일 이후 이렇게 오랫동안 분단된 역사를 가져 본 적은 없습니다. 후삼국의 분열도 44년으로 이렇게 길지는 않았습니다. 일제의 식민지 지배도 35년으로 분단 65년에 비하면 반절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기에다 주한미군이 평택으로 이주하면 최소한 100년은 더 머물겠다하니 이대로 되면 이 땅에 외국군대가 최소한 160년은 주둔하고 민족의 자주적 역사는 훼손될 수밖에 없고, 분단 역시 지속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 민족비극의 원조인 38선은 미국이 이미 45년 7월 중에 계획을 세웠고 최종 확정은 8월 11일 러스크라는 중령이 미 국무성 한 구석에서 지도로 이룩됐습니다. 우리 조선사람 누구와도 상의 한마디 없이 또 연합국 누구와도 상의 없이 독단으로 결정했습니다. 베트남 역시 16도 선에서 미국이 일방적으로 지리적 분단을 결정했습니다.
이 결정을 바로 집행한 당사자가 맥아더입니다. 8월 15일 일반명령 1호를 선포해 38선에서 하루아침에 우리의 조국을 두 동강 내어버린 것입니다. 외세에 의해 분단된 조국의 하나 됨을 위한 통일시대에 접어들었는데 이 분단집행자를 찬양하는 동상이 아직까지 국제관문인 인천에 버젓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마치 우리가 분단을 기리고 즐기는 것으로 비쳐지지 않을지 우려스럽습니다.
3. 점령군 사령관으로서의 맥아더
1945년 8월 일제 식민지지배 35년 만에 해방이 된 당시 우리 조선 사람들은 독립된 주권국가로서 민족의 광복을 맞을 것으로 환희에 젖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점령군 사령관으로 부임한 맥아더가 내린 다음 포고문은 여기에 완전히 찬물을 끼얹었습니다.
제3조 주민은 본관 및 본관의 권한 하에서 발표한 명령에 즉각 복종하여야 한다. 점령군에 대한 모든 반항행위 혹은 공공안녕을 교란케 하는 행위를 감행하는 자에 대해서는 용서 없이 엄벌에 처할 것이다(All persons will obey promptly all my orders and orders issued under my authority. Acts of resistance to the occupying forces or any acts which may disturb public and safety will be punished severely).
제5조 군정기간에(during the military control은 ‘군사점령기간’이 정확한 번역임) 있어서는 영어를 모든 목적에 사용하는 공용어로 한다. 영어 원문과 조선어 또는 일본어 원문에 해석 또는 정의가 불명하거나 부동할 때는 영어 원문을 기본으로 한다.
맥아더는 자기가 점령군으로 진주했음을 분명히 했습니다. 일본의 간악한 식민지 지배로부터 형극을 겪은 조선사람들에 소련 점령군과 같이 따뜻한 위로의 마음을 전달하기는커녕 오히려 식민지총독과 같은 위협의 엄포를 내렸던 것입니다. 미국 또한 조선의 독립은커녕 처음부터 미국 군사정부를 통해 조선을 직접 통치하려 했고 이 결과 바로 군사정부가 수립되어 직접적인 점령정책을 펴 나갔습니다. 소련은 대조적으로 조선인에게 맡기는 간접통치를 했습니다. 이러한 맥아더에게 동상을 선사한다는 것이 과연 조선인 전체에게 얼마나 수용할 수 있었을지 의문입니다.
4. 미국 군사정부 통치와 맥아더
조선은 해방과 독립은커녕 미군의 점령과 동시에 미국의 직접적인 군사정부 통치하에 들어갔습니다. 이 군사정부 점령 통치 3년 동안 1946년 대구 10월항쟁, 1948년 제주4·3항쟁과 여순항쟁 등 인민항쟁과 야산대와 유격대 투쟁 등 수많은 항쟁과 전투와 폭동이 이곳 남한 땅에는 연속이었습니다. 이 결과 1950년 6·25전쟁 직전까지 무려 10만 명의 희생이 이미 남쪽에서 발생했습니다. 6·25전쟁의 시발인 ‘작은전쟁’은 미군의 점령과 군사정부가 출범하자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미국과 미군은 해방자로서가 아니라 일제 못지않은 점령자로 조선 사람에게 각인되었던 것입니다. 총과 칼의 역사로 이어진 3년간의 미국군사정부 통치의 최고 책임자가 바로 맥아더였습니다. 그의 동상을 계속 유지하는 것은 이런 폭력과 희생으로 점철된 미국 군사정부 통치를 정당화 하는 것으로 이해될까 염려스럽습니다.
5. 분단세력과 동북아파시스트 후견인으로서 맥아더
한반도의 분단을 주도하고 강제한 장본인이 미국이라는 것은 너무나 자명합니다. 38선의 지리적 분단에서부터 신탁파동의 이념적 분단, 5·10단정단선의 정치적 분단 등을 주조하고 강요했습니다. 그렇지만 이는 국내세력의 동원이나 협력이 없이 이뤄지기는 힘듭니다.
바로 이 분단비호 국내세력은 일본식민지의 군, 경찰, 관리 짓을 한 김창룡, 노덕술, 최규하 등의 친일민족반역관료세력과 미군정의 여당이라고 일컬어지는 김성수, 조병옥, 송진우, 장덕수, 등이 주도한 한국민주당과 같은 친일정치세력 두 부류였습니다.
바로 이 두 분단 국내비호세력인 정치-관료 친일세력의 대부가 이승만이었습니다. 이 이승만을 권좌에 올리는데 초기에 주도적 역할을 한 장본인이 맥아더였습니다. 그는 미 국무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을 상해임정의 김구나 다른 민족인사들보다 먼저 군용기편으로 한국에 데려와 이승만 영웅 만들기에 결정적 기여를 했습니다.
그는 더 나아가 대만의 장개석과 연대해 맥아더-장개석-이승만 동북아파시스트 연결망을 형성해 중국본토 탈환을 노리고 소련에 대한 봉쇄나 격파의 첨병을 자원하고 자행했습니다. 이런 기조가 6·25전쟁에서 이 전선을 중국과 소련까지 확장시켜 3차 대전까지 몰고 가려는 과대망상을 하는 전쟁광의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세계사적으로는 탈냉전의 평화와 인권시대, 민족사적으로는 통일시대를 맞은 이 시점에서 우리 민족은 말할 나위없고 인류 전체에 대재앙을 가져올 3차 세계대전을 꾀하는 이런 전쟁광을 기리는 동상이 유지되는 것은 인류에 대한 모독은 아닌지 반문해 봐야 할 것입니다.
6. 원자탄 26개로 한반도 종말을 기도한 사람으로서의 맥아더
이 땅의 주류는 미국과 맥아더를 6·25전쟁에서 나라를 구하고 생명을 구해 준 은인이라 합니다. 그래서 이 고마운 은인인 미국에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보은론이 판을 치고 미국을 비판만 해도 ‘배은망덕’ 한다고 질타합니다.
이런 대표적인 인물이 인천지구 황해도민회 류청영 회장 같은 사람일 것입니다. 그는 맥아더를 ‘구세주’라고 하면서 “만일 맥아더 동상이 철거되는 모습이 CNN 방송에라도 나가면 우리는 배은망덕한 민족으로 취급 받는다”고 까지 했다 합니다.
이러한 생명 은인론 이야기만 나오면 미국과 주한미군의 온갖 만행과 제국주의 행태를 성토하다가도 사람들은 뒷걸음질 치고 비판적 예봉이 꺾이고 맙니다. 그야말로 이 은인론과 보은론은 저격수의 역할을 십분 발휘해 오고 있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언제까지 이 만병통치 같은 대미 생명은인론과 보은론에 덜미가 잡히고 주눅이 들어야 합니까? 또 정말 이들이 논거가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생명의 은인이기 보다 생명을 앗아가지는 않았습니까? 이제는 냉엄하게 되물어야 할 시점입니다.
여기서 생명의 구원을 받은 자는 누구입니까? 분명한 것은 전쟁전후에 전사한 약 2백만 명, 학살당한 약 1백여만 명, 중국군 약 90만 명, 미군 등 5만~6만 명, 곧 전쟁 때문에 생명을 박탈당한 약 400만 명에게는 해당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이들 대부분에게는, 미국이란 생명의 은인이 아니라 생명을 앗아간 당사자일 것입니다. 왜냐면 만약 남의 집안싸움인 통일내전에 미국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전쟁은 한 달 이내 끝났을 것이고 사상자는 아무리 많아야 남북한 합쳐 1만 명 미만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미국의 개입으로 인해 약 3백 99만 명이 더 많이 죽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미국의 전쟁개입으로 남북은 거의 전체 인구 10%인 300만이 죽음을 당했고, 중국은 90만, 미국 등은 5~6만이 죽음을 당했습니다. 이런데도 미국을 생명의 은인으로 규정짓는 것은 허구일 뿐 아니라 죽은 자 대부분을 두 번 죽이는 것과 진배없습니다. 실재 전쟁과정에서 그토록 많은 사상자를 낸 주된 장본인은 커밍스가 잘 지적한 대로 미국의 대량살상무기에 의한 무차별 학살이었고 이승만 정부의 체계적인 민간인 학살이었습니다.
더구나 맥아더를 생명의 은인이라 하는 것은 천부당만부당 한 일입니다. 그는 1·4후퇴 당시인 1950년 11~12월 전선이 37도선으로 후퇴하자 중국과 북한에 26개의 원자탄을 투하해 코발트 사선을 형성하고는 중국과 전면전으로 전쟁을 확장하려했습니다. 실재 미국은 허드슨 작전이란 모의 원자탄 실험을 북한 상공에서 실시해 이런 맥아더의 구상이 실현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 당시 원자탄 투하설은 공공연하게 나돌았고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살아남기 위해 남쪽으로 넘어왔습니다. 다행히 영국 등 세계 여론이 들끓어 위기는 모면했지만 휴전협정이 맺어지는 시점까지도 미국은 원자탄 투하 위협을 지속해 왔습니다.
만약 맥아더의 작전대로 원자탄이 투하됐다면 어떻게 됐을지 상상해 보십시다. 이는 필연적으로 소련의 개입과 3차 대전으로 직결됐을 것입니다. 아예 한반도는 지구상에서 사라지고 살아남은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입니다. 그야말로 한반도와 민족의 역사종말일 것입니다.
설사 소련이 개입하지 않았다하더라도 한반도의 결과는 뻔합니다. 남북이 통틀어 불모지대가 되고 남이든 북이든 나라라는 명맥을 잇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 당시 남북인구 3천만 중에 몇 백만만 살아남았을 것입니다. 아마 구세주니 배은망덕이니 주장하는 나이든 사람들은 아예 지금까지 살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거의 대부분은 그들이 ‘구세주’로 모시는 바로 그 당사자가 주동이 되어 투하한 원자탄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이런데도 생명은인이라고 동상을 세우고, 또 60년이 지난 지금까지 금지야 옥지야 껴안고 있어야겠다고 폭력몰이와 색깔몰이까지 벌리는 판입니다. 이성은 간데없고 맹목적인 광신도의 모습만 난무하는 것은 아닌지 자성을 해야 할 절박한 시점입니다.
7. 6·25전쟁전후 민간인 학살과 맥아더
6·25전쟁 초기 남한 땅에서의 미군 민간인학살은 노근리 등 일부 지역에 한정되어 있는 현상이 아니라 보편적현상이었습니다. 당시 중학교 1학년 학생이었던 진주 출신의 어느 ㄱ 국립대교수의 전쟁체험담을 들어보겠습니다.
전쟁 초기 그의 가족은 어느 초등학교에 머물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미군 비행기 두 대가 그 초등학교에 기총사격을 가했습니다.
그래서 인근 지역인 의령으로 긴급히 피난지를 옮겨 다시 그 지역의 어느 초등학교에 투숙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또 다시 미군 비행기가 초등학교를 사격해 사람들이 죽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사람들이 많이 운집하는 곳은 안전하지 못하다고 판단하여 산골짜기로 숨어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산골에서도 집이 쉽게 노출되는 지역은 곧 바로 미군비행기의 표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결국 산골짜기의 외딴집에 피신하여 폭격을 피할수 있었습니다.(1999년 10월 27일 필자와의 면담).
이런한 전쟁 체험은 미군비행기의 무차별 폭격에 의한 민간인학살이 특수한 조건에서 특수하게 이루어졌다기 보다는 6·25전쟁 초기 남한 땅에서 보편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시사합니다. 미군의 민간인 학살에 대해서는 “공산당을 혐오와 불신으로” 묘사해왔던 뉴욕타임스 대구특파원까지도 시인하고 있습니다.
한국인들이, 공산당이 그들의 고향과 학교를 세워둔채로 퇴각한 반면, 가공할 무기로 싸우는 유엔군이 일단 주둔했던 도시는 까맣게 하고(초토화 하고) 떠나는 것을 보았을 때에 공산당은 심지어 퇴각 중에도 도덕적인 승리를 기록했다(「뉴욕타임스」. 1951년 2월 21일자 ; I. F. Stone, ‘비사 한국전쟁’, 신학문사, 1988, 276쪽에서 다시 옮김).
노근리 학살사건도 이 가운데 하나에 불과합니다. 1950년 7월 25일 충북 영동 황간면 노근리의 민간인을 학살한 쌍굴학살 사건의 진상규명 관계자이고 피해당사자인 정은용의 진술은 전쟁 중 미군의 남한 내 민간인학살에 대한 조직성, 공식성, 비우발성, 명령성, 체계성, 범죄성 등을 잘 말해 줍니다.
그들이 피난시켜 주겠다고 동네 사람들을 목적의식적으로 모은 점, 폭격기와 공동작전을 펼친 점, 굴다리에서 사흘 간 계속 총질을 해댄 점 등을 볼 때... 그래서 현장의 미군이 말했다는 것처럼 미군은 실제로 ‘의심나는 피난민은 모두 죽여라’는 명령을 받았을 겁니다. 피난민 조사를 통해 그들은 비무장이라는 사실을 알고도 살인을 계속한 것은 대전에서 당한 것에 대한 복수심과 피난민을 살려 둘 경우 언제 인민군들과 합세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라고 봅니다. 또 일단 ‘학살’을 시작했으니 ‘전멸’시켜 사건을 외부에 알리지 않으려 했을 수도 있겠습니다(오연호, 1994:44; 정은용, 1994)
이러한 정은용의 추론은 정확한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아래의 99년 9월 30일자 한겨레신문의 보도는 이를 확인했습니다.
◇ 1950년 7월 24일 미 1기갑사단 명령(당일 오전 10시 휘하 8기갑 연대 통신문) : 피난민이 (방어)전선을 넘지 못하도록 하라. 넘으려 하면 그가 누구든 발포하라. 여자와 어린이의 경우 분별력 있게 대처하라.
◇ 7월 26일 아침 미 8군 본부 통신명령 : 반복하지 않겠다. 언제 어떤 피난민도 전선을 넘는 것을 허용하지마라.
◇ 7월 26일 미 보병 25사단 통신문 : 사단장 윌리엄 킨 소장은 전투지역에서 움직이는 모든 민간인은 적으로 간주되어야 하며 발포해야 한다고 지시했다.
◇ 7월 27일 미 보병 25사단장 윌리엄 킨 소장 (재차) 명령 : (남한 양민들은 한국 경찰에 의해 전투지역에서 소개됐기 때문에) 전투지역에서 눈에 뛰는 모든 민간인은 적으로 간주될 것이며 그에 따른 조처를 취할것이다.
이렇게 미군의 민간인학살이 상부의 공식적인 명령에 따라 체계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공식문서로 재확인됨에 따라 전국 여러 곳에서(2000년 말 현재 약 60여 곳) 유사한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 요청과 증언이 쇄도하였습니다.
경북고령군 고령교 피난민 다수사상, 충북 단양군 영춘면 상2리 약 300명 사망, 경북 울릉군 독도 150명 사망, 충북 예천군 보문면 신성리 약 50명 사망, 충북 예천군 판교면 판교리 10명 사망, 충북 영동군 황간면 121명 사망, 전북 익산군 익산면 이리역 54명 사망, 경북 구미 형곡동 100명 사망, 경북 의성군 금성면 17명, 경북 칠곡군 외관읍 외관교 폭파 피난민 다수 사상, 경북 포항시 60명, 경남 함안군 군북면 30명 사망, 경남 의령군 용덕면 정동리 30명, 경남 사천시 곤명면 50명 사망, 경남 마산시 진전면 83명 사망, 경남 창녕군 창녕읍 초막춘 80명 사망 등입니다.
이러한 민간인 무차별 기총사격은 미국이 2000년 6월 5일 보도한 미 육군조사단이 국립문서보관소에서 찾아낸 미 공군의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터너 로저스 공군 대령이 남긴 이 기록은 “육군은 아군 진지로 접근해오는 모든 민간인들을 향해 기총소사를 가하도록 요청하고 있으며···지금까지 우리는 이에 부응해왔다”고 적고 있다한다. 육군은 “북한군들로 이뤄졌거나 혹은 북한군이 통제하는 대규모 민간인들이 미군 진영에 침투하고 있다”며 민간인 사격을 합리화하고 있다고 전했다(한겨레신문, 2006.6.7).
미국의 민간인학살은 적과의 전투행위 중에 불가피하게 발생하거나, 결코 우연적이고 개인적인 실수나 순간적인 판단착오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 아닙니다.
노근리사건에서 확인되었듯이 사단장의 작전명령과 같은 공식적 지휘계통에서 체계적으로 이루어진 보편적인 현상이었습니다. 이 지휘계통의 최고책임자는 구세주라고 일컬어지는 맥아더였습니다. 이 학살에 대한 정보보고를 수없이 받았을 텐데 그는 이에 대한 강력한 근절 또는 시정명령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적과 아를 구분 할 수 없었기에 불가피했다고 미국과 맥아더 편을 듭니다. 그러나 당시 참전했던 중국 인민해방군들에게도 조선사람 가운데 누가 적인지 아군인지 구별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중국군의 강간, 학살만행 등은 아직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변명으로 넘어갈 문제는 아닙니다.
맥아더의 책임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7월 초에 그는 한국군에 대한 작전지휘권을 공식적으로 이양 받았습니다. 한반도 내 일어나는 모든 군사행위는 그의 권위 하에 이뤄지게 되었고 이 때문에 그는 모든 일들에 대한 궁극적 책임자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더구나 미군은 한국군의 대대 급까지 미 군사고문관을 파견하고 작전권을 행사해 왔었습니다.
그의 지휘체계 하에 일어난 첫 번째 한국정부의 민간인 대량학살은 7월 중순 평택이하부터 자행된 20만 안팎의 보도연맹원 학살이었고 대전형무소 수감자 1,800명의 학살이었다. 여러 사진에서 확인되듯이 미군의 목격하에 이뤄졌습니다. 이 같은 이승만 정부의 민간인 학살 첫 단추에도 불구하고 최
고책임자인 맥아더는 이 학살만행을 묵인 내지 외면했습니다. 이 결과 형무소 수감자 수만 명의 추가 학살이 전개되고 이후 줄줄이 이어져 약 1백만의 민간인이 학살당했습니다.
물론 그의 임기 중에 발생한 민간인 학살에 대한 궁극적 책임도 그의 몫입니다. 원자탄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이것만으로도 그는 생명의 은인이 아니라 엄연히 학살만행의 궁극적 책임자로서 전쟁범죄자입니다. 범죄자의 동상을 만들고 이를 기리는 현상이 과연 올바른 것인지 또 어떻게 정당화 될 수 있을지 상상이 가지 않습니다.
8. 분단과 전쟁의 주도자와 맥아더
역사에서 가정은 무용지물이라는 이야기는 허구입니다. 역사에는 수많은 가능성이 열려 있고 실제의 역사는 반드시 최선도 아니고 정당한 것도 아닙니다. 만약 조선 말 갑신정변이나 갑오농민전쟁이 성공했더라면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가 아니라 위로부터나 아래로부터의 개혁에 의한 자본주의의 길을 독자적으로 성취했을 것입니다. 이런 열린 역사인식과 평가는 당시의 역사를 올바르게 평가하고 후대에게 훌륭한 역사적 교훈을 남겨줍니다.
우리 현대사에 관한 역사가정을 해 보겠습니다. 만약 미국과 맥아더가 자기들 멋대로 한반도를 38도선으로 두동강 내지 않았다면 우리가 민족분단과 민족내부전쟁과 이것이 확대된 국제전이라는 비극과 형극을 겪었을까? 만약 6·25라는 통일내전에 외국군인 미국이 사흘 만에 개입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많은 전쟁피해가 일어났으며 지금까지 분단되는 비극이 지속될까?
결론적으로 미국의 제국주의적 개입이 없었다면 민족의 분단과 전쟁도 없었을 것입니다. 곧, 커밍스가 논증한 대로 분단과 전쟁의 기원은 바로 미국에 귀착됩니다. 그야말로 미국이라는 존재는 보은론과는 정반대로 우리에게 비극과 질곡, 전쟁, 오늘날 까지 지속되는 한반도 전쟁위기를 몰고 왔고 또 몰아오고 있는 주도자인 것입니다. 여기에 맥아더는 그 첨병의 역할을 초기에 집행한 당사자입니다. 동상이 잔존하는 것은 분단과 전쟁을 미화하는 것과 다름없다는 지탄을 받을 수밖에 없는 점이 고려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9. 추앙받고 사표로 떠받쳐질 수 있는 인품과 맥아더
맥아더는 인천 상륙작전으로 한껏 영웅시 되었습니다. 또 트루만에 의해 전격 해임되고, 미국 의회에서 ‘노병은 죽지 않고 사라질 뿐이다’라는 연설을 했을 때 미국국민들은 그를 마치 신화 속의 영웅처럼 떠받들었습니다.
전쟁영웅으로 최상의 추앙을 받았지만 맥아더관련 상원청문회에 증인으로 나타난 맥아더는 당시의 국무장관 에치슨과 국방장관 마샬 등과의 대립신문이나 논쟁에서 그야말로 아예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로 완패하고 말았습니다. 하루아침에 허풍쟁이 전쟁영웅으로 그의 평판은 둔갑해 그는 이후 미국사회에서 완전 추락한 날개에 불과했습니다.
평소에도 그는 자기보다 나이가 어린 미 합참 상급자, 국방장관, 대통령까지도 무시하면서 독단적 전쟁 수행권을 행사하려한 과대 망상적 영웅주의자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허황된 꿈은 대통령을 겨냥하고 있었습니다. 미국의회에서의 마지막 연설을 계기로 그의 꿈은 그대로 실현되는 듯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의회청문회 이후 그 꿈을 일거에 날려버릴 수밖에 없는 허무한 인생을 마무리 한 사람입니다. 이런데도 이 추락한 맥아더는 오직 이곳 남한 땅에서만 아직도 웅대한 동상으로 위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과연 맥아더가 세상 사람들과 후손들에 하나의 전형적인 사표로서 기릴 가치가 있다고 보편적으로 인정되는 사람의 범주에 감히 속할 수 있는지 엄밀한 검증이 요구됩니다.
10. 당부의 말씀
지금 우리는 분단 65년을 맞았습니다. 환갑을 지났습니다. 환갑은 이제까지 지난 일생을 되돌아보고 새로운 삶을 출발하는 계기로 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제 우리도 지난 분단냉전 65년이라는 일생을 되돌아보고 철저한 자아비판과 새로운 민족사행로를 모색해야 할 때입니다.
이런 모색의 구도 속에 맥아더 동상의 존치문제가 결정되어야 할 것입니다. 참된 자성과 모색을 위해 백범 김구 선생님의 탄식과 분노를 분단 65년 오늘의 이 시점에서 우리 모두 되새겨 보아야 할 것입니다. “미군주둔연장을 자기네들의 생명연장으로 인식하는 무지 몰지각한 도배들은 국가·민족의 이익을 염두에 두지도 아니하고 박테리아가 태양을 싫어함이나 다름없이 통일정부 수립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2009년 월 일
우리민족련방제통일추진회의
출처 : http://hosting.ohseon.com/maroni/xe/?mid=alrns&document_srl=57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