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시멜로 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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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조을해 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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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이름은 노벰버(November).
계절적으로 어울리는 이름이다. 11월. 누구도 11월을 피할 수는 없다.
11월에는 모든 게 느리다. 지구도 태양을 돌다 멈칫할 때가 있다면 그때가 바로 11월일 것이다.
조금만 더 돌면 한바퀴다. 지구도 잠깐 쉬면서 이렇게 중얼거릴 것이다.
태양도 그런 지구를 체근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11월이니까.
아직 춥지는 않다. 그러나 사람들은 물론이거니와 동물들도 추위를 걱정한다.
땔감과 먹을 것을 걱정한다. 몸을 따뜻하게 누일 집을 그리워한다.
서둘러 방한복을 사들인다. 모든 걸 미리 걱정하게 하는 달.
그래서 준비하게 하는 달. 그러나 결국엔 마지막을 예감하는 불안한 달. 그러한 11월의 이른 저녁나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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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기로 점절돼 온 이십대야.
직장도, 대학원도, 결혼도, 꼴같잖은 공무원 시험도."
우리는 각자의 초라한 자소서로 눈을 돌린다.
"더이상, 쓸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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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의 고백이란 게 거의 우격다짐이어서 다투는 날이 더 많았지만,
허황된 행복감에 젖어 서로에게 긴 편지를 쓰는 날도 더러 있었다.
그 정도로 우리는 실없이 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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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전도를 펼치면 볼펜 끝으로 살짝 가리기만 해도 완전히 사라지는 섬나라가 있다.
나는 날마다 그 섬으로 날아가는 꿈을 꾼다.
깨어나면 꿈이지만 오렌지향이며 이름 모를 족들의 격렬한 춤은 일상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 나라에서는 남자와 여자가 사랑을 한다.
남자는 태양이 내리쬐는 시간에 사랑을 하고 여자는 별이 빛나는 때에 사랑을 한다.
그들이 함께 사랑할 수 있는 시간은 기다려도 오지 않는다.
왜 너의 시간 속에서 나를 사랑하느냐고 여자는 남자에게 남자는 여자에게 수없이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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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워지면 고개를 숙이는 어른들은 아이들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지 못한다.
어른들은 겁쟁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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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요새 이런 생각에 빠져 있어.
어떤 현상 혹은 우리 주변의 사물이나 인물, 사건 등
모든 것에 대한 사람마다의 정의는 다 다르구나 하는 생각.
이런 생각은 황당함을 동반하기도 하지.
세상에 비슷한 사람들이란 없거든. 사람들의 얼굴이면 얼굴, 목소리면 목소리, 생각이면 생각은 모두 달라.
진작 이것을 간파했다면 내 인생이 훨씬 자유로웠을 텐데 말이야.
그러니 백과사전이란 얼마나 가볍고 나약한 종이쪼가리들인지 말이야.
백과사전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날이 과연 오기는 올까.
그 종이쪼가리들이 뿜어대는 표준의 힘은 또 얼마나 거대한지.
앞으로는 사람마다 백과사전 같은 걸 만들 거란 생각을 해 본 적 있어.
사람들 고집이 너무 세지다보니 한 가지 표준에 길들여져선 살아가지 못할 것 같았거든.
내 머릿속엔 뭔가 문제가 있는 것 같아.
아마 방향의 문제일 거야.
세상이 바라는 방향과 반대로 살아서, 그래서 나는 늘 외롭게 사는지도 모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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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사랑을 하고 싶었어. 잔인한 상처를 남긴다 하더라도 저런 위안을 받고 싶었어.
사랑은 상처와 위안을 동시에 준다고 생각해.
자신의 아팠던 때를 멀리서 차분히 바라볼 수 있게끔 힘을 주는 건 사랑뿐이야.
사랑으로만 가능해. 내가 똑바로 설 수 있도록 도와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결국 사랑에 빠지고 싶다는 욕구가 아닐까.
물론 그러한 위안을 얻기까지는 많은 상처를 견뎌야만 하지.
사랑은 둘이 나누는 거니까. 사랑을 나누기 위해선 누군가 먼저 다가가 희생할 수밖에 없는 거고.
토맥이 바로 그 경우야. 토맥이 화가보다 용감하고 순수했기 때문에 그는 깊은 상처를 입었지.
영화라 그랬을지 모르지만 그래서 아름다워 보였어.
이제 토맥이 위로받을 차례였으니까.
현실 속에서 그 희생을 내가 맡아하긴 싫었어.
사랑은 하고 싶었지만 상처를 견디기는 싫었으니까. 그렇지만 알 수 있었어.
마음이 깊이 흔들리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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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오랜 시간 책을 만나지 못해서 책을 펼치는 순간 울어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될 정도로
간절하고 필요가 깊어지던 차에 좋은 책을 만났습니다.
고작 일인분의 감정 하나 다스릴 줄 모르면서
사랑을 불행의 주축이라 믿던 이에게 환상이 되고 싶었던 그 때가 떠올랐습니다